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48
2월28일[연중 제7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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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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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Dgj2dNZEwCw
[꼰솔라따 선교수도회 김명호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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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혼배성사 강론 때마다 단골로 써먹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제 주례사 내용을 바꿔봐야지 하면서도 대상이 다르다 보니 늘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사랑이란 보다 단순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과의 작은 약속을 지켜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원치 않는 행동을 자제하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 안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통해서 상대방의 이름으로 행하여 주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최인호, 사랑의 기쁨)
혼인한다는 것은 한 사람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한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장점이나 긍정적인 면, 그 사람의 성공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한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닌 약점과 상처 모두를 함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가 걸어온 삶 전체와 또 앞으로 지고 갈 십자가까지 함께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혼인한다는 것은 두 사람이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사막을 함께 걸어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열흘 여행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긴 여행길입니다. 때로 걷다 보면 투명한 아침햇살이나 넉넉한 저녁 무렵의 아름다운 황혼도 바라볼 것입니다. 가끔 시원한 오아시스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도 걸어야 하고 강한 모래바람과도 맞서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잡은 두 손, 끝까지 놓지 않고, 항상 서로 의지하고 서로 참아주고 서로 배려하면서 긴 여행길 끝까지 잘 걸어가기 바랍니다. 오늘 이 첫 마음만 잘 간직한다면 분명히 하느님께서 늘 동행해주시고 행복한 여행길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접할 때 마다 부담스러운 혼인의 불가해소성에 대해서 소개하십니다. 한번 혼인했으면 갈라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혼인이 소중한 것인 동시에 신성한 것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혼인 성사는 수도 성소나 사제 성소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성사입니다. 만일 청춘남녀들이 혼인해서 출산을 이어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사회가 유지되며, 어떻게 봉헌 성소가 생겨나겠습니까?
테르툴리아누스 교부의 ‘그리스도인의 혼인’에 대한 가르침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교회가 묶고, 봉헌으로 굳건히 하고, 축복으로 봉인하고, 천사들이 선포하고, 아버지께서 확증하시는 혼인의 행복을 어떤 말로 적절히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희망, 하나의 열망, 하나의 규율, 하나의 섬김으로 일치된 두 그리스도인과 같은 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 둘은 형제이며, 각자의 소임에서 동등합니다. 그들 사이에는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갈라짐이 없고, 참으로 둘이 한 몸입니다. 몸이 하나이면 마음도 하나입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 앞에 함께 엎드리고, 함께 단식하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권고하고, 서로 위로합니다. 둘 다 교회 안에서 완전히 동등하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합니다. 하느님의 잔치에서 완전히 동등하고,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완전히 동등하며, 위로를 받을 때도 그러합니다. 서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상대방에게 소홀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습니다.”
둘은 부부인 동시에 서로 형제라는 말씀이 눈길을 끕니다. 서로 숨기지 말고, 서로 짐이 되지 말라는 말씀 또한, 오늘 이 세상 모든 부부에게 꼭 필요한 권고 말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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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2beEGo2sK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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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결혼으로 두 배 더 멀어지는 행복>
결혼은 우리 모두의 화두입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25살까지는 결혼하고 싶었고, 그 이후에는 결혼에 대한 희망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재혼을 반대하시는지를 살짝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명확히 하시며, 결혼이 단순한 인간의 합의가 아닌,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신성한 결합임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대화 중, 결혼의 파기 불가능성을 강조하시며,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이 맺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말라.”는 교훈을 주십니다.
물론 두 번째, 세 번째 결혼해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첫 번째 결혼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두 번째도 그렇게 믿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친구들의 순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친구들은 1950년대 중반, 에콰도르에서 원주민 부족인 아우카 부족과의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짐 엘리엇은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어린 자녀가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결국 짐 엘리엇과 그의 네 명의 동료는 아우카 부족원들에 의해 순교하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점은 짐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순교한 후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명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며, 자신이 남편과 함께했던 사역을 이어가며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순교가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믿고, 그 뜻을 따라갔습니다. 그녀의 삶은 결혼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졌을 때, 그 결혼이 얼마나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예입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친구들이 순교한 뒤, 그들의 아내들은 고통을 겪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그 고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고통과 희생은 단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속 계획의 일환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졌을 때, 그 결합은 시간이 지나면서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의 순교 후에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큰 영적 열매를 맺은 인물입니다.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찾은 ‘행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분명 남편과 함께 자녀를 키워가며 느낄 수 있는 행복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같은 선교의 길을 감으로써 남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남편은 하느님이 맺어주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죽었어도 더는 결혼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불행했을까요? 엘리사벳의 말을 들어봅시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짐 엘리엇의 순교 이후,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어가면서 “내 삶을 목적과 의미 있는 것으로 살아가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선택한 결과임을 나타냅니다. 그녀는 자주 “행복은 세상적인 기준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 짐의 순교 후에 겪은 고통 속에서도 “기쁨과 슬픔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녀는 이 슬픔을 통해 고통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서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삶이 전적으로 외적인 쾌락이나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추구했음을 보여 줍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짐 엘리엇의 순교 이후 “다시 이 길을 가야만 한다면, 그 길을 계속 걷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이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통해 얻은 경험과 교훈들이 자신을 더욱 성숙시키고 하느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으며, 고난과 아픔을 통해 그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주실 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다, 심지어 슬픔까지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추구한 삶의 자세를 나타냅니다.
