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안개니라 (약 4:13-17)
약 4:13-17=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성경은 이 세상을 일컬어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고해(苦海)란? “고생의 바다” 라는 말입니다. 살아가는게 왜? 이렇게 힘이 드느냐 하면 고생의 바다 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산다는 것 자체가 고생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살아갈 땅을 저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저주가 넘실거리는 바다입니다. 바다엔 늘 파도가 있듯이 죄인의 인생사 역시도 일평생 고생이라는 파도가 넘실거립니다. 오죽 하였으면 예수 밖 세상에서도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 라고 하며, 호사다마(好事多魔) 라고 하였을까요.
전도서 기자도 하나님께서 형통과 곤고를 인생들에게 병행하면서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웃는 날이다 싶으면 우는 날이 닥칩니다. 기쁘다 싶으면 슬픈 일이 닥칩니다.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원치 않는 일들이 닥칩니다.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닥친다 함은 우리 인생이 우리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하여 조정 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조정 당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움이란? 이런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금새 사라질 안개 같은 인생이 무슨 내일을 준비하느냐 라고 합니다.
저는 바닷가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바다를 잘 알아요. 바다엔 늘 파도가 쳐요. 단 한 순간도 파도가 없을 때가 없어요. 때로는 작은 파도가 치고 때로는 큰 파도가 칩니다.
사람들은 눈만 뜨면 그 넓고 깊은 바다에 손바닥만 한 나뭇배 하나를 타고 곡예사가 줄타기 하듯이 고기를 잡으며 살아요.
그런데 이 바다는 마치 미친 여자가 널 뛰듯하여서 아침에 잔잔하다가도 오후가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시시각각으로 돌변하여 파도가 쳐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서 죽어요. 제 친구 아버지도 그렇게 비명횡사를 하였고, 옆집에 사는 아저씨도 그렇게 죽었어요. 그래서 어촌 마을에는 미망인들이 많아요.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언제 태풍이 부는지 일기 예보를 듣고 조업을 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은 찾아보기 힘들어 졌지만 과거엔 그렇지를 못했어요. 지금은 배들도 철갑선으로 만들어 튼튼하여 안전하지만 과거엔 일엽편주(一葉片舟) 같은 조각배를 타고 고기를 잡았어요. 그러니 늘 불안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어요. 바다에서 조업을 할 때는 항상 조마 조마하며 하였어요.
가족들은 아버지가 바다에서 돌아와야 돌아 왔구나! 하고 안심하고 살았어요. 그러나 그 안심도 잠간 밤새 안녕이듯이 또 날이 밝으면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루라도 안 나가면 가족들 목구멍이 밥을 넘길 수가 없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또 나가는 겁니다.
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렇게 살아 갈 수 밖에 없어요. 이처럼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늘 죽음을 그림자로 달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과학이 발달해도 소용이 없어요. 죽음의 그림자는 과학이 발달해도 떨쳐 낼 수가 없어요.
오늘 저녁에 아내의 고향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어요. 무슨 내용인가 살펴보니 친구의 남편이 죽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화를 해서 물어 보았어요. 무슨 사고로 돌아 가셨느냐!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가! 물으니 아니랍니다. 집에 들어가 보니 이미 숨져 있더랍니다. 숨 쉬는 것이 귀찮아서인지 그냥 숨 쉬지 않고 있더래요.
이건 숨 쉬지 않는 그 사람이나 그 아내나 가족들이 예상한 일이 아니에요. 누구도 원치 않고 바라지 않던 일이에요. 그런데 죽음은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상의 하지도 않고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 왔어요.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가 급사를 하는 것은 마치 자욱한 안개가 햇살이 떠오르자 금새 사라지는 것처럼 예고 없이 찾아 온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인생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 할 수가 없어요.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하나님이 관리 하세요.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안위하기 위해서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다” 라는 말을 씁니다. 목숨은 하늘에서 관리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어리석게도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알고자 하지 않아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가 되어진 피조물들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스스로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살아가라는 명령에 의하여 살고 있습니다. 생명(生命)이란? “날” 생(生) 자에 “명할” 명(命)자를 써요. 하나님께서 살라고 명령해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피조물의 생명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살라고 하면 살고 죽으라고 하면 죽어요. 우리가 더 살고 싶다고 해서 더 살고, 우리가 죽고 싶다고 해서 죽는게 아니에요.
