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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없는 길
(봉정암에서 하룻밤을...)
가끔은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꽃이 피면 피는 대로
꽃이 지면 지는 대로
2019년 9월 27일 아침
나는 늘 가슴속으로 동경해 왔던 봉정암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번이 세 번째다.
십이년 전 오월에 처음 갔었고 그 후 지난 사월에야 두 번째로 갔었다.
그때는 벚꽃이 지고 라일락 꽃 향기가 온 누리에 가득할 때였다.
라일락 꽃 향기는 사람을 현혹하는 그 무엇이 있다.
가는 봄 저무는 날에 라일락 꽃 향기를 맡아보았는가.
누구라도 잊고 지냈던 첫사랑의 환영 같은 그리움이 묻어난다.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이...
홀연히 길을 나섰다.
그 길은 뚜렷한 목적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는 길이다.
여태 살아온 인생의 길에서 온전한 길을 두고서 험난한 길 없는 길을 얼마나 걸어왔던가.
가는 봄날의 향기를 맡으며 두 번째로 간 봉정암은 옛날 그대로였다.
그러나 내 나이 어느새 육십을 넘기고 조금씩 늙어 가고 있다.
제행이 무상이다.
지나고 보면 헛된 꿈이요 물거품 같은 것 살아온 지난날들이 참으로 덧없다.
나는 가는 세월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내 생애 세 번째로 봉정암을 찾아간다.
아침에 아내가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며 극구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혼자에 길들여진 탓에 어디든 혼자다.
더군다나 지금은 청각의 기능이 온전치 않아 오히려 혼자가 편하다.
내 사는 남양주 퇴계원에서 봉정암을 가려면 마석 나들목에서 경춘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동홍천 나들목에서 44번 국도로 갈아타고 용대리
백담사 주차장까지 150km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봉정암을 그동안 왜 못 갔는지 모르겠다.
용대리 백담사 입구에서 차를 주차하고 백담사까지는 미니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사월에는 토요일이라서 사람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평일인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봉정암을 찾는 사람들은 등산객도 있지만 대부분이 불자다.
전국에 있는 사찰에서 성지순례차 기도를 목적으로 오는 것이다.
한결같이 소속 사찰이 적혀있는 목걸이를 걸고 있었고 미역이나 쌀 등 공양물을 배낭 가득 짊어지고 있었다.
버스는 꼬불꼬불 7km를 곡예 하듯 산굽이를 돌고 돌아 이윽고 백담사에 도착했다.
백담사는 계곡의 물이 폭포를 이루며 떨어져서 생긴 못(潭 담)이 백 곳이 된다고 해서 백담사다.
백담사는 기미년 3·1 만세운동의 주역인 만해 한용운으로 많이 알려졌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배지로 더욱 유명해진 절이다.
11시 30분 드디어 봉정암까지 기나긴 순례자의 길이 시작된다.
그 길은 험난하고 고독한 길이다.
혼자 걸으면 말할 대상이 없어 자동으로 묵언수행이 된다.
말할 대상이 없어 말을 하지 않으니 이때만큼은 업이 쌓이지 않는다.
들리는 것은 오직 물소리뿐
계곡을 따라서 계속 올라가면 물은 소리를 내며 내 왔던 뒤로 흘러간다.
저 물은 어디에서 생겨 나와 저토록 줄기차게 흐를까.
흘러 흘러 강이 되고 바다로 가서 구름이 되어 다시 땅으로 떨어질 때까지 돌고 도는 인연 법에 끝없이 순환한다.
백담사에서 봉정암에 이르는 수렴동 계곡의 물은 사시사철 그 칠 날이 없다.
화강암 바닥이 훤히 비치는 물의 색깔은 옥빛으로 참 맑고 깨끗하다.
한 시간 남짓 걸었더니 영시암이다.
영시암은 봉정암을 가는 순례자나 대청봉으로 가는 등산객들이 숨을 고르고 목을 축이며 잠시 쉬어 가는 곳이다.
영시암에서 왼쪽 산길로는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수렴동 대피소를 거쳐 봉정암으로 가는 길이다.
오세암을 찾는 이가 아니면 대부분이 물소리가 끊이지 않고 쌍용 폭포 등 볼거리가 많은 오른쪽으로 간다.
수렴동 대피소에서 도착하니 13시 20분 시장기가 돌았다.
대피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날이 저물면 물론 예약을 해야겠지만 잠도 잘 수 있고 가지고 온 음식이나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한다.
