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천주교 녹번동 성당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강론과묵상 스크랩 2011년 5월 8일 부활 제3주일
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12 11.05.07 20: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1년 5월 8일 부활 제3주일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

(루가 24,30-31)

 

He took bread,
said the blessing,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With that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

 

 

말씀의 초대

 오순절에 성령을 충만히 받은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영광스럽게 하셨음을 설교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구약에서부터 이어지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었음을 가르친다(1독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하느님을 믿게 된 신자들에게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살라고 당부한다(2독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길에서는 동행하시던 분께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지 못하다가, 빵을 떼어 주시고 사라지시자 그분께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는다. 주님 부활은 마음이 열려야 깨달을 수 있는 하느님 구원의 선물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내가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몸소 나를 나병 환자들에게 데려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세상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도무지 계실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의 현장에서, 하느님을 본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처참한 고통의 자리에서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하고 깨닫지요. 그는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본 것입니다.
부활은 자연 과학이나 철학적 사색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만난 낯선 분께서 부활하신 주님이셨듯이, 나병 환자의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만나는 것이 부활 체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숱한 만남과 사건 속에서 주님 부활 사건을 끊임없이 체험합니다. 특별히 가장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과 만나면서, 자신의 인생에 닥쳐 온 슬픔과 절망의 밑바닥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고통의 바닥, 예수님 십자가 안에 이미 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입니다. 스승의 죽음은 그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마음을 달래려 그들은 시골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전혀 모릅니다. 왜 몰라보았을까요?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이 점을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선입관 때문입니다. 스승은 이미 죽었다는 선입관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곁에 오셨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겁니다. 그만큼 선입관은 무섭습니다. ‘스승은 돌아가셨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그들은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지만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이 그저 덤덤하게 느껴진다면 그들과 무엇이 다를는지요? 부활의 기쁨을 위해서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선입관이 빠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부활 시기가 있는 것이지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은 뜨거움을 체험하였습니다. 기쁨이라는 뜨거움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은총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부활 시기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동행

-최인각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과 두 제자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힘들고 버겁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이들이 있어, 참으로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 두 사람과 동행하는 모습을 묵상하면서, 아름다운 동행의 원칙을 발견합니다.

왠지 지쳐 힘들어 보이는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11km) 떨어진 마을로 걸어가면서, 그동안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더 많은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겪고 죽음을 맛본 이는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시기에, 동행을 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신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처지에 개의치 않고 제자들의 상황을 고려하여 그들의 여정에 동행하십니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 장면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음성을 상상해 보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아마 위로와 평화가 가득한 음성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로의 음성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멈추어 서서 오히려 침통한 표정으로이 며칠 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따지듯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겁고 괴로운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들이 주는 면박을 묵묵히 받아주시며 그들의 여정에 동행하십니다
.

예수님께서는 인내심을 갖고 다시무슨 일이냐?”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아주 분명하게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너희가 이야기하는 예수가 바로 나다라고 말하며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정에 동참하시며, 당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

예수님께서는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라고 제자들이 고백할 때, 그동안 당신이 당한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밝히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보다 힘들어하는 상대방의 처지를 먼저 배려하는 동행의 원칙을 준수하십니다
.

예수님께서는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라는 제자들의 말을 들으시고, 한편으로나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구나!’ 하며 위로를 받으셨으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위로받으시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사흘 동안 무너져 내린 제자들의 희망과 기대를 채워주시며 제자들의 여정에 동행하십니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부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는 말에 더 놀라십니다. 당신이 그토록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믿지 않는 제자들을 보며, 엄청난 실망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라며 실망스러워 하시면서도,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믿었던 이들에게 실망하면서도 인내를 갖고 끝까지 가르쳐 주시고 설명해 주시며, 믿음의 여정에 동행하십니다
.

제자들은 목적지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하며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순수한 초대에 응하시며 그들과 함께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함께 식탁에 앉으십니다. 동행의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예수님은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바로 이때에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모든 것을 알아보고 깨우치는 순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동행하였음을 가슴 깊이 깨달으며 기쁜 순간을 맞습니다. 이를 깨닫는 순간 제자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본 이야기를 하며 기뻐합니다
.

내가 기쁘고 즐거울 때도, 한없이 부족하고 부끄러우며 죄스러운 상황에서도 늘 나와 동행해 주셨던 예수님과 천사들과 성인성녀와 많은 사랑의 손길을 가까이에서 느끼며, 한없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삶 안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과 어떻게 아름다운 동행을 할 것인지 배우게 됩니다. 우리 서로 서로 아름다운 동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지나쳐 가는 봄이 아닌 누리는 신앙의

-권철호신부-

 

“바람과 햇살과 꽃들 같이 주어진 일상을 특별하게 다룬다면 봄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오는 것”이 될수도 있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마음에 닿습니다. 유달리 늦게 시작된 사순절에 보조를 맞추기라도 하듯 그렇게 더디 봄이지만 쉽게 떠날 같은 불안이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기다려 시간에 비하면 누릴 있는 시간이 너무나 짧아, ‘봄날은 간다.’는 말이 봄날은 짧다는 말을 당연하게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봄날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되는 부활입니다.