참새 한 마리의 목숨도 하나님의 허락해야 떨어진다고 했어요. 들에 피었다가 지는 들풀 한 포기도 모두가 하나님의 허락 하에 피고 지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서 수 없이 이런 말씀을 보면서도 그려러니 하고 살아요. 실감하지 않아요.
몇 일전 노무현 전직 대통령이 자살을 했어요. 언뜻 보기에 자신이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목숨조차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죽은 겁니다. 자살이든 잠자다가 죽는 것이든 사고를 당하여서 죽든지 그 죽음은 모두가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발생된 사건들입니다.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관리하세요.
물론 인간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내 죽고 싶으면 죽는 것이지! 라고 말할 수 가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자살에 실패한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실을 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말씀을 하셨어요.
요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보세요. 예수님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목숨을 얻으려고 스스로 지금의 목숨을 버린다고 합니다. 마치 자살한 것으로 들리지요.
하지만 다른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죽지 않으려고 밤이 맞도록 땀방울이 피가 되듯이 기도했어요. 죽기 싫어서 기도한 겁니다.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고 잡혀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셨어요.
왜? 그런가요? 아버지께로 갈 “때” 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보세요. 예수님께선 “아버지께 돌아갈 때” 가 이른 줄 안다고 하?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자살을 한 것은 아니지요.
예수님은 죽을 때가 되어서 죽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몇 년만 살다가 오라고 했어요. 마치 군인이 군대 생활을 하는 것이 정해진 때가 있어 정한 때가 되면 제대를 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한 때” 가 되셔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유월절을 맞추어서 죽으신 겁니다.
왜? 유월절에 맞추어서 죽으셨느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온 애굽에 죽음에 재앙이 임할 때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어준 어린 양의 실체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어서 출애굽 하였듯이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끄집어 낼 때가 되어서 죽으신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실체로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때를 다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실 만큼만 사시다가 죽으신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가 이른 줄 안다고 하신 겁니다.
“때” 라고 하지요. “때” 란 시기에요. “때” 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세요. 그러니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그 “때” 도 하나님이 주관을 하시는 겁니다.
자살도 하나님이 허락 하여야 할 수가 있어요. 어떤 분은 오래전에 사는게 힘들어 자살을 하려고 동맥을 끊은 적이 있어요. 그래도 죽지 못했어요. 이는 그 분은 죽을 “때” 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 분은 예수를 믿고 죽어야 하기 때문에 죽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서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가룟유다가 자살을 할 때는 막지 않은 것은 예수를 팔고 죽어 지옥에 가야 할 때이기 때문에 막지 않고 허락한 겁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그 집사님은 예수 믿고 천국을 가야 하기 때문에 예수 믿기 전엔 자살을 시도 하였어도 죽지 못하게 막아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원치 않게 죽음이 닥쳐 올 겁니다. 저 역시도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어요. 교통사고를 당할 뻔 한일이 여러번 있었어요. 그러나 죽지 않은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아서 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원치 않았는데 죽음이 찾아 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러합니다. 죽고자 할 때는 죽음이 피하여 가더니 이젠 살아야겠다고 할 때 불현듯 죽음이 찾아와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그 생명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전도서에 3장을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 이 있고 “때” 가 있다고 했어요.
중요한 말씀이니! 한번 살펴봅시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잘 보세요. 천하에 범사가 “기한” 이 있고 “때” 가 있다고 하지요. 천하란 해 아래란 말이고 범사란 모든 나날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연인 것 같지만 다 “기한” 이 있고 “때” 가 있다고 합니다.
“기한” 이란? 기간을 말하고, “때” 란? 시기를 말합니다. “기한” 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넌 몇 년을 살아라 하고 보내셨어요. 그리고 “때” 는 언제 죽으라고 했어요. 예수님으로 비유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가장 적절한 시기에 보내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를 “때가 차매”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는 겁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때가 찼다” 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시기” 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총 감독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물의 주가 되는 영화를 찍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무대로 “큐” 싸인을 내는 겁니다. 그러면 준비된 만물들이 자기 차례가 되면 등장하였다 사라집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들이 나고 지는 것도 하나님의 싸인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말들이 뛰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첫째 인을 떼시니 천사가 흰말에게 이리 오너라 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흰말이 뛰니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 미혹의 역사가 시작 됩니다. 둘째 인을 떼시니 붉은 말이 뛰니 온 세상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셋째 인을 떼시니 검은 말이 뛰니 온 세상에 기근이 임합니다. 넷째 인을 떼시니 청황색 말이 뛰니 온 세상에 갖가지 재앙으로 난리가 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하나님의 “큐” 싸인으로 움직여집니다.
