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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사랑의 가객, 김현식」을 편자한 육상효씨가 日刊스포츠 기자로 활동 했을 때 김현식의 자서전을 담당하면서 쓴 내용입니다.
언젠가 그가 술묻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세상에 적이 있어. 그 적이 누군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밤마다 그 적들은 나의 방에 찾아와서 목을 죄어들어."
그는 그 적들의 정체를 모르는 채로 끝내 세상을 떠났다.
- 「사랑의 가객, 김현식」 中에서 -
그와의 재회는 곤혹스러웠던 첫 만남으로부터 약 한 달의 시간이 흐른 뒤에 찾아왔다. 서서히 나름대로 신문사 생활에 적응하며 그를 잊어가고 있을즈음 '스타 스토리'라는 한 사람의 자서전을 연재하는 고정란에 그가 나올 의사가 있는지를 물으라는 부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사실 나에게 그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첫 만남의 느낌으로 그가 하겠다고 응할 리도 없고 설사 그가 하겠다 하더라도 내가 맡아서 진행해야 할텐데 그와 함께 매일매일 고정란을 채워나간다는 게 무척이나 힘들 것이 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선 형식적으로 한번 물어보고 조금이라도 싫은 의사를 보이면 얼른 이를 빌미로 이 일에서 벗어날 속셈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그 전에도 그 스타 스토리 문제로 어느 선배가 그에게 제의해서 거절당했던 전력이 있다고 했다. 오랜만에 걸었던 전화에도 역시 그의 목소리에는 술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심드렁한 인사와 함께 스타 스토리 얘기를 비추었다. 의외로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연재하는 방법, 분량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더니 그렇다면 시작하자고 그가 대답했다. 나로서는 정말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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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1990년 6월경이니 그가 세상을 떠나기 네 달 전쯤이다. 아마 그는 이때 악화되는 건강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 어느 정도 들었던 것 같다. 스타 스토리에 응한 것도 이 죽음의 예감에서 오는 자기 삶의 정리 욕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내가 그 전화를 끝내고 그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도 그는 그런 말을 했다.
"한번 멋지게 정리해보고 싶어. 육기자가 도와주어야 할 것 같애." 라고 말하며 그는 간(肝)의 증세가 악화되면서 차오른 복수(腹水)로 올챙이 배처럼 튀어나온 배를 어루만졌다.
그는 될 수 있으면 자신의 느낌 하나하나를 다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쓰겠노라고 하면서 하루에 몇 장을 쓰면 되냐고 물었다. 일곱 매라고 답장해주었더니 어디서 생겼는지 국민학교 아이들 노트 같은 것에다 '7매'라고 꾹꾹 눌러적었다. 그날도 잔뜩 취해 있었지만 태도는 어느 때보다도 공손해, 7매라고 쓰는 그의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첫회 마감, 사진 계획 등을 그에게 말해주고 그의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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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우연히 방송국에서 나는 그를 또 볼 수 있었다.
그때는 한창 그가 강인원, 권인하와 함께 부른 노래 「비오는 날 수채화」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우연히 공개홀 가수 대기실에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 들렀더니 그가 다른 가수들 속에 섞여 무대의상을 갈아입고 있었다. 복수가 차올라 불룩 나온 배를 위장하려고 그랬는지 여름인 데도 풍성하고 두꺼운 스웨터 종류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나는 마침 다음날로 약속한 첫회 마감일을 한번 더 그에게 일러주고는 그의 녹화가 시작될 공개홀 한쪽 좌석으로 나가 앉았다. 가수 김현식의 무대 노래를 들어볼 심산이었다. 곧 그가 강인원, 권인하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강인원이 가운데, 권인하가 왼쪽 그리고 그가 오른쪽에 서서 자리를 잡자 「비오는 날 수채화」의 전주가 흘렀다. 강인원의 목소리로 노래가 시작됐다.
"음악이 흐르는 그 카……페엔 초콜렉색 물감으로……"
거칠고 그러나 힘있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PD의 요구에 따라 몇 번이고 계속됐다. 그의 얼굴에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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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약속된 원고를 받기 위해 그의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집에 없었다. 대신 그의 외아들 완제가 전화를 받아 병원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의 안위도 걱정이 되었지만 솔직히 원고도 걱정이 되었다.
황급히 병실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그는 의외로 밝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전후 사정을 묻는 나의 말에 그는 괜히 집에서 좀 쉬라고 강제로 집어넣었다고 말하면서 원고지 뭉치를 나에게 내밀었다. 원고를 들쳐보는 내게 그는 원고는 나중에 보고 우선 나가서 담배나 한대 피자고 말했다. 우리는 복도 의자에 나란히 나와 의자에 앉았다. 담배 한모금을 맛있게 들이마신 그가 무겁게, 다소 우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꾸 병원엘 다니게 돼. 벌써 한 오 년은 된 것 같아. 또 다니고 또 다니고, 병원에 와야 특별히 몸이 나아지는 것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더 아파지는 것 같은데, 자꾸 병원엘 오게 돼."
간호원 하나가 그가 담배 피는 모습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달려왔다.
"김현식 씨, 안돼요, 이렇게 말 안 들으면 때려줄 거예요." 그녀가 황급히 그의 손에서 담배를 뽑아냈다.
"그 손에 맞으면 좋지." 그가 우울한 표정을 거두며 말했다.
우리는 그 간호원에게 등이 떠밀리다시피 하여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원고 작성에 상당히 고심한 것 같았다. 정리되지 못한 원고에서는 시작인 듯한 장(章)이 여러 장 나왔다. 어느 것은 '모든 것은 나의 시행착오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었고, 어떤 것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세상을 나는 얼마나 가지려고 하는지, 그게 모두 잘못이란 걸 너희들은 알고 있겠지.'로 시작한 것도 있었다.
또 한 원고는 '그러니까 서로에게 마흔 사이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꿈과 희망과 절망을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쓰려고 한다.'로 시작하는 것도 있었다. 대학 리포트용인 것 같은 원고지 겉표지에는 제목란에 '너희들의 삶을 위하여,' 과목명은 '철학', 담당교수 '?', 무대학교 무대학, 1학년 1학번,' 성명 '김현식'이라고 되어 있었다.
- 계속 -
첫댓글 죽었을때 진짜 충격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