 

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향하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한껏 봄날에 대한 기대로 충만했던 그들이었지만 봄날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기다린 시간에 비해 누린 시간이 턱없이 짧아서 함께 추억만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오늘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 하지만 높았던 기대만큼 커다란 좌절을 겪은 그들의 눈에는 이미 예수님의 자리는 이상 존재할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봄날은 너무나 짧아 되돌이킬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날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부활을 누리는 시간은 짧게만 느껴집니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듯한 느낌 속에 무덤은 부활의 상징이 되기는 했어도 삶의 나침반이 되지 못한 , 망각의 강물에 흘려보내지는 느낌입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너무나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익숙해져 누릴 있는 부활을 누리지 못한 , 봄날은 간다는 말처럼 그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여 것이 지난 삶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봄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좀처럼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일상을 특별하게 다룬다면 봄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오는 것”이 있다는 말처럼 신앙의 봄인 부활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활은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지속되는 시간입니다. 일상의 전례인 미사 전례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은 짧은 봄날과 같은 분이 아니라 봄날과 같은 분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봄날을 우리와 영원히 누리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지 짧은 봄날의 기억을 선물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실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제자들처럼” 부활은 잠시 지나쳐 가는 시간이 아니라 매일 누리는 전례를 통해 영원히 지속되는 신앙의 봄날이 됩니다. 다만 부활을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영원히 누릴 있는 시간으로 간직하는 것은 매일 드리는 일상의 전례를 특별하게 받아들일 아는 마음속에 자리하겠지만 말입니다. 해서 이번 부활은 매일의 성찬례를 통해 가는 봄이 아닌 오는 신앙의 봄으로 그렇게 맞이해 일입니다.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반명순 수녀-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당신 말씀에 맛들이게 하시어 저의 마음이 말씀으로 타오르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지난주 복음에 이어주간 첫날?(24,?1)에 있었던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는 앞으로도 그리스도인 삶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이 그들의 부활체험에 동행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날?(13)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오늘 말씀은 거룩한 독서의 가장 아름다운 전형입니다.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기대했던 권력과 명예, 열망과 해방이라는 날개를 접고
?(20???21), 어둠과 나약 그리고 무력함이 부르는 일상의 작은 마을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나자렛 예수님의 죽음으로 허탈감에 빠진 두 제자는 모든 기대를 떨쳐버리며 지난 이야기를 회상하듯그동안에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14), “침통한 표정을 한 채?(17ㄴ절) 절망의 길을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15),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17ㄱ절), “무슨 일이냐??”?(19ㄱ절) 하고 말을 건네십니다.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함께 동행하는 분은 예수님이지만, 우리가 가던 그 길을 멈추지 않는다면 오시는 그분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멈추어 서서
?(17)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19ㄴ절)을 그분께 전합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한테는 예언자이시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분으로 기대되었지만, 수석 사제와 지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지도 사흘째가 된다고 증언합니다.(19???21) 내적인 것은 외적인 사건에 감추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16) 것처럼 추종의 영광만을 기대했기에 수난과 부활의 예고를 잊어버렸던 것일까요???(9,?22.?44; 18,?31???34 참조) 두 제자는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혼자만 모르고 있는?(24,?18) 그분께 그들이 직면했던 객관적 사건만 아니라주간 첫날 이른 아침?(요한 20,?1), 여자들이 발견한 빈 무덤과 천사들이 전해 준 예수님에 관한 소식으로 자신들을깜짝 놀라게 했던이야기도 함께 전합니다.(루카 24,?22???24 참조) 그러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무지에 잠긴 제자들의 마음을 밝혀 일깨우십니다. 예수님께서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하시며, 사람들의 이야기에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한, 모세와 모든 예언자한테서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을 설명해 주십니다.(25???27)
주어진 현실만 바라보며 찾아가는 제자의 길은 목적지에 이르렀고 그들의 날은 이미 저물었지만, 예수님의 길은 더 멀고 시간은 더 짧았는지 모릅니다.(28) 그러나 예수님은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라고 청하는 제자들과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시어그들과 함께식탁에 앉으셨습니다.(29) 그리스도의 첫 신자공동체가 친교와 빵을 함께 나누고, 함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 구원받은 이들이 늘었던 것처럼(사도 2,?42???47), 함께 드리는 찬미와 나눔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보고 만나게 해주겠지요. 예수님께서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제자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30???31)
제자들은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진 그분께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 하며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32???33) 이처럼 주님을 만난 이들의 삶은 이제 자신의 길이 아니라 참된 자유와 진리로 이르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마태 2,?12; 마르 10,?52 참조) 그리고열한 제자들과 동료들?의 체험에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더하여 부활의 증언을 확고하게 합니다.(루카 24,?34???35) 그래서 제1독서에서처럼 베드로와 열한 사도들은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2,?24) 하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묵상
?(Meditatio)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하루를 말씀으로 열고 마무리하는 것이 일상이지만, 정작 제 마음을 타오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묵상해 봅니다. 무엇이 우리의 일상을 멈추어 서서 듣고 증언하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의 가려진 눈을 열어 보게 하며, 우리의 길을 되돌려 하느님께로 달려가게 하는가?? 일에 골몰해 흘려들었던 말씀과 너무나 익숙하고도 당연하게 받아 모셨던 성체, 그런데도 말씀과 성체는 저의 하루를 비추고 동행하십니다. 때로는 보이지 않아 아프고 힘겹다가도 희망과 기쁨으로 불쑥 찾아오는 말씀 안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현존에 감사할 뿐입니다.

기도
?(Oratio)
당신께서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면전에서 넘치는 기쁨을,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을 누리리이다.(시편 16,?11)

 

 

 
어떤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녀는 자기 자녀가 꼭 올 백점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시험 때마다 자신도 잠을 자지 않으면서 공부를 시켰지요. 즉, 이 어머니의 행복은 아이가 올 백점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어머니가 있었는데요. 이 어머니는 60점 이상만 맞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대신 늘 하는 말은 ‘열심히 성당 다니면서 죄 짓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 어머니의 자녀는 그렇게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의 바램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바르게 성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어머니가 더 행복을 느끼면서 살까요? 당연히 후자의 어머니겠지요. 하나도 틀리지 않는 늘 올 백점을 맞기보다는 성당 열심히 다니고 바르게 사는 것이 더 쉬우니까요.

