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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신동현
대 장 : 이중린李中麟 중 군 : 김도현金道鉉 선봉장 : 이인화李仁和 전방장 : 이중언李中彦 참 모 : 이빈호李彬鎬ㆍ이중엽李中燁 종 사 : 이장규李章奎 |
2차 선성의진은 1차와는 달리 처절한 전투를 치렀다. 선성의진은 안동ㆍ봉화ㆍ예천ㆍ순흥ㆍ영천(현 영주), 그리고 제천에서 온 호좌의진湖左義陣과 더불어 일본군 병참부대 공격에 나섰다. 상주 태봉에 터를 잡은 일본군이 그 목표였다. 당시 일본군이 부산에서 대구를 거쳐 서울로 연결되는 병참노선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 지점이 상주 낙동과 태봉을 거쳐 수안보를 거쳐 충주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래서 태봉 주둔부대를 의병들이 공격 목표로 지목했던 터였다. 호좌의진 별동대를 이끌고 3월 10일(양) 안동에 도착한 서상렬은 연합의진 결성과 태봉 공격을 제기하였다. 선성의진도 기꺼이 여기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전방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이중언이 거기에 참전한 것은 당연하다.
선성의진 선발부대는 예안을 출발하여 1차 집결지인 안동 풍산을 거쳐 3월 20일(음 2.7) 예천으로 향했다. 선성의진은 3월 26일(음 2.13) 예천읍내 강변에서 안동권 6개의진과 호좌의진 등 7개 의진 대표가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며 동맹을 서약하고 승리를 기원했다. 예천회맹이라 불리는 의식을 치른 것이다. 그 자리에서 연합의진은 다섯 가지 맹약문을 선택하였다. 역적의 무리가 되지 말 것, 중화제도를 바꾸지 말 것, 죽고 사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지 말 것, 사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적을 보면 진격할 것 등이 그 내용이다.
이중언이 예안을 출발한 시기는 3월 26일, 즉 예천회맹이 열리던 그 무렵이었다. 중군 김도현ㆍ선봉장 이인화와 더불어 그는 선성의진 본대 300여명을 예안을 출발하였다. 그 행로는 서촌과 풍산 수동, 그리고 예천 오천梧川 장터를 거쳐, 28일에 산양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도착 다음 날 전투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합의진은 눈비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밤을 이용하여 예천군 용궁으로 향했다. 연합의진이 용궁을 거쳐 산양에 진을 친 날이 3월 28일(음 2.15)이었다. 15년 전 1881년 영남만인소를 시작하면서 도소를 차렸던 곳이 산양이었으니, 이중언도 남다른 감회를 느꼈을 것이다. 선성의진은 3월 28일 영주ㆍ순흥의진과 더불어 영주 포내촌(浦內村; 현 문경시 영순면 포내리)에 머물고, 29일 아침 일찍부터 연합의진은 태봉공격에 나섰다. 일본군 보고에 따르면 연합의진 규모가 7천여 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본군은 100명을 넘지 않았지만, 의병에 비하여 무장력이 월등했다.
태봉전투는 이틀 동안 벌어졌다. 그 선두에 선성의진이 나섰고, 풍기ㆍ순흥ㆍ영주의진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일본군의 전투력이 워낙 월등하여 의병들은 밀려났다. 선성의진도 다른 의진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측 자료에도 당시 일본군수비대와 응원군 2개분대가 증파된 가운데 7천명과 치른 전투에서 의병 전사자가 30명에 이른다고 보고되었다. 29일 밤에 의병들은 대체로 예천으로 후퇴하였다가 출신지에 따라 흩어졌다. 선성의진은 용궁으로 갔다가 학가산으로 이동하고, 녹전을 거쳐 예안으로 돌아온 날이 3월 31일(음 2.18)경이었다.
