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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요 4:6-14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6-14 / 또 이 동네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뜨거운 태양볕 아래 오래 걸어오시느라 매우 피곤하셨으므로 그 우물가에 앉아 쉬셨다. 때는 낮 12시경이었다. 7-8) 얼마 안 있어서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왔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간 뒤라 혼자 앉아 계시던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물을 청하셨다. 9) 그 여자는 사마리아 사람과는 대화조차 하지 않는 유대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인 자기에게 물을 청하자 놀라서 말하였다. `당신은 유대 사람이면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제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만일 네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사를 알고 또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생수를 청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여자가 말하였다. `하지만 당신은 두레박도 없는데다 이 우물은 굉장히 깊질 않습니까? 어디서 생수를 길어다가 제게 주신다는 겁니까? 12) 게다가 우리 조상 야곱과 그의 자녀들과 가축들이 즐겨 마시던 이 우물물보다 더 좋은 물을 주실 수 있다니, 당신은 이러한 우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란 말입니까?' 1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곧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그것이 그의 속에서 샘솟는 샘물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할 것이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화에서 물을 길어 오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었습니다.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소외되던 세계에서 물을 긷는 일이 전적으로 부담스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물을 길으면서 다른 여인들을 만나 교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을 좀 달라(6-10)여섯 시는 지금 시간으로 낮 열 두 시입니다. 보통의 경우 햇빛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에 물을 길었습니다. 그리고 물을 길러 오는 여자들은 무리를 지어서 다녔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햇빛 때문에 아무도 나서지 않는 그 시각 무리가 아닌 한 여자가 우물가를 찾았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요. 그때 예수님은 사회적 금기를 깨드리셨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7) 예수님이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도움을 청한 것은 단순히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도움을 요청함으로서 자신을 낮추고, 유대인 남자인 자신에 대한 경계를 허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경계의 마음을 쉽게 풀지 않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9) 사마리아인을 더럽게 여기는 유대인에 대한 반감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10)이라고 응답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에게 줄 수 있는 물과 예수님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물은 다릅니다. 이 여자의 물은 육체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이지만 예수님의 물은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입니다. 그것이 생수, 즉 생명의 물입니다. 예수님이 생수를 준다는 말은 이 여자로 대표되는 인간들이 영혼의 갈증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인간 생명의 깊이가 바로 영혼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11-14) 목마름은 모든 생명체의 공통된 운명입니다. 식물도 목마르고, 동물도 목마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인지라 더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해야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해갈이 되지 않는 목마름이 죽는 순간까지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 목마름을 해갈하는 생수를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영생)은 요한복음서에서 반복되는 개념입니다. 인간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단순히 생명의 무한한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을 의미합니다.
적용: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신 자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셨습니까? 나는 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참조 렘 2:13)
중국 극동 지방에서 자라는 모소 대나무가 있습니다. 이 대나무는 씨앗이 뿌려진 후 4년 동안 단 3cm밖에 자라지 않습니다. 모소 대나무는 4년 동안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다가 5년이 되던 해부터 매일 30cm씩 성장하며, 6주 차가 되면 그 자리는 순식간에 빽빽하고 울창한 대나무 숲을 이루게 됩니다. 모소 대나무는 지난 4년간 땅속에서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 어느 순간 엄청난 성장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뿌리를 내리는 시기가 있습니다. 눈에 띄는 성과의 열매는 없지만, 도약을 위해 내실을 다지는 시기 말입니다.
< 설 교 >
가장 위대한 선택
한 영혼 구원(요 4:5-10) / 임현수 목사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르쳐 ‘포스트 모던’ 시대라고 부릅니다. ‘포스트’라는 말은 ‘모던’에 대한 반발 혹은 반성으로 시작된 말 입니다. 우리가 살기 시작한 바로 전 시대 혹은 우리가 태어나 살기 시작한 시대가 모던 시대인데 우리가 사는 동안 시대는 모던 시대에서 포스트 모던 시대로 변천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모던 시대의 특성을 말할 때 합리적 이성과 도덕적 보편성의 틀을 가지고 진보를 추구하던 시대라고 한다면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이성과 도덕의 틀을 깨는 파괴와 해체를 실험하기 시작한 반항의 시대를 포스트 모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런 시대가 오면서 사람들의 자아는 파괴되고 가정은 해체되고 도덕적 권위와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옛날 성경의 사사 시대가 그런 시대였습 니다.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행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오늘을 사는 소위 포스트 모던 인간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요?
한 문화 학자는 포스트 모던 인생을 가르쳐 “고립되고 /상처 난 /목마른 인간” 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적확하게도 이런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 성경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우물가의 여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우물가의 여인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소위 포스트 모던 인생의 문제와 해답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포스트 모던 인생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1. 관계가 차단된 인생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여인은 6절에 보면 낮 12시 정오에 물길으러 우물가에 나와 있습니다. 사막에서는 저녁에 선선할 때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긷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사막중의 한 부분이죠. 그들은 낮시간에 활동하지 않습니다. 낮시간에는 잡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낮잠Siesta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이 여자는 대낮에 남들이 물을 긷지 않는 시각. 중동의 태양이 작렬하는 정오에 우물가에 나와서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우물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장소는 사마리아라는 장소였습니다.
이 여인은 가장 더운 시각 아무도 우물가에 나오지 않는 시간을 선택한 것 입니 다.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었습니다. 그녀는 고립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바로 우리 시대의 삶의 풍경이 아닌가요?
한 아파트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를 모릅니다. 이웃집에서 토막 살해당한 여인 이 비닐에 싸인 채 냉동고에 방치되어 몇 날을 지나도 알 수 없는 시대입 니다. 이웃이 문을 열지 않는 것은 이해한다 하더라도 스스로도 문을 닫아걸고 이웃을 외면해 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립되어 버렸고 우리는 뼈 속까지 스며온 춥고 떨리는 외로움을 당연한 존재의 모습으로 수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대학교만 들어가면 젊은이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결혼을 해서 배우자가 항상 그의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자조차 친구가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현대인들의 삶의 실존입니다.
고립된 포스트 모던의 아파트에서 고독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이 시대 사람 들의 풍경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술을 퍼 마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 정신으로 대화가 잘 안되니까 알콜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아이들도 외롭고, 노인들도 외롭지만, 한창 뛰어 놀아야 할 청소년들도 왕따가 되어 자살을 시도하고, 청년들도 반 노인처럼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삶의 의욕 을 잃어버리고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제는 나좀 도와달라고 부탁할 의욕조차 상실한 채 스스로 관계를 차단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우물가의 여인이 바로 그런 고립된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상처에 지배당하는 인생입니다.
지난 주간에도 몇 성도의 눈물나는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너무도 상처가 많았습니다. 그런 편지를 읽을 때면 저도 많이 힘들어지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이민교회라는 특성상 우리들만이 이해 할 수 있는 문제들도 있을 것 입니다.
청년에게도 이런 편지를 받고, 갓 결혼한 젊은 부부에게도 이런 편지를 받습니 다. 연세가 꽤 드신 분에게서도 아픈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모두가 상처입니다. 대부분 어른들은 체면상 그런 상담을 쉽게 못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동소이 합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상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생은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상처가 심하거나 상처가 많으면 자기도 자기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치유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문제를 알면서도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 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이웃을 믿지 못하고 이웃에 대하여 공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필요 이상으로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못하는 정의감을 이웃들 에게 강요하는 사람들도 거의 예외 없이 과거의 상처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이웃들이 평범하게 던지는 말도 순수하게 받지 못하고 다시 거기에 의문부호를 던집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는 요청에 줄 수 있다, 없다하면 될 것인데 이 여인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9절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여기 유대인들에게 멸시 당해온 사마리아인의 역사적 상처가 이 여인의 말에 묻어나고 있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놈들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의 살코기를 먹는 것과 꼭 같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생각하여 절대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하고 불결한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단 한가지 이유 때문 입니다. 이방인들과 피가 섞였다는 것 입니다. 이것보다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정통 유대인들은 그들대로 차별하는 이유가 있는 것 입니다.
