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미카 5,1-4ㄱ 또는 로마 8,28-30
마태오 1,1-16.18-23
인간 본성의 신분 상승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말하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전합니다.
보통은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심성 상 자녀는 남자가 낳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태어나게 하는 주체입니다.
하지만 유독 그리스도는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십니다.
마리아가 낳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모 마리아께서 다윗의 후손임을 알 수는 없으나 아브라함의 족보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 사가는 한 이스라엘 여인을 구원의 족보에 끼워놓습니다.
족보는 구원의 계보입니다.
그 사람에게서가 아니면 다윗의 후손이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가 아니면 이사악이 태어날 수 없고, 이사악에서가 아니면 야곱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마태오는 요셉이 아닌 마리아에게서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수 없음을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족보에 끼일 수 있는 남자가 아님에도, 또 다윗의 후손임을 알 수가 없는데도 어떻게 그 족보 안에 들어갈 수 있는지 성모님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는지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족보에 성모님만이 아닌 다른 네 여인이 더 들어있습니다.
그들이 성모 마리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타마르’입니다.
타마르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결혼한 유다의 두 아들이 죽자 유다는 그녀를 쫓아내다시피 합니다.
그녀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집안의 씨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창녀의 모습을 하고 지나가던 시아버지인 유다의 씨를 받습니다.
그녀가 위대한 이유는 세상의 평가가 아닌 누구의 씨를 받느냐가 더 중요함을 알았다는 데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남편 요셉으로부터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온 사람으로 취급된 적이 있습니다.
또 ‘라합’이라는 여인도 나옵니다. 라합은 예리코의 창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리고를 무너뜨리고 점령하였습니다.
라합은 비록 이스라엘 적국의 여자였지만 이스라엘의 씨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배신하는 일이었지만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구원되는 길이 바로 그 길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라합과 그의 가족이 이스라엘에 의해 구원을 받습니다.
이 모습도 성모 마리아의 상징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이 세상 사람들의 씨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하늘의 씨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씨로 태어난 분이 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세상과 싸워 이기러 오시는 분의 씨를 받았기 때문에 성모님은 이 세상에서 영혼이 칼이 찔리는 아픔을 겪으며 사셔야 했습니다.
그다음엔 ‘룻’이 있습니다.
룻은 남편을 여의고 이스라엘의 씨를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의 권고대로 라합의 아들인 보하즈의 밭에서 일하며 보하즈의 씨를 받습니다.
보하즈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룻을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룻은 마치 예수님이 계시지 않던 무덤에서 울고만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연상시킵니다.
룻은 이방인이었지만 구원 백성의 씨를 받기 위해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인이었습니다.
밭은 소명을 의미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 구원 소명에 끝까지 항구함으로써 하느님에게서 오는 아드님의 씨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다 보면 그분의 씨가 잉태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입니다.
그녀도 역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우리야라는 남편이 있었지만, 다윗에게서 씨를 받았습니다.
다윗에게는 이것이 큰 죄가 되는 것이었지만, 어쨌건 그 덕분으로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요셉이라는 남편이 있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씨를 받아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분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부산에 가고 싶어 하십니다. 가족이 보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부산에 내려가셔도 가족은 잘 보지 않으십니다.
사실 호적만 있는 가족이지 친어머니는 어디 계신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연세가 드시니까 당신의 진정한 핏줄을 찾고 싶으신 것입니다.
분명 연세로는 돌아가셨을 것이 당연하지만, 그냥 어머니가 사셨던 부산이 당신의 어머니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족보는 어쩌면 마지막 때에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분의 핏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그 방법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씨를 받아야만 함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씨가 바로 주님의 뜻임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족보를 변화시키고 신분을 변화시켰는지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외도하거나 바람을 피우라는 말이 아니라 구원의 씨가 어디서 오는지 알라는 말입니다.
구원의 씨란 ‘하느님의 뜻’입니다.
인간이 자신들의 뜻이나, 이 세상에서 그 사람들에게 무언가 바라는 사람들의 뜻을 들어준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 백성의 족보에 들 수가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뜻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태어나신 날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셨지만, 족보를 바꾸심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씨를 받는 여인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이 신분 상승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 분이셨습니다.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더 높은 신분을 가진 이의 씨를 받아야 하는데, 그 씨란 곧 하느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종이 되는 길만이 합당하지 않은 이방 여인들이 하느님 자녀의 족보에 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마태오 1,1-16.18-23
참으로 완전한 사람은 자아에 죽고 주님께 사로잡혀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따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여러 축일들 가운데 탄생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부자였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 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 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 분은 서로 부둥켜 않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남아선호 사상이 강하던 당시 딸이다 보니 많이 두분의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지만, 즉시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성모님의 고향인 나자렛은 낙후된 지역 갈릴래아에서도 아주 후미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전체 인구를 다 합해봐야 4백 명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일제 강점기를 체험해봤기에, 당시 유다인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았는지, 나자렛의 마리아 역시 얼마나 팍팍한 삶을 살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즉시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산골 소녀 마리아를 총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실 당신의 통로이자 사다리로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나자렛 마리아에게 전해진 특별한 소식,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소식은 마리아 개인에게 있어 너무나 영광스럽고 황송스러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두렵고 부담스런 소식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초대에 응답함으로 인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의지를 기꺼이 내려놓음으로 인해 완전한 시온의 딸, 하느님의 딸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중세기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성모님의 충만하고 역동적인 신앙을 명문장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완전한 사람은 자아에 죽고 주님께 사로잡혀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따릅니다.
자신과 자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데서 참 행복을 느낍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과 진리만을 알고자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의 태어남>
2022. 09. 08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마태오 1,1-16.18-23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나의 태어남>
오래 전에
태어난
나는
오늘
새로이
태어납니다
첫날 이후
나날이 이어지는
나의 태어남이
늘 나를 낳으시는
하느님과
늘 나를 맞이하는
온 누리와
늘 새로 태어나는
나 스스로에게
탄식이 아니라
기쁨이기를
이 세상에서
나의 태어남이
멈추고
하느님 품에서
앞서 와는 전혀 달리
새로 태어나는 날까지
알알이 자그마한
나의 태어남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의 태어남들이
사랑하는 벗님들의
기쁨과 희망 가득한
고운 태어남들로
이어질 수 있기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