사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규칙을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 있는 욕심들을 낮출 때 우리들은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욕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없애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를 깨닫게 되니까요.

저는 하고 싶은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악기도 몇 가지 다루고 싶고, 새로운 운동도 몇 가지 배우고 싶습니다. 또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공부하고 싶기도 합니다. 악기 다루고, 운동하고, 공부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런데 어느 날 이런 것들도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을 시작함으로 인해서 정작 중요한 것이 뒤로 미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운 일을 위해서는 때로는 가장 중요한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줄이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내 자신에게 있어서 뒷자리에 차지하게 되는 순간, 행복도 멀어지게 됩니다. 주님만이 참된 희망과 행복을 가져다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았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진정으로 내가 행복했었는지를…….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주님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보십시오. 분명히 주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음에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라고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옆에 계셨음에도 알아볼 수 없었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기보다는 우울히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이것저것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작 하느님께 대한 관심을 줄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참된 행복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당신의 사랑과 축복을 약속해주십니다.


나의 만족도를 조금만 낮추어 보세요.

 

사제동행(師弟同行)

-양승국신부-

 

'엠마오를 향해 길을 가던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예수님' 기사를 접할 때마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성가 한 곡이 있습니다. 원선오 빈첸시오 신부님(Vincenzo Donati, 77세, 이탈리아 출신 살레시오회 사제, 1962년 한국에 선교사로 도착, 주로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성무감으로 재직하시다가 1982년 아프리카 선교사로 다시 파견)께서 직접 작곡하신 '엠마우스'란 성가입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 성가는 당신 제자였던 성염 현 바티칸 대사께서 작사하셨고, 원선오 신부님께서 직접 작곡하신 곡입니다.

원선오 신부님은 수도회 안에서, 그리고 당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살레시오고등학교 졸업생들 사이에서 거의 전설적 인물로 정평이 나 계십니다. 그분께서 이 땅에 머무시던 20년 동안 우리에게 남겨주셨던 교육자,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모범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아이들 구미에 맞는 생기 있고 발랄한 성가곡을 직접 작곡하셨고, 또 작곡한 노래를 직접 아코디언으로 반주하시면서 가르쳐주시던 신부님 모습에 감명받지 않은 학생들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살레시오고등학교 성무감으로 재직하실 때 일이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부님께서 아침미사가 끝나기 무섭게 달려가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학교 정문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등교하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아이들은 신부님이 정문에 서 계시다가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만 해도 황송한 일인데, 신부님께서 자신들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하시고 불러주시는데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학생들 이름을 다 기억하셨는지 비결을 추적해본 결과, 비결은 신부님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학기가 시작되면서 신부님께서 하셨던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밤 늦게까지 학생들 사진과 이름을 대조해가며 학생들 이름을 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신부님께서 '이제 한국은 살 만하다'며 자신을 더 필요로 하는 선교지 아프리카로 떠나셨습니다. 이제 그간 한국에서 닦은 기반을 바탕으로 여유있게 노후를 지내실 만도 한데, 그 노구를 이끌고 가장 낙후된 아프리카 오지로 훌훌 떠나가셨습니다.

"돈보스코의 생각, 돈보스코의 정신만이 저를 지탱해주는 지주입니다. 어느 나라든 어떤 상황이든 돈보스코와 함께 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은퇴란 없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8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아프리카 청소년들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신부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모습은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아이들 생활 한가운데 머무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도 사무실에 머물지 않고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뛰놀거나 함께 이야기하셨습니다. 청소 시간에도 아이들과 함께 청소하면서 생활 속의 작은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교육현장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요소가 '사제동행(師弟同行)'입니다. 교사와 학생이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교사가 학생과 나란히 서서 걸어갈 때 감동받지 않을 학생이 없습니다. 변화되지 않을 학생이 없습니다. 참교육은 사제동행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엠마오를 향해 가는 제자들과 사제동행하십니다. 희망을 잃고 힘없이 걸어가던 제자들 사이로 예수님께서 슬며시 끼어드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차근차근히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나누십니다. 좌절과 실의에 빠진 그들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렇게 함께 길을 걸어주신 스승의 모습, 철저하게 사제동행을 실천하신 예수님 모습에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깊은 감명을 받는 동시에 서서히 영적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눈이 열려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제야 그들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마중물 사랑

-김찬선신부-

 

우리의 인생은 가는 인생이고 그래서 하나의 여정입니다.
우리말은 참으로 독특해서 이런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말들은 그저 산다고 얘기하는데
우리말은 그저 산다고 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살고 또 한편으로는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배를 타고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배 안에서 먹고, 자고, 얘기하고, 고기 잡고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배는 계속해서 어디론가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가긴 가는 것인데
살아가는 것인지, 죽어가는 것인지, 이것이 문제입니다.
살아가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독서들은 우리가 살아갈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주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돈을 쫓아가면 죽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삽니다.
권력을 쫓아가면 죽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삽니다.
미녀를 따라가면 죽게 되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살 수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가면 죽지만
주님을 따라가면 삽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쫓으면 죽지만
주님을 따르면 삽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쫓으면 왜 죽습니까?
그것들은 끝이 있고,
그 끝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이런 것들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 끝을 보고서야 절망하고 돌아서 갑니다.
오늘 복음의 두 제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긴 따랐는데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세상의 실패자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출세를 꿈꾸었던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패하고 낙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따라올 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몸소 다가가시어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따라가지 않으니까
주님께서 다가오시어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시며
그들의 대화에 동참하십니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시며 그 말에 동감하기시도 하십니다.
이렇게 그들의 가는 길에 동행하시고,
그들의 대화에 동참하시고,
그들의 말에 동감하시자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고픈 마음이 생기고
주님의 말씀에 감동을 합니다.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며 주님을 붙들고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하며 감동을 서로 얘기합니다.
주님의 동행이 마중물처럼 제자들의 동행을 이끌어내고
주님의 동감이 마중물처럼 제자들의 감동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저의 관구 봉사자의 가상공간 이름이 마중물인데
마중물이란 펌프에 물이 빠졌을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처음에 붓던 물이지요.
펌프에 물이 빠지면 아무리 물을 길으려 해도
물이 올라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때 꼭 필요한 것이 마중물인데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도 물 건너가고
기쁨과 희망도 사라지고
힘도 쏙 빠진 제자들에게
마중물처럼 필요했던 것이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그리고
동행,
동참,
동감이
바로 그때 그 제자들에게 필요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체험한 제자들의 입에서
마침내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하듯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는 노래가 터져나옵니다.

