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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連絡船(연락선)은 떠난다 追憶(추억)의 張世貞(장세정)💢
장세정(張世貞, 日本式(일본식) 이름: 張田世貞, 1921年(년) ~ 2003年(년) 2月(월) 16日(일)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부터 活動(활동)한
Trot(트로트) 歌手(가수)이다.
生涯(생애).
平安南道(평안남도) 평양(平壤: 現(현) 平壤直轄市(평양직할시)에서 出生(출생)하여 生後(생후) 두 달 만에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는 滿洲(만주)에서 獨立團(독립단)에 들어가서 祖父母(조부모) 膝下(슬하)에서 자랐다. 平壤(평양) 和信百貨店(화신백화점)의 樂器店(악기점)에서 勤務(근무)하던 中(중), 만 15歲(세) 무렵이던 1936年(년)에 平壤放送局(평양방송국) 開局記念(개국기념) Song Concours歌謠(가요)콩쿠르)에서 1等(등)을 차지한 것을 契機(계기)로 Ok record(오케레코드)의 이철[李哲:日本式(일본식) 이름: 靑山 哲(아오야마 히카리), 1903年(년) 6月(월) 9日(일) ~ 1944年(년) 6月(월) 20日(일)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企業人(기업인), 音樂家(음악가), 作詞家(작사가), 作曲家(작곡가), Saxophonist(색소포니스트) 兼(겸) Trumpeter(트럼페터)로, 韓國(한국) 音盤事業(음반사업)과 演藝事業(연예사업)의 先驅者(선구자)이다. 아명(兒名)은 이억길 (李億吉)이다. 延禧專門學校(연희전문학교) 在學(재학) 中(중) 현영운[玄暎運, 아명(兒名)은 현영운 (玄映運), 1868年(년) 陰曆(음력) 6月(월) 11日(일) ~ ?)은 朝鮮末期(조선말기)와 大韓帝國(대한제국)의 官僚(관료) 兼(겸) 軍人(군인)으로, 本貫(본관)은 연주(延州)이다. 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의 저장收養(수양)딸인 배정자[裵貞子, 日本式(일본식) 이름: 田山貞子(다야마 사다코), 1870年(년) 2月(월) 23日(일) ~ 1952年(년) 2月(월) 27日(일)는 朝鮮(조선)의 비구니[比丘尼:出家(출가)하여 僧侶(승려)가 지켜야 할 348 가지 具足戒(구족계)를 받은 女子(여자) 僧侶(승려)]이자 日本帝國(일본제국)의 朝鮮(조선) 情報員(정보원), 外交官(외교관)이다. 生父(생부)가 閔氏(민씨) 一派(일파)에게 處刑當(처형당)한 뒤 連坐法(연좌법)에 依(의)해 官婢(관비)가 된 어머니를 따라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니다가 密陽(밀양)의 妓生(기생)으로 팔려갔으나 脫出(탈출), 1882年(년)(高宗(고종) 19年(년) 女僧(여승)이 되었다.
1885年(년) 日本(일본)으로 逃避(도피)하여 1887年(년) (이토 히로부미)의 養女(양녀)가 되었다는 說(설)이 있다. 그 後(후) 日本(일본) 政府(정부)로부터 密偵(밀정)敎育(교육)을 받고 1894年(년) 歸國(귀국)하여 大韓帝國(대한제국)과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 日本(일본)의 密偵(밀정)으로 活動(활동)했으나 이를 立證(입증)할 史料(사료)는 없다. 1920年(년) 日本軍(일본군)의 Siberia(시베리아) 出兵(출병) 때는 滿洲(만주), Siberia(시베리아)를 오가며 軍事(군사) spy(스파이)로 活躍(활약)했다. 그 後(후) 甘多:Gando(간도), 上海:Shanghai(상하이)等地(등지)에서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들의 逮捕(체포)를 위해 暗躍(암약)하다가 1927年(년) 隱退(은퇴)했다. 1949年(년) 反民族(반민족) 行爲(행위) 特別(특별) 調査委員會(조사위원회)에 親日叛逆者(친일반역자)로 逮捕(체포)되었다.
本貫(본관)은 金海(김해)이며, 慶尙南道(경상남도) 金海郡(김해군) 出身(출신)이다. 本名(본명)은 배분남(裵紛男, 裵紛南)이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時代(시대) 映畫人(영화인) 배구자[裵龜子:1905年(년)~2003年(년)는 日帝强占記(일제강점기)에 주로 活動(활동)한 舞踊家(무용가)이며 劇場(극장) 經營者(경영자)이다. 韓國人(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西洋舞踊(서양무용)을 배워 韓國(한국)에서 公演(공연)을 한 舞踊家(무용가)이다.
生涯(생애).
忠淸南道(충청남도) 大田(대전) 出身(출신)으로 出生(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異說(이설)이 있다. 公式的(공식적)으로는 裵貞子(배정자)의 조카이나, 裵貞子(배정자)와 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所聞(소문)이 꾸준히 돌았다. 末年(말년)에는 배구자 本人(본인)이 明治天皇(메이지 天皇(천황)과 明成皇后(명성황후)의 피를 이어받은 公主(공주)라고 밝히기도 했다.
幼年時節(유년시절)의 行跡(행적)은 不透明(불투명)하다. 이는 배구자가 몸담고 있던 日本(일본) デンカス:Denkas(덴카스) 一行(일행)이 京城府(경성부)에서 公演(공연)을 始作(시작)한 1918年(년) 경부터 言論(언론)에 報道(보도)되기 始作(시작)한 履歷(이력)을 本人(본인)이 後(후)에 否認(부인)했기 때문이다. 共通(공통)되는 點(점)을 묶으면, 時期(시기)는 不確實(불확실)하나 어린 나이에 Denkas:デンカス(덴카스)의 團員(단원)이 되어 海外(해외) 公演(공연)을 다니면서 舞踊(무용)을 배웠다는 것이다.
