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롯유다를 볼 때 너무 쉽게 유다를 타인으로 만든다. “저런 악한 사람.” “저런 추한 인생.”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손을 보게 한다. “나를 파는 자의 손.” 그 손이 유다의 손으로만 끝날까? 오늘 우리의 손은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예배의 손 ? 헌신의 손? 주님을 사랑하는 손? 계산의 손? 거래의 손? 주님을 이용하는 손?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손이지만 사실은 사람의 인정을 붙드는 손일 수 있다. 기도하는 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세상을 더 움켜쥐는 손일 수 있다. 성경을 넘기는 손이지만 정작 마음은 탐심의 장부를 넘기고 있을 수 있다. 찬양하는 손이지만 은밀히 누군가를 미워하는 손일 수 있다. 우리는 유다의 이름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손을 봐야 할것이다.
유다는 예수님 곁을 떠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는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다. 기적을 보았다. 제자 공동체 안에 있었다. 사역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가까이 있음이 곧 참된 연합은 아니었다 것이다. 외적 거리의 가까움이 내적 사랑의 깊이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오래 다닌 것, 직분이 있는 것, 성경 지식이 많은 것, 봉사를 많이 한 것이 자동으로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지옥은 교회 밖에서만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소리 바로 곁에서도 자라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문제이다. 내 안에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에서 이루신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시기를 소망하오며의 그 소망의 대상이 앉아 있는가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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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글 감사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12제자로 부름받은 사람중에 예수님을 은30냥에 팔아넘긴 배신자가 나온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입니다.심지어 가룟유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자살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지근거리에 모시며 예수님의 설교나 기적 행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던 증인이며 복음전파의 현장에 함께했고 예수님과 동거동락했던 유다의 배신은 신앙을 떠나 인간적 시선으로도 배은망덕한 자로 지탄 받기에 충분합니다
내가 가룟유다의 길을 걷지 않았다며 유다를 정죄하기보다 유다의 가련한 최후를 동정합니다.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게 좋을뻔한 인생이다라고 하셨을까요?
가롯유다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가롯 유다를 통해 반면교사를 삼습니다. 열심히 종교생활하는건 구원의 길이 아니라 연단의 길일 뿐임을..
고동엽님이 잘 지적해주신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와 뜻을 구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나를 불러 성전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계획하심대로 내안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가을애님의 귀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과거 중3 때 학생회 회지에 가룟유다를 동정하는 글을 게재한 기억이 나는군요. 당시는 성경도 신학도 전혀 모르는 어린시절이었지요. 그동안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때는 우리도 그때 그때 가룟유다의 길을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zra님 귀한 댓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가룟유다
그는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열두제자 중 하나인데도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넘긴 자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된자의 길을 걷지 않도록 반면교사 삼겠습니다
아멘...감사합니다
능소화님,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