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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선종하다.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선종( 1835년 10월20일 마가자)하자, 모방 신부는 단독으로 서울을 향하였다. 그는 이미 수 차례 왕요셉으로 부터 조선의 국경을 넘는 교육 받은 덕분에 이번 일이 낮설거나 두렵지 않았다. 왕요셉은 또 모방 신부에게 만일을 대비하여 봉황성 근처 장터에서 조선 신자들과의 접선하는 방법도 전해 주었다. 운이 좋으면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파견된 대표 신자들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836년 1월, 모방신부는 조심스럽게 봉황성 국제 장터, 국밥집을 찾아 나섰다. 그곳은 생각보다 쉽게 그에게 발견되었다. 왜냐하면 국밥집을 상징하는 깃발이 특별하였기 때문이다. 주변의 깃발들처럼 높고 호화로운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작고 초라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붉고 하얀 천조각, 하늘색 천조각 등으로 만든 누더기 깃발은 모방 신부가 볼 때 교황청 깃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과 청국의 상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깃발을 경쟁적으로 아주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청국 상인들은 대체적으로 크고 높은 장대를 선호하였다. 그 장대 끝에서 아래로 길게 늘어진 붉은 깃발은 점포마다 색다른 문양을 넣어 자신들을 알리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는 조선 대상(隊商)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백옥처럼 하얀 바탕에 힘있고 멋진 필체로 자신들의 상호(商號)만 새겨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대체로 조선인들의 상점(商店)은 청국인 것보다 작아 보이지만 내부가 깔끔하고 청결한 것이 특징이다. 상점들과 조금 떨어진 주점(酒店)들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손님을 잡아끄는 호객꾼들이 역관(譯官)들의 앞길을 가로 막는 것은 보통이다. 고급 인력거(人力車)는 물론하고 예쁜 기녀(妓女)들까지 등장 시키고 있었다.
국제 장터는 자신들의 대상(大商) 명예를 걸고 흥정하는 역관(譯官)무리들이 한 덩어리 되어 파도처럼 밀려갔다 밀려온다. 때로는 인기 상품을 중심으로 여러 무리가 서로 엉겨 붙어 격렬한 흥정이 벌어질 때이면 역관들의 물리적인 충돌을 막기위해 상주 경비병들이 출동하여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일들도 가끔 생긴다. 장터는 시작하는 날부터 끝날까지 몹시 시끄럽고 소란스럽다. 대상(隊商)들은 규모가 크고 호화로운 고급 주점에서 흥정을 할 때도 있는데 이해 관계가 큰 경우, 흥정이 가끔 폭력적인 난투극으로 비화될 때도 있었다. 그런 일을 대비하여 대상(隊商)들은 필수적으로 임시 사병(私兵)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이런 장터 끝머리에 아주 작지만 조용하고 깔끔한 국밥집, 그 국밥집 처마 끝에 묶어둔 장대는 호화로운 주변 환경속에 더 작고 외소하게 보였다. 장대 끝머리에 간신이 매달려 있는 鄭家店이라는 주점(酒店) 명패(名牌)는 외등(外燈)과 함께 작은 바람에도 심하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외등(外燈)은 한 밤중이 지난 새벽까지 켜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 외등은 영업중임을 알리는 표시였다. 선교사가 야간에 도착하여도 쉽게 찾아 볼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런데 그 주점의 깃발의 사연은 정말 특이했다. 바탕은 청국인처럼 붉은 것도 아니오, 조선인처럼 백옥같이 흰 것도 아니었다. 붉은색, 하얀색에 이어 하늘색 천 조각을 이어 붙인 소박한 깃발이었다. 천조각마다 한 글자식 정성드려 鄭家店이라고 수를 놓았던 것이다. 만일 선교사들이 이 깃발을 본다면 로마교황청 깃발로 착각할 정도였다. 누더기 깃발에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鄭家店은 대상(隊商)들을 따라 온 서민들이 부담없이 찾는 국밥집이었다. 대상(隊商)들이 볼 때, 鄭家店은 보잘 것 없는 하인들의 국밥집으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주점(酒店)의 주인은 바로 정하상 바오로였다. 그는 손님이 당도하면 누구나 차별없이 정중히 모시고 있었다. 鄭家店은 맛있고 깔끔한 음식과 함께 실력있는 역관(譯官)들이 늘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청국 대상(大商)에게 까지 은근히 소문난 국밥집이기도 했다. 특별한 손님, 또는 단골 손님이 방문하면 주인은 그들을 좀더 깔끔하게 고급스럽게 꾸며진 뒷방으로 모시곤 하였다.
