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 도승지 규천 전공 사적(贈都承旨虯川全公事蹟)
행장(行狀)
작고하신 나의 형인 규천(虯川)은 문장과 덕행이 일세에 이름을 천양(擅楊)하였다. 우복(愚伏) 정선생(鄭先生)과 창석(蒼石) 이선생(李先生) 문하에 출입하여 사랑을 받고 인정받았다. 규천(虯川)은 자호(自號)이며, 관산(管山) 전씨(全氏)이고, 휘(諱)는 극항(克恒), 자(字)는 덕구(德久)이다.
만력(萬曆) 신묘(辛卯) 11월 29일에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고, 빼어난 남아의 모습은 신선 같았다. 젖 먹이를 겨우 면할 무렵부터 글을 배워 날마다 만여 언(言)을 기록하였으며, 글짓기와 글씨가 능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어린 규천(虯川)을 강하(江夏)의 신동이라 칭하였다.
아홉 살에 우복(愚伏) 선생을 산장(山庄)에서 배알하였을 때, 우복(愚伏) 선생이 운(韻)을 주니 다음과 같이 응구첩대(應口輒對)하였다.
먼 산봉우리는 칼날을 나열한 것 같고 (遠岫疑鋒列))
평평한 물결은 면경을 연 것 같다. (平波若鏡開)
푸른 이끼는 천장석이니 (碧苔千丈石)
그대가 자능대를 지었도다. (君作子陵臺)
이에 좌석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경탄하고 감동하였다.
그의 재능이 민속(敏速)하기가 귀신같아서, 종소리가 울리고 나서 사운(四韻)을 밥 한술 먹는 짧은 시간에 지어 첩대(輒對)하고 회문(回文)하여도 그 글이 장문대작(長文大作) 같아서 한 글자도 구차함이 없었다. 어법(語法)도 신기(新奇)하고, 의취(意趣)가 표일(飄逸)하여 글을 읽는 사람들이 어금니에서 얼음이 나는 듯 모골이 송연하여 신선이 되는 듯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글을 등사(謄寫)하고 외워서 종이 값이 올랐으며, 더욱 서법(書法)의 오묘(奧妙)함이 한 시대를 뛰어 넘는(逈絶) 것이어서, 집집마다 보배롭게 여겨 이를 병풍으로 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이상국(李相國) 시발(時發)이 영남에 규천(虯川)의 이름이 성(盛)한 것을 듣고, 만나보고 나서는 크게 경탄하여 여기에 인물(人物)과 문화(文華) 두 가지가 절묘하니 마땅히 세상 사람들의 그의 아름다움을 칭찬할 것이라고 하였다.
비록 우복(愚伏) 같이 박식하고 창석(蒼石) 같이 이름다운 문사(文詞)는 아니지만 후학들이 그를 경시하지 않았으며, 항상 시와 부로 하여금 바다같이 넓은 가슴 속의 비린(鄙吝)을 씻었다.
조가규(趙可畦) 익(翊)이 총명함과 강기(强記)함을 자부하였으나 공(公)의 전고(典故)를 보고 나서 경복(驚服)하여 마지않았다. 이로 인하여 익(翊)이 자기의 장점(聰明과 强記)을 출척(黜斥)하였다고 한다. 이후로는 공사(公私)의 재주(藝)를 경쟁하는 곳에서 크게 이기니, 박학한 선비나 노련한 문필가도 감히 경쟁하지 못하고, 이백(李白)의 후신(後身)으로 보았다.
중간에 사질(私帙)을 중국에 보내어 살펴보게 했더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비판하여 말하기를 당나라의 성한 시기의 작가로 오르내릴(頡頑) 만 하다고 하였다.
임자년(壬子年) 증광시(增廣試)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나 그 후로 과거의 길이 크게 공정하지 못하여, 고선관(考選官)이 시제(試題)를 팔아 후한 뇌물을 받은 연후(然後)에 사람을 취(取)하기 때문에 시배(時輩)의 친한 무리가 아니면 그 뜻을 실현(售)할 수가 없었다. 비록 친척이라도 대부분 대과에 수 십 년이나 늦어지곤 하였으나, 처가의 제족(諸族)들은 권세(權勢)나 요직(要職)에 웅거(雄據)하니, 처음 관직에 나간 사람이(筮仕) 이를 들으면 더러워서 눈을 찌푸렸다. 희고 깨끗한 구슬에 더러운 진흙이 묻는 것이 두려우나 당시에는 국가(國家)의 윤기(倫紀)가 없어서, 벼슬에 나아가는 길은 아첨하고 뇌물(賂物)을 주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다. 공(公) 이러한 탁한 세상에 저앙(低昻)하지 아니하였다.
다행히 인조대왕이 즉위한 명년 갑자년에 정시(庭試)에 등과하여 괴원(槐院)에 뽑혀 부정자(副正字)가 되었으나, 갑자기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예문관 검열(檢閱)에 천거되었으며, 전과같이 예문관 봉교(奉敎)을 겸하였다.
