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49
3월1일[연중 제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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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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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0PryIzOkCIo
[서울대교구 윤상현 비오(청소년국유아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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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2의 삼일운동이 필요합니다!>
또다시 삼일절입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가 한창이던 시절,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거행된 삼일운동은 여러 측면에서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닙니다. 철저하게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진행되었습니다. 동시에 조선 독립의 초석을 마련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삼일운동은 단기간에 끝났지만, 그 여파는 상당했습니다. 이 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습니다. 국제 사회 앞에 우리 백성들의 자주독립을 향한 적극적인 의지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보다 조직적인 항일 운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종교계가 주도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천도교 15명, 개신교 16명, 불교 2명이 참여했지만, 안타깝게도 천주교는 단 한 명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민족대표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해서, 3·1운동에 천주교 신자들이 전혀 동참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들의 참여는 미미했고 소극적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 교회 지도층 인사들의 그릇된 식별력과 판단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제를 합법적인 정부로, 조선을 일본의 한 부분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독립운동을 반정부 운동으로 단정한 것입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신자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습니다. 나중에는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동참할 것과 신사참배까지 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 같은 경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병자 성사와 미사 요청에 대해 공식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조선교구장은 그를 테러리스트로 간주한 것입니다. 지시를 어기고 성사를 집전한 빌렘 신부에게는 2개월간 성무 집행을 정지시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세월이 흐른 지금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의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그는 이제 독립운동가로서뿐만 아니라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신앙이자 애국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가톨릭 교회가 또다시 시대의 징표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한국천주교회 구성원 전체가 다 같이 노력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교회 담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포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늘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주요 요직에 친일파들이 득실대고 있습니다. 잠잠하다가도 어느새 독사들의 무리처럼 머리를 쳐들고 활개를 칩니다.
그릇된 지난 시대에 대한 깔끔한 청산에 실패의 결과물이 참담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싹 다 정리했어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능수능란한 친일파들은 어우선하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어느새 자신들의 신분을 세탁하고 또 세탁해서, 새로 수립된 정부의 주류이자 기득권 세력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고 그 명맥을 오늘날까지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청춘과 목숨까지 바쳐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해방의 기쁜 소식을 듣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귀환하셨던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받으셨던 느낌, 그 참담한 심정과 수모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자국민뿐만 아니라 일본인들, 전 세계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에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를 볼 수 없습니다. 과거를 반성하는 것은 화해를 위한 전제조건 중에 하나입니다. 나치 만행은 독일의 항구적 책임입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엄청난 과오에 대해, 진심이 담긴 사과를 끝까지 하지 않고 있는 일본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거저 이룩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익명의 독립운동가들, 항일 투쟁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물방울들이 모이고 모여 큰 물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대한독립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항일 운동, 제2의 삼일운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혼란 속에 있는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들을 굽어보시고 지켜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서 빨리 이 야만과 비인간의 시대, 미성숙과 부끄러움의 시대가 지나가고 청산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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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wW43nGrG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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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하느님 나라는 부모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어쩌면 이 말씀이 마르코 복음의 핵심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 나라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주제가 핵심입니다.
먼저 마르코가 설명하려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지금 마르코는 예수님의 두 번째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유에 대해 풀어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사람을 악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면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아니면 사람은 사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창조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웃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까요?