1926年(년)에 Denkas:デンカス(덴카스)가 平壤(평양)에서 公演(공연) 中(중)일 때 몰래 빠져나와 蟄居(칩거)를 始作(시작)했다. Denkas:デンカス(덴카스)에서 脫退(탈퇴)한 理由(이유)는 團長(단장)이자 양어머니인 ヒョギョクサイデンカス:Hyogyokusai Denkasu(효교쿠사이 덴카스)의 의붓아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處地(처지)가 困難(곤란)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脫出(탈출)을 도와준 홍순언[洪淳彦: 1905年(년)? ~ 1937年(년) 1月(월) 19日(일)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興行師(흥행사)이다.
生涯(생애),
平安北道(평안북도) 義州郡(의주군) 出生(출생)이나 生年(생년)은 分明(분명)치 않다. 列車(열차) 食堂(식당)의 給仕(급사)로 始作(시작)하여 平壤(평양)에서 hotel(호텔) 支配人(지배인)으로 勤務(근무)했다. 1926年(년)에 平壤(평양)에 公演(공연)을 온 舞踊家(무용가) 裵龜子(배구자)를 만나 裵龜子(배구자)의 脫出(탈출)을 도와주었다. 이때의 因緣(인연)으로 두 사람은 1929年(년)에 結婚(결혼)하였다.
結婚(결혼) 直後(직후)부터 배구자는 裵龜子(배구자) 舞踊硏究所(무용연구소)를 設立(설립)하여 活動(활동)을 再開(재개)하였고, 洪淳彦(홍순언)은 배구자의 Manager(매니저) 役割(역할)을 하면서 興行業界(흥행업계)에서 活動(활동)을 始作(시작)했다. 裵龜子(배구자) 舞踊硏究所(무용연구소) 學生(학생)들로 公演團(공연단)을 꾸린 뒤 日本(일본)의 興行企業(흥행기업)과 契約(계약)을 締結(체결)하여 日本(일본) 巡廻公演(순회공연)을 벌이면서 收益(수익)을 올리기 始作(시작)했다.
巡廻公演團(순회공연단) 運營(운영) 經驗(경험)을 바탕으로 1935年(년)에는 商業演劇(상업연극)을 專門(전문)으로 公演(공연)하는 東洋劇場(동양극장)을 開館(개관)하여 큰 成功(성공)을 거두었다. 洪淳彦(홍순언)은 現在(현재)의 Seoul(서울)西大門區(서대문구) 忠正路(충정로)에 最新(최신) 施設(시설)로 東洋劇場(동양극장)을 짓고, 小說家(소설가) 최독견[최독견(崔獨鵑, 1901年(년) 3月(월) 15日(일)~1970年(년) 6月(월) 5日(일)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부터 活動(활동)한 大韓民國(대한민국)의 小說家(소설가) 兼(겸) 劇作家(극작가)이다. 藝名(예명) 崔獨鵑(최독견)과 本名(본명) 최상덕(崔象德)을 함께 使用(사용)하였다. 黃海道(황해도) 信川郡(신천군) 出身(출신)이다. 故鄕(고향)에서 普通學校(보통학교)를 卒業(졸업)한 뒤 高等普通學校(고등보통학교) 在學(재학) 中(중)이던 1919年(년)에 3·1 運動(운동)의 影響(영향)을 받고 上海(상하이)로 건너갔다. 上海(상하이)에서 惠靈專門學校(혜령전문학교) 中文科(중문과)를 卒業(졸업)하고 新聞社(신문사)에서 校正技師(교정기사)로 勤務(근무)하였다. 이때 첫 作品(작품) 《유린》을 發表(발표)하면서 小說家(소설가)로 登壇(등단)했다.
1927年(년)에 出世作(출세작)이자 代表作(대표작)이 된 《(僧房悲曲)승방비곡:최독견(崔獨鵑)이 지은 中篇小說(중편소설).1927年(년) 5月(월) 10日(일)부터 9月(월) 11日(일)까지 『朝鮮日報(조선일보)』에 連載(연재)되었고, 1929年(년) 新舊書林(신구서림)에서 單行本(단행본)으로 刊行(간행)하였다. 浪漫的(낭만적)인 色彩(색채)가 짙은 崔獨鵑(최독견)의 代表作(대표작)으로 人間(인간)의 悲劇的(비극적) 運命(운명)을 그린 作品(작품)이다.內容(내용)은 東京女子音樂學校(동경여자음악학교)를 卒業(졸업)한 김은숙(金恩淑)은 釜山發(부산발) 봉천행(奉天行) 列車(열차)에서 우연히 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는 東京 불교대(동경佛敎大) 學生(학생)인 최영일(崔榮一)을 잊지 못한다.
최영일(崔榮一)은 운외사(雲外寺) 住持(주지) 최해엄(崔海嚴) 禪師(선사)의 上佐(상좌)인 天涯孤兒(천애고아) 법운(法雲)이다. 한편 김은숙(金恩淑)은 서울의 숨은 富者(부자)인 이준식(李俊植)의 아들 이필수(李弼秀)의 執拗(집요)한 接近(접근)을 받고 있다.
김은숙(金恩淑)과 최영일(崔榮一)은 金剛山(금강산)에서의 邂逅(해후)를 契機(계기)로 親(친)해지지만, ‘女子(여자)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禪師(선사)의 戒律(계율)로 苦悶(고민)하다가, 서로 男妹(남매)처럼 지낼 것을 約束(약속)한다.