이 여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마리아인으로서의 내면적 상처가 불쑥 튀어 나온 것입니다. 할수 있으면 예수조차도 피하고 싶었습니다. 나를 제발 괴롭히지만 말고 그냥 버려달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포스트 모던 시대의 상처받은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입술로 표현되는 말이 영어로 “please Leave me alone"(나를 버려두세요)라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스마트 폰과 함께 사시는 여러분, 연속극속에 시간을 파묻고 사시는 여러분, 원룸에서 이웃과의 교제가 단절된채 고독하게 살고 계신 분들, 강아지가 사람보다 더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져 한마리 가지고 만족이 안되어 두마리 세마리 강아지를 더 많이 데리고 살고 싶으신 분들….
그렇다면 당신도 별수 없이 포스트 모던 인생을 살고 계신 것 입니다.
3. 목마름에 허덕이는 인생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과 물 길러온 이 여인과의 대화에서 제일 흥미로운 대화의 역전은 “물 좀 달라”던 예수님이 갑자기 이 여인에게 “네가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내게 오히려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네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목마른 인생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을까요? 목마른 인생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인을 바꾸고, 파트너를 바꾸고, 직업을 바꾸고, 직장을 바꾸고, 종교를 바꾸고, 심지어 교회를 바꾸어 봅니다. 그래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방황입니다. 끝없는 목마름, 타는 목마름으로 허덕이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목말라 합니다. 재물에 목말라 하고, 쾌락에 목말라 하고, 권력에 목말라 하고, 행복에 목말라 하고, 어떤 사람은 지식에 목말라 하고, 그래서 배우고 배우지만 끊임없는 지식의 욕구. 삶의 의미에 굶주려하고, 목말라 하는 인생들이 대부분 세상을 살아가는 주님없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목마르지 않기 위해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몸부림치면서 고통하는 그 고통의 결정. 그 십자가의 고통의 결정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 내가 목마르다. 왜 그분은 목마르다고 그랬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목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목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 이라고 하십니다.
지난 주 신문에 경기도지사 김문수 씨의 인생 여정을 정리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서울 대학교에 다니던 학생 시절 완전히 사회주의 이론에 빠져 공부는 안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며 어떻게 하든지 한번 세상을 뒤집어 엎어야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모든 열정을 데모하는데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젊은 시절만 해도 열정을 불사를 이유가 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공산권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인생의 방향을 180도 전환합니다. 그의 나이 44세 되었을 때 진보에서 보수로, 배반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탈바꿈을 시도 합니다. 진보의 아이콘이 보수 아이콘으로 바뀐 것 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만족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이래도 저래도 만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은 누구에게든지 우리의 실존 그 자체가 경험하는 영혼의 목마름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신데렐라인 비운의 다이애나 비가 경험한 목마름일 지도 모릅니다. 본래 다이애나는 영국의 스펜서 백작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그녀의 나이 6세 때 어머니가 자녀들을 버리고 돈 많은 사업가를 따라 나설 때부터 그녀의 목마름은 시작되었다고 진단합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분노와 상처는 다이애나를 무엇으로도 쉽게 채워지지 않는 목마른 여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촬스 황태자와 결혼 후 카밀라 파카볼스와의 염문 사건이 터지자 그녀는 다시 버림받은 내면의 고독한 공간을 채우고자 대리 만족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머리 손질에만 5천 4백달러를 썼고 몸매 관리와 의상 구입에만 년간 87만 달러(한화 7억 5천만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마음의 공간을 달래지 못해 5번의 자살기도와 거식증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애인을 바꾸었습니다. 영락없는 우리 시대의 사마리아 여인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허무한 종말을 압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다이애나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녀를 비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들도 처지가 비슷해서 다 이해가 가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우물가 여인의 이야기는 그 종말이 비극이 아닌 해피 엔딩이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었습니까? 도대체 이 우물가 여인이 발견한 인생의 해답은 무엇입니까? 해답은 단순합니다.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자, 예수를 만난 순간 이 우물가 여인에게 어떤 변화가 왔는지를 주목하십시오. 우선 사람들을 피해만 다니던 이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고립된 인생이 아니라 홀연히 연결된 인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상처를 넘어서서 자기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인생으로 변했습니다. 더 이상 그녀는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영원한 생수를 마신 것입니다. 한 동안 유행한 세속 유머 가운데 “어느 날 변한 여자”라는 유머가 있었는데 이 유머에 딱 들어맞는 변신이 바로 이 우물가에서 예수 만난 여인의 변신이었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 “어느 날 변한 여자--여우같은 여자에서 여유 있는 여자로/화난 여자에서 환한 여자로/따지는 여자에서 따뜻한 여자로/착각하는 여자에서 자각하는 여자로/ 색기있는 여자에서 색깔있는 여자로/밝히는 여자에서 밝은 여자로/남들에게 애 먹이는 여자에서 남들 때문에 애 태우는 여자로/답답한 여자에서 답을 아는 여자로/빚이 많던 여자에서 빛을 발하는 여자로”
이제 하나의 매우 중요한 질문만이 남게 됩니다. 도대체 예수는 누구이신가? 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이 고립되고 상처 나고 목마른 인생을 이렇게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하여 오늘을 사는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독특한 면모가 있습니다. 우선 그는 이 여인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과 대화 중에 갑자기 대화의 흐름을 깨시고 이 여인을 당황케 하신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여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18절의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인간 이상의 분이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예수가 메시아이고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자매하고 이렇게 데이트를 하고, 무척 좋아했는데 결혼이 잘 성립이 안된 모양이예요. 그래서 그 여인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 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그래도 옛 남자에게 자기는 이제 시집 가게 되었다고 통보를 했어요.
그 소식을 들은 남자는 그래도 한 때 사랑했던 여자. 이제는 과거를 잊어 버리고 잘 살아 가도록 내가 축복하고 싶다. 이런 마음에서 이 여인에게 축복하는 전보 를 띄어습니다. 네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그리고 성경구절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성경구절 하나가 생각 났습니다.
과거를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모든 마음속의 불안이나 두려움을 다 떨치고 새로운 미래를 찾아가길 원하는 마음으로 적게 된 성경구절이 바로 요한 일서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그래서 네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이 구절을 쓴것이 아니라 요한일서를 기독교인들이 간단히 쓸 때 요일4:18. 이렇게 쓰쟎아요. 그런데 우체국에서 우체부가 전보할 때 요일에서 일자를 빠트렸어요. 그래서 이 자매가 결혼 전야에 딱 옛 남자한테 축복하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네 결혼을 축복한다. 요한복음 4장 18절. 그래서 찾아 봤더니, (요 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지나가는 얘기이구요…. 무슨 뜻인줄 아시나요?
사람이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자기의 과거를 점쟁이처럼 맞추면 놀라지요?
지금 사마리아 여자도 너무 놀랬어요. 내 과거를 아는 저 분.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이시군요. 이 말은 당신은 내가 생각하던 도덕적인 스승 보다 또 다른 분이군요 하는 고백 입니다.