 

 사제동행(師弟同行)

-양승국신부-

 

'엠마오를 향해 길을 가던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예수님' 기사를 접할 때마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성가 한 곡이 있습니다. 원선오 빈첸시오 신부님(Vincenzo Donati, 77세, 이탈리아 출신 살레시오회 사제, 1962년 한국에 선교사로 도착, 주로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성무감으로 재직하시다가 1982년 아프리카 선교사로 다시 파견)께서 직접 작곡하신 '엠마우스'란 성가입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 성가는 당신 제자였던 성염 현 바티칸 대사께서 작사하셨고, 원선오 신부님께서 직접 작곡하신 곡입니다.

원선오 신부님은 수도회 안에서, 그리고 당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살레시오고등학교 졸업생들 사이에서 거의 전설적 인물로 정평이 나 계십니다. 그분께서 이 땅에 머무시던 20년 동안 우리에게 남겨주셨던 교육자,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모범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아이들 구미에 맞는 생기 있고 발랄한 성가곡을 직접 작곡하셨고, 또 작곡한 노래를 직접 아코디언으로 반주하시면서 가르쳐주시던 신부님 모습에 감명받지 않은 학생들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살레시오고등학교 성무감으로 재직하실 때 일이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부님께서 아침미사가 끝나기 무섭게 달려가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학교 정문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등교하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아이들은 신부님이 정문에 서 계시다가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만 해도 황송한 일인데, 신부님께서 자신들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하시고 불러주시는데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학생들 이름을 다 기억하셨는지 비결을 추적해본 결과, 비결은 신부님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학기가 시작되면서 신부님께서 하셨던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밤 늦게까지 학생들 사진과 이름을 대조해가며 학생들 이름을 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신부님께서 '이제 한국은 살 만하다'며 자신을 더 필요로 하는 선교지 아프리카로 떠나셨습니다. 이제 그간 한국에서 닦은 기반을 바탕으로 여유있게 노후를 지내실 만도 한데, 그 노구를 이끌고 가장 낙후된 아프리카 오지로 훌훌 떠나가셨습니다.

"돈보스코의 생각, 돈보스코의 정신만이 저를 지탱해주는 지주입니다. 어느 나라든 어떤 상황이든 돈보스코와 함께 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은퇴란 없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8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아프리카 청소년들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신부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모습은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아이들 생활 한가운데 머무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도 사무실에 머물지 않고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뛰놀거나 함께 이야기하셨습니다. 청소 시간에도 아이들과 함께 청소하면서 생활 속의 작은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교육현장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요소가 '사제동행(師弟同行)'입니다. 교사와 학생이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교사가 학생과 나란히 서서 걸어갈 때 감동받지 않을 학생이 없습니다. 변화되지 않을 학생이 없습니다. 참교육은 사제동행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엠마오를 향해 가는 제자들과 사제동행하십니다. 희망을 잃고 힘없이 걸어가던 제자들 사이로 예수님께서 슬며시 끼어드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차근차근히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나누십니다. 좌절과 실의에 빠진 그들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렇게 함께 길을 걸어주신 스승의 모습, 철저하게 사제동행을 실천하신 예수님 모습에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깊은 감명을 받는 동시에 서서히 영적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눈이 열려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제야 그들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지름길

-허영엽신부-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나란히 걸어가셨다.

두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일에 대하여 말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에 그들의 동료들이 무덤에 가 보았으나 예수님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의 시체가 도둑맞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생각에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가는 중이었고,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접근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에 관한 성서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서 말씀을 풀이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참으로 뜨거운 감동을 느꼈음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성서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는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먼 길을 동행하는 나그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나그네를 염려하여 날이 저물었으니 함께 묵어 가자고 초대했습니다. 우연히 만난 나그네를 그냥 보내지 않고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그네는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었습니다(루가 22,19-20; 1고린 11,23-25 참조). 나그네는 일용할 양식을 떼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이 인간적인 정을 나누며 따뜻이 대접한 평범한 나그네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사람들 가운데 계시며, 내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 나에게 접근해 오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나는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은 늘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야”(1베드 1,17) 합니다. 하느님 무서운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를 소홀히 대하지 않고, 즐겨 예수님에 관해 말을 주고받습니다. 그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마태 10,42)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묵묵히 실천할 따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역시 주님을 찾으려 했을 때에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내가 특정한 장소에서 주님을 찾으면 주님은 거기 계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일상 중에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나를 찾아오십니다. 나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마음으로 맞이하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지름길입니다. 오늘 우연히 스치는 사람에게서 주님을 만나 뜨거운 감동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 허성 신부-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로마인들의 학정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열심히 따랐었는데, 대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관헌에게 넘겨 무참히 십자가형에 처하여 죽이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그분의 시체마저 무덤에서 사라졌으니 그분의 제자들의 슬픔과 절망감이 오죽했으랴!