제국의 흥망성쇠도 하나님 뜻이고 영웅호걸이 태어났다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때가 찼고 기한이 가까웠으니 회개 하라고 하지요. 회개란? 예수 밖에 있다가 예수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예수 안으로 밀어 넣는 일을 버리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예수 안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때처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신 그 때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을 시킨 것과 같아요.
그러니 저와 여러분이 2000년 전에 태어나지 않고 지금 태어난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에요. 이렇게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에요.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주셔야지 만 믿어져요. 인간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자기 죄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죄책에서 벗어 날 수가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속량해 주셨다는 것은 이성으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은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면 이상하게 믿어져요.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것과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다시 오신다는 것들이 믿을 수 없는 내용이지만 이상하게 믿어져요. 예수 안에 있으면 그 어떤 죄에서도 용서 받는다는 것이 믿어진다니까요.
여러분! 사람들은 생각할 때 착한 사람이 천국에 간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세상적으로 착한 사람이 죽으면 좋은데 갈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천국엔 착한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가요.
하나님은 인간의 착함을 착함이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죄인인 아담 안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인간 중엔 하나님이 인정하는 착한 자가 없어요.
테레사 수녀도 죄인이에요. 우리 인간들이 볼 때는 분명히 착한 일을 하다가 죽으셨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그 사람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 아니고 예수를 본받자고 한 사람이기 때문에 지옥에 갔어요. 그 분이 예수를 믿었으면 천국에 갔어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보세요. 그러니 착하게 산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전 착하게 살았으니 천국에 넣어 주세요! 라고 요구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선 예수님만이 죄 없는 분이세요.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만이 착한 사람이라고 인정해서 천국에 넣어 주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인간들이 받아들이겠어요. 그건 하나님의 횡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사실이 믿어져요. 예수 안에선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 당하지 않는 다는 것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세상에서 비록 악하게 살아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는 것이 믿어진다니까요. 그래서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적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이 믿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결과이므로 자랑치 못해요.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은혜를 주셔서 믿게 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도 하나님이 믿지 못하게 해서 못 믿는 겁니다. 전 이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탄복한 것이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지 않으면 목사이든 집사이든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 보면 그토록 예수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럼에도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안 받아 들여요.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시큰둥해요.
왜? 그렇겠어요. 그건 하나님께서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도록 그들의 귀를 막아 두셨기 때문입니다. 아주 섬뜩하지요. 이건 가족이라도 예외가 아니에요.
부모 자식이라 할지라도 예수를 믿는 것은 인력으로 안돼요. 교회는 부모의 강요로 나올 수는 있어요. 하지만 예수는 부모가 아무리 강요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게 된 것은 십여 년 조금 지났어요. 약 40여년은 교회 마당만 밟고 다녔어요. 그 많은 세월동안 하나님께서 제 귀를 막아두셨다가 십여 년 전에 열어 주셨어요.
십여 년 전에 열어 주셨다는 것도 얼마나 큰 은혜인줄 몰라요. 안 열어 주셨으면 어찌 할 뻔 했겠어요. 평생 교회 다니다가 지옥에 갔겠지요. 평생 목사 노릇하다가 지옥에 갔을 겁니다. 얼마나 아찔합니까? 그리고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지금도 과거 율법 아래서 교제하던 목사님들은 이 십자가 속에 담긴 비밀을 몰라요. 여전히 예수도 모른 채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어요. 왜?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 뿐이라고 하면 화를 낼까요? 십자가 피를 전하는 자를 이단이라고 할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귀를 막아 두셨기 때문이에요.
언제라도 저에게 귀를 여시고 마음에 문을 여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믿어지게 해 주셨듯이 그들에게도 믿어지게 해 주실 것을 바랄 뿐입니다. 그런 은혜가 그 목사님들에게 임하길 기도할 뿐이에요.
예수를 믿게 하고 못 믿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소관이니까요. 행여라도 저에게 은혜를 입혀 주었듯이 그 은혜가 그들 목사님들에게도 임하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니 내 일가친척 형제들에게 임하길 소원해 봅니다. 저희 일가친척 형제들도 다 교회에 다녀요. 그런데 복음을 몰라요. 언젠가는 저 처럼 복음이 믿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겠지 바라고 있어요. 제 간절한 희망 사항이여요.
아까 범사에 기한과 때가 있다고 했지요. 거기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들이 있어요.
다시 살펴봅시다.