당신은 위대한 철학자이시군요. 당신은 역시 슈퍼스타시군요. 역시 4대 성현 중의 한분 이시군요. 아니면 오늘 말씀 처럼 당신은 위대한 선지자, 이슬람교 에서도 예수를 선지자로는 인정을 합니다. 이런 표현은 상당한 변화지만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이런 존경의 칭호를 고백 하는 이 순간까지 아직 이 여인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
바로 이 여인의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이 이 여인을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었습니다. 4:4절을 읽어 보십시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예로부터 이 사마리아에는 북쪽으로 가는 무역의 통로가 있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이 북쪽에서부터 침략을 받게되면, 침략자들의 발 아래에 갈릴리나 사마리아 땅은 쉽게 밟힘을 당했고 또 침략자들이 정복자들이 되어서 그 땅에 어느 정도 머물게 되면 거기서 자연스럽게 국제 결혼이 이루어 지기 때문에 국제 결혼을 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아래에 있는 유다쪽, 예루살렘쪽의 사람들은 굉장히 갈릴리나 사마리아 땅의 사람들을 천시했던 것입니다. 그 상대할 수 없는 국제 결혼한 사람들. 지금 많은 시각이 변하고 있지마는 우리가 조금 옛날 10년, 20년 전만해도 한국에서 국제 결혼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것은 동네의 뉴스였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상대 못할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사람들. 상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 그래서 저 예루살렘에서부터 갈릴리쪽으로 볼 일이 있어서 간다고 할지라도 사마리아라는 중간에 있는 땅을 절대로 통과하지 않고 옆으로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피해다녔 던 유배지와 같던 유랑의 땅. 그런데 성경은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예수님의 의지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남들이 거부했던 그 땅을 꼭 가셔야만 하셨던 절박한 이유가 예수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만남을 위해서 입니다. 한 여인과의 만남을 위해서 사람들이 거부하고 거절했던 그 길을 예수께서는 가셨습니다. 선택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건들은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그런가 하면 또 인생에서 가장 속상하고 가슴 아픈 사건들도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만남을 운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만남은 운명인 것입니다.
부부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일생이 결정됩니다. 그것은 운명입니다. 그러나 이 부부의 만남보다 더 중요한 또 하나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과의 만남입니다. 그것은 일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남은 운명입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께서 우물가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이 기다리고 있던 이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이 한 여인을 찾고 기다리는 이야기.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물가에 앉아서 이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한 여인, 한영혼을 만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물가에 먼저 도착하여 이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만남이 우연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신 것이 우연일까요?
만일 당신을 만나시고자 그분이 오늘 여러분을 이곳에 오게 하시고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 앞에 솔직하시겠습니까?
내가 무척 외로웠다고--그동안 인생의 상처로 많이 아팠다고--목말랐다고--고백하시겠습니까? 내게 이제 주님이신 당신이 필요하다고--주께서 나를 구원해달라고 그렇게 구하시겠습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 말입니다.
성경은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 이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지금 당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님 앞에 오십시오. 지금 오십시오. 지금 결단하십시오. 지금이 당신의 변화의 기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 하나님 앞에 왔어요. 하나님 앞에 일어 났어요. 저는 죄인 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를 변화시켜 주세요. 하나님, 예수님 보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날 위해 못박히셨다구요. 나를 대신해서 고통을 받으셨다구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저의 죄를 씻어 주세요.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제 마음속에 오세요. 저를 구원해 주세요. 저 예수님 믿고 싶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어요. 저를 인도해 주세요.
사랑과 관심
요한복음 4:5-14 / 황의봉 목사
문어가 “고래는 덩치만 큰 게 성질도 급하고 멍청하다”며 흉을 보며 다녔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고래는 너무 화가 나 문어를 물 밖으로 끌고 가서 실컷 두들겨 패버렸습니다. 실컷 얻어맞던 문어 왈 “저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이 자식 넌 더 맞아야 돼.” 한참을 더 얻어맞던 문어 왈. “저 제가 한 말씀만 드리면 안 될까요!” 문어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고래가 “그래 어디 한 마디 해 봐” 하고 기회를 주자 문어가 말했습니다. “저는 낙지인데요.”
‘아사히 이브닝 뉴스’지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 동경의 어른들이 인형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용하기 위하여 말하는 인형을 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장난감 판매업자들은 그 이유가 고독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대부분의 인형이 원래는 세살부터 열살 사이의 소녀층을 대상으로 판매되고 있지만, 학생, 직장인, 심지어 할머니들까지 인형을 말벗 삼아 집에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도 잘 팔리는 인형은 “그런 하찮은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태평양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세요” 라고 말하며, 팔과 다리가 없는 장애자 인형은 “나는 반드시 해내고 말 거야” 라고 녹음기처럼 되뇐다고 합니다.
어째서 이렇게 다 큰 성인들이 말하는 인형을 사게 되었을까요? 사람과 사람의 장벽이 너무나도 두터움으로 해서 느끼는 고독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을 찾을 수 없고 사랑을 만날 수 없으니 인형이라도 찾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사회복지 법인인 ‘사랑의 전화’가 서울 탑골공원에서 60-80대 노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를 보면 61.4%가 “불만이 있어도 가족에게 별로, 또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으며 “자주 이야기한다”고 답한 노인은 6.1%에 불과했습니다. “가족들이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냐”는 질문에도 59.6%가 ‘별로 관심을 보이 지 않는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불만이 없다’는 노인이 58.8%에 달해 노인들 스스로 가족들로부터의 소외를 체념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요즘 사람들은 소외감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어떤 학생은 교회에서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자 예배 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었답니다. 선생님이 “너는 왜 예배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느냐”고 나무라자 “내가 교회에 왔다는 사실을 선생님에게 알려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답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말씀 속에서 버림받은 한 외로운 여인에 대한 주님의 관심과 사랑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외로운 사람들을 대해야 할 본보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Todays English Version은 이렇게 번역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이 사용한 접시를 사용하지 않음이러라.”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도 아니하였고, 사마리아 땅을 밟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뒤 이곳에 이주해 온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들 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람들이 혈통과 종교를 더럽혔다고 해서 상종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 후 성전을 재건할 때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찾아와 이 일에 자신들도 같이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유대인들은 거절했습니다(스 4:1-6). 결국 그들은 그리심 산에 따로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 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는 서로 멀리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절). 이 말은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이 있어 그리로 지나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의 죄 많은 여인을 찾아 전통적 관례를 깨고 사마리아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을 찾아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를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갈과 결혼하여 이스마엘을 낳고 난 후 13년 동안이나 침묵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 부르셨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탐하여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인 다윗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라신 것이 아니라 선지자 나단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낙심하여 로뎀나무 아래 있는 엘리야를 찾으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여 얼굴도 들지 못하고 있는 베드로를 주님은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와 부르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바로 우리를 찾아와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찾아가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찾아가지 않아도 될 사람들은 오히려 잘 찾아갑니다. 그리고 정작 찾아가 사랑과 관심을 보여야 할 사람들은 찾아가지 않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서도 잘 아는 사람들과는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그러나 처음 찾아온 낯선 사람들을 찾아가 반갑게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의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군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이번 한 주간에는 이런 사람을 찾아가 친구가 되어줍시다.
2. 예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제자들을 마을로 내려 보내시고 우물가에 앉아 있는 주님의 모습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섯시라면 지금의 정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낮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이 더운 시간,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물 길러 오고 있는 한 여인을 기다리셨습니다. 아무리 물을 길어도 끝없이 목마른 인생을 조용히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에서 집을 나간 방탕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은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눅 15:20) 사실입니다. 아들이 자기 집 앞에 서 있는 아버지를 먼저 알아보았을 텐데 그게 아니라 길에 오고 있는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항상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은 목마른 여인을 기다리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죄 지은 인생을 사랑하여 한없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 만년설로 덮인 에베레스트 산에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맥 중턱에 있는 어느 작은 산간마을에 한 젊은 처녀로 보이는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등산객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숙소를 정하고 여장을 푼 뒤 그 여인은 말없이 마을 앞 냇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의 생활은 항상 변함이 없었습니다. 밥을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냇가에 앉아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궁금하여 “왜 여기 앉아 있느냐”고 물었지만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누구를 기다리느냐고 물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났습니다. 해가 바뀌면서 처음에 올라올 때 고왔던 그 여인은 점점 나이를 먹어갔고 얼굴에는 주름이 생겼습니다. 그 여인이 할머니가 되었던 어느 날 그녀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눈 녹아 흐르는 냇물에 커다란 한 물체가 둥둥 떠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물체를 끌어 올렸습니다. 그것은 한 남자의 시체였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이 할머니는 젊은 청년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죽은 청년은 그녀의 약혼자였습니다. 수십 년 전 에베레스트 산에 등산을 갔다가 발이 미끄러져 그만 눈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언젠가 그 눈이 녹을 것이고 눈이 녹으면 비록 죽은 시체이지만 약혼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를 가지고 이 마을에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마을에 전해오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집니다. 이제 불과 오십년 밖에 기다리지 못했는데도 가끔 초조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우리의 약혼자입니다. 성경은 교회와 성도들을 신부로,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멀리 하나님께 가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주님이 어느 날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싸늘하게 죽은 시체로 눈 녹은 강물에 둥둥 떠내려 오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천군 천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흰옷 입은 천사는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2-13).
