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43]53년만에 만난 중학 동창
53년만이라니? 반 세기가 넘는 세월에 만난 중학 동창을 같은 반을 한번 했거나 친하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할 것은 뻔한 일. 그 장구한 세월이 흘렀는데, 얼굴과 이름을 어떻게 기억이나 하겠느냐고? 그런데 3년을 같이 다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누구누구 아느냐는 말로 여러 친구들을 댔건만, 둘다 알지 못하니, 진짜 동기동창인지 의심할 뻔도 했으나, 막판에 ‘2명’을 건졌다. A군은 나와 고등학교도 같이 다녔는데, 그 친구가 조금 친했던 모양이고, B군은 초등학교도 동창이기도 해 ‘민증’을 깔 필요도 없이 소통의 숨통이 트였다.
엊그제 친구의 고희기념 서예전 전시를 도와주러 간 자리에서 만난 그 친구는 친구의 내종제(內從弟)였다. 자치동갑이어서 우리와 학교를 같이 다녔다. 대뜸 중학교 몇 회냐고 묻는데, 기억하는 자 몇이 되랴. 은사 몇 명의 이름을 확실히 기억하고, 조회 때마다 웅변을 한 자기를 몰라보냐며 되레 나의 출신을 의심하고 약간 서운해 하는 듯했다.
전시기간 3번이나 얼굴을 마주치니 대충 반말도 할 수 있게 됐다, 교문을 3년 같이 다녔다는 '그놈의 학연'(學緣)이 뭔지, 친근감이 금세 생겼다. 그리고 제법 화통해 보여 좋았다. 한 살 위 내종형에게도 예의를 깍듯히 차린 것을 보니 안동 권씨 후예다웠다. 아무튼, 한국사회는 서로 ‘몇 다리’만 걸치면 다 아는 사이인 것처럼 좁다. 지구촌을 통틀어서도 그럴까? 많이 경험해 봤겠지만, 실제로 성씨와 본관, 출신지 등을 따지다 보면 몇 명도 가지 않아 이래저래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이 툭 튀어나가게 마련이 아니던가. 권씨라는 것과 고향이 비슷해 이모부가 누구라니까 집안 아저씨뻘로 기억한다는데 기도 차지 않았다. 내가 아는 누구는 자기와 항렬이 같은 6촌동생(전라고 7회 권강주)이라고 해 서로 웃었다. 속설로 성씨(姓氏)만 같으면 함흥 출신이든 제주 출신이든 족보로 모두 120촌 이내라는 말이 ‘과학적으로’ 맞다는 것이다. 그럴려면 60대조 할아버지가 동일인이어야 한다고 한다.
정말 죄 짓고는 못살 일이다. 아니, 어느 경우든 죄를 지으면 안될 일이다. 명심보감 ‘은원(恩怨)을 막결(莫結)하라. 인생도처(人生到處)에 하일불상봉(何日不相逢)이리오’ 구절이 맥없이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여, 오랫동안 적조한 A군에게 전화를 해 연결도 시켜줬다. B군을 이야기하는데 ‘조금 사(詐. 거짓이나 허풍)자가 있다’고 해 ‘그 친구가 중학교 때에도 그랬구나’ 싶어 놀랐다. 실제로 그 친구는 학연을 핑계로 후배들에게조차 금전적인 문제로 평이 좋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친구가 “사람은 고쳐쓸 수가 없다. 아니면 바꿔 써야 한다”는 어록(語錄) 한마디를 불쑥 뱉었다. ‘아, 그렇구나. 사람은 바꿔써야지 고쳐 쓸 수는 없구나. 맞아. 의심하면 쓰지 말고(疑人莫用), 한번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用人莫疑)는 말도 있었지. 태생(?)이 허풍쟁이이면 평생 허풍쟁이구나’라는 생각에 웃었다. 정말 ‘DNA의 신비’가 아니면 무엇일까?
문득, 김환기 화백이 김광섭 시인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라는 시를 같은 이름으로 그린 그림이 떠오른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을 안다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 시는 감상해 보자. <저렇게 많은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그 별 하나를 바라본다//밤이 깊을수록/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나는 어둠 속에서 사라진다//이렇게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리>. 두 분은 오랜 친구였다. 김 화백은 병석에 누운 시인친구를 그리워하며, 전면점화(全面點畵: 형체나 대상을 직접 그리는 대신, 캔버스 전체에 작은 점들을 무수히 찍어 그린 추상화)를 그린 것이다. 그 우정이 마냥 애절하고 애잔한데, 결국 친구의 붓끝이 세계적인 명화를 낳은 것이다.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 수상. ‘환기미술관’(서울 부암동) 소장. 만약 경매에 올라온다면 최소 100억 이상이 될 것이라 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중학교 3년을 다니면서도 알지 못했던 초면의 친구를 만나, 뭐 가릴 것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도 흔치는 않은 일이리라. 언제 또 만날지 모르지만, 친구야,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살아라.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