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 성서를 읽게 되면 “헤롯(Herod, Herode)”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왕들이 등장하는데, 이 왕이 그 왕인지….? 그 왕이 이 왕인지, 마치 미로에 빠져 있는 것과 같이 혼란스러워 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유대 땅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두메아(Idumea, Edom)는, 헬라가 유대 땅을 다스릴 때 헬라(그리스)를 대항하여서 독립 전쟁을 하여 이겼던 마카비(Maccabeus) 형제들이 세운 유대인 왕국, 하스모니아 왕조의 요한 히르카우스에 의해서 정복당하였을 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유대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이두메아(Idumea 이두매, Edom 에돔)에서 유력하고 부유한 가문의 안티파트로스(Antipater I the Idumaean)는 지금의 요르단의 페트라 지역에 있었던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 키프러스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었던 아들들 중에 둘째 아들이 신약 성경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헤롯 왕, 헤로데(Herod, Herode)입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헤롯 대왕 (Herod the Great)”라고 불리는 헤롯 대왕 (Herod the Great)입니다.
따라서 헤로데(헤롯 대왕)는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며, 에돔(이두매)에서 태어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유대 사람들은 헤로데를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유대인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헤로데(Herode,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트로스는 로마가 신흥제국으로 그 힘이 날로 커갔던 때에 나중에 로마의 황제가 되었던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과 카시우스(씨저)와 같은 유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그러한 친밀한 관계을 유지하여 왔던 이유로 인하여 폼페이우스 장군이 유대 지방을 점령하였을 때, 유대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 행정관”으로 임명받게 되었는데, 그때에 25살 홍안의 젊은이 헤로데(Herode)를 갈릴리 지방의 총독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BC 47년)
BC 43년, 헤로데의 아버지 안티파트로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게 되자, 헤로데는 그의 아버지를 독살하였던 암살자를 색출하여 처형하고 유대 땅에 평온을 되찾았을 때, 당시 명목상으로만 유대인 왕국이었던 하스모니아 왕조의 공주 미리암의 청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헤로데는 그의 부인과 3살 된 아들을 버리고 명목상으로만 건재하고 있었던 하스모니아 왕조의 공주 미리암과 결혼을 함으로써 유대교의 전통적인 제사장 가문과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BC 40년 하스모니아 왕조의 실력자 파르티아와 안티고노스에 의해서 퇴출당하여 로마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로마로 도망을 갔었던 헤로데는 그의 아버지 때로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왔던 로마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 받으면서 BC 37년 유대 땅으로 다시 돌아와서 재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있었던 로마의 내전 당시 헤로데는 안토니우스를 지원하였으나 나중에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게 되자 로도스(Rhodos) 섬에 있던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가 그를 만나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유대의 왕”의 지위를 다시 한 번 인정받게 되었으며 그가 죽을 때까지 유대 땅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여 헤로데(헤롯 대왕)은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는 유대 땅에 많은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농업을 장려하여 유대의 경제적 기반을 탄탄하게 만들었던 왕이었습니다.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BC 25년 유대 지방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기근이 들었을 때 이집트로부터 곡물을 들여와서 기근을 해소하였으며, 세금을 감면하여 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수도시설을 정비하고 새롭게 왕궁을 건축하였으며, 국경지역에 마사다와 같은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당시에 배를 건조하는 데 꼭 필요했던 아스팔트 타르를 사해에서 추출하는데 성공하였고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키프로스 섬의 구리 광산을 임대하여 돈을 벌어들임으로 국고를 튼튼히 하였습니다.
또한 유대인이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예루살렘 성전을 더 크고 화려하게 재건했는데 이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헤로데(헤롯 대왕)의 가정 역사는 끊임없는 의심, 모함과 그리고 처형하는 일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 동안에 여섯 번 결혼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부인 마리암까지도 의심과 모함으로 죽이게 되는 상황에 있기도 하였으며, 그녀(미리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마저도 죽이게 되는 불행함을 겪었습니다.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고통 속에서 살았으며 정서적으로 늘 불안한 상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후계자 문제를 두고 수차례 유언을 번복하기도 하다가 결국,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던 맏아들 안티파테르를 재판에 올려서 아우구스투스의 허락 아래에서 처형하게 되는 불행함도 겪었습니다.
신약 성서, 특히 마태복음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헤롯(Herod) 왕은, 일반적으로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으로 알려진 헤롯 왕입니다. 그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고 있을 당시에 유대 지방을 다스리도록 세워진 분봉왕으로 임명을 받았던 헤롯 왕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 동방박사들이 왕궁으로 찾아가서 만났던 헤롯 왕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의 왕이 된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확장하여 아름답게 건축하였던 헤롯 왕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평생 동안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압박감에 시달려서 마사다와 헤로디움과 같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도피처를 건설하고 그곳을 요새화하였습니다. 또 여름궁전을 여러 곳에 건축하였고 지중해 해변에 가이사랴 항구 도시를 건설하였던 헤롯 왕입니다.