3. 예수님은 요구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여인에게 그녀가 줄 수 있는 유일한 것, “물을 좀 달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가루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는 사르밧의 한 과부에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 떡을 가져오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심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헌금이 필요하고, 우리의 시간이 필요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도움이 없으면 대단히 불편하신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르밧 여인이나 수가성 여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작은 것을 드리면 오히려 거기에 더 많은 것을 얹어주시는 그런 분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요구하심은 주님의 관심을 보여주심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을 확인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요구하심은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녀는 인생의 갈증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 속에서 영생하는 샘물을 줄 수 있다” 하셨을 때, 그녀는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물 길러 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근본적인 문제는 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셨을 때, 이미 다섯 번을 이혼하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하고 대답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해결하지 못하는 인생의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바꾼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목마름이 그녀 자신에게 있음을 아시고 바른 신앙을 통해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을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인생의 갈급함은 물을 마심으로서가 아니라 바른 신앙에서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우리가 어디서 예배해야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녀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신앙 문제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인생의 제반 문제들은 하나씩 하나씩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배움이 아닙니다. 만남입니다. 유교의 문화권에 살아온 우리는 신앙을 배움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도 메시아에 대해 많이 배워 알고 있었으나 그 신앙적 지식이 갈증을 풀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자 자연스럽게 모든 문제가 풀려지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바른 신앙을 회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외로워하지 맙시다.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셨던 주님은 지금도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사랑과 관심을 보여 주십니다. 이 사랑을 받은 우리는 또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여인처럼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고 소개해 드려야 합니다.
특별한 만남
요한복음 4:5-14 / 조상호 목사
1889년 4월6일 같은 날에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그 부부는 사촌남매관계였기 때문에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잘못 만난 부부였습니다. 아기의 아버지는 세무직원으로 성미가 무척 급했고,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기보다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그 아이를 알콜 중독자인 숙모에게 맡기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숙모 손에서 자라난 그 아이는 16세가 되었을 때, 학교를 중퇴하고 숙모 집을 떠나 가출해버렸습니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자,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독일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 후 정치에 발을 들여놓고 극렬행동대원이 되었다가, 반란 음모가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더 이상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서약을 하고 석방되었지만, 여전히 정치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나라 정세 속에서 1933년 수상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의해서 독일과 전 세계는 전쟁에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죄 없는 유태인 600만 명을 비롯한 수천만 명이 죽어갔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고아, 불구자, 과부를 만들어낸 인류의 가장 큰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입니다. 또 다른 아이는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캔사스로 이사를 갔습니다. 도시에서 농촌으로의 이사였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아이를 신앙으로 교육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가훈 하에 아버지는 그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온 가족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소년은 청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와 손을 잡고 매일 저녁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군대에 흥미를 느껴 육사에 입학한 후 졸업을 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사령관에 이어 미국의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그는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입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태어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미국의 아이젠하워 두 사람은 전장에서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연합군 사령관이 되어 11개월 동안 치열한 싸움을 했습니다. 마침내 히틀러는 1945년 4월30일 방공 지하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전 세계는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1969년 80세 나이로 평화롭게 눈을 감았을 때, 전 세계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세 번째 소개할 인물은 ‘빌 게이츠(William H. Gates)’입니다.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세워 세계 최고의 거부가 된 배경에는 한 친구 때문입니다. 빌게이츠는 이런 말을 종종 합니다. “내게는 스티브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술적인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스티브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 초기에 영업의 1인자로 불린 ‘스티브 발머’를 가리킵니다.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개발에는 천재성을 발휘했지만, 영업에는 문외한이었습니다. 빌 게이츠는 영업에 한계를 느꼈을 때,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스티브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함께 일을 시작한 끝에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세계 최고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업계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된 것은 빌 게이츠가 스티브 발머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소개할 인물은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정치했던 61년 동안 여러 가지 업적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고, 9년에 걸쳐 영국수상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고, 나중에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화려한 성취만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는 말더듬이 학습장애인으로 학교에서 꼴지를 했고, 사관학교 시험에도 두 번이나 낙방을 했고, 처음 정치에 입문했을 때에는 선거에 낙선하기도 했습니다. 21년 동안 노동당에서 의정활동을 했지만, 성취보다는 실패와 패배가 더 많아 당적을 보수당으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당적을 옮긴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첫 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끝난 후에 있었던 선거에서도 보수당이 참패함으로 수상직을 잃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실패와 패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를 아십니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아내 클레멘타인 때문이었습니다. 아내 클레멘타인이 옆에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위스턴 처칠이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네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히틀러와 아이젠하워와 빌 게이츠와 윈스턴 처칠 네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만남의 중요성‘입니다. 히틀러는 부모를 잘못 만나 세계를 어지럽히는 Trouble Maker가 된 반면, 아이젠하워는 부모를 잘 만나 Peace Maker가 되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도 복입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자녀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친구를 잘 만나는 것도 복입니다. 빌 게이츠가 영업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던 스티브 발머를 만났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세워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한 배우자를 잘 만나는 것도 복입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아내 클레멘타인을 만났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여 역사에 길이 남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좋은 사람을 만나 성공한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공부 못하던 학생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이 좋은 의사를 만나 건강을 회복한 일도 많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잘 만나야 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만남의 복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복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만남의 복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복이 여러분들 가운데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아주 ‘특별한 만남(Special Meeting)’을 경험한 한 여인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4장 14절 한 절만 읽었는데, 1절부터 보면 단 한 번의 만남을 통해 인생이 완전히 바뀐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전에 보신 중고등부 학생들이 준비한 '드라마'는 오늘 본문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어진 드라마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으로부터 65Km 떨어진 수가라는 동네에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결혼하여 낳은 후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에 의해 개처럼 취급받고 천대받았습니다. 사마리아 출신인 그녀는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정식 남편이 아닙니다. 그녀가 자기 뜻에 의해 남자를 다섯 번이나 바꾸었는지, 아니면 남자에 의해 버림을 받아서 다섯 번씩이나 남자가 바뀌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면서 그녀의 마음은 병들대로 병들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아마 추측컨대 그녀는 부모와 형제 등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았을 것입니다. 그녀의 부모는 자기 딸이 그렇게 많은 남자를 바꾸는 것을 보고 창피해서 동네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형제들도 어디 가서 ‘내 누이’라고 ‘내 언니’라고 말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족 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조차 손가락질 당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여인입니다.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버림받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을 자세히 보면 그녀가 대낮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왔습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매우 드문 행동입니다. 중동 지방에서는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이는 대낮을 피하여, 대부분의 여인들이 새벽이나 저녁에 물을 길러 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불볕더위를 무릅쓰고 대낮에 아무도 없는 우물가에 혼자서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 이유는 내리 쬐이는 뜨거운 햇빛보다 사람의 시선이 더 싫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여인은 아픔과 사연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마음에 갈증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마음의 갈증을 해소하려고 여러 남자를 만나고 계속 몸부림쳤지만, 그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했지만, 여인에게는 육체적 갈증, 정신적 갈증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물론 처음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9절에서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을 ‘당신‘으로 불렀습니다. 또 12절에서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을 ’당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처음에 이 여인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써 지나가는 나그네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는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인은 그 동안 아무리 해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으로부터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듣고 나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15절과 19절에서 “여자가 이르되 주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비로소 이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기 시작했습니다. 