그러던 中(중) 김은숙(金恩淑)의 아버지 김창호는 그가 經營(경영)하는 청운학교(靑雲學校)의 運營(운영) 資金(자금)을 이필수(李弼秀)에게 빌리게 되며, 이필수(李弼秀)는 ‘수캐같이 추근추근하고 床奴(상노)같이 卑屈(비굴)하고 데릴사위같이 溫純(온순)하게’ 김은숙(金恩淑)에게 接近(접근)한다.
그러나 이필수(李弼秀)는 本妻(본처)가 있고, 載寧(재령) 나무리에는 그의 小作人(소작인)의 딸 명숙을 誘惑(유혹)하여 낳은 딸이 있으며, 그女(녀)를 失明(실명)하게 한 前科(전과)가 있었다.
최영일(崔榮一)과 김은숙(金恩淑)은 次次(차차) 젊은 肉體(육체)에서 타오르는 憾情(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괴로워한다. 그러다가 최영일(崔榮一)은 이필수(李弼秀)의 卑劣(비열)한 陰謀(음모)에서 김은숙(金恩淑)을 求(구)해내고, 김은숙(金恩淑)에게 請婚(청혼)한다. 그러나 이제는 김은숙(金恩淑)의 어머니가 둘의 結婚(결혼)을 反對(반대)한다.
結婚式(결혼식)이 있던 날 김은숙(金恩淑) 어머니는 自殺(자살)을 하고, 어머니의 遺書(유서)로 최영일(崔榮一)과 김은숙(金恩淑)이 한 男妹(남매)였음이 밝혀진다. 최영일(崔榮一)은 김은숙(金恩淑) 어머니와 禪師(선사) 사이에서 낳은 김은숙(金恩淑)의 오빠였던 것이다.
意義(의의)와 評價(평가).
이 作品(작품)은 韓國(한국) 最初(최초)로 試圖(시도)한 映畫小說(영화소설)로서, 讀者(독자)들로부터 좋은 反應(반응)을 얻었다. 作者(작자)는 이 作品(작품)에서 男妹(남매)의 悲劇的(비극적)인 사랑을 通(통)하여 人間(인간)의 運命(운명)을 real(리얼)하게 表現(표현)하고 있다. 崔獨鵑(최독견)은 이 作品(작품) 以後(이후) 社會(사회) 現實(현실)에 關心(관심)을 가지고 傾向文學(경향문학)으로 轉換(전환)한다.]》을 《朝鮮日報(조선일보)》에 連載(연재)하여 人氣(인기) 作家(작가)로 浮上(부상)했다. 최영일(崔榮一)과 김은숙(金恩淑)이라는 두 男女(남녀)의 宿命的(숙명적) 사랑을 그린 이 作品(작품)은 典型的(전형적)인 大衆小說(대중소설)로 많은 人氣(인기)를 끌었다. 1927年(년)에 發表(발표)한 《黃昏(황혼)》은 抗日運動家(항일운동가)의 아내를 다룬 作品(작품)으로 마지막 部分(부분)이 檢閱(검열)로 削除(삭제)된 적이 있다. 이듬해에는 《每日新報(매일신보)》 學藝部長(학예부장)으로 就任(취임)했다가 벚꽃 그림을 無窮花(무궁화)로 바꾼 事件(사건)으로 退社(퇴사)하여 小說(소설) 執筆(집필)에 專念(전념)했다.
1935年(년) 常設(상설) 劇場(극장)인 東洋劇場(동양극장)이 開設(개설)되었을 때 專屬(作家전속작가) 兼(겸) 支配人(지배인)이 되었다.
崔獨鵑(최독견)
崔獨鵑(최독견)은 東洋劇場(동양극장) 主人(주인) 夫婦(부부)인 裵龜子(배구자)와 洪淳彦(홍순언)에게 먼 親戚(친척)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東洋劇場(동양극장)은 新派劇(신파극)을 주로 公演(공연)하며 높은 人氣(인기)를 누렸다. 崔獨鵑(최독견)이 쓴 《僧房悲曲(승방비곡)》도 東洋劇場(동양극장)의 代表的(대표적)인 公演作(공연작) 中(중) 하나였다. 1938年(년)에 洪淳彦(홍순언)이 死亡(사망)하면서 崔獨鵑(최독견)이 社長(사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崔獨鵑(최독견)의 放漫[방만:하는 짓이 나 일 等(등)이 야무지지 못하고 , 맺고 끊음 이 없음]한 經營(경영)은 中日戰爭(중일전쟁) 勃發(발발) 戰後(전후)에 新派劇(신파극)이 急擊(급격)히 衰退(쇠퇴)한 社會(사회) 雰圍氣(분위기)와 맞물리면서 不渡(부도)를 내게 되었다. 不渡(부도) 事態(사태) 以後(이후) 崔獨鵑(최독견)은 潛跡(잠적)하여 太平洋(태평양) 戰爭(전쟁) 때까지 숨어 지냈다.
終戰(종전) 後(후) 蘇軍政(소군정) 地域(지역)에서 曺晩植(조만식)의 朝鮮民主黨(조선민주당) 機關誌(기관지) 《黃海民報(황해민보)》 發行(발행)에 參與(참여)했다가, 反動(반동)으로 指目(지목)되자, 1947年(년)에 美軍(미군)정 地域(지역)으로 越南(월남)했다. 越南(월남) 作家(작가)보다는 越北(월북) 作家(작가)가 흔하던 時節(시절)이라, 崔獨鵑(최독견)은 "以北(이북)에서 最初(최초)로 越南(월남)해 온 作家(작가)"로 紹介(소개)되었다.