저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들이 결혼의 경험과 비교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경험이 사제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될까요?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묵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상대에게 잘못 했던 것, 상대가 나에게 잘못했던 것, 내가 상대에게 잘했던 것, 상대가 나에게 잘했던 것 등은 모두 내가 하느님께 가는 길에서 큰 묵상 거리였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귀중한 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만큼이라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행복은 인간적인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행복해지면 인간적인 관계에서 더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행복을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는 믿음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 하느님께 참아나가며 나아가야 하는 길을 외면하게 되고 다시 살게 되더라도 그 믿음을 쉽게 회복할 수 없게 됩니다. 첫 번째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는데, 두 번째가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포기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결혼의 유대를 유지하며 참사랑을 알게 되고 그 참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했음을 깨달은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토비트서에서 토비아와 사라의 혼인은 이런 면에서 큰 의미를 줍니다. 토비트는 결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이를 위해 하느님 자비를 청합니다. 십자가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결혼의 참 의미는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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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도 ‘비상계엄’으로 인한 태풍이 불고 있고, 미국에도 ‘서류 미비자’에 대한 광풍이 불고 있습니다. 한국의 태풍은 법원에 대한 테러가 있었지만, 법적인 절차에 따라서 누그러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광풍은 위력이 워낙 거세서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의 태풍이 태평양 건너에서 살고 있는 제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미국의 광풍은 제 주변에서도 불고 있기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 서류 미비자로 지내고 있는 사람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한국인 중에 서류 미비자로 지내고 있는 사람도 십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단속반이 한국인 식당에도 왔다고 하고, 교회에도 왔다고 합니다. 교우 중에는 일손이 모자란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직원들이 무서워서 직장에 안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 주변에도 이번 광풍 때문에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분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걱정 없어 보였는데, 남모르게 가슴 졸이던 분도 많았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물건을 사재기하는 예도 있다고 합니다.
서류 미비자를 위한 모임도 생긴다고 합니다. 50개 주에서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항의하는 모임도 있다고 합니다.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합니다. 이왕에 미국 땅에서 살고 있는 서류 미비자들에 대한 관용과 구제책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도 있습니다. 무서워서 바깥출입을 못 하는 이웃을 위해서 장을 봐주는 분도 있습니다. 무료로 서류 미비자들의 법률적인 도움을 주는 변호사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김혜선 님의 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라네./ 하늘의 본향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는 모두/ 이 세상 덧없이 떠도는 나그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억누르고 부당하게 대우한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분노를 터뜨리신다네.”
동창 신부님 중에 거동이 불편한 친구,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친구, 잠시 쉬는 친구가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소통을 가능하게 하기에 친구들의 근황을 접하게 됩니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바빠서인지 특별히 날을 잡지 않으면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로 위안을 삼기도 하고, 다들 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말씨는 친구들을 많게 하고, 우아한 말은 정중한 인사를 많이 받게 한다. 원수로 변하는 친구도 있으니, 그는 너의 수치스러운 말다툼을 폭로하리라. 식탁의 친교나 즐기는 친구도 있으니, 그는 네 고난의 날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친한 친구들끼리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부간에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한 번 내뱉은 말 한마디가 평생 살아가면서 계속 쫓아다닌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부부가 좀 더 사랑하고 아껴주려면 말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한 번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계속 생채기를 내고 싶지 않다면 부부 사이에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꼭 기억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이혼해!/ 내가? 그러는 당신은 어떤 줄 알아?/ 옆집 남편(아내)처럼 할 수 없어?/ 어린애처럼 굴지 좀 마!/ 당신, 예전이랑 똑같은 실수를 한 거잖아?/ 좀 더 이성적일 수 없어?/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난 지금 안 듣고 있어/ 모든 게 당신 잘못이야./ 당신이 먼저 시작했잖아/ 당신이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저 농담이라고”
부부 사이라도 이런 말은 꼭 해야 할 거로 생각합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미안해요./ 감사해요./ 내가 할게요./ 다시 할게요.” 교우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사랑하며 지내야 하는데 때로 불신과 반목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의 시작도 사소한 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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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혼인한 이들은 물론이고, 사목 현장에서 혼인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을 돌보는 사목자들과 교우들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가르침 앞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마치 우리 시대의 인간적 현실을 무시한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멍에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의 가정은 사실혼, 동성 간의 결합, 출산 기피, 기술 혁명으로 말미암은 출산 행위의 조작이나 성별에 대한 편견 등 그리스도교적 혼인을 위협하는 수많은 요소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실제로 혼인을 지속하는 데 어려움을 가진 가정의 상황만을 기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혼인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사”(1코린 7,7)이고 무엇보다 먼저 성직과 축성 생활에 앞서는 하나의 성소이기에 신중한 식별로 응답해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따라서 “혼인의 불가 해소성은 사람들에게 부과된 ‘멍에’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혼인으로 결합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은사’로 이해하여야 합니다.”(「사랑의 기쁨」, 62항)
위기에서도 인내로 혼인을 지키는 사람들, 혼인 생활의 위기 앞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과 기도로 동반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현대 감각을 거스르지 않고자, …… 또는 인간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에서 시류에 뒤처져 있다고 느껴서, 혼인을 옹호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를 멈춘다면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고 주어야 하는 가치관을 제시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3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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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0,1-12: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혼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오직 한 사람 하와만을 짝을 주신 것은 두 사람이 모든 일에 동등하게 하나가 되고 모든 것을 나누고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혼에 대한 가르침은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5절)라고 하신 말씀은 처음에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아담이 하느님께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그리고 여자는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먹었습니다.”(창세 3,13)라고 핑계를 대는 것에서 나온 법이다.