역사적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나라들은 생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이킹’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8세기 당시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살던 북게르만족은 인구가 큰 폭으로 상승하자 그 척박한 땅에서는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육로로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박기술이 발달하자 바이킹은 잉글랜드 서쪽 지역을 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커다란 덩치에 무식한 도끼를 들고 싸우는 바이킹을 당해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이킹은 오딘이란 신을 섬겼는데 싸우다 목숨을 잃으면 오딘의 나라인 발할라로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투 민족답게 방패 처녀라고 불리는 여성 전사가 전쟁에 다수 참여했고 고위직에 올라간 여전사가 존재했을 정도로 여성의 인권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여전사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약탈하기 위해 오랫동안 집을 떠난 남성들을 대신해 자신의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먹을 걱정이 없다면 목숨을 건 약탈은 왜 하겠습니까? 모든 약탈이 일어나는 이유는 생존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약탈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린이들이 부모의 돈을 훔친다거나 다른 아이들의 것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아이들이 생존에 대해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EBS 부모 – 저, 혼나러 나왔어요’에서는 4학년 남자아이를 호랑이보다 무섭게 체벌하는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도 2021년부터 법적으로 아이에게 체벌하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맞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자신은 매 맞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물론 어머니에게도 이유가 있습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지갑에 손을 대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친구를 사귀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아이가 왜 약탈자가 되어가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먼저 아이에게 충분히 좋은 환경이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환경입니다. 바이킹이 살던 땅처럼 척박한 부모는 바이킹처럼 약탈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환경에서 자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체벌은 약탈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약탈자로 만듭니다.
아이에게 부모는 환경입니다. 부모가 생계 걱정을 하고 있다면 자녀는 어떨까요? 당연히 약탈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 되어주기 위해 제가 항상 추천하는 것이 ‘십일조’를 온전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에덴동산의 환경 안에 있다면 자녀도 에덴동산의 환경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아이가 약탈자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디팩 초프라의 훈육법을 배우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가 먹고사는 건 다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너희가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찾고 이웃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만 생각하며 살아라.”
아들 둘은 에덴동산에서 산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것입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잘 도와주었고 동생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쳐 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형은 인도에서 커다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동생은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디팩 초프라는 자신이 언제까지 좋은 환경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을 찾고 그 신이 창조한 이유를 찾으라고 합니다. 모든 창조된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사업가로 혹은 교수로 하느님이 부르셨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삶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되어 부모가 더는 아이의 환경이 되어주지 못해도 아이들은 신의 섭리 안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삶은 ‘경쟁’을 시키는 것입니다. 경쟁이란 환경은 지옥입니다. 지옥에서는 약탈자들이 생겨납니다. 약탈자들이 사는 세상은 또 지옥이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녀를 낳을 부모는 없습니다. 약탈자를 낳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아는 자신이 자기 주인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만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뱀은 진정한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땅에 살고 싶으면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스스로 채워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자아를 환경으로 사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약탈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떤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자아가 만들어낸 척박한 이집트와 같은 환경에서 종살이하고 있나요, 아니면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나요? 어린이처럼 부모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는 자신에게 양식을 주는 이를 부모로 믿습니다.
이는 증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양식을 주는 부모를 찾지 않으면 지옥의 삶을 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며 자아가 강해지면 자아는 그런 환경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며 창조자가 있다면 증거를 찾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기가 부모를 찾는 것은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믿는 것은 선택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창조자로 믿으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분이 창조자이심을 믿기 위해 십일조도 내야 하지만 내가 에덴동산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자녀들도 또 다른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천국의 백성이 됩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어린이처럼 그리스도를 하느님 나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두 선택밖에 없습니다. 뱀의 나라를 선택하든,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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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순발력, 임기응변이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빠른 분들입니다. 흔히 그런 분들을 ‘내공’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대사 중에 깊이 각인 되었던 대사가 있습니다. “잘 났어! 정말, 너나 잘하세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추우냐, 나도 춥다.” 이런 대사를 들으면 의미가 선명하게 살아납니다. 강론할 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날 전례와 맞지 않는 복음으로 준비한 때도 있습니다. 화창한 날을 예상하고 강론을 준비했는데 갑자기 비가 오는 때도 있습니다. 강론 중에 아이가 울거나, 스마트 폰이 울리는 때도 있습니다. 내공이 깊은 신부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별 무리 없이, 어떨 때는 더 깊은 감동을 주면서 선포합니다. 오랜 경험을 지닌 요리사는 신선한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만, 철 지난 재료로도 깊은 풍미를 주는 음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순발력과 임기응변의 원조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은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입니다. 