그분에게 걸었던 모든 기대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자 상처받은 마음으로 생각마저 하기 싫은 예루살렘을 떠나 삼십리길이나 떨어진 시골인 엠마오로 떠나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접근하시어 하루길을 동행하시면서 당신과 연관된 성서구절을 풀이해 주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감동시켜 주셨다. 엠마오에 도착하셔서는 식탁에서 빵을 들어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시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 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슬픔과 좌절과 절망에서 벗어나 다시 기쁨과 희망과 용기를 회복해서 예수님을 잡아 죽인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내용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내가 잘 아는 어떤 이는 평소에 우리 가톨릭교에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신자인 친구의 권유와 인도로 예비신자 교육을 받으면서 성당에 다니게 됐고, 마침내는 기쁨과 감격속에 본당 신부님과 신자들의 열렬한 축하속에 세례를 받았다.

그때 까지는 너무나 신앙 생활이 재미가 있었고, 모든 신자들이 천사로 보여 기도와 미사참례에도 열심히 했고, 여러 신심 단체에도 가입해 열심히 재미있게 보람을 느끼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영세 대모가 며칠후에 꼭 갚아 준다면서 많은 돈을 꾸어 달라고 하여 빌려 주었는데 도무지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고 또 그분의 남편은 신자인 친구의 빚보증을 서주었다 친구가 부도를 내고 사라져 그의 빚을 떠안게 됐다. 그래서 자신마저 부도를 맞게 되었을 뿐아니라 본당의 신심단체 회원들과도 마음이 많이 상해서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집에 있던 기도서, 십자고상, 성모상, 묵주, 성서, 성가집, 미사수건까지 모두 보자기에 싸서 사제관 문앞에 갖다놓고 분노와 절망속에서 냉담하고 말았다.

나는 그를 찾아가 위로 하면서 성령 묵상회에 한번 갔다 오라고 권하였고 그는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나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마지못해 교구에서 개최하는 2박3일 성령묵상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은 특별한 사랑과 교육을 받은 제자로부터 인신매매를 당하시고 그토록 사랑을 베푸신 백성들로부터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과 황제를 거역한 역적으로 몰리어 처형되셨는데도 불구하고 배신자들을 조건없이 먼저 용서하셨을 뿐아니라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만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없이 울면서 재산상 손해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었고 떼인 돈은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분노와 증오와 절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감사와 기쁨에 충만되어 보다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봉사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상 처형사건은 너무나 큰 충격과 절망이 아닐 수 없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셨지만 그분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이 숙식을 함께 하면서 우리 오감으로 늘 느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그분과 하룻길을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분은 신앙의 대상이시지 감각의 대상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분이 성서를 풀이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고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실 때에야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기쁨과 희망과 신앙과 용기로 재충전되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고자 날이 이미 저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예루살렘으로 서둘러 갔던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려면 성서와 전례에 적극 정성을 기울여야 되겠다.그러면 우리의 영안이 점점 더 밝아져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면서 치유를 시켜주시고 방향을 제시해주시면서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다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충격적인 만남

-안병철신부-

 

희망의 보루였던 스승께서 그토록 처참하고 참담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시다니! 스승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제자들은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극도의 실망감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순간을 맞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서 삶의 의미를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앞에서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의 미련도, 더 이상의 희망도, 더 이상의 후회도 없는 그야말로 자포자기의 상태, 그것이 제자들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마도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동네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찼던 지난 추억들을 하나하나 지워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스승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상 그들에게는 더 이상 의미 없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말입니다. 하지만 엠마오로 가는 그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좌절감 속에 빠져 버린 두 제자의 마음에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펴 주시기 위해 그들을 만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이렇게 같은 길이었지만 목적은 그렇게 달랐습니다. 두 제자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깊은 시름을 안고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전혀 기대치 않은 순간에 그렇게 부활하신 분을 만났습니다. 그러고는 그분과 함께 엠마오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동행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할 만큼의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주실 때에야 제자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부활하신 분을 만났지만 그 순간 “그분께서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루카 24,30-31). 제자들에게 실망과 좌절의 쓰디쓴 맛을 보게 하신 스승 예수님과 그들의 여정에 함께하고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같은 분이십니다.

두 제자는 그야말로 절망의 끝자락에서 예수님을 부활하신 분으로 만나는 충격적인 순간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체험의 첫 순간은 이렇게 생각과 관념, 상식과 논리를 뛰어넘는 모습으로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온전히 은총 안에서 이루어진 예수님과의 충격적인 만남을 통해 그분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살아 계신 분이시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하셨던 것처럼 당신을 믿는 이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심으로써, 그들 안에 자리하고 있는 불신의 어둠을 몰아내고 욕심과 이기심으로 범벅된 자기중심적인 삶을 청산하도록 이끄십니다. 또한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시선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여정에 함께하십니다. 따스한 봄볕을 피부로 느끼며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듯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만들어가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길에서 만난 예수님