전도서 3장 2절부터 8절까지입니다.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 할 때가 있느니라
자 보세요. “날 때” 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고 하지요. “극과 극의 때” 를 하나님께서 일으킨다고 하지요. 천국 같은 때와 지옥 같은 때를 교차하여 일어나게 한다고 합니다.
누가? 하나님이요.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닥친 환경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일으킨 때입니다. “때” 를 놓치지 마세요.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자기의 원함으로 되지 않아요. 제가 정씨 집안에 태어난 것도 하나님 뜻이고, 이 시대에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뜻이에요.
저희들이 어렸을 때는 미국의 구호품으로 살 때입니다. 학교에 가면 점심시간에 옥수수 죽을 주었어요. 그 당시 우리 모습들이 지금 저 아프리카 빈민들과 같았어요. 지금은 이렇게 기름진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먹지만 그 때는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살았어요. 6.25 전쟁으로 빈핍하게 살았어요.
젊은 분들은 이해가 안 될 겁니다. 이 시대 젊은이들은 배고픔의 아픔을 몰라요. 그러니 맨 날 데모 한다고 지랄을 떨어요. 설음 설움 해도 배고픈 설움만한 것이 없어요.
이 시대 젊은이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북한을 감상주의로 접근하지 않아요. 지금 보세요. 우리는 형제로 대하여도 그들은 핵무기 개발해서 미사일로 쏘겠다고 한국을 압박하잖아요. 믿을 수 없는 집단과 믿음으로 거래를 하자고 한 우리 대통령이 어리석지요.
그 당시 어린 마음에 왜? 나는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을까?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을까?부자 집에 태어나지 못하고! 어린 한 때는 가난한 부모님을 원망을 참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자랐어요.
제 이야기를 좀 할께요. 그러면 위에 때와 기한이라는 말씀이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
전 제 스스로를 생각하기를 원래 없던 자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58세 이셨고 어머니가 47세 때에 저를 낳으셨어요. 한마디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낳았어요.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과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 나이에 어머니가 경수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절 이 세상에 보내시려고 연장시켜 준 것이라 믿어요. 왜? 그 늙으신 분들을 통하여서 절 만들었을까요?
목사가 되고난 후 복음을 알고 난 후에 알았어요. 아! 하나님께서 이 십자가 피 증거하라고 그 할아버지 할머니 몸에서 나를 나게 하셨구나! 이건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국민교육헌장에 나와 있는 말처럼 전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 역사적 사명이란 다름 아닌 비진리가 홍수처럼 온 세상을 혼탁하게 한 이 시대에 작은 예수쟁이가 되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 약 40년 동안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면서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게 하시다가 늦은 나이에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전도서가 말하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 인 것입니다. 저를 사용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와 기한” 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고려나 조선 시대에 태어나게 하지 않고 지금 태어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지금 저와 여러분이 만난 것도 하나님의 때와 경륜에 의한 사건인 겁니다. 우리교회 블로그에 많은 분들이 방문을 하여서 복음을 듣습니다. 어제도 7천명이 넘게 들어왔어요. 지난 토요일엔 9천명이 오셨더니 주일엔 1만 2천명이 다녀갔어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블로그에 글을 읽고 너무너무 감격해서 이렇게 인터넷 상으로라도 만나게 된 것을 엄청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요.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다고 감사해요. 지금이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전화로 어떤 분은 댓글로 인사를 하는데 이러한 모든 일들은 저와 여러분이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연출하거나 기획하지 않았어요.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만난 것도 예상치 못한 일들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각본을 쓰시고 연출하시고 때와 기한을 정하시고 감독을 하셔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전 성도가 예수님을 만난 것을 “사건” 이라고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실제로 내게 일어난 흔적이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의아해 해요. 긴가! 민가! 하는 거에요.
긴가! 민가! 한다는 것은 안 믿어진다는 겁니다. 믿어지면 화답을 하지 긴가! 민가! 의심하지 않아요. 지금 저와 여러분이 만난 것이 분명한 사실이듯이 성도가 예수님을 만난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사건이에요.
여러분 사건은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일으키지 않아요. 외부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나요.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지나가다가 교통사고를 목격 했다고 합시다. 우연히 길을 가는데 그 사건을 목격했어요. 그 사건은 내가 일으킨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난 분명히 봤어요. 이러면 난 그 사건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판사가 묻습니다. 정낙원 목사님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세요. 보았으면 보았다! 못 보았으면 못 보았다! 고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사건을 목격한 시간이 언제이지요. 예! 새벽 1시입니다. 그 때 상황을 좀 설명해 주세요. 예! 전 교회에서 집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가 제 앞 쪽에서 흰색 소나타가 오토바이를 치고 가는 것을 봤습니다. 차 넘버는 1234입니다. 분명한가요. 예! 분명해요.
