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화) 이사야 33:7-16 찬송 505장
7. 보라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
8.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9.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
11.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
12. 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
13. 너희 먼 데에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알라
14.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15.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16.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개역 개정)
- 대적의 멸망과 의로운 자들의 구원 예언 -
대적으로부터의 구원을 비는 간구와 남유다의 구원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어제 말씀(1-6절)에서 이사야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구원의 비결임을 언급했다.
이어 오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악한 대적들을 영원히 멸절시키시되
자기를 경외하고 의뢰하는 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대적들을 멸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고 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먼저 7-9절은 대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황폐해진 남유다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10-12절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들을 위하여 그 대적들을 멸절시키실 것을,
13-16절은 그 대적 앗수르의 멸망을 보고 예루살렘 안에 있는
죄인들은 두려워 떨며, 오직 의를 행하는 자들만이
참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 대적 앗수르를 멸하시는 모습을 보고
시온의 죄인들과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두려워 떨었다는 사실이다.(14절)
이는 결국 하나님의 앗수르에 대한 심판이
선민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을 대하는 편견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혈통과 관계없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선을 행했는가의 여부에 따라
철저하게 공의로 행하신 심판임을 나타낸다.
때문에 비록 선민이라 할지라도 범죄한 이상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은 자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한다.
①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들은 속히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올 때만
참 구원과 하나님의 보호를 얻는다.(눅24:47; 벧후3:9)
② 하나님의 징계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14절)은
결국 영원한 멸망의 불길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유1:7)
③ 그러므로 항상 구원의 반석되신 여호와 안에 있기 위해서는 악을 멀리하고
날마다 경건을 연습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15-16절; 딤전4:7)
10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
10절은 하나님께서 친히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놓인 유다를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높임을 받으시겠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내가 이제’라는 말이 세 번이나 거듭 반복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내가'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된 것은
유다가 앗수르에 의한 멸망의 위기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그들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준다.
그런데 이 ‘내가’라는 말 이상으로 ‘이제’라는 말이
세 번씩이나 반복된 사실도 중요하다.
여기서 ‘이제’란 언제를 말할까?
그것은 바로 유다가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처한 때를 말한다.
유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당면한 난국을 극복하고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고
또 앗수르에 협상단을 파견하여 앗수르를 달래고자 하였으나
그 모든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오직 멸망만이 남아 있다고 여겨질 때이다.
또한 이때는 유다가 스스로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끗이 인정하고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던 때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유다가 실패를 인정하고 당신 앞에 엎드린 그 때에
비로소 유다를 구원하시고자 일어서신 것이다.
하나님은 유다가 교만하여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기고
당신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그들을 전혀 돕지 않으셨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유다가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때
그들을 도우셨다면, 예를 들어
유다에 대한 애굽의 군사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하셨거나
유다가 파견한 사절단을 통하여 앗수르와의 강화 조약이 체결되도록 도우셨다면
유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였겠는가?
그들이 그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로 생각할까? 아니다.
그들은 분명 그것을 자신들의 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 할 것이며
‘봐라, 우리의 힘으로도 잘 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하며
더욱 큰 교만과 불신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기를 허용하신 목적과 맞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위기를 허용하신 것은
그들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다가 실패하고 당신 앞에 엎드리는 그 순간까지
잠잠히 기다리셨다가 그들이 당신께 엎드리는 그 순간에
비로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일어서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에게 자신의 무력함, 인간적인 노력의 허무함을 인정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의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그 때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힘입을 수 있는 때라는 사실을 교훈하여 준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기력함과 연약함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만일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닥쳤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과 권세, 지혜를 자랑하고
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더 큰 실패와 패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능하신 도우심을 구하는 삶,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능하신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 자기를 부인하고 당신을 의뢰하는 자들을
외면치 않으시고 필경 승리의 길, 형통의 길,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시4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