유대의 율법에 따르면 그런 여인은 돌로 쳐서 죽여도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면 예수님은 새로운 메시아가 아니라 구약의 율법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이방인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손에 든 돌을 놓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아픈 사람,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제자들도 안식일에 밀 이삭을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과 제자들은 왜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그 밖에도 예수님의 순발력이 돋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면 됩니다.’ 우리가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언제나 기도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순발력과 임기응변의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빠른 비행기와 우주선으로는 태양계를 벗어나기도 힘이 들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업적으로는 피라미드 이상 높은 건축물도 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년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올 수 있도록 어머니가 10개월 동안 나를 품고 있었음을 감사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일어날 수 있도록, 걸을 수 있도록 나를 먹여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이 있었음을 감사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무상으로 모든 것을 받았으니, 나도 무상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능력을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있으며,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 감성이 있습니다. 우주와 세상의 시작을 사유할 수 있는 오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 분노, 미움, 원한’의 쓰레기를 담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 희생, 나눔, 배려, 인내, 사랑’의 보석을 담으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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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이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 가까이 온 아이들을 그분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의 행동을 보시고 언짢아하십니다. ‘언짢아하다’는 ‘매우 화를 낸다.’의 뜻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였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린이들을 쓰다듬어 주는 행위가 잘못이어서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막아선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린이를 쓰다듬는 행위는 안수처럼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는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습니다. 율법 학자가 제자나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고, 실제로 라삐들도 그러한 관습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은 아마 예수님께서 어린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셔야 하므로, 어린이들을 막아서는 것이 그분께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려한다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강하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보여 주시고자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몸소 손을 얹어 그들 앞에서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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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0,13-16: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15절). 어린이들이 부모를 바라보듯이 제자들도 하느님을 그렇게 바라보고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받아들이고 행하도록 하여야 한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아이들이 축복을 받도록 예수님께 데려왔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나무랐다. 어린아이들 때문에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언짢아하시면서 어린이들을 맞아주시고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이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14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온 아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어린이는 벌어먹지 않고 부모가 주는 대로 받는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과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자세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것은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 역시 세상의 지혜와 명예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에 있음을 알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주님이 가신 길이 어떠한 길이었는지 묵상하며 순간순간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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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3-16)
1) 여기서 ‘어린이’는, 작고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것없는 ‘소외계층’ 사람들, 즉 복음서에 보통 ‘작은 이들’로 표현되어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영적인 소외계층 사람들’도, 즉 죄인이라고 무시당하는 사람들과 ‘잃은 양’ 취급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포함됩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라는 말씀에서 ‘그냥 놓아두어라.’는 “내버려두어라.”가 아니라, ‘인도해 주어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소외계층 사람들이(‘작은 이들’이) 나에게 올 수 있도록(나를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인도해 주고, 안내해 주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인들은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소외당하지 않도록, 즉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일에(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더욱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하고,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인들이 실천해야 할 중요한 ‘사랑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이 기도는, 인간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당하지 않고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는 기도입니다.
2)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 신자들을 매우 엄하게 꾸짖은 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17.20-22) 이 말은, ‘아가페 만찬’을 하려고 신자들이 교회에 모여 있는 상황에서, 부자들이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킨 것을 꾸짖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라는 말은, “가난한 이들은 굶고 있는데, 부자들은 배불리 먹고 술에 취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 짓은 ‘사랑’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고, 가난한 이들을 교회에서 밀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큰 죄’가 됩니다. 그렇게 ‘사랑 없는’ 식사였기 때문에, 그 만찬은 ‘아가페 만찬’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 부자들의 위선만 가득한,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식사였습니다.