혼인으로 둘은 각자의 소임에서 동등하다. 그들 사이에는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갈라짐이 없고, 참으로 “둘이 한 몸입니다.”(창세 2,24; 마태 19,5; 에페 5,31) 몸이 하나이면 마음도 하나이다. 부부는 함께 기도하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권고하고, 서로 위로하는 관계이다. 서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소홀하지도 않고, 서로에게 짐이 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혼인 생활을 절제 있게 엮어 가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9절)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주님의 가르침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 가르침은 간음의 경우 외에는 모든 이혼을 금한다. 그 간음은 여자나 남자가 아내이기를, 남편이기를 원하지 않았고 혼인의 신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살아 있는 동안 서로에게 매여 있다.(참조: 1코린 7,39) 부부는 항상 서로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서로를 위하여 어떠한 경우에라도 부부간의 도리와 혼인의 신성한 의무를 충실히 하여야 한다. 부부는 하나라고 한다. 둘이면서 하나이다. 그리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그리고 사랑으로 주님을 그 안에 모시기 때문에 주님을 모신 삶으로 삼위일체의 삶을 사는 것이다. 가정의 모습은 삼위일체의 모습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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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혼인법은 멍에가 아니라 은총을 실현하는 도구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2-12)
1) 구약성경 토빗기를 보면, 토비야는 혼인 첫날밤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하늘과 당신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협력자며 협조자로 아내 하와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둘에게서 인류가 나왔습니다. 당신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와 닮은 협력자를 우리가 만들어 주자.’ 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토빗 8,5-7)
이 기도에는, 혼인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믿음이 들어 있는데, 그 믿음은, 혼인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믿음입니다.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라는 말은,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나타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일’을 함께한다는 믿음으로 결혼합니다. <인간적인 욕망이나 욕심으로 결혼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라는 말씀은, “혼인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 또는 “혼인은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셔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결정해서 결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 모든 과정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고, 또는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일’이라고 믿는다면, 하느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신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보호를 잘 받는 방법입니다. 더 좋은 방법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을 잘하는 비결은 ‘기도’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또 가족이 ‘함께’ 바치는 기도는 그 가정을 지키는 힘이 됩니다.
3)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혼장에 관한 모세의 규정은, 인간들이 하느님도 잘 모르고, 하느님의 뜻도 모르던 시절에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위해서 만든 과도기적 규정일 뿐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 규정은 하느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규정일 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규정을 당신의 권한으로 폐지하셨습니다.>
4) 2절의 ‘예수님을 시험하려고’라는 말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라는 뜻인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혼인과 이혼에 대해서 질문한 것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재혼을 꾸짖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마르 6,17-29)
그래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는,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은 정당한 일인가?”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단순하게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라고 대답하셨다면, 바리사이들은 헤로데에게 가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를 비난했다고 고자질했을 것이고, ‘버려도 된다.’고 대답하셨다면 산상설교의 가르침(마태 5,31-32)과는 다른 말을 했다고 사람들을 선동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창세기의 내용을 언급하신 것은, 바리사이들의 함정을 피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5) 바오로 사도는 혼인에 관해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1코린 7,15) 혼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의 혼인법’은 신앙인들을 속박하기 위한 멍에가 아니라, 신앙인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의 혼인법에도 적용됩니다.
