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에스파냐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행복은 하느님에게서 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기를 바라시며 그 안에서 참행복을 안겨다 주신다(복음).
음력 10월이 되면 시제(時祭)라는 것을 지냅니다.
5대 이상의 선조들을 함께 기억하며 묘소에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때 벌초도 하고 무너진 곳도 손질합니다.
먼 친족과는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기도 합니다.
직계든 방계든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동양의 전통입니다.
‘위령의 날’은 ‘서양의 시제’입니다.
앞서 간 영혼들을 기억하며 위령 미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사제들은 세 대의 미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중세 때부터 시작된 특전입니다.
더 많은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라는 취지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대로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라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때가 되면 누구나 하늘 나라로 갑니다.
그들과의 이별이 아쉬운 것은 애정 때문입니다.
그분들 역시 모두를 잊어버린 채 천국에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의 남은 이들을 위해 ‘반드시’ 기도하십니다.
죽음 저쪽에서 ‘행복을 누린다면’
지상의 가족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습니다.
성인 반열에 오르신 분만이 통교의 대상은 아닙니다.
연옥 영혼들과도 친교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앞서 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도 기도해 주십니다.
각박한 현실에서 ‘행복과 기쁨’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모든 성인은 의로운 삶을 사셨기에
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정화를 위한 연옥 영혼들도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지상교회가 기도를 바칩니다.
위령의 날에 교회묘지, 공원묘지, 성직자 묘지 등에서
세 번 위령 미사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위령의 날에 드리는 세대의 미사 중에서 사제는
한 대를 개인적인 지향으로,
또 한 대를 죽은 이를 위해,
나머지 한 대를 교황의 지향에 따라 봉헌합니다.
이 세 대의 미사전례 주제는 ’죽은 자를 위한 청원’입니다.
이 주제의 배경에는 ’죽음의 엄숙한 현실’, ’육신의 부활’,’
그리스도의 심판’, 그리고 ’영원한 생명’ 등
그리스도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 주제가 깔려 있습니다.
특히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정성껏 기도하는 교우들에게는
연옥 영혼에게 양도될 수 있는
전대사(죄의 잠벌을 모두 사면함)가 주어집니다.
서양에서는 위령의 날에 한국인의 추석 성묘나 시제처럼
대거 묘지방문을 나섭니다.
이 세상과 죽음 후에 맞는 세상은 다르지만
서로 기도로 통교하는 것이지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관습은
구약시대에도 있었고(마카베오 2서 12,45),
초기교회 때 미사성제를 드린 예(2세기 Tertullian)도 있으며,
13세기에는 로마에서 전례에 반영되었습니다.
위령의 날은 998년 클뤼니(Cluny)수도원의 오딜로(Odilo)원장이
산하 수도원에 한 해 한번 이날을 지내도록 한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연옥에 관한 신앙 교리는 피렌체공의회(1437)에서 확정하였고,
종교개혁 이후에도 트리엔트공의회(1563)에서 다시 밝혔습니다.
한스 멤링의 최후의 심판
예수님께서 종말의 날에 사도들과 옥좌에 앉아 최후의 심판을 한다.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수난 도구를 들고 있고 마지막 나팔을 분다.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두 손 모아 전구하고,
미카엘대천사는 저울을 들고 무거운 사람과 가벼운 사람을 구별하여
천국과 지옥으로 보낸다.
기도와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은 무거워서 천국으로 가고,
기도와 선행을 하지 않은 사람은 가벼워서 몸부림치며 지옥 불에 떨어진다.
지옥 불에 떨어지는 사람은 한 결 같이 공포와 두려움에 싸여 있다.
악마들은 몽둥이와 창과 채찍 등으로 폭력을 써가며
죄인들을 지옥 불로 밀어 넣고 있다.
그러나 천국으로 향하는 사람은 수정계단을 지나
고딕성당으로 표현된 천국의 문으로 들어간다.
천사들은 고딕성당 위에서 연주와 합창을 한다.
의인의 천국입성을 환영하는 것이다.
천국의 입구에는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는 사도 베드로가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있고,
천국의 문 앞에서는 천사들이 의인들에게 예복을 입혀주고 있다.
그런데 천국으로 들어가는 의인들도 서열이 있다.
교황과 추기경과 주교와 사제와 수도자가 먼저 천국 문으로 들어가고,
이어 일반신자들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것으로 작가는 가톨릭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선하게 살면 천국에 가고,
악하게 살면 지옥에 간다는 가톨릭의 교리를 표현하고 있다.
욥이 말한다.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욥기 19,23-24)
그런데 우리의 이야기는 항상 최후의 심판의 자료로 기록된다.
그러니 종말에 부끄럽게 되지 않으려면 착하게 살아야 한다.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고,
하느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 슬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하느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온유하게 살아야 하고,
주님 안에서 흡족하기 위해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 하느님의 자비를 입기 위해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하느님을 보기 위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고,
하늘나라의 상을 받기 위해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참아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난해도 주님 안에서 행복한가?
우리는 구원에 희망을 두고 사는가?
구원에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항상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