이후 선성의진에서 이중언의 움직임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세밀하게 그의 움직임을 담은 기록이 없으니, 언제까지 의진을 이끌었는지 알 수 없다. 선성의진이 태봉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뒤에 선성산에 산성을 개축했다거나 기봉旗峰에 굴을 팠다는 활동이 보이는데, 선성의진이 적을 대비한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군과 관군이 본격적으로 예안에 밀려들자 선성의진은 청량산으로 들어갔다. 청량산淸凉山 산성을 기지로 삼고 버티자 일본군과 관군은 의병 근거지를 없애려 나섰다. 5월 31일(음 4.20)에 청량산 오산당吾山堂이 불태워지거나, 심지어 그 전 날 퇴계종가에 불을 질러 1,400권 문서와 책이 소실된 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중언의 집에서 멀지도 않은 상계마을 큰 종가에 방화사건이 일어났으니 모두들 황망하기 그지없는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난리를 겪은 뒤 열흘 지난 6월 10일(음 4.29)에 2차 선성의진은 해산하였다.
5. 다섯 역적(을사오적)의 목을 베소서
을미의병이 끝나고서 이중언은 다시 신암폭포 아래 은거했다. 그가 다시 역사의 무대로 나타난 것은 일제에 외교권을 강탈당한 박제순-하야시 억지합의(을사조약·을사늑약) 소식 때문이다. 그는 광무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리기로 작정하고 소장疏章을 지었다. 그 제목이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즉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이었다. 그리고는 조카 이빈호李斌鎬를 대동하고 서울로 향했다. 이에 앞서 옆집에서 이중업李中業이 부친 이만도李晩燾가 쓴 상소문을 갖고 서울로 향했다. 다리가 부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중업이 상경한 길이었다. 상소문을 써서 아들 이중업에게 상경하여 소를 올리게 하였다. 둘은 동시에 상소문을 대궐에 제출했다.
그는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라는 상소문에서 먼저 역사적 원수인 일본을 끌어 들인 잘못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강압함에도 불구하고 강제 병탄의 앞 단계로 가는 일제 정책을 단호하게 거부한 황제의 의지를 그는 높이 평가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섯 역적을 처형하는 일이 다음 순서라고 그는 천명하면서, 그 길이야말로 안으로 안정을 가져오고, 밖으로 조약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확인시킬 수 있다고 확언했다.
6. 나라가 망하자, 음식을 끊고 순국하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붙들 수도 없다. 의병도 일으켜 싸워보았고, 외교권을 빼앗길 때는 다섯 도적의 목을 베라고 상소도 올려 보았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적을 막아 나라를 되살릴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문을 걸어 잠그고 잠적한 채로 살았다. 이웃 어른 이만도는 산으로 들어갔다. 세상만사가 뒤틀려 어느 하나 바르게 돌아가는 것이 없는 나날이었다.
국치國恥, 마침내 나라를 잃었다.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망했으니, 하늘이 무너진 것이나 한 가지다. 만 60세를 맞은 이중언, 목 놓아 통곡하던 그는 “을사년 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오로지 한 올의 명주실과 다를 바가 없이 목숨을 영위해온 사람이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살아있는 인간으로 자처하겠는가.”고 말했다.
나라를 잃은 1910년 가을, 온 세상은 어둡고 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문을 걸어 닫고 세상과 발을 끊은 이중언은 갈 길을 가늠하고 있었다. 결국 자정순국이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을 굳혀 나갔다. 나라의 자존심을 살리고 겨레의 가슴에 결코 꺾이지 않는 힘을 불어 넣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날이 대개 9월 9일(음 8.6)이라 생각된다. 두문불출하며 각오를 굳혀가던 무렵에 마침 들려온 향산 이만도가 단식 소식이 그로 하여금 마지막 결단을 내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만도가 단식에 들어간 지 나흘 지난 9월 21일(음 8.18), 그는 소식을 들었다. 이만도는 재산 묘막에서 단식을 시작하였는데, 그 소식을 이중언만 늦게 들은 것이 아니라, 아들 이중업李中業이나 며느리 김락金洛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향산이 단식에 들어가리라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향산이 단식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놀라 벌떡 일어나서 “우리 숙부니까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우리 숙부의 이런 결행이 있으리라는 것을 진정 입산하시던 날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훌륭하신 일이 아닌가! 통쾌한 일이 아닌가!”고 말했다는 대목에서 확인된다.
그러다가 마침 9월 21일(음8.18) 사종숙부 향산 이만도의 단식 소식을 들었다. “과연 우리 숙부다”, 이것이 이중언의 외침이었다. 이미 그를 따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혁신유림으로 이름 높은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의 제문에서 그런 장면이 드러난다. “우리 장인이 반드시 뒤이을 것이다”, 이 말은 맏사위 김만식이 류인식에게 던진 것이다.