혼인법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혼인법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혼인과 가정의 거룩함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그 고통을 잘 극복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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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사랑 한결같기를>
마르코 10,1-12 (혼인과 이혼)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그 사랑 한결같기를>
주님의 제단 앞에 나란히 선
신랑과 신부를 바라보는 것은
큰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세상 그 무엇도 갈라놓을 수 없는
티 없이 맑고 고결한 사랑이
두 사람 안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마주 섭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나의 반쪽을 채워달라고
서로에게 고백합니다
이미 온전히 하나인데도
아직 하나가 아니라
여전히 모자란 반쪽이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겸손입니다
당신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소유에 눈이 멀어 사람을 보지 못하는
어둠 가득한 혼탁한 세상 안에
해맑게 빛나는 순수함입니다
삶의 가시밭길조차
당신과 함께 하기에
기쁨 가득하리라고 고백합니다
제 살 길 찾기에 얽매여
벗들의 슬픔을 함께 보듬지 않으며
어느새 편안함에 길들여져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쉽게 주저앉고 마는 많은 이들에게
쉼 없이 샘솟는 희망을 나눕니다
지나온 날들의 허물도
지금 이 자리의 부족함도
행여 있을지 모를 내일의 잘못도
결코 서로의 믿음을 허물지 못하리라
마음으로 몸으로 고백합니다
서로를 향한 지긋한 눈빛으로
서로를 품는 넉넉한 마음으로
맞닿은 손끝이 전하는 따스한 느낌으로
지금 여기에 마냥 머물고픈
참 사랑을 나눕니다
그 사랑 언제나 한결같기를
함께 했기에 정겨웠던 이 세상 떠나
영원히 하느님 품으로 돌아갈 때
오늘 맞잡은 손
다시 곱게 쓰다듬으며
그동안 가슴 아릴만큼 고마웠다고
아름다운 작별 인사 나누며
뜨거운 사랑의 눈물 흘릴 수 있기를
하느님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모든 부부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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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내로 견디고, 사랑으로 이겨내기>
결혼을 앞둔 젊은이에게 결혼은 왜 하느냐? 고 했더니 “사랑하기 때문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항상 예뻐해 주고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며 어떤 이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살아가면서 그것도 체험해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좋은 면만 봤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면도 감싸줄 수 있는 마음을 키워가겠다고 다짐하는 젊은이에게 그 약속 변치 않기를 기원하며 마음 다해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면 계약에 충실할 수 있고, 계약에 충실함으로써 또 사랑을 지키게 된다는 깨우침을 얻기를 기도 했습니다. “인내로 견디고, 사랑으로 이겨내기. 이는 그리스도인 고유의 은총입니다.”(프란치스코교황)
예수님께서는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7-9)고 하시며 결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부부, 즉 합당하게 결혼한 부부는 두 인격체이면서도 동시에 한 인격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흔히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부다처제, 남편이 아내를 일방적으로 쫓아내는 소박 등 남존여비 사상이 빚어낸 결혼, 이혼, 재혼은 가부장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가능할지언정 이제 하느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는 혼인의 단일성, 즉 ‘일부일처’, 그리고 혼인의 불가 해소, 즉 ‘이혼 불가’, 혼인의 성사성 즉‘부부애’, 창조 사업의 직접적인 참여, 다시 말하면 ‘자녀의 출산’을 중요시하여 가르칩니다. 그런데 요즘 결혼하는 부부 2쌍 중 1쌍이 이혼한다는 통계가 나오고, 출산율도 0.79로 여성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아이가 한 명도 안 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족함을 채워주고 계약에 충실하며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어디 가고 그리 쉽게 헤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이고 아이들의 어머니요, 아버지임이 분명한데 그들을 뒤로하고 차라리 몰랐던 사람보다도 더 악하게 마주 서고 있으니 그러고도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염려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닌지요? 어려움이 몰려올 때 그래도 사랑해야 할 나의 동반자임을 다시 한번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시다! “말로나 혀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1요한 3,18)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커지면 그에 상응하는 법률이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서로를 갈라서게 하는 일이 아니라 일치를 도모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결혼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예레 31,3)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써 한 몸을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원한 사람은 하느님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하느님과 나를 갈라놓는 것은, 무엇인가요? 인내로 견디고 사랑으로 이기는 은총을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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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나궁렬 요셉 신부님]
<부부가 되어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부부가 되어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젊은 시절,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질 수가 없어서 함께 살자고 합의를 하여 살림을 차렸지만 서로의 감추어진 약점들이 드러나면서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듣자니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이혼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많은 부부들을 만나다 보면 천생연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다른 사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배우자의 약점을 받아들이고 감싸주는 부부를 여럿 본다. 어떤 남편은 아내의 드러난 약점을 하소연하고 자기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는지 토로하면서 자기가 아내를 버리면 데리고 살 사람이 있을 것인지 걱정이 되어 함께 살고 있다고 눈물로 고백한 적이 있다. 이 부부가 서로의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부는 하느님이 짝을 지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당사자들 스스로 그 사랑의 끈을 풀 수 없다. 부부란 부족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서로 보완해 주면서 한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내를 못해 쉽게 이혼하는 젊은 세대들이나 남편의 권위에 짓눌려 살아오다 이제라도 여생을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이혼하는 노년 세대들 모두가 부부란 하느님이 맺어주신 천생연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부부로 맺어준 것에 감사를 드리고 온 힘을 다해 백년해로하겠다던 약속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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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정재성 요한 신부님]
1. 수필가인 윤득길 씨는 결혼생활 45년 동안 티격태격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돌아보면 별것도 아닌 것 때문에 싸웠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언젠가 그는 상에 수저를 자기 것만 갖다놨는데, 아내를 무시한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그런 건데, 아내는 섭섭해 했습니다. 그래서 한참 싸우다가, 나중에는 뭣 때문에 싸우는지 잊어버렸습니다. 부부는 그렇게 심각한 일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 사소한 것으로 싸울 때가 참 많습니다.
아내가 그보다 키가 크고 체격도 우람해서 그와 많이 다른데, 한 세월 지나보니까 ‘다름’이야말로 그를 성장시켜줬던 것이었음을 깨닫고, 그런 아내를 인정해주다 보니까 그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결혼할 때 어른들 말씀이 다홍치마 때 버릇을 가르쳐야 한다고 해서, 자기 식으로, 신랑 집안의 가풍대로 아내를 길들이려고 몇 십 년 싸웠는데, 결국은 실패를 했습니다. 처음부터 아내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면 서로가 편했을 텐데 말입니다.