또 29절에서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비로소 이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마음의 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인생이 완전히 변해 버렸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난 후 네 가지를 체험했습니다. 첫째로 그녀가 체험한 것은 ‘Confession‘입니다. 그녀는 그 동안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29,39절). 둘째로 그녀가 체험한 것은 ’Conversion‘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거듭남을 체험했습니다(26절). 셋째로 그녀가 체험한 것은 ’Change‘입니다. 그녀는 옛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롭게 변화를 받았습니다(28절). 마지막 넷째로 그녀가 체험한 것은 ’Come'입니다. 마을에 가서 자기처럼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29~30절). 여러분, 이 여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만남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구와의 만남이 중요합니까? 예수님과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부모는 자녀를 잘 만나야 합니다. 학생은 선생님을 잘 만나야 하고, 선생님은 학생을 잘 만나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잘 만나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잘 만나야 합니다. 친구를 잘 만나야 하고 직장동료를 잘 만나야 하고, 고용주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인 만남보다 더 중요한 만남은 영적인 만남인 줄로 믿습니다. 부모와의 만남도 중요하고 배우자와의 만남도 중요하고 친구와의 만남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인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 만족과 참 행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라의 한 재상이 팔레스틴을 여행하다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귀국 후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그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이 소식을 듣고는 그 재상을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보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라면 말 한 마디만으로도 모든 인생을 구원할 수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친히 사람의 몸을 입었는가?" 그 재상은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자, 의기양양한 왕은 기꺼이 허락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 재상은 기술이 뛰어난 목수를 불러다가, 왕의 외아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목각 인형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형에 아름다운 옷을 입혔습니다. 이튿날 왕자의 유모에게 그 인형을 안고 부둣가에 세운 다리 위에 서있으라고 했습니다. 재상과 함께 배에 앉아 있던 왕이 유모를 보고는 왕자가 유모 품에 안긴 줄 알고 팔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유모는 실수인 척하면서 일부러 인형을 물속에 떨어뜨렸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물로 뛰어내리려고 했습니다. 재상은 만류했습니다. "폐하! 친히 내려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하지만 왕은 "안 된다. 안 돼. 내가 구하러 가겠다. 다른 사람은 마음이 안 놓여! 난 저 아이의 아버지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제 서야 재상은 물속에 떨어뜨린 왕자는 사실은 왕자가 아니라, 목각 인형이라고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왕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류를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어찌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를 받아들여야만 죽음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못하시는 것이 없으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까 영상을 통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2,000년 전 친히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누구든지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2008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 100인(The 2008 Forbes Celebrity 100 Power List)'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1위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가 아닙니다.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도 아니고, 축구스타 데이빗 배컴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아니고 바락 오바마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후보도 아닙니다. 2008년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1위를 차지한 사람은 다름 아닌 54세의 '오프라 윈프리'였습니다. 그녀는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가 극심한 미시시피 주에서 가난한 흑인출신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6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랐고, 13살 때까지 밀워키에서 파출부로 일하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19살 때까지는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아버지 집에서 자랐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하고, 가까운 친척에게 성폭행도 당했습니다. 난잡한 성생활로 인해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낳아 미혼모가 되고, 소녀 감호소에도 출입하는 등, 어떻게 보면 저주받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만난 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가지 가난한 환경과 여러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고 그녀의 모든 수치심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사람들이 자기를 흑인 시골출신 뚱뚱이라고 놀리고, 마약에 손을 대었고 강간당했고 사생아를 낳은 여자라고 과거를 들추며 괴롭힐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So What?(그래서? 그게 어때서?)“ 이처럼 그녀는 당당합니다. 이제 그녀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현재 그녀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녀는 지난 1년 동안 2억 7500만 달러(뉴질랜드 달러로 환산하면 약 4억 달러)의 수입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간 벌어들인 돈이 14억 달러(뉴질랜드 달러로 환산하면 19억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선한데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여성 리더쉽 아카데미 재원 마련을 위해 이미 4천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민주당 대선후보인 바락 오바마에게 거액을 기부하였습니다. ‘더 기빙 백 펀드’가 발표한 2006년 자선금 기부 명단에 따르면 윈프리는 2006년 한 해 동안 5,830만 달러의 자선금을 기부하여 1위에 오르는 등, 좋은 곳에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던 오프라 윈프리는 지금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녀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난 후, 인간적으로 보면 망가진 인생이지만 그녀는 자기의 인생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따라 그녀가 소개하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그녀는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저의 인생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변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불의의 사고를 당했습니다. 저의 생일날 떡방앗간에서 제가 기계에 손을 집어넣는 바람에, 왼손 세번째와 네번째 손가락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후로 저의 인생은 망가진 인생이었습니다. 공부를 포기하여 나중에 고등학교를 세번씩이나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거액의 빽을 써서 시골에 있는 모 종합고등학교에 입학시켜주셔서 간신히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건강도 나빠서 극심한 빈혈증세로 인해 자주 쓰러지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어떤 소망도 기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 땅을 떠나버릴까'라는 생각도 자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3월 세째주 목요일 저녁, 한 선교단체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저의 인생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7년 동안 사라져 있던 꿈이 다시 생겼습니다. 자신감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는 믿음이 생기니까 공부를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학에서 식품가공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는 유전공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을 마친 후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식품회사 연구원으로 취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호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지금은 목사가 되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저는 어제 저녁 제 서고에서 지나간 저의 과거를 돌아보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요. "조상호가 예수님을 증거하다니, 고등학교 3번씩이나 떨어진 조상호가 목사가 되다니, 건강이 나빠 남들에게 폐를 끼치던 조상호가 목사가 되다니, 꿈도 희망도 없이 날마다 밥만 죽이던 조상호가 목사가 되다니 "라는 생각이 들자,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하염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을 만난 후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여인처럼,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처럼 변했습니다. 예수님 만난 후에 제 인생이 '저주 받은 인생'에서 '축복 받은 인생'으로 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무거운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시고,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실 수 있으시고, 우리의 갈증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자리에 아직까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예수가 아니라, 인격적인 예수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나의 상처를 치유해주시는 사랑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여인처럼, 오프라 윈프리처럼 인생에 역전을 이루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모두 눈을 감으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칼라일이 말한 것처럼, “선택은 순간이지만, 결과는 영원합니다.” 지금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여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의 마음 문 밖에 서서 노크하고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마음 문을 열고 “내가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삶을 인도해주시고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고 싶습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손을 드시기 바랍니다. 제가 기도해드리겠습니다. 이 시간이 여러분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죽고 사는 결단의 순간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믿기로 손을 드신 분들이나 이미 믿고 있는 분들은 저의 기도를 따라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는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지난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지금부터 천국 가는 그 날까지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인생을 바꾼 사람들
요 4:5-14 / 김영헌 목사