-윤희동 신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길거리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합니다. 서로 대화하고 때로는 예수님께서 야단을 치시고, 때로는 치유하시는 모습이 복음서 곳곳에서 얘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루가 5, 2732(세리 레위 부르심), 6, 15(바리사이파 몇몇), 7, 1117(장례행렬), 8, 2639(마귀 들린 사람), 18, 3519, 10(소경과 자캐오), 23, 2632(십자가의 길), 요한 4, 542(사마리아 여인)에서 일단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글레오파와 그 동료들을 만나 함께 걷습니다. 삼십리 길(12Km)이니 얼마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겠습니까? 이 시간 동안 예루살렘사건과 예수님과 관련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털어버리려던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생각이 바뀌고 열린 마음이 되면서, 이성과 감성의 감각이 다시 새로워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공생활 때와 같이 절망과 실망에 젖어든 그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줍니다. 물론 엠마오 동네 집안에서 성찬례를 하면서 글레오파와 그 동료가 결정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길에서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 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루가 24, 32)하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그들 자신의 부활도 보여 줍니다. 부활은 현실 안에서 실제모습으로 일어납니다. 부와 권력, 명예, 인기에 대한 탐욕에 빠져 버리면 죽음의 늪에 발목 잡혀 살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기쁨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빠져 나올 때 부활의 삶이 됩니다. 부활의 삶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의 삶은 예수님처럼 살게 되는 모습입니다.

길거리는 이동공간이자 삶의 공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길거리에서 만나는 그 사람들의 부활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어 주며 함께 있습니까?. 어쩌면 길거리의 사람들은 부활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부활을 모르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제대로 맛보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 마음, 삶의 자세가 실제생활에서 표현 될 때, 부활의 기쁨이 옵니다.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우리 그리스도인은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서로에게 진정한 부활이 되도록 말입니다.  

 

 증거해야할 부활체험

-조욱현신부-

 

영광스러운 부활은 오늘의 전례에도 계속되고 있지만,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 파스카의 의미를 신앙의 빛에 비추어 알아들으려 하는 노력하고 그 부활체험을 증거하여야 함을 오늘 독서에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제1독서: 사도 2,14.22-28: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는 오순절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주님이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 올라가 성령을 부어주실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께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 에 의한 것이었음을 말하면서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시편 16,8-11을 인용하면서 부활사상을 더욱 명확히 표현해주고 있다. “당신은 내 영혼을 죽음의 세계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
한 종을 썩지 않게 지켜주실 것입니다”(27절). 여기서 ‘거룩한 종’은 분명히 비극적인 죽음의 상황에서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하느님께서 그의 ‘오른편’ 에 계시어 그를 변호하여 지켜주시기 때문이다(25절).

제2독서: 1베드 1,17-21: 당신의 귀한 피로 이루신 구원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흠도 티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당신의 귀한 피’로 값을 치르시고 이루신 것이라고 하면서(18-19절), 그리스도께 관한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에 대해 말한다(20-21절 참조). 즉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의 도달점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성서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잘 알아듣고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 예로니모가 “성서를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시
하는 것과 같다”(Comment. in Isaiam. Prol., PL 24,17; 계시 27)고 한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복음: 루가 24,13-35: 엠마오의 제자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예언하고 준비하는 구약성서 안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신비를 구약성서의 메시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권위 있는 해석을 하고 계시다. 부활 날, 두 제자가 실망에 가득 차 엠마오로 가면서 그 때에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어떤 낯선 사람이 동행을 하며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 때에 제자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바가 모두 무너져 침통하다는 말을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형 당함으로써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흘째나’ 되었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의미이다(21절). 두 제자들과 다른 모든 사람이 어떤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나타나고 있다. 강력한 메시아를 기대하였지만, 십자가의 일은 정 반대의 일이었다. 여기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성서가 어떻게 예언하였는가를 깨우쳐 주신다(25-27절). 그러기에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였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 성서상의 예언은 하느님의 옳으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인들과 제자들은 성서의 말씀을 왜곡하고 편리하게 해석하여 참 의미를 외면함으로써 멋대로 해석하였다는 것을 꾸짖고 계신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성성의 참된 의미를 되찾아 주신다. 이렇게 하여 성서의 본래의 의미가 되살아난다. 이렇게 신앙의 메시지로서의 성서의 말씀은 오직 ‘믿는 마음’을 통해서만이 그 풍부한 의미를 다 드러낼 수 있다.

예수께서 ‘성서’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때에 두 제자는 이 모든 것을 체험한다. 그들은 그 낯선 동행인이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32절). 이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서를 받아들일 때, 성서는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서와 같이 가장 권위 있는 주석가가 될 것이다.

또한 성서와 더불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표지가 바로 성체성사이다. 두 제자에게 낯선 여행자가 초대되어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체성사를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30절). 성체성사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이 때에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31절). 제자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그분을 알아보았다”(35절)고 한다. 루가 복음사가는 최후의 만찬의 성체성사와 연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이야기가 ‘그들은 그분이 빵을 떼어주실 때에야 그분을 알아보았다’라는 말로 끝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성서를 읽어보면 신자들의 공동체는 신앙을 고백하고 빵을 떼어 나누기 위해 성체성사를 통해 서로 결합되고 있다. 빵을 떼어 나눔으로써 실현되는 주님의 현존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인식되도록 해주신다. 이와 같이 신앙은 인간에게 파스카 신비를 열어 보
여줄 뿐 아니라, 신앙 그 자체가 파스카 신비의 조명이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그 행위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부활과의 만남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그 부활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활의 원인이며 또한 결실이다” (A. St?ger, Vangelo secondo Luca, Vol. II, Roma 1968, p. 332).

우리는 여러 가지 표징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우선은 성서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 말씀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되며, 그 안에서 성서에 대한 주석가는 가장 권위있는 예수님으로 모시게 될 것이다. 그 성서가 이제부터 나에게 있어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있게 된다면 말이다. 또 하나는 성체성사의 표지이다. 이는 이제 우리가 성체를 이루는 삶을 살면서, 우리 자신을 나누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삶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어둔 밤을 보내야 부활이 찾아옵니다

-배광하신부-

 

엠마오로 가는 길

스승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던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옛 직업을 찾아 떠나며 동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요한 21, 3).

