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화 선생
묘향산 등반을 마치고 돌아온 후 안내원들과 ‘평양국제문화회관 민족식당’이란 음식집에 들렸더니 한복을 곱게 입은 여가수 정옥화 선생이 ‘울밑에 선 봉선화야’를 부르고 있었다. 식사를 하며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여기선 아버지에게도 ‘아버지 동무’라고 부른다던데 도대체 누구까지 동무로 부르느냐?” 라고 물으니 그들은 정색을 하며 “동무는 애칭이디요. 10년까지는 동무로 부르디만 50세 이상이면 애칭인 아바이로 부르디요. 아버지요? 아버지는 아버지로 부르지 누가 아버지를 동무로 부릅네까!”라고 한다. 또 <승리64> 운전기사 설용조(53)선생에게 “나이가 좀 지긋한 분을 10년 연하가 애칭이랍시고 ‘동무’ ‘아바이’로 부르면 기분이 어떠십니까?”라고 물으니 “나이 든 이에겐 ‘형님’ 이라고 해야지요.”라고 답하는 모습이 젊은 애송이에게 ‘동무’라고 불리는 것이 불쾌하다는 표정이다....
보현사에 있는 서산대사비, 안내하시는 분
이들이 우리의 역사와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정철 송강을 "우리 글로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시적 화폭으로 형상화한 당시의 업적은 크다" 라고 인정을 하나
"그러나 작품에는 량반 관료들의 유희적 기분과 봉건적 충군사상이 짙게 반영되어 있습네다!" 라고 하는데 좀 놀랬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우리 민족 모두가 흠모하지요 라고 할줄 여기고 한 물음이었느데
"그도 봉건군주에게 너무 나약했습니다!" 라고 한다 ...
내 나라, 하나의 민족이나 시간이 다르게 흘러 생각도 다르구나 ....
우리가 함께 품을 수있는 가치는 무었이 있을까?
내 고향에 왔으나 고향이 아닌 이곳에 서서 비감에 잠기는데
산사에서 내온 속절없는 차는 타향 나그네를 달래주고 있었다.
5/19/89
내가 태어난 곳을 찾아가 고향의 흙을 가져왔다.
1 gal 정도의 흙을 돌아올 때 LAX 세관에 사연을 말하고 신고를 하니 노신사 세관원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잠간 기다리라고 한다. 고향의 흙을 microove에 넣어 살균을 한후 잠시후 찻잔 정도의 흙만 주며 "고향에 다녀온 일을 축하합니다"
라고 후의를 베풀어 준다. 그 흙은 지금도 모교의 흙(천문기상반이 있던 곳의)과 함께 내집 내실에 있다.
을밀대
어머님이 날 업고 평양을 떠나시던 날 모란봉 을밀대를 바라보며 한없이 우셨다고 한다. 그 모란봉에 올라 어머님의 시선이 하염없이 닿던 을밀대를 구경했다. 6.25때 소실 됐을 을밀대는 의구(依舊)한듯 했다. 평양은 잘 구획되고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대동강은 서해 갑문으로 흐름이 멈춘 듯했다. 주체탑과 105층짜리 류경호텔, 개선문, 소년궁전은 웅장했고 능라도경기장, 천리마거리, 지하철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했다. 서울 남대문 같은 남문(南門)이 전화(戰禍)후 복원되어 평양 한복판에 서 있었다. 1989년 5월
평양관광을
하고, 냉면을
먹고, 대동강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내가 살았다던 기림리 땅에 가서 흙을 퍼 담기도 하면서 고향에
온 것을 실감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혹독한 한국전의
추위를 뚫고 이남으로 내려와 고된 삶을 꾸려 가시던
부모님에 대한 한없는 애정 어린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안내원에게 부탁하여
혼자 택시를
타고 평양거리를
다녀봤다. 그렇게
하면 믿음으로써
나그네 인생길을
걸으시던 아버님의
모습을 뵈올 수 있을 것 같아서였고 내가 유아세례를
받았다던 장댓재(장대현)교회의 무너져
버린 주춧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고
공산당에게 쫓기며
숨이 턱에 차던 우리 가족의
가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1989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