2. 주부 정혜영 씨는 애들 둘 다 대학생일 때 한 주간 여행을 갔고, 남편이 5일간 매일 저녁, 결혼관, 경제관, 애들의 미래에 대해 그 부부의 생각을 애들한테 강의했습니다. 한 시간 강의 후, 다음 한 시간은 토론하면서 애들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했습니다. 애들의 배우자는 이런 사람이었으면 참 좋겠다고 했는데, 애들에게는 무척 인상적이었고, 아버지가 매일 강의를 준비해왔다는 것도 좋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때 남편이 굉장히 자랑스럽고 고마웠다고 합니다.
요즘 결혼에 대해 말이 많은 건 거의 어른들 책임이라 생각하는 그녀는 어린 나이에 엉겁결에 결혼해서 신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들에게는 진짜 신혼을 안겨주고 싶어서 아무 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혼식도 성당에서 했고, 다른 준비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애들 생활 보면 자취생활 같다고 합니다. 신랑이 쓰던 냉장고, 세탁기 그대로 쓰고, 부모 집에서 쓰던 것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엄마들의 로망’이라는 게 있습니다. 딸이 결혼하면 예쁜 이불이나 그릇을 사주고픈 마음이지요. 하지만 딸이 전부 싫다고 했습니다. 엄마로서는 참 속상한데, 정말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결혼했습니다. 한 달 살더니 전자레인지를 샀는데, 소파는 안 사는지 물었더니 앉아 있을 시간이 없어서 필요 없답니다. 뉴스라도 보게 TV는 필요하지 않냐 했더니, 인터넷으로 보면 된답니다. 이처럼 결혼 전에 다 마련해서 결혼하지 않고, 결혼 후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마련하는 것도 실용적일 것 같습니다.
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혼인과 이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혼인풍속이 다르겠지만, 결혼 전에 오랜 기간 기도하면서 결혼을 준비하고, 결혼 후에는 공감대를 만들면서 애정을 키워나가고, 자녀들을 하느님 뜻대로 성장시켜야 합니다. 행복하고 일치된 가정을 꾸며나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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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상각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신부님]
너무나 큰 고통과 번민·좌절 속에서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미움과 원망만이 가득합니다. 제 상황이 이 정도인데도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해야만 하는 건가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가정 폭력이나 알코올 중독, 도박, 극심한 경제적 곤란이나 혼외정사 등이 원인이다. 그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면서도 그저 ‘한 번 결혼했으니 무조건 끝까지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혼을 하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 종종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
그럴 때면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얼마나 지혜롭게 대답하셨는지를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고 말씀하신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하느님의 본래 계획을 밝히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창조의 목적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하나 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혼인의 진정한 의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남편이나 아내가 배우자를 버리는 것은 혼인, 나아가 창조의 참된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신다.
어떤 이유로든 혼인에 실패한 사람은 혼인이 어떤 직업처럼 간단히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혼인의 실패는 무엇인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가정을 파괴하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참다운 삶을 파괴한다. 특히 얼마나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부모의 이혼으로 고통 받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가정의 파괴를 막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성모님은 모든 가정에서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가족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칠 때 가족은 그 기도 안에서 예수·마리아·요셉의 모범적 삶을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성가정의 모범은 서로에게 사랑과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될 때 가족은 가정 안에서 기쁨을 나누는 법과 십자가와 고통을 함께 지는 법을 배우고 마침내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을 우리 가정에로 초대할 수 있으며, 우리 가정 안에 오신 성모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칫집에서처럼 우리 가정에 부족한 포도주를 채워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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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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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요즘 우리가 읽고 있는 독서는 집회서입니다. 저는 집회서를 좋아합니다. 그 안에는 많은 삶의 지혜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집회서는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줍니다. 특히 저는 이 부분을 듣고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너와 화목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많이 만들되 조언자는 천 명 가운데 하나만을 골라라.”
“식탁의 친교나 즐기는 친구도 있으니 그는 네 고난의 날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
지혜서는 말합니다. 성실한 친구는 보물과도 같고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저울로도 그 값을 저울질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부의 일체에 관하여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부부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대의 가장 좋은 친구, 가장 성실한 친구는 그대 옆에 있는 남편이고 아내일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성실하다면 그런 친구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친구를 놓치지 마세요. 친구에게 성실했다면 그대의 고난에 그 친구는 기꺼이 함께할 것입니다.
지금 옆에 있는 친구에게 그대의 성실함을 선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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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또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주어진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씨 유 어게인’
저자는 현직 의사로 일하고 있는 서연주 님입니다. 그녀는 불의의 사고로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의 별명은 윙크 의사입니다.*_* 그녀는 말합니다.
“이제부터 내 눈은 해와 달이야.”라고….
책 한 권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잃어본 적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응원하고 기도하며 읽었던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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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코.10,9)
한 사람을 평생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끊임없이 한다는 것은 엄청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하기 쉬운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이 쉽고 즐거웠을 때라면 우리가 지나가는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순간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지속적이지 않고 순간적이고 현실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서로에게 ‘이끌리는 순간’은 사랑스런 인간 관계를 맺기 위한 첫 걸음이요, 첫마음이요, 거룩한 삶의 순간입니다. 자신의 인생 축제로 한 사람을 초대하는 순간입니다.