나는 아내가 챙겨준 김밥 한 줄에 바나나 우유 그리고 배 한 조각 사과 한 조각으로 점심을 때웠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보았더니 버너에다 삼겹살을 굽고 라면을 끓이는 등 난리가 아니었다.
산행을 할 때는 배가 고파도 안 되겠지만, 배가 너무 불러도 좋지 않다.
조금 부족한 듯 쉴 참에 자주 먹는 것이 좋다.
또다시 출발이다.
나는 봉정암을 가면서 이번에는 대청봉까지 올라가 볼 참이다.
봉정암 가는 길은 각고의 인내가 필요하다.
장장 여섯 시간을 걸어가야 한다.
지루하고 힘이 들지만, 인내심을 갖고
이천 오백 육십 이년 전에 열반한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가는 순례자의 길이다.
길 없는 길도 만들면서 가야 하거늘 하물며 옛사람이 만들고 걸었던 길이 아니던가.
깎아지른 듯이 가파른 곳은 철제로 계단을 만들고 물이 막혀 있으면 다리를 놓아 이렇게도 편하게 가건만 옛사람들은 무엇보다 변변찮은 신발로
어떻게 걸어갔을까.
백담사가 해발 530고지에 있고 봉정암은 1244고지에 있어 갈수록 고도가 높아진다.
구월 말이지만 계곡에는 나뭇잎들은 옅은 붉음으로 변해가고 성급한지 벌써 빨갛게 물들인 곳도 있었다.
쌍용 폭포에서 좀 쉬었다가 좀 더 올라오니 깔딱 고개가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서부터 봉정암까지는 500미터
거리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지만, 경사가 거의 수직이라 젖 먹던 힘까지 짜내야 한다.
한 발 한 발 오르다 보면 숨이 깔딱 깔딱 넘어간다
깔딱 고개가 지금은 해탈 고개로 바뀌었다.
해탈 참 좋은 말이다.
누에가 그토록 좋아했던 뽕잎을 끊어 버리고 날기 위해 자신의 몸을 풀어 집을 짓듯이 해탈이란 뼈를 깎는 수행으로 인간사 온갖 괴로움을 여의어
마침내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저 언덕에는 근심 걱정 온갖 번뇌가 사라진 곳이기에 일체 고요함이 머물고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들 하지마는 이 세상에 나온 사람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깊은 산중에 있어도 바닷속에 숨어 있어도 고대광실 높고 넓은 집에 살고 있어도 때가 되면 반드시 병들어 죽는다.
이 세상은 쓸고(苦) 바다 해(海) 고해다.
쓴 바닷물에 던져졌으니 바닷물을 마시지 않으려면 쉴 새 없이 사지를 바둥거려야 한다.
그 안에 행복은 무엇이며 불행은 또한 무엇이든가
지나간 날들은 모두가 부질없는 것 닥쳐올 한 끼의 밥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해탈 고개는 껍질을 벗어버리듯 정말 힘이 든다.
봉정암은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뇌 사리를 봉안하여 창건했다고 한다.
남동으로는 소청 중청 대청봉 줄기에 닿아있고 서북으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있다.
무엇보다 1244고지의 높은 곳인데도 물이 흔하다는 것이다.
바람을 막아주고 물이 풍부하니 말 그대로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이 아닌가.
1400년 전 자장은 어떻게 이런 곳에 터를 잡았을까.
맨몸으로 와도 죽을 맛인데 길도 없는 그 옛날에 어떻게 전각을 짓는 재료를 운반했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세 번째로 오니 모든 것이 눈에 익었다.
그러나 봉정암은 올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평균 여섯 시간 코스를 나는 네 시간 못 미쳐 봉정암에 왔다.
빨리 오는 것이 무턱대고 좋은 것은 아니다.
산행은 쉬엄쉬엄 느긋해야 하는데 빨리 온 만큼 무릎관절에 탈이 생긴다.
봉정암에 오면 제일 먼저 종무소에 들러 방 배정을 받아야 한다.
미리 예약한 대로 종무소 스님에게 이름을 대면 방과 누울 곳을 정해준다.
방은 방바닥에 가로 40cm 세로 120cm 금이 그어져 있어 번호가 매겨진 곳에 자야 한다.
두꺼운 방석 두 장이 이불 겸 요로 제공되고
방바닥은 한겨울 군불을 지피듯이 뜨겁다.
열명이 자도 충분하지 않은 곳에 스무 명이 넘으니 누우면 옆 사람과 어깨를 밀착한 체 무릎을 세워서 자야 한다.