장터가 중반전에 들어서는 어느 날, 북경 넘어 사막에서 시작된 모래 폭풍이 장터를 한바탕 휘젖고 있던 중이다. 사람들은 모랫 바람을 피해 두툼한 모자를 쓰거나 목도리 등으로 입과 코까지 막고 눈만 빼꼼이 들어 내고 있었다. 급한 일이 아니면 가겟문 조차 열지 않고 있었다. 이런 고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때를 훨씬 넘긴 오후 세시쯤, 풍체가 남달리 좋은 스님이 鄭家店에 불쑥 나타났다. 그는 머리에 커다란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목도리로 입과 코를 가린체 손에는 구불구불한 다래 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의 목탁소리는 몹시 작고 단조로웠다. 똑똑 또르르..., 똑똑 도르르... 멀리서 들으면 아마추어 무전사가 모리스 부호를 치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스님은 그 소리에 장단 맞추어 끊임없이 염불을 외우고 넉넉한 시주를 재촉하고 있었다. 손님 안내를 맡고 있던 청년이 이상한 듯 스님을 유별나게 살펴 본후 밥 한 공기를 공량 주머니에 넣어주자 그는 공손이 절을 하면서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시주가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청년은 막무가내로 버티고 있는 스님이 부담이 되어 뒷방에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정하상를 불러냈다. 하상 바오로는 청년의 보고를 받기전 스님의 목탁소리를 듣고 이미 그의 정체를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하상 바오로는 스님의 지팡이 그리고 목탁과 손을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본 후 그 분이 바로 선교사라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하상 바오로는 그 분을 뒷방으로 모셨다. 스님의 다래 지팡이는 구브러진 손잡이가 다시 펴지지 않도록 상하좌우로 예쁘게 묶어 놓았는데 그 모습이 얼핏 보면 십자가 모양처럼 보인다. 목탁 특별한 곳에도 보석이 박혀 있었으며, 스님의 검지 손가락 은반지는 묵주가 분명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왕요셉과 미리 약속한 표시들이었다. 정하상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조신철은 스님, 즉 모방신부님을 모시고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모방 신부님, 주교님은 아직 오시지 않는가요?”
“주교님은 1835년 10월20일 마가자에서 선종하셨습니다. 나는 주교님이 조선 국경을 무사히 넘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서만자에서 출발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11월1일, 부고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랐지만, 지체하지 않고 바로 마가자로 가서.... 그리고 21일 성모자헌 축일, 그곳의 본당 주임 고신부와 함께 주교님을 묘지에 안장해 드리고 바로 이곳으로 달려오는 중입니다. 산동반도에서 입국 준비 하시던 샤스당 신부도 나와 같은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상 바오로 형제님, 바로 준비해 주셔요. 그 분도 수 일내 이곳에 도착하실 것입니다.”
모방신부는 하상 바오로와 함께 조선 국경을 향해 출발하여 1836년 1월3일 무사히 조선 국경선을 넘었다. 그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장한 끝에 15일만에 무사히 서울 잠입에 성공하였다. 산동반도에서 대기 중이던 샤스당 신부도 간발의 차이를 두고 같은 방법으로 서울 잠입에 성공하게 된다.
모방 신부가 서울 잠입 후 첫 번째 펼친 일은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를 파리외방전교회 재치권 밖, 즉 압록강, 두만강 넘어 북경으로 추방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파리외방전교회 방침에 따라 방인 사제 양성을 서둘렀다. 조선 신학교를 어디에다 세워야 하나...