3) 야고보서에 있는 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야고 2,1-4) 만일에 교회 안에 빈부차별이 있다면, 그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절대로 빈부차별이 없다.”라고 큰소리치기 전에 먼저, 교회 운영과 제 단체 운영을,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늘 ‘베푸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잘난 체 하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늘 ‘받기만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 생각하면서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모두 ‘사회적인 기득권층 사람들’이 차지하면서, 그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4)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의 ‘어린이’는, 산상설교의 ‘참 행복 선언’에 언급되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마태 5,3-12) 하느님 나라는 가진 것이 많다고, 배운 것이 많다고, 신분과 지위가 높다고 우쭐거리는 교만한 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15절) 그 나라는, 하느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뿐이다.”라는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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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린이처럼>
마르코 10,13-16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어린이처럼>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하나로 모두
받아들이는 겁니다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서
받아들이는 겁니다
어린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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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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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부탁드립니다.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주임 신부님이신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께서 어제 아침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성모병원서 수술 후 입원중이십니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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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으로 어린이를 내세우신 것은 이례적입니다. 어린이는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알아갈수록 먹고 갖는 것에 욕심을 내고, 질투하며 사랑을 독점하려 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노출된 요즘 어린이에게 순진함이나 단순함은 어울리지 않는 듯싶습니다.
그런데도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린이의 숨겨진 마음이 있습니다. 엄마에게 한참을 혼나고도 울면서 다시 엄마에게 안기는 것이 어린이입니다. 욕심을 한껏 부리다가도 이내 잊고 작은 것에 다시 행복해지기도 합니다. 어른들처럼 생각이 많아서 잠을 못 이루는 일도 없고, 누군가를 미워하면 기억 창고에 담아 두고 늘 꺼내 드는 어른들과는 다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상상하듯 천사 같은 사람들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신 분별력과 혀와 눈, 그리고 귀와 마음을 통해 “그분의 위대하신 영광을 보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 열린 나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욕심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인생이란 그 세월 풀과 같아서, 들꽃처럼 그렇게 피어나지만, 바람 한 번 스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길이 없네.”라는 시편 저자의 말씀에 따라 어린이처럼 매 순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열린 나라입니다. 내가 꿈꾸고 있는 천국이 정말 이런 모습인지 되물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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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故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 가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우리의 관심은 무엇인가?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사람은 각자 자기 삶의 목표가 있고 그것을 이루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려는 것을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 부자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세계 챔피온이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그것만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과연 나의 인생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가지 달려왔고 또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가?
목표없는 인생은 불행하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먼저 목표를 분명히 세워 놓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따라서 성공하는 인생을 살려면 먼저 목표를 세우고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반드시 실천하고자 하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계획을 세우는데 실패한다는 것은 실패하기를 계획하는 것이다."라고 어떤 학자는 말했다. 산다는 것은 먼저 계획하는 것이요, 계획한다는 것은 목표와 방향을 세우는 것이요, 그 목표와 방향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먼저 명확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계획없는 생활은 실패를 가져온다.
한문에 始終如一(시종여일)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과 끝, 시작과 마지막이 한결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무슨 일이나 한결같아야 한다. 한결같다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한결같다는 것은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는 것이다. 꾸준하고 끈기가 있고 일관성이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결같다는 것은 작심삼일 하지 않는 것이다. 쉬지 않고 꾸준히 전진하는 사람만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쉬임 없이 흘러가는 강물만이 망망대해에 도달한다.
과연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나는 한번뿐인 내 인생을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무엇를 위해서 죽어야 하는가? 내 인생 목표를 잘못 세우면 일회성인 내 인생이 실패로 끝날 수 있다. 인생은 반복이 없고 연습이 아닌 실전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은 진지한 것이고 엄숙한 것이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목적지를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듯이 내 인생 목표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해 달려가야 한다.
옳은 길을 찾아가는 사람을 도인(道人)이라고 한다 바른 길을 찾고자 하는 이를 구도자(求道者)라고 한다.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것을 도통(道通)한다고 한다.
산다는 것은 옳은 길을 찾아가려는 부단한 노력이의 과정이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고 공자는 갈파했다. 이 말은 공자가 얼마나 인생의 옳은 길을 갈구하였는가를 잘 나타낸 말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보여 주신 분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선포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목표가 무엇이고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신 말씀이다.
즉 인간의 삶의 목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삶의 목표라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회개하기가 어렵고 복음을 믿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다시 한번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이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이다. 사람 숫자를 계산 할 때에도 넣지 않을 만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어린이를 막은 것은 이런 하찮은 사람을 자기 스승님께 데려 온다는 것이 기분이 상한 것이다. 데려올 가치도 없는 어린이를 왜 데리고 오느냐 하는 태도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린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나무랐다. 즉 그들의 무지함 또는 그들의 경거망동한 행동, 예의 없는 행동에 대한 질책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 어린이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행동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당시 당연시해온 사회적인 분위기였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화를 내셨을까?