以後(이후) 大邱每日新聞(대구매일신문) 主筆(주필), 서울新聞(신문) 編輯局長(편집국장), 聯合新聞(연합신문) 主筆(주필) 兼(겸) 編輯局長(편집국장), 世界日報(세계일보) 主筆(주필) 兼(겸) 編輯局長(편집국장) 等(등)을 지냈고, 韓國戰爭(한국전쟁)에는 1951年(년)에 組織(조직)된 從軍作家團(종군작가단) 團長(단장)으로 參戰(참전)했다. 韓國戰爭(한국전쟁) 때의 功勞(공로)를 認定(인정)받아 金星花郞(금성화랑) 武功勳章(무공훈장)을 授與(수여)받았다.
1959年(년)에 月刊誌(월간지) 《夜話(야화)》를 創刊(창간)했다가 筆禍(필화) 事件(사건)에 휘말렸다. 이 雜誌(잡지)에 詩人(시인) 조영암[조영암(趙靈巖, 1918年(년). 5月(월). 27日(일) ~ ?)은 韓國(한국)의 僧侶(승려)이자 詩人(시인), 作家(작가)이다. 조영암(趙靈巖)은 1918年(년) 5月(월) 27日(일) 江原道(강원도) 淮陽(회양)에서 태어났으며, 本名(본명)은 조승원(趙乘元) 또는 조성원(趙星元)이다. 龍井(용정)의 大成中學(대성중학)을 나왔다.
15歲(세)에 건봉사(乾鳳寺) 금일우 대강백의 은상좌가 되었다.19歲(세)에 월정사(月精寺)에서 백초월(白初月, 1878年(년)~1944年(년)의 典講(전강)을 받았고, 20歲(세)에 東鶴寺(동학사) 講主(강주)에 就任(취임)했다. 1943年(년) 惠化專門(혜화전문)을 卒業(졸업)했다. 解放(해방) 後(후) 北韓(북한)에서 敎師(교사)를 하다가 1948年(년) 越南(월남)하였다. 乾鳳寺(건봉사)의 僧侶(승려)로 있을 때 한용운[한용운(韓龍雲: 1879年(년) 8月(월) 29日(일) ~ 1944年(년) 6月(월) 29日(일)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詩人(시인), 僧侶(승려),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이다. 本貫(본관)은 靑州(청주). 號(호)는 만해(萬海)이다. 佛敎(불교)를 通(통)한 言論(언론), 敎育(교육) 活動(활동)을 하였다. 從來(종래)의 無能(무능)한 佛敎(불교)를 改革(개혁)하고 佛敎(불교)의 現實參與(현실참여)를 主張(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對案點(대안점)으로 佛敎社會改革論(불교사회개혁론)을 主張(주장)했다. 3·1 萬歲運動(만세운동) 當時(당시) 民族代表(민족대표) 33人(인)의 한사람이며 光復(광복) 1年(년)을 앞둔 1944年(년) 6月(월) 29日(일)에 中風(중풍)과 營養失調(영양실조) 等(등)의 合倂症(합병증)으로 病死(병사)(入寂(입적)하였다. 獨立宣言書(독립선언서)의 "公約(공약) 3章(장)"을 追加補完(추가보완)하였다. 또한 獄中(옥중)에서 '조선독립의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獨立(독립)과 自由(자유)를 主張(주장)하였다.
1910年(년) 日本(일본)이 主張(주장)하는 韓日佛敎同盟(한일불교동맹)을 反對撤廢(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等(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獨立運動(독립운동)을 協議(협의)하였다. 1918年(년) 11月(월)부터는 佛敎(불교) 最初(최초)의 雜誌(잡지)인 《唯心(유심)》을 發行(발행)하였고 1919年(년) 3.1 萬歲運動(만세운동) 當時(당시) 獨立宣言(독립선언)을 하여 逮捕(체포)當(당)한 뒤 3年間(년간) 西大門(서대문) 刑務所(형무소)에서 服役(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年代(년대)에는 帶妻僧(대처승) 運動(운동)을 主導(주도)하여 중에게도 結婚(결혼)할 權利(권리)를 달라고 呼訴(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年(년) 詩集(시집) 《님의 沈默(침묵)》을 出版(출판)하여 抵抗文學(저항문학)에 앞장섰고, 佛敎(불교)를 通(통)한 靑年運動(청년운동), 言論(活動언론활동)에 參與(참여)하였다. 1927年(년) 2月(월)부터는 新幹會(신간회)에 參與(참여)하여 中央執行委員(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新幹會(신간회) 京城支部長(경성지부장)을 지냈다.
1918年(년) 《唯心(유심)》에 詩(시)를 發表(발표)하였고, 1926年(년)〈님의 沈默(침묵)〉等(등)의 詩(시)를 發表(발표)하였다. 님의 沈默(침묵)에서는 旣存(기존)의 詩(시)와, 時調(시조)의 形式(형식)을 깬 散文詩(산문시) 形態(형태)로 詩(시)를 썼다. 小說家(소설가)로도 活動(활동)하여 1930年代(년대)부터는 長篇小說(장편소설)《흑풍》(黑風),《後悔(후회)》,《박명》(薄命), 短篇小說(단편소설)《죽음》等(등)을 비롯한 몇편의 長篇(장편), 短篇(단편) 小說(소설)들을 發表(발표)하였다. 1931年(년) 김법린[金法麟: 1899年(년) 9月(월) 27日(일) (陰曆(음력) 8月(월) 23日(일) ~ 1964年(년) 3月(월) 14日(일)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佛敎(불교) 僧侶(승려)이자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政務職(정무직) 公務員(공무원)이었다.慶尙北道(경상북도) 永川(영천) 出生(출생)이며 慶尙南道(경상남도) 東萊(동래)에서 成長(성장)하였다. 佛敎(불교) 僧侶(승려) 出家(출가) 以後(이후) 法名(법명)을 범산(梵山), 筆名(필명)을 김철아(金鐵啞)로 썼다. 14歲(세)인 1914年(년) 銀海寺(은해사)로 出家(출가)하고 이듬해 梵魚寺(범어사)의 明正學校(명정학교) 1年(년) 課程(과정)을 마친 後(후) 江原(강원)에서 四敎科(사교과)를 修了(수료)하였다. 그 뒤 新學問(신학문)을 익히기 위해 서울의 徽文高普(휘문고보)에 들어갔다가 1918年(년) 佛敎中央學林(불교중앙학림)으로 編入(편입)하였다.
