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한국 최초의 영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문제는 지금까지 최초의 한국영화로 인정받고 있는 <의리적 구토>라는 영화가 완전한 의미의 극영화가 아니라 연극 내용의 일부를 야외에서 촬영하여 연극의 중간에 상영한 소위 “연쇄극”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는 당시 신극좌를 이끌던 김도산이 단성사 경영주 박승필의 자본을 받아 제작하였고, 1919년 개봉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연극이라는 전체 작품 중에 일부로 상영된 영화다보니 온전한 의미의 영화냐에 대한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요.
제목도 <의리적 구투 義理的 仇鬪>냐 <의리적 구토 義理的 仇討>냐를 두고 이견이 있었는데, 1919년 개봉 당시의 매일신보 광고에는
<의리적 구토>로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한국 영화계는 <의리적 구토>가 처음으로 상영된 1919년 10월 27일을 공식적인 한국영화의 탄생기로 보고,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제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영화사가 안종화는 재산을 탐내 가문을 위기에 빠뜨리는 계모 일당의 음모를 물리치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한편 연쇄극이 아니라 극영화를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1923년에 제작된
<월하의 맹서>가 최초로 인정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이론이 있습니다. 즉 조희문과 같은 한국영화사 연구자는 1923년 1월에 개봉했다는 기록이 있는
<국경>이라는 영화가 최초의 극영화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일본 쇼치쿠사가 주도적으로 제작하였고, 연출자 역시 일본인으로 되어 있어 한국영화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또한 <월하의 맹서>가 조선인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1924년에 단성사 사장 박승필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장화홍련전>을 최초로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이 역시 광범위하게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현재로서는 1923년 <월하의 맹서>가 한국 최초의 극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월하의 맹서>는 조선총독부 우체국에서 기획하고 자본을 댄 저축장려 계몽영화로, 1923년 조선인 윤백남이 연출하였습니다. 영화사가 이영일에 따르면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득과 정순은 약혼한 사이였는데 서울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온 지식청년 영득은 노름과 주색에 빠진다. 그의 방탕으로 영득의 집은 도산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정순의 부친이 그때까지 저축으로 모았던 돈으로 영득의 빚을 갚아준다. 영득은 심기일전, 새 사람이 되어 정순과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월하의 맹서> 이후 1923년 하시카와 코주라는 일본인에 의해 <춘향전>이 만들어져 큰 히트를 기록하였고, 마침내 1924년 <장화홍련전>이 조선인의 자본(박승필의 단성사 활동사진 촬영부)과 연출(김영환), 촬영(이필우)로 만들어집니다. 이후 조선영화사는 나운규로 대표되는 무성영화의 전성기로 돌입하게 됩니다.
한편 <월하의 맹서>를 감독한 윤백남(1888~1954)은 소설가이자, 교육자, 영화감독으로 일제시대 뚜렷한 족적을 남긴 분입니다. 1923년 <월하의 맹서>를 감독한 이후,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나운규의 데뷔작으로 유명한
<운영전>(1925)을 만들었고, 최초로 순수 조선인의 영화사인 윤백남프로덕션을 차려
<심청전>,
<개척자>를 제작하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영화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만년에는 서라벌 예술대학 학장으로서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이셨다고 합니다.
참고자료
김종욱 편저, 실록 한국영화총서(하), 국학자료원, 2003
이효인, 한국영화역사강의 1, 이론과 실천, 1992
조희문, 한국영화의 쟁점 1, 집문당, 2002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도서출판 소도,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