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7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루카 6,20-26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잊는 유일한 행복의 요건
금쪽같은 내새끼 112회 ‘부모의 이혼과 재혼을 겪는 금쪽이, 불안과 구토증세의 이유는?’에
심하게 분리불안을 겪는 여자아이가 나옵니다.
집에 들어와 엄마가 없으면 심하게 불안해하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무조건 들어오라고 떼를 씁니다.
그리고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펑펑 서럽게 웁니다.
그러다 먹을 것을 생각하면 금세 울음을 그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폭식합니다.
엄마를 찾는 행위가 분명 생존본능 때문임을 입증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음식이 떨어져 갈 때 아이는 다시 급히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합니다.
결국 음식으로는 엄마를 대체할 수 없음을 몸이 아는 것입니다.
아이는 잠을 혼자 자지 못합니다.
옆에서 엄마가 손을 잡아주고 같이 자야만 잠이 듭니다.
안 그러면 기침하다가 또 구토합니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남편이 아닌 아이와 같이 잠을 자야만 합니다.
금쪽이가 이렇게 엄마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아빠가 자신에게 신체접촉도 안 해주고 놀아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금쪽이가 네 살 때 엄마와 결혼하였습니다.
엄마는 재혼이었지만 아빠는 초혼입니다.
그러니까 아이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남의 자식이라 야단도 칠 수 없고 신체접촉도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아빠를 이상하게 여길까 봐 주저합니다.
금쪽 처방으로 아빠는 금쪽이를 하루 세 번 안아주어야 하고 자주 놀아주어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빠는 피곤하지만, 아빠의 역할을 다해줍니다. 그러니까 금쪽이가 너무 좋아합니다.
급기야 폭식 성향도 줄어들고 잠도 혼자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잠을 잘 때 부모가 지켜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 압니다. 참 행복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줄 수 있는 부모에게서 온다는 것을.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도 부모가 나의 참 생존을 책임져주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아니면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지나고 어른이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았고 어디서 왔는지도 알게 됩니다.
자신은 인간이며 진화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신과 같은 존재로 믿습니다.
이제 자기 생존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과 먹는 것과 힘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것이 행복이라 믿게 됩니다.
행복이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줄 부모를 믿는 것이 아닌 부모가 알아서 챙겨주어야 할 것들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마태오복음의 진복팔단과는 다르게 루카복음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고 청빈-정결-순명의 덕을 쌓으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곧 세속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육신은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마귀는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로 극복됩니다.
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모욕받고 중상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따르면 불행하고, 청빈-정결-순명을 추구하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 복음이 아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돈을 행복이라 여기고 배부름을 행복이라 여기고 명예를 행복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되었을까요? 어린이 때 가졌던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자신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들보다는 부모를 행복으로 여깁니다.
부모가 생존까지 책임져주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부모를 바랍니다.
아기가 음식을 씹어서 식물인간이 된 엄마에게 먹이는 예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자신도 창조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생존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다는
교만함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더는 자신의 출처가 아닌 자기 자신의 신으로서 스스로 생존을 책임지려 합니다.
그래서 행복의 목적이 자신의 출처가 아닌 자기를 생존시켜 줄 대상들로 바뀌게 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아기들은 아는데 어른은 모릅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창조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기 생존을 책임지려 하는 게 고통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일은 고통스럽게 보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부재를 잊기 위해 먹고 토하고 하는 것과 같은 삶을 삽니다.
그렇게 탈진해버립니다.
정 안 되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다행히 저는 어렸을 때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물론 생존에 관련된 것들이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추구하다 보니 더 공허하고 배고프고 행복에서 멀어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결국 그런 것들을 추구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신을 창조자로 믿는 방법뿐입니다.
나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임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의 출처인 창조자 하느님을 찾아냅니다.
그분이 아니면 결코 그 목적이 달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봅시다.