獨立運動(독립운동).
1919年(년) 3·1 運動(운동)때 京城府(경성부)에서 韓龍雲(한용운)으로부터 獨立宣言書(독립선언서)를 받아 東萊(동래) 梵魚寺(범어사)에서 萬歲運動(만세운동)을 主導(주도)하였다. 그는 3·1 運動(운동)이 일어나기 直前(직전) 梵魚寺(범어사)의 代表(대표) 資格(자격)으로 Seoul(서울)로 올라갔으며, 3月(월) 4日(일) Seoul(서울)에서 萬歲運動(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梵魚寺(범어사)로 내려와 萬歲運動(만세운동)을 計劃(계획)해 갔다. 그리하여 3月(월) 18日(일) 東萊邑(동래읍) 장날을 기해 萬歲運動(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萬歲運動(만세운동) 後(후) 警察(경찰)의 警戒網(경계망)을 避(피)하여 1919年(년) 4月(월) 上海(상하이)로 亡命(망명)하였다. 이때 그는 佛敎(불교)學校(학교)인 佛敎中央學林(불교중앙학림) 內(내)에 設置(설치)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의 代表(대표) 資格(자격)으로 派遣(파견)된 것이었다. 韓國民團本部(한국민단본부)는 僧侶(승려) 백초월(白初月)을 中心(중심)으로 中央學林(중앙학림) 出身(출신) 僧侶(승려) 數十名(수십명)이 結成(결성)한 抗日祕密決死(항일비밀결사)로서 機關誌(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發行(발행)하는 한편 軍資金(군자금) 收合活動(수합활동)을 展開(전개)하였다. 또한 民團本部(민단본부)에서는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와 滿洲(만주) 等地(등지)에 부원(部員)을 派遣(파견)하여 國外(국외)獨立運動(독립운동)과의 連結(연결)을 꾀하였다.
이러한 任務(임무)를 띠고 (상하이)에 派遣(파견)되었던 그는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에 參加(참가)하여, 國內(국내) 派遣員(파견원)의 資格(자격)으로 1919年(년) 5月(월)경 다시 韓國(한국)에 들어 왔다. 1919年(년) 6月(월) 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의 要請(요청)으로 1884年(년)에서 1910年(년)까지의 日帝侵掠(일제침략) 資料(자료)를 收集(수집), 整理(정리)하고 이를 複寫(복사)하여 大韓民國臨時政府(대한민국임시정부)]에 傳達(전달)하였다. 韓國(한국)에서 그는 上海(상하이)의 大韓民國臨時政府(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하여 國外(국외) 獨立運動(독립운동)의 消息(소식)을 國內(국내)에 傳達(전달)하기 위하여 「화신공보(華新公報)」를 發刊(발간)하여 地方(지방)까지 配布(배포)하면서 宣傳活動(선전활동)을 展開(전개)하였다. 또한 滿洲(만주)로 넘어가 獨立運動(독립운동) 機關誌(기관지)인 革新公報(혁신공보)를 發行(발행)하여 國內(국내)에 搬入(반입)하였다. 安东贤(안동현) 육도구(六道溝)에 동광상점(東光商店)으로 僞裝(위장)한 獨立運動(독립운동) 根據地(근거지)를 마련하고 上海(상하이)의 신상완(申尙琓)과 백성욱, 韓國(한국)의 김상헌(金尙憲) 等(등)과 連絡(연락)을 取(취)하면서 僧侶(승려)들의 團結(단결)을 위해 努力(노력)하였다.
僧侶(승려) 活動(활동).
1920年(년) 佛敎中央學林(불교중앙학림)을 卒業(졸업)하고 백성욱·신상완·김대홍 等(등)과 함께 上海(상하이)로 건너가 1920年(년) 初(초) 의용승군(義勇僧軍)을 計劃(계획)하고 韓國(한국)에 들어왔으나 事前(사전)에 同志(동지)가 被逮(피체)됨으로써 다시금 上海(상하이)로 亡命(망명)하였다. 義勇僧軍(의용승군) 計劃(계획)은 事前(사전) 發覺(발각)되어 實踐(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全國(전국)의 僧侶(승려)들을 軍事體制(군사체제)로 組織(조직)하여 組織的(조직적)인 抗日運動(항일운동)을 展開(전개)하기 위한 뜻에서 計劃(계획)된 것이었다.