예문관에 재직한지 여러 해가 되어 경오년에 전적(典籍)에 승차되어 예조좌랑정랑(禮曹佐郞正郞)이 되었고 전과같이 겸하였다. 신미년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로 나아가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였다. 을해년에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제수 받고,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였다. 병자년에 예조정랑이 되었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만나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사(司)에 머물렀다. 그러나 임금이 다시 왕도(王都)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니, 모든 사람들이 위태롭다고 말하며 비록 조정의 명령이나 병과(兵戈)가 땅에 가득하여 사(司)를 보호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시세(時勢)를 관망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였다. 그러나 공(公)께서는 오직 명령을 따라야 하니 지체할 수 없다하고 하며, 수레를 재촉하여 왕도(王都)로 가서 성중에 머물렀다. 성에 머문 지 수 십일에 적의 방자하고 강포(强暴)한 창날에 공이 순절하시었다.
이 때가 정축년 정월 초육일이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슬퍼하시며 도승지(都承旨)를 증직(贈職)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끝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허장예문(虛葬禮文)을 하지 아니했다. 향년 사십 칠세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식(湜)이니 증좌의정행중추부사(贈左議政行中樞府事)이다.
사적(史蹟)으로 대학사 채유후(蔡裕後), 대학사 조경(趙絅), 대사성 황호(黃㦿)의 비문 행장 등에 그 선조(先祖)를 기록하기를 휘(諱) 학준(學浚)은 영동정(領同正), 휘(諱) 효격(孝格)은 태자중윤(太子中允), 휘(諱) 대부(大富)는 형부시랑(刑部侍郞), 휘(諱) 필(弼)은 검교사순위호군(檢校司巡衛護軍), 휘(諱) 유(侑)는 밀직부사겸겸민부전서(密直副使兼民部典書), 휘(諱) 숙(淑)은 판도판서(判圖判書)니 이분들은 고려의 달관(達官)들이었다.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휘(諱) 도(都)는 전의도감(典醫少監), 휘(諱) 오례(五禮)는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휘(諱) 효순(孝順)은 현감(縣監), 휘(諱) 응경(應卿)은 조졸(早卒)하여 출사하지 아니했고, 휘(諱) 팽조(彭祖)는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좌승지(左承旨)를 증직(贈職) 받았으며, 휘(諱) 혼(焜)은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증직(贈職) 받았고, 휘(諱) 여림(汝霖)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贈職) 받았으니 이것이 세보(世譜)이다.
비(妣) 정경부인(貞敬夫人) 남양(南陽) 홍씨(洪氏)는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휘(諱) 여강(汝剛)의 후손으로 휘(諱) 천서(天敍)의 따님이다.
공(公)은 대성(大姓)인 밀양(密陽) 박씨(朴氏) 현감(縣監) 박안정(朴安鼎)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후사 없이 일찍 돌아가셨고, 그 후 대성(大姓)인 풍양(豐壤) 조씨(趙氏) 현감(縣監) 조기원(趙基遠)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역시 후사가 없어 아우인 전(前) 감역(監役) 극념(克恬)의 차자 후(垕)로 후사를 이어 종사(宗嗣)를 받들었다.
아! 만약 그 덕(德)을 논한다면 문한(文翰)은 특별히 남을 만한 일이다.
공(公)은 천성이 온화하며, 강교(强矯)한 기상이 없고 뛰어난 표상(表象)은 발월(發越)하여 맑은 지조(志操)가 있어 진애(塵埃)의 기운이 공(公)의 얼음같이 맑은 가슴에 침범하지 못하고, 오예(汚穢)의 물질이 물과 달(月)같이 맑은 정신을 더럽히지 못하였다. 평생에 악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장단(長短)과 시비(是非)를 논하지 아니하여, 옆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이 하였다.
듣는 것을 꿈 같이 하고, 일은 심곡(心曲)에 두지 아니하며, 사람을 대하는 것이나 만물을 접촉할 때에 온화한 얼굴과 즐거운 낯빛으로 하니,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애모(愛慕)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이 공(公)을 따랐다.
재산이나 토지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담담하고, 가인(家人)의 산업을 간섭하지 않았다. 거처하는 가옥은 비를 피하지 못하고, 양식은 하루를 이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公)은 이러한 어려움들은 마음에 두지 않고, 오로지 고인(古人)들의 글을 읽으면서, 잠심(潛心)하고 완상(玩賞)할 뿐이었다.
애석하도다. 시(酸)고 짠(醎) 세상 풍속에 물들지 않은 까닭에 입조(入朝)한지 십여 년이 지나도 지위가 낭중(郎中)에 지나지 아니하였고, 명도(命途)가 기이하고 어긋나서 마침내는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죽음에 이르렀으니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옛날에 문집(文集)이 있었으나 정축년 난리에 돌아가시면서 함께 잃었다. 다만 남은 것이 사육(四六)과 잡영(雜詠) 약간, 그리고 부용(芙蓉) 한권이 남아 있었다. 어찌 많아야만 하리요. 삼가 그 대개를 기록하여 오는 사람들에게 보인다.