모든 관계의 시작인 ‘이끌림’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이끌림'의 순간은 아주 짧지만, 서로를 부르는 강렬하고 깊은 영혼의 손짓입니다.
가슴 설레던 첫 만남의 짜릿함이 늘 있기를 바라지만, 살아가는 동안 그것이 환상임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낭만의 시기는 순간이고 환멸의 시기로 금방 접어듭니다. 우리가 보았던 아름다움은 추함으로, 우리가 가졌던 신뢰는 불신으로, 우리가 품었던 희망은 실망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온갖 추함과 불신과 실망을 품은 우리의 가슴은 멍이 들지만, 그래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한 때 가슴 설레던 ‘이끌림’의 순간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새로움에 대한 기대보다는 우리는 잊고 살았던 행복의 순간을 더 자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거부할 수 없었던 그 ’이끌림‘을 기억하고,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서로를 간절히 부르고 원하였던 그 순간들을 우리는 잊었지만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잊어버린 첫 마음을 우리에게 되새겨 주시는 주님은 상기자이십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기억하는 것입니다. 수시로 변하던 사랑의 감정 속에서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함께 이룬 성취를 기억하고, 가슴 설레던 첫 마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 나가니 이웃도 그의 본을 따라 그대로 하리라."(집회서 6.17)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끌림'이라는 첫마음과, 사랑의 순간들을 우리들 기억에서 떼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때 남녀의 사랑은 서로가 편한 친구의 우정으로 동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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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1-12)
부부의 이혼사유 중 가장 큰 것이 ‘성격차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질 때에는 나와 다른 점들이 너무나 새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평생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는데, 부부의 연을 맺고 같이 사는 동안 그 사람을 좋아했던 이유, 그래서 그와 함께 살고 싶었던 이유가 어느 새 그 사람이 너무나 꼴보기 싫은 이유, 그래서 도저히 그와는 같이 살 수 없는 이유로 변해버린 겁니다. 그렇기에 성격차이는 부득이한 이혼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격 차이를 내세우며 배우자와 갈라설 생각을 하는 것은 다 상대방을 내 기준에 따라 판단하려는 마음, 그의 말과 행동을 내가 원하는대로 통제하려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또한 내 마음 따라 갈대처럼 왔다갔다 하는 ‘좋고 싫음’이란 감정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잘못 해석하여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격 차이를 내세우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을 향한 내 마음이 변하진 않았는지를 돌아봐야겠지요.
오늘 복음은 율법에 적혀있는 이혼의 ‘예외규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원래 율법에는 ‘이혼해도 된다’는 내용이 없지만, 유다인들이 자기 욕망과 고집을 쫓는 완고함 때문에 혼인에 대한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에, 그로 인해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이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죽음의 위기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런 일들을 최대한 방지하고자 ‘예외규정’을 만든 겁니다. 아내가 혼인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한 사유에 해당하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경우 남편은 이혼장을 써주고 그녀를 내보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언제든 여자를 쫓아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심지어 아내 쪽에 이혼의 귀책사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최소한 이혼장이라도 써줌으로써 다른 남자를 만나 새로 혼인을 맺을 때 율법에 따른 결격사유가 없게 해주라는, 결과적으로 약자를 배려하는 자비의 규정이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예외규정에 담긴 그런 뜻과 의도를 명확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보다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는 배우자와 갈라설 때 이혼장이라도 써주는 최소한의 의무에 머무르지 말고, 하느님께서 그 사람과 나를 부부로 맺어주신 뜻을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그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창조하시고, 남자가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신 것은 혼자서는 부족하고 불완전한 남녀가 사랑으로 서로 일치함으로써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허물을 덮어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당신 뜻과 섭리로 나와 맺어주신 소중한 인연을 그저 내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내 욕망을 채우려고 갈라놓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 말씀 중에 “맺어주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의 원래 뜻은 ‘함께 멍에를 매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즉 혼인은 취향이나 호불호에 따라 쉽게 바뀔 수 있는 가벼운 관계가 아니라, 구원과 영적 완성이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끝까지 함께 나아갈 든든한 동반자 관계를 맺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 상대방과 나의 다른 점을 그와 갈라설 핑계거리로 만들지 말고, 그 ‘다름’을 통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함께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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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을 떠나 유다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군중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결혼에 대한 진정한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10,3)고 되물으시고, 그들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해준 이유가 이혼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모세가 그렇게 한 것은 여성이 이혼장이라는 서류도 없이 버림을 받게 될 경우, 여성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생활하다 붙잡히게 되면 간통죄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내의 사소한 일을 꼬투리로 잡아 이혼하는 일이 많아 사회적 문제꺼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혼이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10,9)는 창조 때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이라고 번역한 “짝 지우다”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함께 멍에를 매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는 결혼이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일치를 향한 공동의 운명을 지니고 함께 협력하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결혼이란 ‘한 몸’, 곧 일치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일치를 이루기 위한 조건적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고’ ‘하나 됨’으로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 10,7)는 말씀을 