義勇僧軍(의용승군) 計劃(계획)이 挫折(좌절)된 直後(직후)인 1921年(년) 그는 France(프랑스)로 留學(유학)을 떠났다. 僧侶(승려)로서 外國(외국) 留學(유학)을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폭넓은 世界(세계)를 接(접)하고 그 속에서 祖國(조국) 獨立(독립)의 길을 摸索(모색)하기 위해 留學(유학)에 나선 것이었다. 그는 France(프랑스) Paris University(파리 大學(대학) 문학부(文學部) 哲學科(철학과)에 在學(재학)하면서 한편으로 Paris(파리)에 本部(본부)를 두고 있는 피압박민족대회(被壓迫民族大會)에서 韓國(한국) 代表(대표)로 活躍(활약)하였고, 西歐(서구)의 自由思想(자유사상)을 硏究(연구)하는 데 沒頭(몰두)하였다. 1926年(년) 哲學科(철학과)를 卒業(졸업)하고 France(프랑스) 留學(유학)을 마친 그는 1928年(년) 初(초)에 歸國(귀국)하였다. 1928年(년) 백성욱·김상호 等(등)과 함께 佛敎(불교)靑年會(청년회)의 中興(중흥)을 圖謀(도모)하였고, 1929年(년) 1月(월) 朝鮮(조선)佛敎禪敎兩宗僧侶大會(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開催(개최)하여 佛敎(불교)의 自主化(자주화)를 위해 獻身(헌신)하였다. 1929年(년) 봄 朝鮮語學會(조선어학회)가 主管(주관)하는 朝鮮語辭典編纂會(조선어사전편찬회)의 準備委員(준비위원)으로 參加(참가)하였다.
이렇듯 表面活動(표면활동)과 함께 祕密決死(비밀결사)를 通(통)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을 展開(전개)하였으니, 그것이 만당(卍黨)의 決死運動(결사운동)이다. 卍黨(만당)은 佛敎界(불교계) 民族運動(민족운동)의 指導者(지도자)인 한용운[韓龍雲: 1879年(년) 8月(월) 29日(일) ~ 1944年(년) 6月(월) 29日(일)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詩人(시인), 僧侶(승려),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이다. 本貫(본관)은 淸州(청주). 號(호)는 만해(萬海)이다. 佛敎(불교)를 通(통)한 言論(언론), 敎育(교육) 活動(활동)을 하였다. 從來(종래)의 無能(무능)한 佛敎(불교)를 改革(개혁)하고 佛敎(불교)의 現實參與(현실참여)를 主張(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對案點(대안점)으로 佛敎社會改革論(불교사회개혁론)을 主張(주장)했다. 3·1 萬歲運動(만세운동) 當時(당시) 民族代表(민족대표) 33人(인)의 한사람이며 光復(광복) 1年(년)을 앞둔 1944年(년) 6月(월) 29日(일)에 中風(중풍)과 營養失調(영양실조) 等(등)의 合倂症(합병증)으로 病死(병사)(入寂(입적)하였다. 獨立宣言書(독립선언서)의 "公約(공약) 3장"을 追加(추가)補完(보완)하였다. 또한 獄中(옥중)에서 '朝鮮(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獨立(독립)과 自由(자유)를 主張(주장)하였다.
1910年(년) 日本(일본)이 主張(주장)하는 韓日佛敎同盟(한일불교동맹)을 反對撤廢(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等(등)의 獨立志士(독립지사)들을 만나 獨立運動(독립운동)을 協議(협의)하였다. 1918年(년) 11月(월)부터는 佛敎(불교) 最初(최초)의 雜誌(잡지)인 《唯心(유심)》을 發行(발행)하였고 1919年(년) 3.1 萬歲運動(만세운동) 當時(당시) 獨立宣言(독립선언)을 하여 逮捕(체포)당한 뒤 3年間(년간) 西大門(서대문) 刑務所(형무소)에서 僕役(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年代(년대)에는 帶妻僧(대처승) 運動(운동)을 主導(주도)하여 중에게도 結婚(결혼)할 權利(권리)를 달라고 呼訴(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年(년) 詩集(시집) 《님의 沈默(침묵)》을 出版(출판)하여 抵抗文學(저항문학)에 앞장섰고, 佛敎(불교)를 通(통)한 靑年運動(청년운동), 言論活動(언론활동)에 參與(참여)하였다. 1927年(년) 2月(월)부터는 新幹會(신간회)에 參與(참여)하여 中央執行委員(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新幹會(신간회) 京城支部長(경성지부장)을 지냈다.
1918年(년) 《唯心(유심)》에 詩(시)를 發表(발표)하였고, 1926年(년)〈님의 沈默(침묵)〉等(등)의 詩(시)를 發表(발표)하였다. 님의 沈默(침묵)에서는 旣存(기존)의 詩(시)와, 時調(시조)의 形式(형식)을 깬 散文詩(산문시) 形態(형태)로 詩(시)를 썼다. 小說家(소설가)로도 活動(활동)하여 1930年代(년대)부터는 長篇小說(장편소설)《흑풍》(黑風),《後悔(후회)》,《박명》(薄命), 短篇小說(단편소설)《죽음》等(등)을 비롯한 몇편의 長篇(장편), 短篇(단편) 小說(소설)들을 發表(발표)하였다. 1931年(년) 김법린[金法麟, 1899年(년) 9月(월) 27日(일) (陰曆(음력) 8月(월) 23日(일)~1964年(년) 3月(월) 14日(일)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의 佛敎(불교) 僧侶(승려)이자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 大韓民國(대한민국)의 政務職(정무직) 公務員(공무원)이었다.]等(등)과 靑年僧侶祕密決死體(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組織(조직)하고 黨首(당수)가 되었으나 1937年(년) 佛敎關係(불교관계) 抗日團體(항일단체)를 摘發(적발)하는 過程(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背後(배후)로 逮捕(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著書(저서)로는 詩集(시집) 《님의 沈默(침묵)》을 비롯하여 《朝鮮佛敎有神論(조선불교유신론)》,《佛敎大典(불교대전)》,《十玄談註解(십현담주해)》,《佛敎(불교)와 高麗諸王(고려제왕)》 等(등)이 있다.
