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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강 처녀/김태희
1. 해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나는 어쩌나 아~그리워서 애만태우는 소양강처녀.
2.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오시면 나는나는 어쩌나 아~그리워서 애만태우는 소양강처녀.
3. 달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나면 나는나는 어쩌나 아 -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처녀. |
이 노래의 모델은 춘천출신 가수 지망생 윤기순(당시 18세)양이라 한다. 소양강 처녀 노래말을 탄생시킨 작사가 반야월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지금으로부터 44년을 거슬러 올라간 1968년 을지로 명보극장 앞 네거리에 '한국가요반세기가요작가동지회'라는 사무실이 있었다.(지금은 강서구 우장산동으로 옮김)
이 작가동지회 사무실에는 윤기순(尹基順)이라는 18세 소녀가 여사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여기서 일을 하게 된 동기는 장차 가수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쳇말로 그녀는 가수의 화려한 꿈을 안고 서울에 온 강원도 촌구석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가사를 돕는데 책임이 막중한 그런 소녀였다.
이런 그녀의 딱한 사정을 들은 인정파 젊은 가요작가 김종한 선생이 개인 레슨을 해주며 한을 풀어주려고 백방으로 뛰고 있었다.
평소에 레슨비도 제대로 못내는 윤기순은 죄송스러워 어찌지 못하다가 한가지 묘안을 내어 스승인 김종한 선생을 비롯해서, 회장인 반야월 선생을 비롯해 여러분들을 자기의 고향인 소양강 상류에 초청했고, 소양강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 가는 어부였던 윤기순 아버지도 자기 딸을 지도해 주는 서울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윤기순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민물고기 매운탕을 끓인다, 토종닭을 잡는다는 등 부산을 떨고 있을 때의 여가를 틈 타, 윤기순은 반야월 선생에게 "회장님. 저기 조그마한 갈대 숲 섬이 보이시지요. 거기 가면 아주 경치도 좋고 놀기도 좋아요. 우리 저 섬으로 놀러가요."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노는데에 일가견을 가진 그들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일행은 나룻배를 타고 섬으로 건너갔다. 그야말로 시상(詩想)이 절로 떠오르는 주위 경치에 일행은 시상을 가다듬었다. 바로 이때였다. 청천벽력으로 시커먼 비구름이 몰려오면서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왔다. 소나기 비바람이 몰아치며 잔잔하던 강 물결이 산천초목을 삼킬 듯이 일렁거리고 갈대 숲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소나기에 흠뻑 젖은 윤기순이 "아이고 무서워!"하면서 반야월 선생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바람은 10여분간을 몰아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먹구름을 거두고 다시 해맑은 여름 햇살이 내려 쪼이는 변화무쌍의 심술을 부렸다. 일행은 다시 뭍으로 나와 젖은 옷을 말렸고, 반야월 선생은 이때 느낀 감정을 메모해 두었다가 다듬고 다듬어 <소양강 처녀>라는 가사를 만들었다.
이듬해(1969년) 봄, 이호 선생이 작곡을 했고, 가수 김태희가 부르게 되었으며 <소양강 처녀>는 대 히트를 했다. 소양강 처녀의 곡은 매우 쉽다. 남성 여성을 불문하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고 어느 한 군데라도 어렵게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
또 오래도록 사랑받는 곡의 가사가 그렇듯이 누가 들어도 웬지 자신의 얘기처럼 느껴진다. 소양강 처녀가 우리들 가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그리움의 연정을 살살 흔들어 놓기 때문이 아닐까.
95년 춘천시에서는 작사가 반야월 선생을 초청하여 “소양강 처녀”작사에 따른 사무실 직원 윤기순의 일화를 들었고, 여기서 노래비와 배경에 소양강 소녀 동상을 만들기로 결정이 되어 “소양강 소녀상”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사연이 있는 노래가사는 그 사연을 떠올리고 생각하며 듣거나 부르면 또 다른 느낌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소양강 처녀>에 얽힌 윤기순 처녀의 사연은 KBS-TV <이것이 인생이다> 시간을 통하여 방송(2000년)되기도 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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