꼼짝달싹 못하는 그야말로 새우잠이다.
이토록 잠자리가 열악하지만, 기도가 목적이 아니면 그나마 잠을 잘 수가 없다.
등산을 목적이라도 반드시 기도하러 왔다고 해야 방 배정을 받는다.
방 값은 만 원이다.
많은 사람이 오다 보니 비좁아도 어쩔 수가 없다.
코 고는 사람 밤새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사람 어두운 방에 자기 자리를 찾아가면서 잠자는 사람의 다리를 밟기도 하고 여간 불편하지가 않다.
또 불편한 것은 해우소다.
해우소는 숙소와는 많이 떨어져 있다.
아파트 3층 높이의 언덕을 올라가 한 100m쯤 걸어가서 다시 2층 아래의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소변을 보려도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한다.
그것도 소변기 세 개 대변기 세 개다.
해우소에 들어서면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강하게 자극한다.
어렸을 때 많이 맡았던 측간 냄새다.
이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수행의 일부분이다.
봉정암에서는 아침저녁에 식사를 제공한다.
하루 방문객이 적게는 이백 명 많을 때는 오백 명 가까이 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을 굶기지 않고 공양을 챙겨주니 놀랍고도 고맙다.
절에서는 식사를 공양이라고 부른다.
오후 다섯 시 반 새벽 다섯 시 반 메뉴는 단 한 가지 밥을 미역국에 말아 오이 반찬 다섯 개를 준다.
좀 부실한 것 같지만 먹어보면 그런대로 먹을만하다.
먹고 난 빈 그릇은 각자 씻어야 한다.
세면장은 찬물 그대로다.
환경오염 때문에 치약과 비누 샴푸를 못 쓰게 한다.
찬물로 발을 씻고 대충 세수를 하고 이를 닦는 정도다
이토록 아날로그식 불편을 감내하며 하룻밤을 보내도 신기할 정도로 몸이 개운하다.
나는 봉정암에 오면 제일 먼저 부처의 뇌 사리가 봉안된 탑에서 108배를 한다.
나는 절을 하면서 무언가를 바라지는 않는다.
무념 무상으로 하고 나면 더없이 마음은 평온하다.
저녁 무렵 멀쩡하던 날씨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기온의 변화로 안개가 피어올랐다.
운무가 흘러가고 흘러오는 것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천상계에 와있는 것 처럼 몸이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 모두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봉정암의 저녁은 이렇게 벅차오르는 가슴으로 저물어 갔다.
저녁 공양을 하고 난 다음 저녁예불이 시작되었다.
나는 적멸보궁에서 어설픈 수행자가 되어 스님들과 수많은 순례자와 어우러져 저녁 예불을 올렸다.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법당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지는 경건한 예불소리에 산사의 밤은 깊어간다.
불자들에게는 봉정암이 꿈이요 로망이다
한번 가면 두 번 가고 열 번 스무 번 자꾸만 가고 싶은 곳이다.
나 역시 기회가 되면 또 가고 싶다.
일심으로 합장하고 절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간절함이 느끼지 않는 나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샘 철야 기도를 하는 순례자들을 보니 더욱 그러했다.
봉정암의 밤은 점점 깊어가고
나는 잠시나마 떠나온 집을 떠올리며 새우잠에 들었다
(아! 대청봉)
9월 28일 토요일 새벽 다섯 시
주위의 부산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을 때 같이 잤던 사람들은 어느새 일어나 배낭들을 챙기고 있었다.
머물러 있지 않음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찬물에 세수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공양을 하고 나서 대청봉을 가기 위해 서둘러 봉정암을 나섰다.
이때가 05시 30분
날은 아직 칠흑같이 어두웠다.
봉정암에서 대청봉까지는 2.5km 한 시간 반이 소요된다.
나는 앞선 사람들의 헤드램프 불빛을 따라 거의 수직으로 된 철제 계단을 오르고 올랐다.
얼마나 올랐는지 모른다.
숨결이 가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며 온몸에 땀이 흘러내렸다.
6시 10분 드디어 소청대피소에 도착했다.
소청대피소는 인터넷으로 예약하면 잠을 잘 수가 있다.
방값은 만 오천 원이고 음식은 제공되지 않는다.
소청봉에서 중청봉으로 가는 도중에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지척도 분간할 수 없어 일출은 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중청대피소에 도착했다.
새벽 3시쯤에 한계령에서 단체로 올라온 산악회 등산객들이 대청봉 등반을 마치고 중청봉 대피소로 내려와 삼삼오오 아침밥을 챙겨 먹는 등
중청대피소는 시장통처럼 북적였다.