日帝(일제)와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에 대한 抵抗精神(저항정신)으로 執賭(집도)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反對(반대) 方向(방향)인 北向(북향)으로 지었고, 食量(식량) 配給(배급)도 拒否(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有名(유명)하다. 그러나 實際(실제)로 尋牛莊(심우장)에 가보면 周邊(주변)의 집들이 大部分(대부분) 尋牛莊(심우장)과 같은 方向(방향)으로 지어져 있고 이것은 그곳의 地形上(지형상) 不可避(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總督府(총독부)를 등지고 싶어서 北向(북향)으로 지었다는 이야기는 城北區(성북구)에서 세워놓은 尋牛莊(심우장)의 푯말에만 보이는데 아마도 後世(후세)의 創作(창작)이 아닐까 斟酌(짐작)된다. 또한, 親日(친일)로 變節(변절)한 崔南善(최남선)에 관하여서는 1937年(년) 自身(자신)에게 崔南善(최남선)을 言及(언급)한 김홍규[金洪奎: 1876年(년)~1959年(년)는 大韓民國(대한민국)의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로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율재(栗齋)이다.]에게는 "아직도 崔南善(최남선)이 살아 있소?"라고 하는가 하면, 崔南善(최남선)이 塔骨公園(탑골공원)에서 人事(인사)를 하자, 처음에는 알은체도 하지 않다가 崔南善(최남선)이 自身(자신)을 못 알아보겠냐면서 계속 이름을 말하자 "내가 아는 六堂(육당)은 이미 죽었소."라면서 차갑게 대했다. 卍海(만해)는 高宗(고종) 16年(년)인 1879年(년) 8月(월) 29日(일)에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溫陽方氏(온양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兒名(아명)은 유천(貞玉)이며 龍雲(용운)은 出家(출가) 했을때 恩師(은사) 스님으로부터 받은 法名(법명)이다. 卍海(만해)의 戶籍上(호적상) 이름이자 本名(본명)은 한정옥이다. 그의 兄弟(형제)로는 兄(형) 한윤경이 있었다.
本貫(본관)은 淸州(청주)이며, 世祖(세조)때의 權臣(권신) 韓明澮(한명회)의 同生(동생)으로 전구서승(典廏署丞)을 지낸 西原君(서원군) 韓明溍(한명진)의 後孫(후손)이었다.
沒落(몰락)한 兩班(양반) 士大夫(사대부) 家門(가문) 出身(출신)으로 아버지 한응준은 洪城郡(홍성군) 官衙(관아)의 下級(하급) 臨示(임시) 官吏(관리)였으며, 집안은 몹시 家難(가난)하였다. 그의 집안은 兄(형) 한윤경이 一時的(일시적)으로 家勢(가세)를 일으켜 土地(토지)를 마련했지만 卍海(만해)가 土地(토지)를 賣却(매각)해 獨立資金(독립자금)으로 썼다고 했다. 幼年時代(유년시대)에 관해서는 本人(본인)의 述懷(술회)도 없고 側近(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6歲(세)부터 성곡리의 書堂谷(서당골) 書堂(서당)에서 漢學(한학)을 배웠고, 9歲(세)에 文理(문리)를 通達(통달)하여 神童(신동)이라 稱頌(칭송)이 자자하였다.
少年(소년) 時節(시절).
14살이 되던 해인 1892年(년) 風俗(풍속)에 依(의)해 地主(지주) 집의 딸 전정숙과 結婚(결혼)했으나 그는 家庭(가정)에 疏忽(소홀)하였다고 한다. 16살 되던 해인 1894年(년)부터는 洪城邑內(홍성읍내) 書堂(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을 두었으나 그는 出家(출가)하였다. 後日(후일) 한보국이 父親(부친)인 그를 보러 왔을때 그는 外面(외면)하였다 한다.
1894年(년)에 家出(가출)하여 東學農民運動(동학농민운동)에 加擔(가담)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洪州(홍주)監營(감영) 官軍(관군)의 中軍(중군)이 되어 農民軍(농민군)을 討伐(토벌)하는데 參與(참여)한다. 1895年(년) 또는 1897年(년)에 故鄕(고향) 洪城(홍성)을 떠나 麟蹄郡(인제군) 百潭寺(백담사)等(등)을 轉傳(전전)하며 數年間(수년간) 佛敎書籍(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放浪生活(방랑생활).
靑年期(청년기)의 卍海(만해)
建陽(건양) 1年(년)인 1896年(년)에 그는 雪岳山(설악산) 五歲庵(오세암)에 들어갔다. 後日(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自身(자신)의 述懷(술회)에 幹略下(간략하)에 言及(언급)하기를 世上(세상)에 대한 關心(관심)과 生活(생활)의 方便(방편)으로 집을 떠나 五歲庵(오세암)에 入山(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出家(출가)하여 僧侶(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出家(출가)의 原因(원인)은 正確(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當時(당시) 故鄕(고향) 洪城郡(홍성군) 洪州(홍주)에서도 東學農民運動(동학농민운동)과 義兵(의병)運動(운동)이 展開(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歷史的(역사적) 激變期(격변기)의 狀況(상황)에 影響(영향)을 받은 것으로 推定(추정)된다. 東學運動(동학운동)이 失敗(실패)한 뒤 한동안 五歲庵(오세암)에 隱身(은신)해 있다가 다시 故鄕(고향) 洪城郡(홍성군)으로 되돌아왔다.