예수님의 화는 제자들에 대한 화였다. 즉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를 위해 오셨고 누구나 다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잘못된 가치관 사회적인 관습을 깨트리려 오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교육시켜 오셨다.
그런데 아직까지 제자들의 인식과 사고는 조금도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없다.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함에 대한 화이다. 안타까움이다. 보고 보아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에 대한 화이셨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이는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밥을 먹고 싶어도 엄마가 해주지 않으면 먹지 못하고 어디를 가고 싶어도 데려다 주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어린이는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의 것이라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처럼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그 공로에 의한 어떤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선물로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거저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마치 자기가 받은 물건이 자기의 힘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 하느님의 선물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다. 따라서 복음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를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린이와 같이 순순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이들! 그들이 땅을 차지하리니.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이들! 그들이 하느님을 뵈오리니."(마태 5,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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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는 노트와 만년필을 이용해서 글을 씁니다. 그러다 보니 꽤 많은 노트를 사용하게 되는데, 노트를 쓰면서 가장 기쁠 때와 기분 좋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글이 잘 써질 때도 그렇기는 하지만, 가장 기쁠 때는 두꺼운 노트의 마지막 장을 채울 때이고 기분 좋을 때는 새 노트에 첫 글씨를 적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새 노트에 글을 쓰면서, 이번에는 더 잘 쓰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과거와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과 똑같다면 희망도 없을 것입니다.
강의 나갔을 때, 종종 청중에게 “최근에 뭔가 새롭게 시작한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몇 분이 대답하십니다.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한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한다, 운동을 시작했다,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등등의 답변이 들려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생기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런 분들의 모습은 어린아이와 비슷합니다.
아이들은 새로운 일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합니다. 새로운 일에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큰 관심을 갖습니다. 월요일 새벽 미사 끝나면 미사 나온 아이들 라면을 끓여주는데, 맛있는 라면보다 더 좋아하는 라면은 새로운 라면입니다. 그만큼 새로움은 어린아이와 가깝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희망을 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움을 지향하는 아이에게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됩니다. 예수님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
제자들의 꾸짖음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 선포로 너무나 바쁘신데, 어린이들까지 성가시게 나서서 예수님께 축복을 받는 것이 방해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희망’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희망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고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믿고 신뢰하는 것이 나를 이끌게 합니다. 그래서 희망하지 않는 것은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능성과 실현성에 대한 감각을 갖춘, 희망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3월의 첫날입니다. 바로 내가 희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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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이와 같이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과연 우리 성인들과 어린이는 무엇이 다를까요? 어린이는 하늘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언젠가 ‘아동 학대와 폭력’에 대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 글에는 아동 학대와 폭력이 왜 죄 중 극악한 죄인지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대략적으로, 글쓴이는 이런 의미를 글에 담아냈습니다.
아동 학대와 폭력은 극악한 죄 중에서 가장 극악한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힘없는 아이들을 학대하고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이들의 믿음을 자신들의 놀이로 사용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아빠와 엄마는 ‘신(神)’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학대를 겪고 폭력을 당해도 그들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아이들의 순수한 믿음을 죽음으로 몰고 간 범죄가 바로 아동 학대이며 폭력입니다.
위의 글을 읽고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특히 믿음을 이용한 학대에서 그 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이들이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이런 모습 아닐까요? 아이들은 하늘나라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처럼 머릿속으로 셈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와 세상 중간에 서서 무엇이 더 자신에게 가치 있는지 헤아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하늘나라를 마음에 품습니다. 그 안에는 셈이 없습니다.
셈이 없는 믿음은 주님을 기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의 기쁨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 역시 행복 안에 살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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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이라는 것은….
아기를 키우고 있는 부부의 집에 초대받았습니다.
조용조용….
아기를 재우고 옹기종기 과일 상을 마련했습니다.