상담학으로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The University of South Carolina)에서 개최하는 정신과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습니다. 수도 워싱톤에서 콜롬비아로 향하는 비행기였습니다. 비행 중에 조종사는 비행기의 착륙기어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착륙용 비행기 바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노스 캐롤라이나의 그린스보로(Greensboro)공항에 연락하여 몸체 비상착륙을 시도했습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수십 대의 소방차가 활주로를 메웠습니다. 기장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화재나 충돌에 대비해 승객들에게 단단히 준비토록 했습니다. 노련한 관제탑의 안내를 따라 몸체 착륙을 시도하여 활주로로부터 꽤 떨어진 곳으로 미끄러져 나갔지만 착륙은 성공하였습니다. 그날 밤 늦게 인터뷰를 하던 심리학자는 자신이 무신론자였음에도 비행기가 흔들리고 아래위로 곤두박질 할 때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번 기회를 통해 인생길이 바꾸어지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가끔 하나님을 부인하고 신앙을 거부하던 사람들이 어떤 위기를 겪고 나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그런 사람들의 얘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우물가의 여인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우물가의 여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이 우물도 사마리아에 있는 야곱의 우물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 의해 심한 차별대우를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남북왕국시대 때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의 후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남왕국 유다왕국의 후손들입니다. 이때부터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 간에 앙금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북왕국 이스라엘이 유다왕국보다 136년 전에 앗수루에 먼저 망했습니다. 그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잡혼을 했습니다. 유다왕국이 바벨론이게 멸망당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로로 붙들려 갔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오히려 이방인들과 혼인하며 그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이방인들이 섬기는 神도 쉽게 받아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모두가 불결하고 더러워 보였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성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거짓 神인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동족은 커녕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과는 상면조차 안 했습니다. 유대지방(예루살렘 지역)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여행할 때는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기 위해 우회하여 멀리 돌아서 가곤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만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하고 참된 곳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예배해오던 그리심산이 참 성전이라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기원전 128년에는 유대인들이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영적 불결의 전염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겸상을 하여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차도 함께 마시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과 접촉하면 유대인들은 몸과 영혼이 더럽혀지고 오염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관계보다 당시의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과의 관계가 더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에, “내가 여자가 아닌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방인이 아닌 것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사마리아인이 아닌 것도 감사드립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행을 하면서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게 된 것입니다. 피곤하고 배가 고픈 제자들이 읍내로 먹을 것을 사러 간 사이 예수님은 조금 떨어져 있는 우물가로 갔습니다. 거기서 한낮에 물을 길러온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물 좀 줄 수 있겠느냐?”는 예수님의 요청에 사마리아 여인은 놀란 듯이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며 반문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또 이해할 수 없는 동문서답식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네가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나에게 오히려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요,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생수(living water)를 주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당신은 물을 길을 두레박도 없는데 어떻게 이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야곱의 우물의 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당신(예수님)이 주는 물은 생수이기 때문에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랜 여인은 그 물을 내게 달라고 요청합니다. 물을 길러오는 것이 귀찮으니 그런 물이 있으면 달라는 것입니다. 당연한 요청입니다. 이 여인은 거의 창녀처럼 사는 여인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러오는 것이 동네 여인들의 관습인데 이 여인은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서 아무도 없는 뜨거운 정오에 물을 길러 오곤 했습니다. 아마 남의 눈을 피해 물을 길러오는 것이 몹시도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만 마시면 다시는 안 마셔도 되는 생수가 있다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런 생수를 달라는 여인에게 물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갑자기 남편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머뭇거리며 남편이 없다고 말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7-18)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저가 누구이기에 나의 과거를 안단 말인가?” 그때 그녀는 예수님이 곧 메시야임을 알았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다섯 명의 남편으로도 만족하지 못했고 지금 있는 남편을 통해서도 그녀는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남편과도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인생의 위기를 당하고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살고 있으면서도 남편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그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분이 메시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동네로 들어가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쳤습니다. 그 이후 완전히 새사람으로 바뀌어 일생동안 예수님의 시중을 들며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의 요지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소식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는 편견이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신 예수님의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사마리아인들을 기피할 때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도 불결한 사람들이었고 신앙적으로도 불결한 사람들이라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낮에 야곱의 우물가로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은 더 불결하고 더러운 인생을 사는 여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진리의 길,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예수님은 어디든지 찾아가셨습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불결하다고 여기는 사마리아 여인이라도 예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그녀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그런 마음 때문에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어느 날 장의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AIDS를 앓던 남자가 죽었는데 장례를 치러 줄 목사님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장의사집의 간절한 요청을 받고 이 목사님이 찾아가서 장례예배를 주관했습니다. 조문객은 아무도 없고 동성연애자들 몇 명만이 관을 지켰습니다. 하관예배를 보고 돌아서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서 부탁을 합니다. 시편 23편을 낭송해 줄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쾌히 승낙을 하고 다시 가서 시편23편을 큰 소리로, 그리고 천천히 봉독했습니다. 그때 다시 한 남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요한복음 3:8의 말씀을 다시 봉독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자가 아무도 없음(롬8장)을 선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은 눈을 감고 한참동안 생각을 하다가 롬 8:33-36의 말씀을 봉독해 주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3-36)
돌아오는 목사님의 가슴 속에는 번민으로 가득 찼습니다. 비록 나쁜 짓을 하다가 AIDS에 걸려 죽어가는 죄인이지만 누가 그들을 정죄할 수 있으며 누가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있을까? 며칠을 생각해도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저들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지혜를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AIDS처럼 추하고 불결한 병을 앓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깨달으면 아무도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인생이 바뀌어 질 줄 믿습니다.
일본의 야쿠자 하나가 변화된 인생을 사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잔인한 깡패조직에서 난폭한 만행을 저지르며 살던 야쿠자가 한국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이 여인이 야쿠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호소에 야쿠자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는 회개하고 돌아서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어 풍성한 삶을 살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혼자 갖기에는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는 동료들을 찾아가서 받은 복을 나누며 예수님을 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인생을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결코 편견을 갖지 않습니다.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복음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양반이나 천출이나,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누구든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 주께 나오라 어서 와서 주의 말씀 들으라
하늘 아버지가 오라하시니 어느 누구나 오라
(2절) 오는 사람들은 지체 말고서 문 열었을 때에 들어오시오
우리 행할 길은 구주 예수니 어느 누구나 오라(257장-듣는 사람마다 복음전하여)
둘째로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에게 인생의 참 기쁨이 있습니다. 이 진리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보여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육체의 향락에서 행복과 기쁨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술에 빠지기도 하고, 마약을 복용하기도 하고, 정욕을 불태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 기쁨이 없습니다. 잠시 향락의 즐거움을 가져올 뿐, 오히려 엄청난 고통과 아픔과 실망만을 안겨주고 맙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누구입니까?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면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때마다 실패했습니다. 지금 여섯 번째 남편과 함께 살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참 기쁨을 얻는다는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쁨을 억누룰 수 없어 물동이를 우물에 내동댕이친 채 동네로 달려가 자신의 기쁨을 전합니다. 그녀의 표정만 보고도 동네 사람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 4:39-42)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인생의 기쁨이 어디서 얻게 되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녀는 헛된 것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인생의 기쁨이 있음을 이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 와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양식 내게 채워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마지막으로 인생은 예수님을 만날 때 바뀌어 집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인생을 바른 길로 바꾸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처음 만드신 창조주만이 우리를 바꿀 수 있는데 예수님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배는 곧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콜롬비아 감옥에서 선교하는 일본인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영어를 유창하게 할 줄 모르니 감동적인 설교를 수형자들에게 하지 못했습니다. 성경공부도 잘 못 시켰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며 신앙서적을 구해다 형무소 모퉁이에 도서실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성경책들도 비치했습니다. 수형자들에게 굽신굽신 거리며 도서를 정리하고 대출하는 일을 돕도록 요청했습니다. 몇 사람의 봉사자들이 자원해서 일본 목사님을 도왔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러 갈 때도 함께 갔습니다. 그 중에서 갱 단원 출신 마약사범이 하나 있었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도서실에 와서 책을 정리하고 빌려주면서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신앙간증도 읽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일본 목사와 앉아서 에배를 드릴 때 그의 가슴이 열렸습니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가슴에 뜨거운 성령의 바람이 일었습니다. 그 자리에 고꾸라진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그를 거듭나게 했습니다. 무기징역을 사는 죄수이지만 그로 인해 형무소 분위기가 바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좋은 날 내 천한 몸 새사람이 되었으니
이 몸과 맘 다 바쳐서 영광의 주 늘 섬기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찬209장 2절)
몇 년 전 플로리다(Florida)에 갔을 때 매일 밤 성령집회가 열렸습니다. 대단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밤 통성기도를 한 후 중년 백인 하나가 강단으로 뛰어 올라오더니 간증을 합니다. 어려서부터 컬러 피플(유색인종)들을 혐오하고 차별했답니다.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기가 싫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귀가 안 들렸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도 이유 없이 귀가 안 들렸습니다. 청력을 잃은 것입니다. 수년을 고생하고 있었는데 그날 밤 흑인 목사님이 안수할 때 귀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멸시하던 흑인을 통해 귀가 열린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회개한다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아직도 불결한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무책임한 삶을 사십니까? 아직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십니까? 이 시간에 우물가의 여인처럼 마음의 문이 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바뀌어 질 것입니다. 아직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십니까? 더럽고 불결한 사람들이 싫습니까? 성령님이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음이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에 의해서 그들의 인생이 바뀌어 질 것입니다.