인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이 철학적인 작품은 초월의 경지에서 인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이 이 작품을 그릴 때,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고갱은 타히티라는 낯선 곳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했지만, 그곳에서의 삶 역시 녹록지 않았습니다.
타히티에 온 지 6년째 되는 해, 딸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 무렵 자신의 건강도 나빠졌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그가 자살 결심 후 그린 대작입니다.
“저는 용기도 돈도 떨어졌습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에다 밧줄을 메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엄습해 옵니다.
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오직 그림뿐입니다.”
이 작품은 오른쪽의 탄생을 시작으로 왼쪽은 죽음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고갱은 늦은 나이가 되어서 그가 죽고 싶은 이유는 실제로는 돈 때문도, 건강 때문도 아닌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 늦기 전에 우리 존재의 행복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에 있음을 잊지 말고 내 영혼의 창조자를 믿으려 노력합시다. 그래야 세속-육신-마귀의 집착에서 멀어져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집착이 사라져서 그것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기반이 바로 그분이 참 행복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요한복음의 이 문장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3-5)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7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콜로새 3,1-11
루카 6,20-26
세상의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콜로새서를 읽고 묵상하다 보니, 어찌 그리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명문장인지? 어찌 그리도 감동적인지?
어찌 그리 오늘 제게 꼭 필요한 말씀인지?
출력을 해서 냉장고문에 붙여 놓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콜로새서 3장 1~10절)
세례 성사를 통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 신자들의 시선은 이제 교정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을 내다봐야 합니다.
땅을 바라보지 말고 저 윗쪽, 천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신자들을 향해 새로운 시야를 지닐 것을 부단히 강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의지는 하늘나라에, 다시 말해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더 이상 지상에 있는 것들에 우선권을 둔다든지, 지상 것들에 중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모든 피조물들은 새로운 질서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모든 창조물들은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쇄신되고 재창조되었습니다.
이제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새로운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거듭 아래가 아니라 위를 바라보라고, 지상 것들로부터 초월하고, 천상의 것들 추구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잘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래보다는 저 위의 것, 지상 것보다는 천상의 것을 추구하라는 그분의 말씀을 곡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위의 것, 천상의 것이라는 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매일 당연히 해야 할 담당구역 청소는 하지 않고 줄창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서도 안되겠습니다.
맡은 일은 뒷전인 채, 하루 온 종일 성전에서 울부짖고 있어서도 안되겠습니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와 만남, 사건과 사고에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의 진의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맡고 있는 직무나 사명에 소홀 하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시선은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 세상만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만, 현세 생활에서 맡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저 위의 것, 천상의 것, 영적인 삶에 우선권과 고귀함을 크게 강조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상의 삶, 현세적인 것, 인간 조건, 육체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평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께서 지적하고 힐난하신 것이 탈선이요 과욕, 죄로 가득한 그릇된 욕망입니다.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고 고결하신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반하는 악습에서 거듭 죽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어두운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생명의 삶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특별히 과도한 욕심, 탐욕을 경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어느 정도 충족되었으면 감사하고 만족하면 좋을텐데, 어떤 사람들 보면 욕심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충분히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은 그칠줄 모릅니다.
그런 모습은 새로운 백성의 복음적 삶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삶이라서 그리도 강하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는 죄에 대한 죽음의 성사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재창조되는 은총의 성사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세상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의복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자아로 무장한 새로운 인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매일 과거의 악습에 죽어야겠습니다.
수시로 우리를 유혹하는 죄와 탐욕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시시각각 분노와 격분, 악의와 중상에 죽고, 온유하고 자비로운 새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행복과 불행>
2022. 09. 07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루카 6,20-26 (참 행복, 불행 선언)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행복과 불행>
나 그대로
나로 품는
행복
나의 것을
나로 믿는
불행
나를
이루어가는
행복
나에
고여 있는
불행
나 너머
너와 함께
행복
나 안에
나만 홀로
불행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