교부들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로,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로 해석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하여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하여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이처럼,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과 인간은 한 몸을 이루어나가야 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일원이 되는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하는 혼인성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의 이 깊은 관계가 우리를 가장 품위 있는 존재로 끌어올려줍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거룩하고 놀라운 일인지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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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8)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과 더불어 한 곳을 함께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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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정의 여정>
-“주님과의 우정, 이웃과의 우정, 부부간의 우정”-
“주님, 당신의 계명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실로 내 낙이 이것이오이다.”(시편119,35)
우정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친구가 있습니까? 한결같이 평생 함께 하는 도반인 친구입니다. 한둘만 있어도 그 인생 성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우정관계에서 사람의 됨됨이가 잘 드러나니 참사람임이 저절로 검증되는 우정관계입니다. 공자의 논어 서두에도 나오는 인생 삼락중의 하나 역시 우정입니다.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사랑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 우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이, 시대, 남녀, 국적을 초월하는 우정관계입니다. 주변에서 탁월한 우정관계의 사람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에서도 우정의 탁월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더 가고 싶을 때 절제하고, 두려울 때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탁월함이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다산>
“고요할 때 텅비면 밝고, 밝으면 통한다. 움직일 때 곧으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넓다. 이러한 상태는 탁월함에 가깝다.”<통서; 주돈이의 책>
참된 우정의 여정에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탁월함입니다. 정말 우정의 여정에서 드러나는 이런 탁월한 우정일 때 순수하고 아름답고 참 행복할 것입니다. 이런 우정의 본보기로 생각나는 구약의 다윗과 요나단, 조선시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그리고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 손암 정약전과의 우정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우정의 여정입니다. 단순히 이웃 형제와의 우정만 있는 게 아니라, 주님과의 우정도 있고 이웃형제와의 우정도 있고, 부부간의 우정도 있습니다. 하루 이틀만에 완성되는 우정이 아니라 우정 또한 평생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주제는 우정입니다. 너무 적절하고 공감이 가서 전문을 인용하고 싶습니다만, 아쉽게도 집회서 후반부만을 인용합니다.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는 셈이다.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으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나가니
이웃도 그의 본을 따라 그대로 하리라.”
정말 우정에 관한 금과옥조의 교훈입니다. 이런 우정도 보고 배웁니다. 보고 배울 이런 우정의 사람들은 그 존재자체 만으로 이웃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참된 우정의 기초에는 주님을 경외함이 전제조건임이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그 삶의 중심에 주님과의 우정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과의 우정과 함께 가는 형제들, 심지어는 부부관계의 우정임도 깨닫습니다. 이것은 제가 수도공동생활을 통해서도 깨닫는 체험적 진리입니다. 다 서로 다른 이들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는 것은 정말 하느님 은총의 기적입니다. 주님과의 우정관계의 여정을 노래한 ‘하늘과 산’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하늘이 주님을 상징한다면 산은 우리 각자를 상징합니다. 지금도 자주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되뇌는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
무려 28년전 시이지만 늘 읽어도 늘 새롭습니다. 바로 일치의 공동체 중심인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공동체 형제들 상호간의 우정입니다. 형제들간의 우정의 기초에 자리하고 있는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그러니 일치의 중심인 주님과의 평생 우정을 돈독히 함이 얼마나 본질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깨닫습니다. 형제들간의 우정이 변질되거나 부패됨이 없이 평생 온전함 속에서 원숙하게 익어갈 수 있음의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이래서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바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 수행이요 이보다 주님과는 물론 형제들간의 우정을 북돋우는데 중요한 수행은 없습니다. 부부간의 우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참으로 성숙해가는 부부는 연정이나 애정으로 시작되어도 결국은 우정으로 변모되어 아름다운 친구관계의 우정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날로 깊어지는 신뢰관계와 더불어 말이 없어도 마냥 편안한 노년 부부의 모습은, 흡사 일몰시의 평화처럼, 또 가을 단풍 짙어져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노년 부부는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지요.
오늘 복음의 주제는 혼인과 이혼입니다. 예나 이제나 혼인과 이혼은 영원히 화제의 중심이 되는 주제입니다. 혼인은 이제 공통적인 의무가 아니라 선택처럼 생각되는 현실이요 혼인하지 않은, 못하는 형제자매들이 너무 많습니다. 혼인해도 이혼하여 홀로 살아가는 이들 또한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결혼관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가 부득이 이혼을 허락했지만 창조주 하느님의 뜻은 한몸의 일치관계를 이루며 사는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혼인관의 대원칙입니다. 그러니 부부간 신뢰의 일치를 깨는 간음이 얼마나 치명적 위중한 대죄인지 깨닫게 됩니다. 간음으로 무너진 부부간 신뢰관계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간음에 대한 말씀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부간 평생 함께 신의를 지키며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힘들겠는지요! 답이 없습니다. 늘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삶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단호히 ‘잘살고 못살고 할 것 없이 부부가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미운정 고운정 들면서 연정도 애정도 우정으로 승화되어 잘 익어가는 우정의 여정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이런 우정 역시 필히 주님과의 우정과 함께 감을 봅니다.
부부간 우정의 여정이 이상이라면 이혼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애는 황홀한 착각이요 결혼은 참혹한 이해’라는 좀 심한 말도 있습니다. 또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옆문으로 달아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이요 여정인지요!