아우 행(行) 사산감역(四山監役) 창주(滄洲) 극념(克恬)이 기록한다.
[국역]
전 경상북도 상주교육지원청 교육장
전 상주문화원 부원장
현 상주 임란 북천 충열사원장 권세환
[原文]
贈 都承旨 虬川 全公 事蹟
行狀
吾先兄之有以文章志行擅名一世出入 於愚伏蒼石諸老先生之門而為愛重 者虬川自號管山全氏諱克恒字德久是 也生於萬曆辛卯十一月二十九日而有 異質秀朗如神仙兒口纔免乳學書日記 萬餘言䏻屬文下筆驚人人以江夏神童 稱之九歳拜愚伏於山庄愚伏命韻輒應 曰遠岫疑鋒列平波若鏡開碧苔千丈石 君作子陵臺一座亹亹馬其才敏速有如 鬼輸神運小鐘聲立成四韻裡一飯之煩 輒就囬文至如長文大作一字不茍語法 新竒意趣飄逸使讀者頰牙頰生冰而毛骨 欲仙世皆謄誦㡬使紙價高也尢妙於臨 池之法逈絶一時人家取寶者不知其幾 許屛障矣李相國時發按嶺中聞其盛名 就與之見大加驚歎曰此有人物文華之 两絶宜世人之交口稱美也雖以愚伏之 博學蒼石之蔍藻不以後學而輕視之常 使賦詩洗其蓇海鄙吝馬趙可畦翊以聰明強記自負見公之典故莫不驚服因黜 己長自是公私戰藝所在大捷宿儒老筆 不敢争的視以為李白浚身也中間以私 帙送中國視之見者批曰當與盛唐作者 相頡頏云中壬子增廣進士自後科舉之 路大不公考官賣題淂厚駱然後取人故 非時輩取親不可售共志雖為親例赴而見屈大科者數十年世皆遅之妻門諸族 皆據權要或策仕聽之凂凂然猶恐白壁 之受泥滓時國家倫紀掃地仕進之路阿 賂成俗以是不欲低昂於濁世幸遇 仁祖大王即祚之明年甲子登庭試科選入 槐院為副正字俄丁內艱服關薦為藝文 舘檢閱待 教奉 教兼如故在藝文者 屢年庚午陞典籍遂為禮曹佐郎正郎兼 如故辛未出為全羅道都事兼春秋舘記 注官乙亥除京畿道都事兼如右丙子入 為禮曹正即遂遇胡亂扈 駕入南漢城 旋以留司承 命還都諸人危之曰雖 朝命如許兵戈满地保無護司之理不如 觀勢爲之公曰惟 命是從不可緩也促駕而徃留城中數十日賊大肆搶掠公遂 死之丁丑正月初六日是已事定 上聞 之震悼特 贈都承旨是别典也卒未獲 屍故不虚葬禮文然耳享年四十七先考 諱 贈左議政行知中樞府事事在大 學士蔡裕後大学士趙絅大司成黄㦿碑 文行狀等書其先祖曰諱學浚領同正諱孝格太子中允諱大富利部侍郎諱弼檢 校司巡衛護軍諱侑密直副使兼民部典 書諱淑判圖判書此其高麗達官也入本 朝有諱都典醫少監諱五禮龍驤衛副護 軍諱孝順行縣監諱應卿早卒不仕諱彭 祖成均生員 贈左承旨諱焜 贈吏曹 參判諱汝霖 贈吏曹判書是為世譜妣貞敬夫人南陽洪氏寶文閣直提學諱汝 剛之後諱天敍之女也公娶密陽大姓縣 監朴安鼎女未乳早世後娶豐壤大 姓縣 監趙基遠女亦以無嗣以第前監役克恬 次子垕為後以奉宗祀鳴呼若論其德則 文翰特餘事耳天性温和而無強矯之氣 英標發越而有疎雅之操不可使塵埃之氣侵到冰壺脑次不可使汙穢之物累及 水月精神平生惡言不出於口不論人長 短是非如有在傍者之云云聽之如夢寐 事不留於心曲待人接物一以和顏愉色 以此知 與不知莫不愛慕而追隨之至於 財利地上心源淡淡然不事家人産業屋 不蔽雨食不繼日亦不知其苦惟手関古人書潜玩而已惜乎酸醎殊俗而様不入 時故立朝十餘年位不過即中加以命途 奇舛終至於殺身鸣呼痛哉舊有文集丁 丑之亂随身並失只餘四六與雜詠若千 首集笑容一卷藏在家欲知文章何以多
為謹記其槩以示來者第 行四山監役 滄洲 克恬記
규천선생사적 유일본 자료 제공 : 옥천전씨 판서공파 사서종택 종손 전상룡
원본자료 편집(타이핑) : 옥천전씨 판서공파 전재몽
최초국역: 전 상주교육지원청 교육장 권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