소주교 역시 조선교구 근처 청국에 신학교 설립을 선호 하였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은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현재 그 지역 즉 만주와 요동반도의 재치권을 갖고 있는 남경 주교(포루투갈 출신, 피레서 페레이라-pires pereira)는 공석중인 북경 주교를 대신하여 다음과 같은 교령을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요동과 만주에 거처하는 사제는 물론하고 일반 신자들은 소주교와 그 일행의 조선 선교를 돕거나 후원하지 마라. 소주교와 그 일행에게 숙식을 제공하거나 후원하는 경우에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라도 파면할 것이다...,
그 주교는 이러한 특별 지시를 만주와 요동 반도에 내린 상태였다. 왜 그런 교령을 내려야만 했는가? 원인은 아주 간단 명료했다. 그것은 그 주교의 지독한 소심 때문이었다. 현재 청국내에서 진행중인 아편 전쟁은 유럽인들과의 전쟁인데 갑자기 만주와 요동 지역에 유럽인들이 나타나면 청국 정부는 그 지역에 즉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감행(敢行)할 것이고 그 결과 수많은 순교자(殉敎者)가 발생하리라는 예견(豫見)때문이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조선교구 신학생들을 북경에서 수학시키고 조선으로 돌아가 사목을 펼치게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이었다. 소주교와 조선교구 설정 자체를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그의 말이 합리적일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재 북경 교구장은 공석이이기 때문에 누군가 그런 큰 공사, 즉 신학교 설립을 선 듯 떠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북경 또는 그 근처에 신학교를 세우려면 재정적 능력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진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을 뿐더러 현재 북경은 유럽 선교사들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특별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남경 교구장의 논리는 결국 소주교와 함께 조선교구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소주교는 남경 교구장의 절망적인 속셈을 알아 차리고 그의 교령을 처음부터 무시했다. 자신은 교황청에 의해 임명된 조선교구장으로써 단독으로 조선에 잠입하다 과로와 추위로 인해 여행길에서 객사(客死)하리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소주교의 후계자, 모방 및 샤스당 신부는 수 많은 억측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교구에 도착했다. 그들은 교황청으로부터 인준받은 조선교구를 성장 시키야만 했다. 그들이 선교지 조선교구에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 시급하게 해야할 일은 파리외방전교회 전통에 따라 방인 사제 양성이었다. 어떻게 시작하지.....?
우선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였다. 모방신부는 그들에게 가장 기초적인 라틴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매일미사 복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1836년 4월 26일 앵베르 신부가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과 카프사(Capsa)의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들러 왔다. 서울에서의 신학교 설립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요동반도와 만주 또는 북경에 조선신학교 설립은 재치권등 남경주교와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다. 모방과 샤스당 신부는 조선교구 제2대 주교님이 계신 마카오등에 신학생을 보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모방 신부는 정하상 조신철등을 안내자로 하여 조선의 첫 번째 신학생들을 마카오로 떠나 보냈다(1836년12월) 마카오 유학생 일행은 드디어 서울을 출발하였다. 그들의 첫 번째 도착지는 만주 봉황성이었다. 왕 요셉은 봉황성에서 조선 신학생들 맞이하였다. 그들은 유학생 무리를 장사꾼으로 포장했다. 그들의 상단(商團)은 마카오로 명명되었다. 열두명의 장사꾼과 함께 세명의 조선 신학생으로 꾸며진 마카오 상단(商團)은 서둘러 마카오를 향하였다(1836년 12월2일). 마카오 상단에는 강희 황제의 손자인 황손이도 끼어있었다. 그는 황제 자손만 교육받을 수 있던 상서방(上書房)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신앙 때문에 유배를 갔다가 풀려나 소주교의 한문 선생을 자처 한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신학생들의 한문 담당을 자청하였다. 왕요셉은 소주교를 모시고 있는 동안 지병인 폐가 더 악화되었는데 불구하고 이번 여행길 대장으로 자원하였다.
유학길 첫날, 왕요셉은 신학생들을 모으고 주의 사항을 전해 주고 있었다.
“마카오 까지의 유학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빠르면 6개월, 늦으면 1년 이상 걸릴 수 있는 순례길입니다. 오직 앞만 보고 가야합니다. 좋은 날도 있겠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급박한 상황도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중국은 지금 대형 민란으로 무척 어지럽습니다. 도처에 마적들과 반란군들이 서민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겁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정말 그래요?.”
겁많고 소심한 최방제가 되물었다. 그는 얼굴빛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갔다. 그는 두뇌가 남달리 명석하지만, 늘 소심하고 매사 소극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남보다 겁이 많은 것이 흠이었다. 왕요셉은 점차 나아 지겠지 하면서 하던 일은 계속 진행해 갔다.
“학사님들 중에 누가 제일 큰 형님이 되시나요?”
“똑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생일이 제일 빠르지요?”