판사가 목격자에게 묻는 것은 그 사건이에요. 당신 어느 학교 나왔습니까? 몇 살입니까? 한 달 수입은 얼마나 됩니까? 직장은 어디입니까?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아이큐가 얼마입니까? 묻지 않아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동일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면 그 사람에겐 분명한 사건이 생깁니다. 예수를 만나는데 목사냐! 집사냐! 따지지 않아요. 남자냐! 여자냐! 많이 배웠느냐! 못 배웠느냐! 부자냐! 가난하냐! 나이가 많으냐! 적으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어떤 분이 저에게 물어요. 목사님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제가 되물었습니다. 목사가 뭘 하는 분입니까? 목사를 왜? 세웁니까?
복음 전하는 분이지요. 그럼 복음 전하는데 남자냐! 여자냐! 문제가 됩니까? 아니요. 그럼 여자가 목사 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지요.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목사라고 한다면 남녀노소를 따질 이유가 없지요.
아까 교통사고 사건의 목격자를 증인이라고 했지요. 사건을 목격한 것을 증거 하는데 남자냐! 어자냐! 구분할 이유가 없지요. 중요한 것은 사건을 분명하게 목격했느냐 이잖아요.
목사도 복음 증거자잖아요. 예수의 증인이?아요. 증인을 남자다 여자다 따질 이유가 없지요.
그럼에도 한국교회에서는 따져요. 장자 교단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여자 목사를 인정하지 않아요.
어떤 교단에선 미혼이거나, 이혼하면 목사 안수를 안줘요. 아니 복음 전하는데 미혼인 것하고, 이혼 한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요. 아무 문제가 없잖아요.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교단들이 이런 것으로 규제한다는 것은 정신머리가 딴 데 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들의 교리로, 그들의 조직으로, 그들의 방법으로 교회를 관리하고자 하기 때문이에요. 예수 믿는 것은 누가 관리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교회가 교인들 믿음을 관리를 해요. 마치 회원 관리 하듯이 하고 있어요.
한국교회의 교단들은 복음엔 관심이 없어요. 교인들 관리하기에 바빠요. 그져 교단이라는 조직을 키우고 지키기에 분주해요. 그러니 온갖 구실을 만들어서 규제하는 겁니다. 예수님에겐 관심이 없으니 그런 짓거리들을 하는 겁니다.
이런 거짓 목사들을 일어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에요. 왜? 이런 가짜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날까요? 그만큼 가짜 교인들이 많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에겐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 나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교회로 교회로 몰려드니 그 거짓 신자들을 추수 하려고 거짓 목사를 배출하는 교단들을 흥왕케 만든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데에는 인간의 조건은 방해가 되지 않아요.
할머니이든지 어린아이이든지 예수를 만난 사람은 분명하게 증거를 가지고 있어요. 누가! 할머니 예수님 아세요? 그러면 예! 내가 만난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고 하면 되요.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말하면서 사는게 증인으로 사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여주고 깨닫게 해 준 것만 큼만 전하면 되요. 보태고 빼고 할 것이 없어요. 여러분도 본 그대로만 전하세요. 만난 그대로를 전하세요. 예수 안에선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을 증거하면 되요. 그게 전도이고, 증거에요.
예수 믿는 것을 사건이라고 했어요. 사건은 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으켜요. 그러니 성도는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을 본 그대로만 증거하면 됩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여요.
신앙생활을 철학화 학문화 하지 마세요. 고상하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사건을 증거하는 일에 무슨 고상함이 필요합니까? 사건을 증거하는데에는 각색하거나 좋은 미사여구를 쓸 필요가 없어요.
신앙생활이란? 성령께서 인도하심 따라 사는 겁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울면 같이 울고, 예수님이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며 사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은 쉬워요.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예! 예수 안에선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에!
여기에 무슨 학벌이 필요하고 부자와 가난함이 필요합니까? 믿어지는 것으로 살면 되요. 아니 믿어지는 것으로 사는 것도 힘이 듭니까? 내가 믿음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는데도 믿는게 힘듭니까?