해발고도 1708미터 전국에서 한라산 백록담 지리산 천왕봉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설악산
말로만 듣고 먼발치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설악산 대청봉에 오르려니 가슴은 뛰고 있었다.
중청봉 대피소에서 보면 대청봉은 바로 코 앞이다.
한달음에도 닿을 수 있는 거리였으나 지독한 안개에 싸인 대청봉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위를 보니 단풍은 이미 물 들었고 모진 바람에 고개가 꺾인 주목과 철쭉들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구름은 중청봉에 걸쳤다가 대청봉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멀리 동해의 구름 사이로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감추기를 반복했다.
그랬다.
금방 바람이 휘몰아치고 금방 구름으로 내려앉고 햇살이 슬쩍 비추다가 숨고 했다.
첫얼음과 첫눈이 제일 먼저 관측되는 대청봉 날씨는 한마디로 변화무쌍했다.
중청봉 대피소에서 대청봉 구간 5백 미터는 경사가 심한 것은 아니지만, 나무계단이 끝나고 돌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돌길을 올라가며 문득 티베트의 장례 풍습인 조장이 생각났다.
조장은 시신을 새에게 던져주는 장례다.
음산한 하늘에 까마귀가 나르고 독수리가 날개를 퍼덕이는 티베트의 고원지대를
이 좋은 날에 나는 왜 하필이면 죽음이 떠오를까
혼자 산에 오면 좋은 점도 있지만 가끔은 어두운 생각이 들어 싫을 때도 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돌을 보며 강가에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거쳐간 흔적을 생각했다.
저마다 생각에 족한 표정으로 대청봉에 올랐고 그렇게 내려갔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혼자였고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쓸쓸한 바람이 온몸을 스쳤다.
순간 으스스한 한기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나는 잔뜩 움츠린 체 진한 회색의 돌밭 길을 밟으며 한 발 한 발 올라갔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갑자기 주위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 사이로 붉은색의 대청봉 표지석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 대청봉...
9월 28일 07시 20분
대청봉은 내가 올라오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모습을 드러냈다.
환희의 순간이 흐르고 뒤이어 목적지를 상실한 허무가 밀려왔다.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대청봉을 비추었다.
언뜻언뜻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눈 부셨고
멀리 설악의 침봉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울산바위도 보였고 천불동 계곡도 보였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설악의 아침 풍경을 눈으로 사진으로 담고 있었다.
(공룡능선에서 길을 잃다)
산을 오르다 보면 내려올 때가 쉬운 것 같지만, 위험은 더하다.
사고도 내려올 때 많이 난다.
목표물을 얻고 나면 대체로 마음이 풀리고 마음이 풀리면 육신도 따라 해이해진다.
대청봉에서 어렵게 인증사진을 찍고 중청봉 대피소에서 배낭을 풀었다.
물도 한 병사고 빵과 배 한 조각으로 배를 채웠다.
어디로 내려갈 것인가.
소청봉에서 봉정암 오세암 코스가 무난하다.
백담사 주차장까지 대략 일곱 시간 소요된다.
그렇게 하산했으면 봉정암과 대청봉의 좋은 추억을 안고 무난히 하산하련만
나는 겁도 없이 공룡능선에서 오세암으로 빠지는 코스를 택했다.
소청봉에서 갈림길이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기어이 공룡능선을 선택했다.
소청봉에서 희운각 대피소까지 1.5km는 거의 수직 강하다.
중간중간 단풍구경을 하면서 희운각 대피소에 도달했을 때는 08시 30분 이었다.
혼자 산행을 하면 단점이 속도 조절이 어렵다.
우울한 생각이 들고
일행이 없다 보니 쉬는 것도 잠깐이고 그냥 앞으로 걷다 보면 무리를 하게 된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 통상 여섯 시간 걸리는데 나는 네 시간이 안 되어 봉정암에 도착했다.
무리를 한 것이다.
오늘도 소청에서 희운각 대피소까지 거의 쉬지 않고 내려왔으니 나도 모르게 무릎을 혹사시켰다.
무너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마등령까지 공룡능선이요 오른쪽은 비선대에서 신흥사로 빠진다.
무너미 삼거리에서 나는 지나는 사람을 잡고 공룡능선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들려온 대답은 체력에 자신이 없으면 아예 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렇다고 다시 소청으로 올라가 봉정암으로 내려갈 수는 없는 일
이때부터 무릎이 조금 시큰했지만, 그냥 밀고 나가기로 했다.