베드로의 이 말에는 인생살이에서 무언가 잔뜩 기대를 걸었던 것이 그야말로 물거품이 되었을 때, 희망과 꿈이 좌절되었을 때 던지는 허망함이 담겨 있습니다. 인생살이의 패배를 맛본 이의 스산함이 담겨있는 말입니다. 그가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인생의 희망이 예수님의 처참한 십자가 죽음으로 끝났고, 자신은 배신의 절망감으로 이제는 무엇을 기대할 수조차 없는 막다른 길에서 옛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 가족의 생계나 걱정해야겠다는 슬픈 어둠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제자들, 그들은 침통한 표정인 채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희망을 걸었던 예루살렘에서 패배의 쓴맛을 본 뒤 절망 가운데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내리막길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내리막으로 끝나는 내리막길이며, 다른 하나는 내리막에서 다시 올라가는 내리막길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희망과 꿈이 좌절되어 내리막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인생에서 쓰디쓴 낙방의 내리막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그 길이 엠마오로의 길이며, 다시 고기잡이를 떠나는 길입니다.

그 내리막을 끝까지 걸으면 그것으로 인생도, 신앙도, 믿음도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걷고 있던 내리막길에서 잘못 되었음을 빨리 인정하고 되돌아올 때 내리막은 내리막이 아니라 다시 올라갈 수 있는 부활의 오르막길이 되는 것입니다. 좌절과 실패의 사순을 얼마나 빨리 깨닫느냐가 부활의 기쁨의 길로 그만큼 빨리 인도해 주는 법입니다.

성공한 인생을 살았던 위인들이나, 신앙인들 역시 자신들의 삶에서 단 한 번도 내리막의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가슴 아픈 엠마오로의 내리막길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기 있게 찬란한 부활의 오르막길을 향하여 눈을 뜨고 다시 힘차게 걸어 올라갔던 분들이셨습니다. 그것을 확신하였던 베드로 사도는 부활의 기쁨을 체험한 뒤, 이렇게 외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1베드 1, 21).

다시 예루살렘으로

영성신학의 한 획을 그으셨던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은 신앙의 어두운 밤을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저 밤이 날 인도했다네,
한낮의 빛보다 더 확실하게,
날 기다리는 분이 있는 곳으로
내가 잘 알고 있던 분께로,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곳으로,
오! 이끌어준 밤이여!
새벽보다 더 다정한 밤이여!
오! 합쳐준 밤이여!”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자신의 세속적인 모든 것을 끊어 버려야 하는 정화의 과정, 어둡고 좁은 어둔 밤을 거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길이 고통의 길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통과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 13~14).

우리는 모두 신앙의 삶에서 여러 가지로 번민하며 갈등합니다. 신앙의 여러 선택에서 강한 믿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부활의 삶을 선택하기를 주저하며 자주 엠마오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성인 성녀들조차도 그 같은 어둔 밤을 걸었던 것에 작은 위로가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의 두 제자도 신앙과 믿음의 체념 속에서 어둔 엠마오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진정 부활이 희망이자 복음의 기쁜 말씀인 것은, 의욕을 상실하고 모든 것을 체념하며 침통한 인생길을 우리가 걸을 때, 주님께서는 나 몰라라 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 오시어 함께 동행 하시며 용기와 힘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옛날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그러하셨듯이 오늘 우리들의 고달픈 인생 여정에도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의 동행을 굳게 믿으며 함께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께 내어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주 불안이, 어둔 밤이 계속될 때 그분의 동행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그럴 때 주님께서는 나와 우리 가족, 공동체의 청을 뿌리치지 않으시고 믿음과 희망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기쁨이며,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

 

루가복음서는 성전의 전례와 기도를 대단히 소중히 생각합니다. 이 복음서는 성전에서 “백성이 모두 기도하고 있는 가운데”(1,10) 즈카리아가 성소에서 분향하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늘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낸다”(24,53)는 말로써 끝납니다. 복음서의 시작과 말미에 기도하는 이야기를 실은 것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도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23,46)라는 기도로써 당신 생애를 끝내셨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초기 교회가 거행하던 성찬 전례, 곧 오늘의 미사를 기본 틀로 삼아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여기에는 말씀의 전례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고 성찬 전례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째 되는 날 제자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복음은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클레오파라고 말할 뿐,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합류하여 함께 가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그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 미사에서 말씀의 전례 부분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과 함께 나눈 만찬을 기념하여 성찬을 거행했습니다. 그 성찬 중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과 일들을 회상하고, 그 의미를 그들의 성서 곧 오늘의 구약성서에 비추어 이해하고 토론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여 영으로 살아 계신 예수님이 그들의 그런 노력에 합류하셔서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서”를 바탕으로 당신에 관해 깨닫게 해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부활 후 영으로 그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깨우쳐 주신 바를 요약합니다. 초기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런 양식으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두 제자는 집안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고,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미사의 성찬 전례 부분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빵인 성체 안에 계시지만, 사람들이 육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양식으로는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기억하여 행하는 우리의 성찬 안에 보이지 않는 양식으로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나누는, 성찬은 이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장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고 있는 루가복음서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듣고 함께 나누는 말씀 안에 또 우리가 받아 모시는 성찬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계시고 또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오늘의 제자들은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더라고 말합니다. 죽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비참하게, 또 어떤 고통 중에 돌아가셨는지를 알아들어서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제자는 말합니다. 빈 무덤에서 “천사들이 나타나 그분은 살아 계시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하시던 말씀과 실천에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부활하신 분을 믿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음 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삶과 실천이 하느님의 것이었다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같은 삶, 같은 실천을 자기 안에 이루어서 예수님이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말씀으로 신앙 공동체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의 삶과 실천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성찬은 이 함께 계심을 받아들여 우리의 삶 안에 실현하라고 촉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길을 가는 두 제자는 낙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처형을 당하셨고, 더구나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에 대해, 또 구원에 대해 가졌던 희망은 처참한 절망으로 끝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절망으로 끝나는 희망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재물에 또 권력에 희망을 둡니다. 그것만이 구원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잘 섬겨서 그런 것을 받는다고 희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강이 구원이라 생각하고 그것에 희망을 두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면 재물도, 권력도, 건강도 주신다고 믿습니다. 구원에 대한 이런 희망은 처형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 믿었던 마음은 낙담할 것입니다.