“안드레아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십인대장(Decanus-데카누스)은 안드레아 학사님입니다. 대장은 기상과 동시에 –Benendicamus Domino-주를 찬미합시다-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Deo graatia-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나야합니다. 이 기도는 아마 사도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학생들의 전통 기도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왕요셉에 이어 이번에는 중국어 선생, 황손이 나섰다.
“모두 붓과 먹을 준비하셔요.”
‘凡不隨從惡人的計謀,不插足於罪人的道路,不參與譏諷者的席位,
Fán bù suí cóng èrén de jìmóu,bù chāzú yú zuìrén de dàolù,bùcān yǔ jī fěngzhě de xíwèi’
처음 시작하는 중국어 공부였다. 신학생들은 서로 얼굴만 처다보며 어리둥절할 뿐이다. 교장인 왕요셉이 안드레아를 지명하니 분위기는 더욱 난감하고 심각해져 갔다..
“십인대장 큰 소리로 읽어 봅시다.”
안드레아는 벌떡 일어나 유창하게 중국어 성경을 중국어가 아닌 서당식으로 읽어 내려갔다.
“惡人的 計謀에 凡不隨從하며, 罪人的道路에 不插足하며, 譏諷者的席位에 不參與하여라”
왕요셉과 황손이는 안드레아의 한문 실력이 제법 월등한 것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억망이 된 학습을 중단 시키지 않고 계속 진행해 갔다. 그는 말뜻을 알아 듣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신학생들에게 불가따 원본을 천천히 그리고 명확하게 읽어 내려갔다.
“Beatus vir, qui non abiit in consilio impiorum et in via peccatorum non stetit et in conventu derisorum non sedit,”
두 번째 문단 역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왕손이(중국어), 신학생(서당식 한문 강독), 왕요셉(라틴어) 형식으로 이어져 갔다. 다만 신학생은 안드레아에 이어 최양업, 최방제의 순서로 갈 뿐이었다.
“而專心愛好上主法律的,和晝夜默思上主誡命的,像這樣的人才是有福的!
ér zhuānxīn àihǎo shàngzhǔ fǎlǜ de,hé zhòuyè mòsī shàngzhǔjiè mìng de xiàng zhèyàng de réncái shì yǒu fú de”
“上主法律을 專心愛好하고 上主誡命을 晝夜默思하는 사람”
“sed in lege Domini voluntas eius, et in lege eius meditatur die ac nocte.”
왕요셉이 첫 번째 학습 과정을 강평하고 나섰다.
“학사님들께서는 모두 잘 하셨습니다. 라틴어와 중국어는 어순이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중국어를 잘 하면 라틴어 역시 잘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한문에 능통하십니다. 따라서 중국어 배움에도 별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더불어 라틴어도 어부지리로 잘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 언어의 뿌리는 라틴어입니다. 라틴어를 잘 하시면 영어, 불어, 스페인어까지 쉽게 통달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행운아입니다. 소주교님의 한문 선생님 이셨던 황손이 선생님이 바로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왕요셉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황손이의 한문 학습은 깊이 있고 내용이 풍부했다. 신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황손이의 한문 공부는 신학생들에게 신나고 줄거운 시간이 되어 갔다.
학습은 상단(商團)이 출발하기 직전에 실시 되었다. 세명의 신학생들은 조선에서 모방 신부로부터 라틴어 기본 학습과 한문을 배우고 익힌 후였다. 그런 이유로 그들에게 라틴어와 한문 공부는 낮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로 익혔던 라틴어는 미사때에 사용되는 전례문에 한정되어었다. 지금 학습하는 라틴어 학습 내용은 시편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라틴어는 친근하게 들려왔으나 그 말의 뜻은 전혀 알수가 없었다.