마침내 10월 10일(음9.8) 이만도가 순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마음에 새겨둔 그대로 밀고 나아갔다.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조상의 사당을 찾아 나섰다. 마침 바람이 매서운데다 물마저 차가워 아들과 조카들이 가마를 타고 다녀오길 권했다. 그러나 그는 “내 몸이 상처를 입어 손상되었는데 어찌 발이라고 해서 아까워하겠는가.”라 말하고는 걸어서 강을 건너가 사당 앞에 엎드려 곡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임북산林北山(임부곡)에 있는 부모 묘소를 살핀 다음 큰 종가 이하 모든 선조들의 사당을 두루 찾아가 참배했다.
선조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고하고 돌아온 순간이 단식 시작점이었다. 귀가하자마자 집안사람들이 권한 미음도 받지 않았다. 그가 단식을 선언하자, 부인과 아들은 당연히 만류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의 뜻은 단호했다. 아들 서호瑞鎬가 울면서 고하였으나 한 치 흔들림도 없었다. 또 맏사위 김만식의 숙부인 김소락金紹絡이 동은을 찾아가 “황제로부터 받은 은총이 향산響山보다 적으니, 굳이 향산을 따라 단식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라면서 단식을 그만두라고 간곡하게 말렸다. 그러자 동은이 “부인의 수절守節 여부도 남편의 은공恩功 차이에 따라 결정되는가?”라고 되물었다. 대과에 합격하고서도 관직에 나아간 기일이 짧으므로 굳이 향산의 길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단식을 만류하려 했던 것이 김소락의 뜻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에게 베푼 은공이 적다고 남편이 죽은 뒤 부인이 수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냐고 그가 되물은 것이다.
이중언은 단식을 시작한 다음날인 10월 11일(음9.9) 일제를 향해 「경고문警告文」을 썼다. 여기에 자신이 단식순국을 결행하는 이유와 목표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먼저 짐승 같은 무리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의리뿐’임을 강조했다. 또 우리 동포가 모두 여기에 매진하여 일제 강점을 용납하지 않도록 하는 초석이 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단식을 시작한 지 12일째 되던 10월 21일(음9.19), 그는 족손族孫이자 예안의 선성의진에서 활약했던 이선구李善求에게 “옷을 칠한 좋은 관棺은 쓰지는 말라”고 당부하며, 시를 읊었다. 이것이 앞에서 본 「술회사」다. 칼날 같은 마음을 풀지 못하는 처지를 탄식하면서, 순국한 이만도가 자신을 어서 오라 부르고 있다고 읊었다. 며칠 뒤 그는 상복차림으로 대기하던 친족들에게 그는 일일이 뒷일을 당부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염습도 얇게 하고, 장례도 달을 넘기지 말고 간단하게 치르라는 것이 그의 당부였다. 맏딸이 와서 울고, 사위들이 안타깝게 인사드렸다. 보름이 지나니 목이 막혀 말하기 힘들어졌다.
10월 4일(양 11.5) 일본 순사 3-4명이 조사한답시고 방문하여 음식을 강제로 권하라고 요구했다. 혼미해 있던 그가 갑자기 일어나 곁에 있던 사람에게 “너는 저런 놈들을 빨리 쫓아내지 않고 뭘 하느냐. 내가 당장 저놈들을 칼로 베어 죽이리라.”고 했다. 정신을 잃어가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기개는 서릿발 같았던 것이다. 임종이 가까워짐에 따라 시자侍者가 상투의 끈을 정돈하고 수염과 머리를 빗긴 다음 손을 들어 옷깃을 여미고 반듯하게 눕히니 숨을 거두었다. 단식을 시작한 지 27일 만인 10월 4일(양 11.5), 저녁 6시 무렵이다. 이렇게 그는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기 앞서, 그는 글을 남겼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 펼쳐보라고 가족들에게 일러준 봉서封書였다. 거기에 담긴 글이 바로 「경고문警告文」이다. ‘규범이 무너진 세상이라면 삶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의리를 지켜야하는 것이 성현의 가르침’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우리 겨레가 힘써 매진할 때임을 일렀다. 바로 그 글 아래에 ‘동은東隱’이라는 호가 적혀 있었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삶과 뜻을 담아낸 것이 바로 이 ‘동은’이라는 호였다. 동암 선조가 터를 잡은 마을, 그 마을을 지켜보던 ‘동암’ 바위 아래에서, 조용히 은거하고 살아간 선비가 바로 ‘동은’이었다. 그는 그렇게 불리고 평가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1910년 늦가을 하계마을은 온통 잿빛이었다. 이만도가 단식한 지 24일, 그리고 이중언이 그 길을 따른 것이 27일이었으니, 50일을 동안 하계마을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뜻을 세우고 떠나는 두 어른을 보내고, 또 장례를 치러야 하니, 온 집안이 석 달이나 침묵과 통곡을 이어갔다.