미처 몰랐었는데 설악산 공룡능선이 전국의 등산코스 중에서도 난이도가 제일 높은 곳이었다.
점입가경이라는 말이 있다.
공룡능선이 그러했다.
들어 갈수록 산세가 험했다.
산세가 험한 만큼 기기묘묘한 기암괴석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살아생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설악의 침봉들이었다.
가도 가도 그런 풍광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장엄하다는 표현은 너무 상투적이다.
더 좋은 말이 내 능력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 아쉬울 뿐이었다.
감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런 맛에 공룡을 탄다며 사람들은 말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때부터 내 두 다리는 시큰거렸다.
거의 수직인 암벽을 기어오르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어 반쯤 내려갔을 때 기어이 무릎의 통증으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무릎에 통증이 오고 나서 쉬었지만, 소용이 없는 휴식이었다.
공룡능선 1275고지에서 나는 길을 잃어버렸다.
이때가 10시 30분이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은 마등령까지 2.1km 마등령에서 오세암까지 1.5km 오세암에서 영시암까지 2.5km 영시암에서 백담사까지 3.5km 도합
9.6km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는 시큰거리고 갈 길은 멀고 진퇴양난이었다.
이때부터 공룡능선의 아름다운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과연 이 고통을 견디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고 훗날에 지금의 이 고통을 옛일처럼 말할 때가 있을까
어느 가파른 암벽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퍼지고 앉아 있으니까 지나는 아주머니가 파스를 꺼내 내 무릎에 붙여 주며 가지고 있던 나머지도
내게 주었다.
나는 너무나 고마워 눈물이 날뻔했다.
오세암으로 내려오는 마등령에서 나는 또 한 사람의 고마운 사람을 만났다.
마등령에 도착하니 13시 30분이었다.
나는 배낭을 열어 마지막 남은 인스턴트 전복죽과 과일로 점심을 먹었다.
물도 얼마 없어 마음껏 마시지 못하고 목만 축였다.
무너미 삼거리에서 마등령까지 5.1km가 공룡능선이다.
오면서 내가 가면 출발하고 그렇게 다섯 시간 동안 몇 번을 마주친 어떤 분이 마등령에 와서 또 만났다.
그분은 나와 같은 연배인 것 같았는데 네 명의 일행과 컵라면을 끓여 먹는 중이었다.
참 선하게 생긴 그 분은 다리를 절뚝거리는 나를 보더니 배낭을 열고 약국에서 조제한 진통제 한봉지를 꺼내주었다.
나는 너무나 고마워서 고개를 숙이며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했다.
나에게 남아있는 복이 있다면 그분에게 모두를 주고 싶었다.
진통제를 먹었다고 금방 통증이 없어지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이 베풀어 준 호의에 힘을 얻어 오세암으로 내려왔다.
아직도 6km가 남았다.
다리로써 온전한 기능은 상실했지만 나는 뼛속을 갉아먹을 듯이 아픈 고통을 참고 견디며 드디어 백담사에 도착했다.
이때가 19시였다.
백담사에서 용대리까지 운행하는 막차에 올라타니 도저히 믿기지 않은 현실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처참한 몰골로 집에 오니 밤 열 한시를 넘기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내한테 사서 고생한다며 엄청나게 깨졌다.
(꿈속을 헤매다)
9월 29일 일요일 10시
나는 시큰거리는 다리를 끌고 동네 정형외과병원에서 무릎 연골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받았다.
봉정암에서 새벽 05시 30분에 출발하여 저녁 7시 백담사에 도착할 때까지
소청봉 중청대피소 대청봉 다시 중청대피소 소청봉 희운각 대피소 무너미 삼거리 공룡능선 마등령 오세암 영시암 백담사까지 17.1km를 13시간30분을 걸었다
그것도 온전치 않은 다리로
첫날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 10.6km 4시간까지 더하면
27.7km를 이틀에 걸쳐 17시간 30분을 걸었던 것이었다.
물리치료를 받으며 누워 생각하니
모든 것이 꿈만 같다.
현실 같은 꿈이요 꿈같은 현실이다.
비몽사몽
나는 아직도 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설악의 봉정암 대청봉 공룡능선을 헤매고 있다.
2019년 10월 3일
홍 태의
2008년5월 첫번째 봉정암 순례
2008년5월
적멸보궁
해탈고개(깔딱고개)
순식간에 안개가 피어오르면 천상계에 와 있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구름인지 안개인지 꿈속같다.
공양간
중청봉
대청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