五歲庵(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佛敎(불교)의 基礎知識(기초지식)을 涉獵(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佛敎(불교)에 入門(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關心)을 가지고 大藏經(대장경)을 閱覽(열람)하였다. 1896年(년) 下山(하산)하여 더 큰 世上(세상)을 배우고자 Siberia(시베리아)行(행)을 決心(결심)하지만 Vladivostok(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을 고비를 겨우 謀免(모면)하고 1897年(년)에 歸鄕(귀향)하였으나 居處(거처)가 없던 그는 1901年(년) 妻家(처가)에서 2年間(년간) 隱身(은신)하다가 家出(가출)한 後(후) 나중에 다시 再出家(재출가)를 한다.]의 指導(지도) 아래 金法麟(김법린)과 조은택·박창두 等(등) 僧侶(승려)들이 1930年(년) 5月(월)에 組織(조직)한 强烈(강렬)한 抗日祕密決死(항일비밀결사)였다. 이러한 卍黨(만당)은 日本(일본)의 植民地(식민지) 政策(정책)을 排斥(배척)하였고, 정교분리(政敎分離), 佛敎(불교)의 大衆化(대중화), 佛陀(불타)精神(정신)의 具現(구현)을 主張(주장)하며 慶南(경남) 泗川(사천)의 다솔사(多率寺)를 根據地(근거지)로 祕密(비밀)鬪爭(투쟁)을 展開(전개)하였다. 卍黨(만당)은 國內(국내)뿐 아니라 日本(일본) 東京(도쿄)에까지 支部(지부)를 設置(설치)하였는데 김법린은 1930年(년) 東京(도쿄)支部(지부)의 責任(책임)을 맡으면서 고마자와(駒澤)大學(대학)에서 佛敎(불교)를 硏究(연구)하고 1931年(년) 東京(도쿄)에서 朝鮮靑年同盟(조선청년동맹)을 組織(조직)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펼쳤다. 1933年(년)부터는 多率寺(다솔사)를 비롯하여 海印寺(해인사)·梵魚寺(범어사) 等(등)에서 敎學(교학)을 講義(강의)하는 한편, 獨立精神(독립정신)을 높이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런데 卍黨(만당)의 組織(조직)이 1938年(년) 末(말) 日警(일경)에 發覺(발각)됨으로써 그는 主要(주요) 人物(인물)로 手配領(수배령)을 받고 있는 터여서 1938年(년) 慶尙南道(경상남도) 晉州(진주)에서 檢擧(검거) 投獄(투옥)되었다.
出獄(출옥) 後(후) 얼마 안 있어 1942年(년) 10月(월) 朝鮮語學會(조선어학회) 事件(사건)에 連累(연루)되어 警察(경찰)에 다시 被逮(피체)되었다. 이때 日帝(일제)에 被逮(피체)된 會員(회원)은 그를 비롯하여 32名(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日帝(일제)의 取調過程(취조과정)에서 '불로 지지기', '공중에 달고 치기', '비행기 태우기' 等(등) 이루 形言(형언)할 수 없는 惡刑(악형)의 拷問(고문)을 2年(년) 넘게 當(당)하다가 1945年(년) 1月(월) 16日(일) 咸興(함흥)地方法院(지방법원)에서 懲役(징역) 2年(년)에 執行猶豫(집행유예) 4年(년)을 받았다.
光復(광복)以後(이후).
解放(해방)을 맞은 1945年(년) 겨울, 佛敎中央總務委員(불교중앙총무위원)에 選出(선출)되어 當時(당시) 美軍政長官(미군정장관) John not(존 하지) 將軍(장군)을 만나 日本人(일본인) 僧侶(승려)들이 居住(거주)했던 寺刹(사찰)을 宗團(종단)에서 引受(인수)할 수 있도록 要請(요청)하였다. 金九(김구)가 Москва(모스크바) 3相會談(상회담)에 反撥(반발), 强力(강력)한 反託運動(반탁운동)을 推進(추진)하자 12月(월) 30日(일) 結成(결성)된 信託統治反對(신탁통치반대) 國民總動員委員會(국민총동원위원회) 委員(위원)이 되었다.
그 뒤 東國學院(동국학원)의 理事長(이사장)이 되었고, 1948年(년) 3月(월) 美軍政廳(미군정청) 軍政長官(군정장관) Warden Dean(딘 少將(소장)으로 부터 5·10 總選擧(총선거)를 管理(관리)하기 위한 中央(중앙)選擧委員會(선거위원회) 委員(위원)에 任命(임명)되었다. 1949年(년) 8月(월) 20日(일) 民族陣營講和委員會(민족진영강화위원회) 常務委員(상무위원)에 選出(선출)되었고, 1952年(년) 文敎部長官(문교부장관)에 任命(임명)되었다. 1953年(년) UNESCO(유네스코) 韓國委員會(한국위원회) 委員長(위원장)이 되었고, 第(제)3代(대) 民議院(민의원)으로 活躍(활약)하는 等(등) 政治(정치)에도 參與(참여)하였다. 1959年(년) 原子力院長(원자력원장)을 맡았고, 1963年(년) 東國大學校(동국대학교) 總長(총장)이 되어 人才養成(인재양성)과 敎育(교육)에도 남다른 熱意(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1964年(년) 66歲(세)의 나이로 別世(별세)하였다.
그 外(외)에도 立法議院議員(입법의원의원), 大韓國民監察委員(대한국민감찰위원), 高試委員長(고시위원장), 京城佛敎專門學校(경성불교전문학교) 敎授(교수), 梵魚寺佛敎專門講院(범어사불교전문강원) 院監(원감)을 歷任(역임)하였다.
死後(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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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금 2021-06-04 오후 10:15 ~ 양산생님 추억어린 좋은 노래입니다. 괏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