상처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요 4:5-14 / 최응희 목사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신일의 대부분은 치유하시는 일이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치유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라 할 것입니다. 죄인을 고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잘 못 인생을 사는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마태복음 9:35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신 일을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 말씀에서 눈여겨 볼 말씀은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약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삶에서 병보다 더 무서운 것, 그것은 바로 이 약한 것입니다. 마음의 병입니다. 상처입니다. 열등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이런 상처를 가지고 살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말씀이 나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유대로 내려오셨다가 다시 갈릴리로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고 하면 제일 가까운 길은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잘 상종치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이하로 여기면서 멸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의외의 일일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사마리아 동네 ‘수가마을’에 들어 가셨습니다. 때가 정오쯤 되었습니다(4:6). 시장하여 제자들은 음식을 사러 나갔고, 예수님만 홀로 계셨습니다. 그곳은 ‘야곱의 우물’이라 이름 붙여진 우물가이었습니다. 더운 한낮에는 아무도 물 길러 나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나온 것입니다.
이 여인은 왜 아무도 나오지 않는 한낮에 혼자 물을 길러 우물로 나왔을까요? 이 모습 속에서 상처받은 삶의 모습을 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무언가 자신 속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 때문에 삶의 기쁨을 잃고, 기쁨을 잃어버린 삶이 또 다른 상처를 만듭니다. 이 여인은 이런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인간적인 노력하며 여러번 변신을 시도하였습니다. 이곳에서도 살아보고, 저곳에서도 살아보고, 이 사람과도 살아보고, 저 사람과도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상처로만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게 되었습니다. 그 영혼은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기 싫고, 만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물에도 아무도 없는 시간에 혼자 나온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상처 속에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대부분의 상처는 ‘거부’의 경험에서 시작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여 B학점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이 기뻐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집으로 와서 성적표를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부모님은 ‘네가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A학점도 받을 수 있지 않았겠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열심히 노력하여 A학점을 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부모님께 A학점 성적표를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부모님은 ‘얘야 네가 조금만 더 부지런히 공부하면 A+도 받을 수 있지 않겠니?’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해서 이 아이가 A+를 받았습니다. 더 높은 점수가 없는 점수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님께 A+를 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부모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학교는 참으로 이상한 학교로구나. 어떻게 너같은 아이가 A+를 받을 수 있니?’ 이 아이는 맥이 빠져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깊은 상처 속에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아이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거부의 한 예에 불과합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어떤 이유로 상처를 받았던지 그는 자신은 아주 가치없는 존재라고 여기면서 스스로 자학적인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결국은 이웃과 단절하고, 원망과 미움이 가득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가족과도, 이웃과도 부딪치고 상처받고 상처주며 살았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미워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이 그 상처를 치유받고, 그의 삶을 얽어매던 것에서 자유함을 얻고, 삶의 자신감과 기쁨을 회복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입니다.
한 낮에 물을 길러 나온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물 한 잔을 요청하셨습니다. 그 여인이 대답합니다.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합니까?”
예수님께서 이 여인,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계속 말을 거십니다. 정말 목이 마르셔서가 아니라 이 불쌍한 영혼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안다면 오히려 내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이 여인은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그런 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물 한번 마시고 다시는 물을 길러 나오지 않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런 물이 있다면 귀찮게 이 우물에 나오지 않도록 나에게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때 주님은 갑자기 영적인 문제로 대화를 바꾸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
그 여인의 상처를 건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상처를 건드리신 것은 아프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봄으로서 회복시키고자 하는 뜻입니다. 때로는 아픔과 상처를 감추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 치유될 수 있습니다. 감추고 덮어버린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심령 깊은 곳에 가라앉습니다. 그리고는 시시로 다시 겉으로 떠올라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탄의 도구 노릇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 여인의 아픈 상처를 겉으로 드러내게 하여 치유받게하신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름답게 작별하기’(윤남옥)라는 책을 읽어보면 상처의 파괴력에 대해서 8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과거지향적인 삶을 살고 미래를 파괴한다.
2. 하나님과 단절하고 은혜의 강가로 가는 것을 막는다.
3. 상처라는 돌을 던지는 가해자가 된다.
4. 자녀들의 삶으로 전수된다.
5.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6. 이웃과 단절하고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7. 행복과 자유가 사라진다.
8. 상처와 미움에 나를 결박한다.
상처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남을 고통가운데 몰아넣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왕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초대 왕이 되었지만, 평생 다윗에 대한 열등감으로 보냈습니다. 그가 평생 한 일이라고는 다윗을 없애려고 쫓아다닌 일 밖에 없습니다. 왕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백성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칭송하는 말에 상처를 받고 그 후로부터 그 상처에 묶여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 되었습니다. 상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이 여인의 상처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치유되고,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목마름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채워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돈을 준 것도, 지식을 준 것도, 명예를 준 것도, 세상의 어떤 것도 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말씀을 주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 여인에게 생명의 샘물이 되어 그토록 마르고 타던 영혼을 시원하게 적셔주고, 그토록 아프던 상처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삶의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꺼려서 한낮에 물 길러 나오던 여인이 동네 한 가운데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나는 참 인생의 길을 찾았다! 나는 영원한 샘물을 얻었다! 너희들도 와 보라! 그 분을 만나보라!’
어디서 이러한 자유함이 생겨난 것입니까? 어디서 이러한 용기와 힘이 생겨난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의 샘물이신 예수님을 진실로 그 심령에 영접하고, 그 말씀으로 자신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 생겨난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은 삶을 변화시킵니다. 삶을 자유케 합니다. 삶에 힘과 용기를 부어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가장 비천한 모습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그렇게 되셨습니다. 그 분은 상처 입은 치유자이십니다. 그런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여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힘이 되시고, 용기가 되시고, 능력이 되십니다. 세상에서 나약해지고, 낙심될 때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그 상처가 나의 삶을 괴롭힐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시리.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고 늘 지켜 주시리.
현재는 분명 과거보다 먹을 것, 마실 것이 더 풍성해진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자체가 풍성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육체적으로는 한없이 편리해 졌으나 인간의 삶은 공허하고 사람들의 가슴은 텅비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사람 속에 부대끼며 깊은 상처를 경험합니다. 야곱의 우물이 아무리 유명해도 그것으로는 목마름을 해갈시킬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우리 영혼에 박혀진 상처를 치유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께서 주시는 생수-그것만이 우리를 생의 목마름에서 해갈시키고, 깊은 상처의 늪에서 헤어나게 합니다.
누구나 상처는 있습니다. 어떻게 상처를 대처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상처를 감추고 외면하면 그 상처가 없어지거나 덮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 삶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열등감에 빠뜨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기도 속에서, 말씀 속에서, 찬송 속에서, 예배 속에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배 속에서 마음의 상처들을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배 후에는 치유받은자의 기쁨을 가지고 밝게 웃는 낯으로 바뀌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치유받은 사람은 오히려 치유자가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치유함을 얻고 상처받고 사는 다른 이들을 치유하며, 여러분 스스로는 기쁘고 힘있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
요 4:5-18 / 연제원 목사
나는 할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 여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4장 전체를 자세히 읽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이 여인은 행복한 여인이었을까요? 아니면 불행한 여인이었을까요?