두런두런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쯤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자고 있던 아기가 엄마 옆에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뛰는 것은 물론이고 걷는 것도 못 하는 아기가 어떻게 소리 소문 없이 엄마 옆에 와 있었을까요? 아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즉 ‘기어가기’를 시전했습니다. 그 속도는 가히 어마어마했습니다.
아기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와 최선으로 엄마 곁에 다가온 것입니다. 아기는 기는 순간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엄마를 향해 가는 엄청난 속도에 뿌듯해 하지 않았을까요. ^^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최선이란 그대가 가진 최고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최선 안에는 엄청난 힘이 들어 있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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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르코.10,14)
우리 안에는 내면의 어린이가 있습니다. 아직 미성숙해서 어리다고 하지만, 아직 순수함을 가지고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순진 무구한 어린이의 본성을 우리는 좋아하지만 현실에서 당장 도움이 되지 않아 자주 숨기고 삽니다.
아이들의 순수함은 우리 모두가 좋아합니다. 사람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순수함은 우리가 갈망하는 미래이기도 합니다.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던지는 자유를 품고 있기에 우리는 어린이의 순수함을 좋아합니다.
어린이의 열린 마음 또한 모두가 좋아합니다.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진솔함에서 빚어지는 그 용기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의 열린 마음은 자신을 감추고 거짓으로 살아야 할 필요가 없는 아름답고 진실한 세상을 담고 있기에 모두가 좋아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처럼 그들에게 힘을 입히시고 당신 모습으로 그들을 만드셨습니다."(집회서17.3)
하지만, 이렇게 창조된 어린이를 우리는 거부합니다. 아이로 살다가 너무 많은 좌절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간직하였던 우리의 순수함은 이용당하였고, 용기를 가지고 열었던 우리의 마음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세상이 우리의 순수함을 함부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아 어린이처럼 살기를 우리는 거부합니다.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받아들이던 우리의 용기가 이제는 너무 많이 세상을 알아 두려움으로 변했습니다. 세상이 두려워 아이들의 열린 마음은 닫힌 마음이 되었습니다.
비록 거친 세상에 살더라도 우리 안에 흐르는 순수하고 열린 어린이 같은 마음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순수와 열린 마음을 가진 우리 내면의 어린이를 되찾아야 합니다.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열린 우리들의 마음은 세상을 비추는 하늘의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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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3-16)
오늘 복음은 엊그제 복음에 내용적으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엊그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진정 큰 사람은 스스로를 억지로 드높이며 다른 이들 위에 힘으로 군림하는 이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그분 뜻인 사랑과 자비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부족하고 약한 이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품어 안는 ‘너른 품’을 지닌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합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안수를 좀 해달라며 예수님께 다가가는 부모들에게 ‘그런 하찮은 일로 예수님을 귀찮게 하지 말라’며 호통을 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그런 제자들의 완고하고 무뚝뚝한 모습을 보시고 마음이 언짢아지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력하고 힘 없는 존재,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으며 누군가가 돌보아주어야만 하는 존재, 그렇기에 강한 자들로부터 천대받고 사회에서 소외되는 작은 이들을 상징합니다. 또한 율법을 모르는 무지한 이, 철부지를 상징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부족하고 약해도 그 부모에게는 너무나 사랑하는 특별한 존재였기에,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축복해 주시기를 청한 겁니다. 병자가 예수님의 안수를 통해 치유의 은총을 받고 다시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아이들도 예수님의 안수를 통해 은총과 복을 받음으로써 한 사람의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해가길 바란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이들이 그런 순수하고 간절한 바람이 예수님께 닿도록 인도하지는 못할망정, 힘과 효율성이라는 세상의 논리에 따르며 그들이 예수님께 다가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으니, 그런 모습에 답답하고 화가 나실 법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더 강한 힘이나 더 뛰어난 능력을 얻으려고 애쓸 게 아니라, 그렇게 얻은 힘과 능력을 작고 약한 이들에게 휘두르며 자기 잇속을 채울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시는 작고 약한 이들을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 그들의 실수와 잘못, 부족함과 약함을 더 큰 사랑과 자비로 내 안에 품어안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차지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자비와 포용으로 어린이와 같이 작고 약한 이들을 받아들여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기쁨과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웃의 허물과 잘못을 ‘도끼눈’을 뜨고 째려보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딱한 사정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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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9장)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이라 함은 ‘하느님 나라’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가려는 이에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획득하는 나라’가 아니라 은총으로 ‘주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어른 이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어린이는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른들은 ‘아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일 것입니다. 어린이는 어떤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모르기에 놀라워하고 경이롭게 여기고 경외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채로 받아들입니다. 곧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까닭입니다. 아인쉬타인은 말합니다.