그러나 함께 살든 혼자살든 교회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면서 영원한 평생도반이자 친구인 주님과의 우정의 여정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웃형제들과의 우정, 부부간의 우정의 기초가, 기반이 되는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날마다 거행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서로간의 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이게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바램입니다.
그러나 함께 살든 혼자살든 교회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면서 영원한 평생도반이자 친구인 주님과의 우정의 여정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웃형제들과의 우정, 부부간의 우정의 기초가, 기반이 되는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날마다 거행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서로간의 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이게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바램입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요한17,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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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친구와 배우자를 선택할 때>
오늘 집회서는 가히 친구론(親舊論)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앞부분만 보면 명심보감 같은 데서 하는 얘기가 아닐까 생각할 정돕니다.
아무튼 친구는 중요하고 그래서 잘 사귀어야 합니다. 오늘 집회서 말씀이 아니더라도 친구 잘못 사귀면 자기 인생도 망치고 패가망신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면담하다 보면 자기 아들이 참 착한 아들인데 친구 잘못 만나 나쁜 짓을 하게 되었다고 하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부모가 된 입장에서 자기 아들의 잘못을 아들 친구 탓으로 돌리려는 비겁함이랄까 무책임함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를 친구로 택한 것부터 끊지 못하고 계속 사귄 것이 아들이지요.
이는 마치 책을 만드는 것이 사람이지만 책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 것과 같지요. 책방에 가서부터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고르는 것까지 내가 잘해야 하는 거지요.
이런 뜻에서 오늘 집회서의 앞부분은 다른 가르침과 별로 다르다고 할 수 없고 그래서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끝부분은 신앙인의 친구 선택이라는 면에서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고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 나가니 이웃도 그의 본을 따라 그대로 하리라.”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교회 친구와 사귀고,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도 신자 가운데서 찾음으로써 신앙생활을 같이 이어가고 서로 신앙의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개신교 젊은이들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심하면 할수록 자기와 신앙이 다른 사람과 사귀지 않으려 하고, 많은 시간을 교회 안에서 같이 보내는데 그것도 꼭 같은 교회 안에서 보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런 친구 관계가 오늘 복음이 얘기하는 결혼 관계로 이어지고 자녀 관계와 자녀 교육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기준으로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기준으로 친구와 배우자를 택했기에 배우자를 자기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이 짝지어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지요.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을 볼 때마다 제가 놀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들의 교리와 하는 짓을 제가 좋게 보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배우자의 선택을 교회에 맡긴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의 싫고 좋고가 없으며, 자기의 싫고 좋고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뜻에 따라 부부의 인연이 맺어졌기에 하느님 뜻에 따라 살겠지요.
물론 이 얘기는 신자하고만 친구를 사귀고 결혼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신자 아닌 사람에게도 열려있고, 그런 열린 자세로 신자 아닌 사람을 사귀어 하느님께로 인도하면 더 적극적이고 좋겠지요.
저의 육신의 형제들을 보면 한 명만 빼고 신앙이 없거나 다른 신앙인과 결혼했지만 지금은 다 가톨릭 신자로 살아가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니 좋은 결과를 냈다고 할 수 있는데 관건은 그래도 신앙이 중심이었던 거지요.
그러므로 오늘 얘기하는 친구 관계나 부부관계는갈수록 하느님이 중심과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자기의 싫고 좋음에 따라 선택하고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자기의 싫고 좋음이 기준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사랑에서 멀며 하느님 사랑에서는 더 먼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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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9)
<초심(初心)!>
오늘 복음(마르10,1-12)은 '혼인과 이혼'에 관한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10,2)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나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5-9)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2,18)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와를 아담의 협력자로 보내주십니다.
'남편과 아내는 인생의 동반자이며 반려자이며 협력자이며 좋은 친구'입니다. 혼인을 할 때 혼인의 두 당사자는 서로 오른손을 잡고 하느님의 어전과 교회 앞에서 이렇게 서약합니다.
"나는 당신을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존경하고 사랑할 것을 약속합니다."
혼인은 신비이며 성사입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이 초심을 기억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함께 노력하는 성실한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들을 얻으리라."(집회6,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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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 9)
하느님께서는
맺어 주시고
사람은
어떻게든
서로를
갈라놓습니다.
그만큼
서로
주고받는
마음의 언어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엄숙한
혼인의
약속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는
혼인의 여정입니다.
혼인의 여정은
마음을 다잡는
순간들이
그야말로
참으로
많습니다.
결혼은
함께하는
합심의
생활입니다.
혼인은
부딪치면서
성장하고
성장하면서
이어가는 것이
혼인의
생활입니다.
상처와 치유
행복과 불행
소통과 단절이
혼인 안에
다 모여
있습니다.
거울을 닦듯
마음을 닦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삶다운
삶을 위해
고민하고
갈등하며
마음을 나눕니다.
부정직한
변명과
무책임이
아닌
혼인의
첫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맺어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맺어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혼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소중한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끈이
하느님이심을
우리는 언제나
뒤늦게
깨닫습니다.
서로를 잡아주고
이끌고 밀어주는
아름다운 혼인의
여정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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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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