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는 일제의 통치방법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표면적인 변화를 보인 시대로 제한된 수의 언론기관(조선 동아일보의 창간 등)의 허가와 개벽 등 잡지의 발행 등을 허가하였다.
또 하나뿐이지만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고 제한된 수의 중등교육기관이 설립되고 초등학교도 증설하는 등 교육기회가 확대되는 모습을 보여주어 일제의 통치방법이 강압일변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개벽이라는 천도교에서 발행하는 잡지가 1920년에 창간되어(1926년 폐간) 비교적 장기간 발생되었는 데 차상찬은 이때 개벽사에서 기자로 일을 한 분이다.
차상찬(1888-1946)은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잡지사 개벽을 비롯해 별건곤, 신여성, 어린이, 학생, 혜성 등 잡지의 기자로 활동했다. 개벽을 제외한 잡지는 단기간 발행후 폐간되는 등 단명하였다. 차상찬은 어려운 시대 언론인으로 잡지를 통해 민중들을 깨우치려는 사명감으로 활동한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래에 소개하는 글들은 차상찬이 주로 1920년대에 개벽 등의 잡지에 기고한 글 중에서 기독교와 기독교인 개인에 대한 인물평을 한 글들이다.
차상찬이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천도교에서 발행하는 잡지에서 주로 일을 했고, 기독교에 대하여 호감을 갖지 않았던 개인적 한계가 있다. 따라서 그의 기독교와 기독교에 대한 관점이 당시의 상황이나 인식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고 차상찬 개인의 견해라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여 주기를 바란다.
아래는 차상찬이 개벽이라는 잡지에 실린 글이다.
평양은 당시 기독교의 교세가 가장 강하였던 지역으로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하였고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높았던 지역이었다. 아래는 차상찬이 본 평양거주 저명한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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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면 먼저 어떤 분야의 인물을 보는 것이 좋을까? 물론 관상을 보는 데 순서나 선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양은 세력으로나 인물로나 예수교가 제일 크다. 그 분야의 인물을 먼저 복 수벆에 없다.
아따. 평양은 참 목사님도 많고 장로님도 많다. 교회에 가면 물론이지만 서점에 가도 목사와 장로, 포목점에 가도 목사와 장로, 냉면집에 가도 목사와 장로. 심지어 코머리 집(기생 퇴물이 하는 요릿집)을 가도 목사, 장로요 고리대금업자도 아주 목사 장로의 대풍년이 들었다.
경성 야간시장을 가면 이 골목 저 골목애 사람이 수백명씩 에워싸고 약을 파는 약장수가 이크 이번에는 류목사님이 나오신다. 방장로님이 나오신다 하고 익살을 부리는 데 처음 보는 사람은 교회의 목사 장로가 나오는 줄 알다가 나중에 버드나무로 만든 유목사(柳木蛇)와 구충약인 네모진 방장뇌(方樟腦)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모두 배꼽을 잡고 웃지만 , 그에 비해 평양은 진짜 교회의 목사 장로가 그렇게 많다. 이 많은 목사 장로를 어찌 짧은 시간에 일일이 다 볼 수 있나. 대강 추려서 보자
첫째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목사는 얼굴이 멀리서 보면 환하고 성씨도 또한 길이지만 신수는 좀 불길하다.
같이 앞을 잘 못보아 3척 지팡이를 평생 길벗으로 삼는 데 수십여년간 공들여 쌓은 믿음과 덕망까지 기미사건(1919년 3.1 만세운동) 공판정에서 원수와도 같은 비겁한 마음이 북받쳐서 답변을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타락하게 되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어두운 눈에 아들이 죽는 아픔을 당하였다. 말년운수가 참으로 가련하다. 그러나 원래 신실하고 믿음이 독실한 까닭에 마음은 편안하여 몸이 점차 비대해진다. 그가 살아서는 방 안에 각종 서화를 걸어놓은 것을 보면 취미가 많아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암말로 ‘장님 단청 구경하는 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음으로 변인서 목사는 능라도 수박처럼 둥글둥글하고, 박치록 장로는 정직하고 과묵한 군자이기에 별로 볼 것 없고, 윤원삼 씨는 얼굴이 교만하이 많게 생겨서 잠을 보고 먼저 인사하는 법이 없고 교회 내에서도 목사나 장로가 아니면 악수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
곱사등이 춤 잘추기로 유명한 이덕환 장로는 세상에 다 아는 부부간 소송 때문에 머릿골이 아파서 요새는 춤도 쑥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산정현 교회 강규찬 목사는 원래 도필가(刀筆家) 출신인 까닭에 한 힘도 보통 이상이고 사교술도 상당하다. ‘하구요’ 소리를 썩 잘하는 까닭에 ‘하구요 목사’라는 별명을 듣는데 청년을 날 타이르고 달래는 데는 평양 교회계에서는 손꼽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김동원군운 장로 중 제일 젊은 데 재산이 있어서 상업회의소의 특별 평의원도 되고 관공서에서도 상당한 대우를 받는 오양인데, 그래서 그런지 적이 많고 건방진 면이 많다고 일반의 비난을 받으며 또 천당(天堂)보다도 전장(錢堂)을 먼저 찾아가는 특성이 있다.
아따! 어떤 사람 관상을 본다니까 교회에 있는 돼지가 나온다.. 7만원이파틑 거금을 내고(일시불은 아니지만) 정의 유치원을 설립하고 (민영휘의 휘문학교를 꿈꾼 듯) 새로 장로 칭호를 얻은 최정서 군은 원래 인색하기로 유명하여 ‘평양의 세 돼지’의 하나로 불리던 돼지였다. (최정서, 최벽부, 김진모를 일컬어 ‘평양의 세 돼지’라 함) 그이가 여러 無産者의 고혈을 착취하고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아니면 돈을 쓰지 않던 생각을 하면, 어째서 환장한 것처럼 교회에 입교하였으며 유치원을 설립하였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러나 전날의 잘못은 말할 것 없다. 돈이라도 바치고 하느님 앞에 속죄하면 돼지 칭소는 고사하고 천당에라도 뛰어 오를 것이다.
에라! 그 말은 그만두고 이제는 평양 조선예수교 청년회 총무로 조선물산 장려회와 민립대학 지방부라는 빈 간판을 떡하니 붙이고 꼬부라진 허리에 까만 눈을 깜빡깜빡하며 긴긴 여름 날 파리를 날리고 있는 조만식 장로를 보자. 그는 완고라면 찰완고요 괴벽가라면 참괴벽가요, 팔방미인이라면 또 팔방미인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성의가 철저한 까닭에 교회측면으로나 사회 측면으로나 평양에서는 아직까지 신망이 많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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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목사 : 민족대표 33인 중 31인은 일제가 유죄 판결을 하고 복역 후 독립운동과 항일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 공로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최린과 박희도, 정춘수 3명이 추후에 변절하여 친일 행위에 가담하여 친일인사가 되었다. 길선주는 무죄를 선고받았기에 독립운동 관련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사실이 이후 확인되어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길선주 목사는 50세 무렵 눈병으로 시력이 크게 손상되어 보는 것이 불편하였다고 한다.
길선주 목사는 33인에 동참의사는 표명하였으나 형장에 있지 않았고 무죄판결을 받은 것으로 당시에 비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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