“경외심을 느끼고 감탄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떤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그것이 이해가 되면 받아들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곧 지성적 동의를 통해 아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른 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선사된 것, 베풀어진 것, 선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요, 주어진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은 의탁과 신뢰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결국은 사랑을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습니다. 곧 ‘베풀어진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선사되고 주어져 이미 ‘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와’ 있는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오히려 막고 있는 이들을 깨우치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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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주님!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놀라워하고 경배하게 하소서.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속해 있고, 당신 생명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아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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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성사”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머무르리라.”(시편103,17ㄱㄴ)
오늘은 3월 성요셉성월의 첫날 3월1일이자 삼일절입니다. 올해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 1919.3.1.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났으니 삼일절 10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희미해진 기억을 되살려보며 조용히 불러보는 삼일절 노래입니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미물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4대 국경일 노래를 작사한 분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위당 정인보 선생입니다.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이런 삼일절 역사를 지닌 구체적 대한민국 사람인 우리들입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아주 예전 어느 수녀의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참사람 하나 만나기 힘든 세상입니다. 극단적 이념에 경도된 광기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밤중 도착한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글입니다.
“연기처럼 사라질 인생이다.
집착하지 마라.
바람처럼 날아갈 인생이다.
욕심부리지 마라.
한줌의 흙이될 인생이다.
가볍게 살아라.”
허무하고 덧없는 무의미한 인생, 공감이 가지만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얼마전 ‘2024.12.20. 밤7:42분 붓을 들어 2025.1.11.무려 3주만에 탈고했다’는 도올의 ‘상식’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상식이 실종된 시대 상식을 일깨우기 위한 심정에 쓴책입니다. 후반부 내용중 공자와의 주고받은 문답입니다.
“인(仁)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아끼는 것이다.”
“선생님,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아는 것이다.”
“늙은이들에게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친구들에게는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젊은이들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공자야 말로 우리 예수님과 더불어 참사람의 원형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옛 현자의 말씀은 황금률을 실천함이 바로 참사람임을 깨닫게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되는 진리는 황금률이다. ‘나 자신을 대하는 것같이 항상 타인을 헤아리라.”<다산>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논어>
제 책상 위에 말씀집 3월 주제는 화광동진(和光同塵; 물들이고 싶거든 먼저 물들어라”입니다. 복음선포에 앞서 복음이 되라는 것이며, 사랑하기에 앞서 사랑이 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모상이자 하느님의 성사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인간의 신비를 해명할 길이 없습니다. 질문만 있고 답이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대한 해명입니다. 아쉽게도 전문이 아닌 일부만을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흙에서 창조하시고,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처럼 그들에게 힘을 입히시고,
당신 모습으로 그들을 만드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시고,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게 하시고,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영원히 찬양하게 하셨다.
그들의 길은 언제나 그분 앞에 드러나고,
그분의 눈앞에서 감추어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은총 선물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의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평생 과제입니다. 그분앞에 드러나는 모두의 참사람이 되는 공통의 길은 십자가의 길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사람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어린이처럼’이 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남녀노소 상관없이 열려있고 유연하고 신축적이며, 편견이 없는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 가난하고 깨끗한 이들입니다.