두 살 아래의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하는 왕의 명령을 피하여 예수님의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을 가 있을 동안 헤롯 대왕은 죽었는데 이때에 그는 그의 3 아들에게 이스라엘 땅을 나누어 주면서 그곳을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AD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BC 4년 봄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자신이 다스리던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그러나 이 마지막 유언은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세 아들 모두 로마로부터 “왕(King)”의 칭호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이스라엘 땅을 나누어 다스렸던 헤롯 왕들 중에서 헤롯 필립(Phillipus 2)에게는 헤르몬 산 주변과 골란 지역, 그리고 베다니아 지방을 각각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죽게 하였던 “헤롯 아티파스”와 헤로디아의 딸이었던 “살로메”와 결혼하였던 헤롯 왕이었는데(그는 그의 조카와 결혼한 것임), 그가 헤르몬(Mount Hermon) 산기슭에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온천 휴양 도시를 건설하였던 헤롯 왕입니다. (누가복음 3:1)
헤롯 빌립보 2세(Herod Phillip 2)의 얼굴이 새겨진 로만 유대의 동전
또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리 지방과 베뢰아 지방을 다스렸던 헤롯 왕이 있었는데, 그가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입니다.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 지방과 베뢰아 지방을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배다른 형제 빌립 1세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빼앗아 결혼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비난하였던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으며 결국에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요구에 따라 그를 처형하였던 헤롯 왕입니다. (마태복음 14:1~12)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하였던 헤롯 왕입니다. (누가복음 23장)
복음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헤롯 왕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갈릴리 지역과 베뢰아 지역을 다스렸던 왕이 헤롯 안티파스였으므로 거의 다 “헤롯 안티파스”를 말하는 헤롯 왕입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을 다스리도록 그 땅을 물려받았던 헤롯 아켈라오는 그가 유대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 되던 첫 해에 그를 반대하는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헤롯 아켈라오는 그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대인 반란군 3,000명을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였습니다.
그외에도 반란군을 지지하였다는 구실로 유대의 대제사장을 파면하고 그는 향락과 사치를 일삼으면서 정치는 잔인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다스리던 유대 땅에서 민심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통치를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곳에 살던 유대인들의 불평을 사다가 마침내 로마로부터 파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로부터 파면을 당하게 된 헤롯 아케라오 대신에 유대지방을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로마에서는 로마인 총독으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도록 파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는 헤롯 왕들이 자신의 영토를 다스렸지만 유대 지방(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은 로마인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하였던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 땅을 다스렸던 여섯 번째 총독이었습니다.
원래 총독이 머물러 있었던 총독 관저는 지중해 해변이 있는 가이사랴의 헤롯 궁전에 있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을 당시에는 유월절을 맞이하면서 유대인들의 소요사태를 주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 옆에 있었던 안토니오 요새에 와 있었던 때였습니다.
로마의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있을 때, 그는 유대 땅을 다스리는 총독을 철수시키고 헤롯 하그립바 1세로 하여금 유대 땅을 다스리도록 왕으로 세워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또 다른 헤롯 왕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헤롯 대왕과 하스모니안의 공주 미리암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스토 불루스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인데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던 헤롯 왕이며, 유대 사람들이 이일을 보고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서 옥에 가두었었던 헤롯 왕,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는 초대 교회의 기독교도들을 심하게 핍박하였던 헤롯 왕인데, 그의 포악함과 교만함으로 인하여 벌레에 먹혀 죽은 헤롯 왕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얼굴이 세겨진 AD 1세기의 동전
헤롯 아그립바 2세의 얼굴이 새겨진 AD 1세기의 동전
헤롯 아그립바 1세는 AD 44년에 가이사랴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AD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며 기록하였는데 그의 기록은 누가복음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축제의 두 번째 날에, 아그립바 왕은 순은으로 짠 멋진 의복을 입고 새벽에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태양 광선이 찬란하게 비치자 그 은으로 장식된 옷은 신비한 빛을 반사하기 시작했고, 그 반짝임을 바라본 사람들은 기묘한 두려움과 경이를 느꼈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옆에서 아첨을 하던 많은 사람들은 아그립바 왕을 신(god)이라고 소리쳐 부르면서 사방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때 왕은 갑자기 엄습한 강한 고통으로 인하여 복부를 움켜잡으며 쓰러졌습니다……. 왕 아그립바는 당시 54세, 즉위한지 7년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xix 8.1)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자(AD 44년) 그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그의 나이가 어린 탓에 왕으로 세우지 못하고 로마에서는 또 다시 총독을 파견하였는데,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만났었던 총독이 11번째의 유대 총독인 벨릭스(Felix, AD 52~60년)이며, 또 12대 유대 총독인 베스도(Festus, AD 60~62 년)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5장~26장)에서 등장하고 있는 헤롯 왕, 헤롯 아그립바 2세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서 이제는 성년이 되어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가 점령하고 있었던 유대를 다스렸던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이 되었습니다. (헤롯 가문이 통치하였던 기간은 BC 55년-AD 93년까지입니다.) 그는 지중해의 해안 도시 가이사랴에서 사도 바울을 심문하였던 헤롯 왕,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정말로 복잡한 가계도 입니다. 기록 정리하면서도 헷갈리는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약 성서에 등장하고 있는 헤롯 왕들은 다 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당시에는 헤롯 대왕이 왕이었고, 그 후에 그의 아들 3명(아켈라오, 안티파스, 빌립)들과 그의 손자 1명(헤롯 아그립바 1세) 그리고 증손자 1명(헤롯 아그립바 2세)이 등장하여 다른 역할들을 수행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