성경에서 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유대인들이 생각하는것과는 차원적으로 다릅니다. 유대인들에게서 ‘물’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 물속에 들어가서 침례를 받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죄인이 거듭나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물로 침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물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물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거나 이슬이 내리거나 강물은 흐른다든지 샘이 솟아난다든지 이런것들은 내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하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의 개념과 반대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우물’ ‘웅덩이’입니다. 같은 물이지만 ‘우물’‘웅덩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높은 산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큰 웅덩이는 물을 저장하는 장소입니다. 그들은 웅덩이를 크게 파서 하늘에서 내리를 비를 받아놓고 물을 먹습니다. 그런데 웅덩이를 파고 석회석을 바르고 수십메타 땅을 파고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웅덩이 우물 그러면 ‘고생’을 연상합니다. 지긋지긋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물’ ‘웅덩이’하면 고통을 연상합니다. 즉 성경에서 우물과 웅덩이 뒤에는 눈물나는 한숨과 절망과 좌절 파란만장한 인생이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었던 본문에도 우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한 여인이 우물곁으로 다가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여인의 삶이 고통의 삶이요, 눈물의 삶이요 구차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이 여인의 삶은 진절머리 나는 삶이라는 것을 우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성경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이 여인의 삶을 본문 18절을 보면 ‘이 여인이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도 한 남자와 살고 있지만 진정한 남편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여인은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 아니 여섯...
‘참 기구한 인생이다’ ‘상당히 부도덕한 여인이다’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한 여인이다’라고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사실 이 여인의 삶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도덕한 여인으로 취부하지만 유대인들의 삶을 돌아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대가족 중심의 생활을 합니다. 그들은 씨족 공동체를 이루며 삽니다. 최소한 유대인들은 3-4대가 모여삽니다. 그러헤 모여살면 인원이 최소 200여명 정도 됩니다. 많게는 천명도 될 수 있습니다. 최소한 200여명이 모여 삽니다. 한 마을을 이룹니다.
또 유대인들은 명예를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 민족입니다. 가족들 중에 명예를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도려내 버립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 모슬렘 문화는 명예를 대단히 중요시 여깁니다. 만약 자기 누이동생이 다른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하면 우리 같으면 동생을 보호해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생이 명예를 잃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동생을 죽이기도 한답니다. 이런 것을 ‘명예살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동생을 죽여서 감옥에 가면 그는 감옥에 가도 영웅대접을 받습니다.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속에서 부도덕한 여인이 살 수 있겠습니까? 살 수 없습니다. 이런 문화속에서 창기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대로 남편을 자기가 갈 아 치우고 만족하지 못하면 또 갈아치우고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 성경은 이 여인이 결혼을 다섯 번이나 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무엇을 말하고 있는것일까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신25:5절을 보면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결혼해서 살다가 남편이 죽으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수 없고 그 남편의 동생에게 시집가야하고 거기서 아들은 낳으면 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도록 하는것입니다. 이것을 [계대 유산법]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팔레스타인 뿐만아니라 오래전 동양문화에도 있었던 제도라고 합니다.
그럼 지금 이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것은 이 남자 저 남자 자기의 향락을 딸라 살았던 부도덕한 여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법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삶을 살았던 기구한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성경속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창38장을 보면 유다가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이 ‘엘’이었습니다. 둘째가 ‘오난’ 셋째가 ‘셀라’ 그런데 큰 아들 ‘엘’이 다말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는데 그 아들이 하나님께 타락하자 죽게됩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 ‘오난’이 다말의 남편이 됩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도 타락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습니다. 그런데 셋째 ‘셀라’가 있었는데 나이가 어리니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보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눅20장을 보면 당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교묘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어떤 사람이 결혼해서 잘 살다가 남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둘째가 그의 남편이 되고 또 둘째가 죽고 셋째가 남편이 되고 셋째가 죽고 또 넷째가 남편이 되고...... 그럼 나중에 부활하면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성경이 이런 예를 들고 있는 것은 당시 이런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흔하지 않았겠지만 오늘 본문의 남편이 여섯이나 있었던 경우가 실제 있었던 이야기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일까요?
이 여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세상사람들은 ‘서방잡아 먹는 여자’라고 비아냥 거릴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 잘못도 없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따가운 시선으로 그 여인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남편의 장래를 치룰 때마다 고통을 삼키며 남 몰래 눈물로 하루 하루를 보냈던 여인입니다. 자신도 한 남편과 오순도순 자식새끼 몇 낳고 잘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시만 어쩔 수 없이 아픔을 겪어야 했던 여인인것입니다.
세상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남들이 물길러 오는 그 시간에 오지 못하고 아무도 오지 않는 태양볓이 내리쬐는 6시 오늘 시각으로 낮 12시 정오에 물길러 왔습니다. 아무도 모르게...아주 불쌍한 여인입니다. 정말로 눈물나게 불쌍하게 사는 여인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은 매일 매일 야곱의 우물에 아무도 없는 시간에 자기의 상한 심령을 채우기 위해 물을 마셨습니다.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 채울길 없어서 야곱의 우물로 달려 물 한모금 마시며 스스로 위로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갈급한 심령이 이 야곱의 우물을 통해서 만족감을 줄 수 있었을까요?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의 가슴 깊은곳에 있는 아픔과 상처를 이 야곱의 우물을 통해서는 얻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매일 매일 우물곁으로 달려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우물을 통해서 상한 심령을 채울려고 애쓰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돌아서면 우리속에 허전하고 갈한 마음들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의 우물을 향해 달려 갔던것처럼 우리도 인생의 우리의 우물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우리의 우물은 ‘우리의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가 내 인생의 우물같아서 애 인생의갈급함을 채워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온정성을 쏟고 온 마음을 쏟아서 달려갑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갈급함인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의 창고에 무엇인가를 쌓아두면 내 통장에 무엇인가를 채워두면 그것이 내 인생의 공허함을 채워줄 것 같아 밤낮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절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이것이 진리입니다. 야곱의 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그 갈증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목마를 것이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의 인생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무엇이 우리의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무엇이 우리의 인생에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재물, 건강, 힘 이것이 우리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것들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 줄 줄 알고 매일 매일 달려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물은 우리에게 갈증을 더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무슨말씀을 연이어 하셨습니까?
14절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무엇이 우리의 인생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무엇이 우리의 인생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주님은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나를 찾아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나를 찾아오셔서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나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고 싶어서입니다.
지금도 주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우물을 통해서 만족을 얻을려고 수없이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잘 보이지 않았고 그 우물이 내 영혼을 만족하게 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아셨습니다. 우물로 달려가는 우리의 어리석은 발걸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달려가는 그 우물 곁으로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나에게 생수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회복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15절에서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건 여인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저는 우리 아름다운 덕소가족들이 이 여인과 같은 기도를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제가 우물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인생의 우물이 내게 만족함을 주는줄 알고 전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 우물은 만족함이 아니라 더욱 갈증만 있었습니다.
주님 우물곁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을 주옵소서.
예수님 나에게 생수를 주옵소서!
사랑하는 아름다운 덕소가족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우물곁에 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야곱의 우물만을 쳐다봅니다. 그리고 그 야곱의 우물이 갈증을 해소해 줄것처럼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만족외에는 없습니다.
요즘 우리는 힘들고 버겁게 살아갑니다.
남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우리 속에서는 남도 모르는 눈물의 고통과 아픔 때문에 가슴을 졸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 아십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다 아십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눈물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 곁으로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영원한 생수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르지 않은 영원한 샘물을 주시기 위해 여러분 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전 여러분에게 그 생수의 기쁨이 경험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는 만족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