십자가 길의 여정에, 비움의 여정에 충실할수록 이런 천진무구의 어린이처럼 됩니다. 이런 어린이들의 접근에 완고한 마음으로 차단하는 제자들에게 몹시 불쾌해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을 물론 하느님의 모상이자 성사인 인간에 대한 사랑을 느낍니다. 사실 나이에 관계없이 내면의 인간원형은 순수한 어린이입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주님 안에 머물수록,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성장 성숙하는 각자 내면의 맑고 순수한 영혼의 어린이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의 어린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을 끌어 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따뜻한 스킨십의 달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안으시고 축복해 주시니 우리의 내면은 치유되어 어린이처럼 날로 개방적이고 순수해집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와 치유가 되는, 내면의 야수를 길들이는 주님 사랑의 따뜻한 스킨쉽을 닮도록 합시다. 이런 사랑의 스킨십의 결핍으로 날로 어두워지고 굳어지며 거칠어지고 사나워지는 사람들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보이셨나이다.”(마태11.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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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다시 어린이가 되는>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제 생각에 유산만 달라고 하고 받은 다음에는
부모를 버리는 자식이 제일 불효막심한 자식일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재산을 챙긴 후 아버지를 떠나는 그 아들과 같은 자식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만드시고 주신 그 모든 것을 소유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은 싫다고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탕자가 어린아이 때부터 아버지를 떠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의 재산보다 아버지가 더 소중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리 많은 재산도 다 헛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머리가 굵어지고 자기와 자기 세계가 생기면서 차츰 자기 것을 챙기기 시작하고 아버지를 떠나야지만 완벽하게 자기 세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종교를 믿었고 부모를 따라 성당에 갔었습니다.
그러다 사춘기가 되어 부모와 독립전쟁을 치르며 친구와 더 어울리게 되고, 어른이 되어 부모보다 연인을 더 사랑하고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게 되면서 부모의 종교와도 멀어지고 하느님과도 또 하느님 나라와도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다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이런 뜻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늙으면 애가 된다는 것에 나쁜 뜻도 있지만
이런 뜻에서 우리는 다시 어린이가 되어야 하고 늙을수록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제 자랑하는 것 같지만 현재까지는 제가 이런 뜻에서
어린아이가 되어가고 있다고 감히 말하곤 하는데
더 늙어서 나쁜 뜻에서 애가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늙을수록 이 세상에서는 멀어지고 하느님 나라와는 가까워지는 저를 꿈꾸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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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의로움과 복됨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 1,39-47)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말씀과 마리아의 짧은 응답'입니다. 마리아가 나자렛을 떠나 친척 엘리사벳이 사는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5)
그러자 마리아가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루카 1,46)
오늘은 3월 1일, 성 요셉 성월의 첫날이자, 첫 토요일인 '성모신심미사'가 있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을 기른 아버지 요셉을 함께 기억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복된 분입니다. 이 의로움과 복됨은 한 생을 드러나지 않게 끝까지, 그리고 모든 면에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의로움이며 복됨입니다. 그리고 시메온 예언자가 예언한 것처럼 꿰찔리는 아픔이 함께 한 의로움이며 복됨입니다.
점점 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기가 힘들어지는 세상입니다. 우리를 분열과 죽음으로 이끄는 악마들이 여기저기서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차리고,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무는 의롭고 복된 신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천상 양식을 받고 간절히 비오니, 이 성사를 통하여, 저희가 동정녀 몸에서 태어나신 성자를 받아 모셨음을 깨닫고, 그분을 입으로 고백하며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영성체 후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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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 15)
어린이의
마음이
하느님 나라의
가장 맑은
마음입니다.
삶에 재미와
기쁨이 있는
어린이가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주체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삶도
언제나
자연스럽게
만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연스러움이
편안한
관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편한 곳이
좋은 곳입니다.
편한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편한 곳에
편한 감동도
있습니다.
어린이의
정직한 고백과
기도 안에
유쾌한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어린이는 열고
어른은 닫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뛰노는
행복한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는 재미가
노는 재미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어린이들과 같이
즐겁게 놀고
즐겁게 감동하는
3월의 첫 시작이며
성 요셉 성월의
기쁜
첫날입니다.
먼저 잘
놀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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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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