안동문화권에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인물들이 줄을 이었다. 이만도가 단식한 지 23일째, 곧 순국하기 하루 앞서 10월 9일(음9.7) 와룡에 살던 권용하가 나라가 망한 소식을 자세하게 듣고서는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피를 흘리고 자결하였다. 이만도의 순국 소식을 들은 봉화군 춘양면 내곡마을의 이면주가 9일 뒤인 10월 19일 음독 자결하였다. 물론 이때는 이중언이 단식에 들어가 있던 때였다. 또 나라가 망하고 종묘가 훼철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하회마을 류도발은 절명시를 남기고서 음식을 끊은 지 17일 만인 10월 26일(음9.24) 순국하였다. 단식 시작 날짜가 바로 이만도가 순국하던 날이다. 또 풍천 출신이면서 도산 토계에 살던 진사 이현섭은 “내 차라리 목이 잘릴지언정 어찌 오랑캐의 백성이 될까보랴”라는 시를 남기고 단식했고, 21일 만인 11월 26일(음10.25)에 순절하였다. 풍산 소산 출신 김택진은 이강년의진에 참가했던 인물인데, 역시 나라가 망하자 가족들에게 “천만금이 생겨도 친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한 끝에 11월 28일(음10.27)에 만 36세라는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중언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서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으로는 맏사위 김만식이 대표적이다. 그는 내앞마을 도사都事 김진린金鎭麟의 차남 김효락金孝洛의 둘째 아들이다. 백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이요, 큰 고모부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다. 그리고 막내 고모부가 이중업이니, 곧 향산 이만도의 맏며느리이다. 김만식은 큰 고모부를 도와 대한협회안동지회 설립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구국운동에 나섰다. 나라를 잃은 직후 이상룡을 비롯한 안동인사들이 망명을 계획하면서 그에게 만주지역 사전조사를 맡겼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백부와 큰 고모부 및 김동삼 등과 함께 그는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하고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를 출입하다가 1928년 청성진에서 일경에 붙들려 고초를 겪고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1933년 9월 사망하였다.
7. 마무리
동은東隱 이중언李中彦!
퇴계 묘소 발치에 있는 마을 하계下溪, 그곳에 터를 잡은 입향조 동암 이영도, 입향조를 상징이나 하듯 버티고 선 동암東巖, 그 바위 아래에서 살다간 이중언은 그래서 스스로 호를 ‘동은東隱’이라 지었다. ‘동암 바위 곁에 은거하고 살다가는 선비’라는 뜻이자, 그의 생애를 그대로 옮겨놓은 말이다.
그의 생애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만 60년 일생 가운데 전반기는 학문적 성장과 과거 시험 준비, 그리고 대과합격이 주류를 이루었고, 후반기는 나라가 무너지는 과정을 온 몸으로 버티면서 자신이 담당할 역사적 몫을 다하려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은 나날이었다. 30대에 척사운동, 40대에 의병항쟁, 50대에 다시 척사운동, 그리고 60에 자정순국으로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표현할 수 있겠다.
당시 나라가 무너져 가던 그 시절, 민족지성이 선택한 길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전통을 계승하면서 나라를 붙들어 세워보려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혁신적인 변화 속에 새로운 틀을 만들어 보려는 것이었다. 이중언은 바로 전자의 길을 걷다가, 나라가 무너지자마자 함께 산화해 간 민족지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가 선택하고 걸은 길은 오직 대의명분과 의리에 바탕을 두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그는 그것만 묻고 답하며 살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