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는 동주를 만나 국밥을 먹으러 간다.
동주더러 현석에게 전화하라 하니 산에 다녀 와 밥과 술을 다 먹었다 한다.
수육을 준다는 윗장에서 주차를 못하고 다시 아랫장으로 왔다.
머릿고기 국밥을 주문하는데 난 소주가 간질간질하다.
용감하게 소주를 참고 한춤 배우러 간다는 시각 전에 일어나 집앞에 내려준다.
먼 곳에서 와 만날 때는 술 마시고 재워달라거나 모텔을 찾았는데,
정작 오랜만에 만났으면서도 돌아 갈 생각에 술을 참는다.
거리가 가깝다고 쉽게 만나는 건 아니다.
처음 본 오천지구를 나와 연향동 쪽으로 가는 길은 밀린다.
간전으로 오는 길을 고민하다가 홈플러스에 들러 공책을 5권 산다.
글을 베껴 쓰는데 꼭 맞는 공책이 있어야 하나?
아무 공책이나 종이에 써도 상관없지 않나?
종중이 가게에 들러 한지를 사서 영대한테 가서 옛책 묶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을까?
볼펜으로 예기 몇 구절을 공책에 옮겨 적는다.
눈을 뜨니 5시 반을 지난다.
날씨를 보니 오후부터 비가 온댄다.
아침에 황전터널에서 철쭉나무 큰 곳을 다녀오기로 하고 차를 끌고 나온다.
효곡 논곡 금산을 올라 고개를 넘는다.
회룡마을쪽인가는 고원이다. 황전마을까지 높은 길이 산 아래로 이어진다.
터널 끝에 차를 세우니 5시 50분이 지난다.
지도는 잘 읽을 수가 없다. 방향감각이 없다.
미사치 0.9km를 보고 숲으로 들어선다.
길은 완만하고 숲은 훤하다. 10여분 숨가뿌게 올라 미사치에 닿는다.
철쭉나무 재배군락지는 2km가 넘어 1.3km정도 되는 갓걸이봉쪽으로 길을 잡는다.
길은 금방 가파라진다. 밧줄도 매어 두었다.
갓을 걸어둘 만한 봉우리? 누가 붙인 이름일까?
줄을 잡으며 부지런히 올라가니 암벽이 나타난다. 여기가 갓걸이인가 올라가니
쉰질바위다. 누가 여기서 쉰질을 했나? 쉰질은 어떻게 하는 걸까?
바위에 서자 포근한 바람에 내가 지나 온 도로 뒤로 계족산과 왕시루봉 너머 반애봉 아래에
하얀 구름이 걸려 있다.
저 멀리 천왕봉은 구름 아래 흐리다.
황전면과 구례구쪽을 내려다 보고 다시 더 올라간다.
산을 쳐다보는 이는 산봉우리 뒤의 봉우리를 보지 못한다.
봉우리에 서 또 건너의 봉우리로 건너가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일은
우리 삶에 비춰본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작은 건너의 봉우리를 오르기가 겁난다. 정말 겁쟁이다.
더 나은 경치를 위해 한층 더 올라가는 이의 마음을 난 이해한다하면서도 난 게으르다.
순천 시내의 아파트가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돌아온다.
해는 구름 위로 떠 오른다. 건너편의 판교쪽으로 내려가는 줄기가 계족산인지
저쪽 구례 오산 둥주리봉 지나 오는 쪽이 계족산인지도 모르겠다.
닭발이 몇개더라? 아마 이 줄기가 호남정맥의 구간인 듯도 한데 어디서 와서 어디를 지나
끝에 살짝 보이는 억불봉까지 가는지 모르겠다.
나도 백두대간이나 호남정맥을 정해놓고 걸을 수 있을까?
산걸음에 그런 게 중요한가? 지도를 만들 필요도 없고 피난처를 고를 필요도 없는 시대 아닌가?
아니 여전히 그러한가?
돌아오는 길은 진댈래도 보고 히어리도 보고 현호색도 보고 제비꽃도 본다.
히어리는 높이 피어 잘 보지 못한다. 내려오는 길은 금방이다.
미사치에서 지도를 다시 확인하고 터널 입구로 내려간다.
나뭇가지 소리가 나더니 저 앞에서 꼬리없이 엉덩이가 둥근 노루? 한마리가 급히 도망간다.
새들의 소리가 좋다. 키큰 나무 위로 가는 바람소리가 좋다.
봄 아침에 숲을 걷는 나는 나무와 풀과 꽃의 향은 모르더라도 그 속에 파 묻혀 걸어가는 것이다.
호젓한 산 아래의 아스팔트를 지나다가 수내마을의 서어나무들을 만난다.
아직 잎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