재물도, 권력도, 건강도 모두 좋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만큼 하느님에게 감사드리고, 그것이 은혜롭게 보이는 그만큼 그것을 활용하여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체험하게 하는 계기가 되면 좋은 것이고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나는 진리를 증언하러 태어났다”(요한 18,3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진리는 예수님에게 재물을 주고, 권력을 주고, 건강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는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13,1)이었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고난을 겪어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이 보입니다. 그것은 나 한 사람 잘 되자는 길이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이 힘들고 고난을 겪어서 내 주변이 행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자기 주변의 생명들을 소중히 보는 시선이 진리를 보는 시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듣고 나누는 복음의 말씀 안에 또 우리가 예수님의 몸이라고 모시는 빵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계십니다. 우리 안에 그 진리가 살아 있게 하기 위해 계십니다.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실천하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부활은 죽었던 생명이 환생한 기적이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 한 몸 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삶 안에 확산되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행복하세요~!

-최용감신부-

 

까르투시안 수도회는 1084년 브루노 성인에 의해 세워진 이후 현재까지 단 한 번도 개혁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수도회로 유명합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결코 변질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그 수도회 수사님 한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 때부터 가졌던 수도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 동경이 이끌어 낸 입회, 철저한 봉쇄 생활 중 자주 찾아들었던 답답함, 그리고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내게 만들었던 희망과 그 희망의 근거가 되어 준 예수님의 손길에 대한 이야기. 결론식으로 던졌던 마지막 한마디 “그래서 지금 행복합니다”라는 확신은 함께 있던 저를 전율시켜 버렸습니다. 부러움을 뛰어넘어 저 역시 그렇게 살고 싶게 만드는 어떤 영적인 교만함도 묻어있지 않은 단순하면서도 확신에 찬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은 분명 예수님을 보았고 말씀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따르던 그분이 돌아가신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22-24절) 사뭇 자신이 없는 듯 ‘~라고 하더랍니다’라는 식으로만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전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의 마음은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알아보자마자 곧바로 사라져버린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 타오른 마음에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하루 종일 걸어 멀어졌던 예루살렘으로 곧바로 돌아가 확신에 차서 동료들에게 그 소식을 나누기에 이릅니다. 그 동안 자신을 짓눌러왔던 모든 의심을 벗어버리고, 확신에 차서 목소리를 높여 남이 추하게 보건 말건 상관없이 벅차오르는 행복을 나누는 그 모습 말입니다. 한줄기라도 빛이 비추면 어둠은 순식간 자취를 감추듯 이제 사도들에게는 그들이 따랐던 예수님에 대한 의심의 빛이라곤 이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해 버리게 됩니다.

그들을 변화시킨 것은 분명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곳은 그들이 다른 이들을 만날 때 드러나는 바로 행복이 넘쳐흐르는 모습에서 일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든 적게 했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일’에 대해 많이 알든 적게 알든 상관없이, “지금 내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한가”라는 질문은 2000년 전 제자들에게도,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신앙인으로서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하나의 가치판단 기준이 될 것입니다. 자주 이 질문 스스로에게 던져보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는 행복한가?”

 

 내 인생 길의 동반자

-이영묵신부-

 

“형이 아우한테 말했다. 그 사람의 진짜가 보이는 것은 여행을 했을 때, 식사를 할 때, 도박판에 앉았을 때, 그리고 위급함이 나타났을 때이다.”(정채봉 ‘간장종지’ 중 )

함께 여행을 하면 동반자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정채봉씨는 오늘의 루카복음 24, 30
31을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식탁에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을 때 나그네들은 알아보았지만 예수님은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여행객은 분위기로 보아 가는 발길이 가볍지 않았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 소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실망이 컸던 모양입니다. “그분이라면” 하고 믿었던 터에 십자가의 죽음은 허탈 그 자체입니다. 이 때 두 여행객 사이에 끼어 든 한 사나이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두 여행객 사이에 말벗이 되었던 사나이는 두 사람의 인생길에 삶의 좌표를 확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나이는 다름 아닌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그 예수였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신 부활하신 주님이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듯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점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부활 신앙은 현재 사건의 연장입니다. 예수 부활 사건은 허구(fiction)가 아니라 사실(fact)입니다. 그분이 다가오시는 모습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그분이 말씀하실 때 신앙의 귀로 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두 가지 무장은 하나는 성경이요 하나는 성체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와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 32). 성경을 읽는 게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실 때 신앙의 감동을 얼마나 느끼는 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은 과거에 말씀하신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또 하나는 성체성사의 신비입니다. 성체는 신앙인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먹거리입니다. 주님을 먹지 않고 잘 살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의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 인생의 여행에 인도자(guide)이신 예수님은 편안한 여행이 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내 삶이 풍요롭도록 미사를 집전해 주십니다.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에서 영육간 건강하도록 배려해 주시는 주님은 오늘도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게 해 주십니다. 알렐루야!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