왕요셉이 시편을 택한 이유는 과거 페낭 신학생 시절 가장 흥미를 갖고 열심히 공부한 과목이 바로 시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시편안에는 인생의 희노애락이 모두 들어 있었다. 뿐만아니라 소주교님이 늘 강조하셨던 대목, 즉 “섭리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중 나가는 것”이라는 말씀이 시편 어느 곳엔가 있을 것처럼 보였다. 왕요셉은 그 귀절을 찾아 내기 위해 시편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처음부터 아주 꼼꼼히 그 말씀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황손이는 풍부한 인생 경험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신앙 때문에 황태자의 자리를 잃었지만, 결코 후회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궁중 상서방(上書房)에서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익힌 분이었다. 상서방(上書房)은 건륭 황제가 황제 자손들만의 학습을 위하여 만든 특수 학교였다. 건륭황제는 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중국의 고전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 즉 베트남과 버마, 티베트에 이어 몽고까지 모두 정벌하여 청국의 국토를 건국이래 가장 크게 확장해 놓았었다. 그러나 그런 황제에게도 힘든 일이 있었다. 소금천과 대금천 정복(건륭29년)은 뜻대로 되지 않고 엄청난 국력만 소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그는 자국에 들어와 천문과 지리학등에 도움을 주고 있던 선교사(예수회 수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그들은 황제에게 유럽에서 실제로 운영되고 있었던 신형 대포를 제작하여 황제에게 주었다. 황제는 신형 대포의 위력으로 소금천과 대금천 정복에 성공하여 그들을 다른 나라처럼 청국의 속국으로 만들어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건륭 황제는 유럽 선교사와 신형 대포 사건을 금방 잊어 버렸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아주 작은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청국이 패망의 길로 들어서는 아주 작은 첫 번째 틈새였던 것이다. 건륭과 주변 인물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아 차리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미 정복해 놓은 조공국가들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한결같이 외교 사절단, 그 대포의 주인에게 까지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만 강요 했던 것이다.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 그것이 화이사상(華夷思想)의 실질적인 내용이었다.
건륭에 이은 가경, 도광 황제들 역시 소금천과 대금천 정복에 사용되었던 신형 대포의 주인, 즉 유럽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황손은 상서방(上書房) 시절을 기억하면서 불현 듯 지나가는 상념속에 잠시 머물렀던 것이다. 정말로 그랬다. 황제의 아들들은 많을수록 황제의 지위가 튼튼하다고 하여 수명에서 수십명에 이르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상서방(上書房)은 늘 만원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로 지명되는 이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선택에서 제외된 황제의 아들들은 한명의 황태자를 제외하고 적당한 나이가 되면 황궁으로부터 수킬로 떨어진 곳에 머물며 황제에 대한 충성을 외치며 살아가야만 했다. 충성을 거부하면 역적으로 몰려 죽음에 이른다.
황태자의 지위는 천자에 이 두 번째 자리였지만, 그것 역시 사람이 만든 자리에 불과했다. 온갖 영화와 부귀, 세상의 모든것이 황태자의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것을 탐내는 인간은 끝도없이 많았다. 황태자는 먼저 황궁밖으로 떨어져 나간 형제들로부터 견제를 받는다. 모두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한 순간의 방심으로 황태자 자신이 역적이 되어 흔적없이 파멸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황태자는 한 순간의 방심도 허락되지 않는다. 늘 먼저 보는 사람이 승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경우 황태자 주변에 있는 자들이 황태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없는 죄도 만들어 내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이유로 황태자는 주변 권력 변동에 따라 죄도없는 형제들을 차례로 죽음으로 몰아 가기도 했다.
황궁안에서도 황태자의 적들은 수없이 많다. 하루 일과가 끝나가는 황궁의 퇴근 시간이후 황궁의 남자는 황제와 황태자만 남는다. 황궁에 밤일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인물은 황제가 아니라 환관(宦官)들이었다. 환관(宦官)은 황제를 섬긴다는 명분으로 온갖 탕약(湯藥)과 궁녀(宮女) 관리를 주도 하고 있었다. 황제(皇帝)가 환관(宦官)의 눈밖에 나면 패자(敗者)는 늘 황제(皇帝)였다. 수 많은 황제가 환관(宦官)의 눈밖에 나면 젊은 나이에 폐인(廢人)이 되어 이슬로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이 미천한 환관(宦官)의 저주(咀呪)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황손들 외에 많지 않다. 환관(宦官)은 마약등으로 황제(皇帝)의 육신(肉身)뿐만아니라 황제 영혼(靈魂)까지도 병들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궁정(宮庭) 비사(祕史)인 것이다. 황손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세상의 권력과 영화는 아침 이슬과 같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황손이였다.
황손은 영혼이 깨끗한 신학생들에게 최대의 존경과 예를 진심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또한 황태자 권력과 바꾼 자신의 신앙심에 대하여도 대단한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