신앙생활이 힘들다는 것은 뭔가 만들어내고자 하기 때문이에요. 전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요. 신앙생활은 믿어지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사는 겁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아내가 있습니까? 그럼 아내 있는 대로 사세요. 아내가 없습니까? 그럼 아내 없는 대로 사세요. 아내가 있고 없고는 내가 예수를 믿는 것엔 전혀 지장될 일이 아니에요. 아내나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그럼 그냥 사세요.
당신이 예수를 믿게 해 줄 수는 없잖아요.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켜 주어야 하잖아요. 물론 교회는 데리고 나갈 수가 있어요. 그러나 교회 나간다고 예수까지 믿는 것이 아니에요. 한국교회 교인들 대다수가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지 예수 믿지 않아요.
이 시대 대 다수의 목사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목회하기에 바빠요. 목회는 교인들 관리하는 것이고, 교회 운영하는 겁니다.
교인은 사육하는 것이 아니고 양육하는 거에요. 사육은 관리 하는 것이고, 양육은 복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교회 운영하는 것하고 예수 믿는 것 하고는 전혀 상관없어요. 예수를 믿는 목사는 교인들을 관리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건 목사가 할 일이 아니에요. 그 교인에게 예수를 믿게 하고 안 하고는 하나님이 하세요. 그러니 목사가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 할 생각은 하지 않고 교인 관리를 하고 교회 운영을 하고 있어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자 수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제자들이 그들을 돌아본다고 말씀 증거하는 일에 게을리 하게 되었어요. 속된 말로 목회를 하고자 한 겁니다. 교인들 끼리 니편 내편으로 갈라져서 싸우고 난리가 납니다.
이러다간 안 되겠다 싶어서 일곱 집사를 세워서 교인을 관리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아나니아 삽비라 같은 자들이 교회 안에 생기기 시작했어요. 죄인이 모이면 선악으로 나누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큰 환란을 주어서 교회를 흩어버린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목회와 신앙생활은 달라요. 목회 하지 말고 신앙생활하세요. 신앙생활은 예수 믿고 사는 겁니다.
교인들이 떠나면 아! 하나님이 떠나게 한가 보다! 교인들이 오면 아! 하나님이 오라고 한가 보다! 하세요. 그 사람이 또 언제 떠날지 몰라요.
복음만 전하세요. 그게 십자가 안에서 하는 목회에요. 다 떠나고 없으면 혼자 믿으면 되지요. 뭐가 문제인가요.
이러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목회를 통하여서 뭔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교회를 직장으로 하고 목사를 직업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해서 먹고 살아야겠다고 하면 신앙생활 못해요. 교인들 비위나 맞추고 그들을 관리를 해야 하는 목회를 해야 되요.
신앙생활 하면 구원은 받는데, 목회하면 구원 못 받아요. 무슨 뜻인지 잘 새겨들으세요.
여러분들도 목사들이 복음만 전하면 아! 저 목사님은 신앙생활 하는 분이구나! 하고 같이 하시고, 복음은 안전하고 교회 운영하고 교인 관리하는 일에 몰두하면 아! 저 놈은 가짜구나 하세요. 아니 예수님께서 삯꾼은 목자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목자인냥 졸졸 따라다닙니까?
따라다니는 당신이 이상해요. 당신이 소경이니 가짜 목사를 따라다니는 겁니다. 가짜를 따라다닌다면 당신도 복음엔 관심이 없는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는 종교인일 확률이 높아요.
신앙생활이 힘든 이유는 예수를 안 믿고 종교생활하기 때문에 그래요. 종교 생활을 하면 목사 눈치 보아야지요. 교인들 눈치 보아야지요. 자기 이미지 관리 해야지요.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믿는 척 해야 하니 그 마음이 어디 천국이겠어요! 지옥이지!
그러나 예수만 믿고 살면 삶이 복잡하지 않아요. 아주 심플해요. 남에 눈치 볼 것도 없고 남에 이목을 신경 쓸 것도 없어요.
세상일에 관심 두지 마세요. 아무렇게나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쟁이의 본문을 잃지 말고 살란 말입니다.
이 세상은 다 지나가는 형적에 불과해요. 그러니 세상에 것으로 인하여 정신머리 빼앗기지 말란 말입니다. 저 서울 광장에 모여서 시간을 허비 하지 말란 말입니다. 예수를 위해선 울지 않으면서 왜? 지 옥간 죄인 때문에 그토록 애석해 하고 서글퍼합니까?
지금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한다고 난리입니다. 한마디로 만신전(萬神殿)입니다. 모든 신(神)이 다 모인 것 같아요. 마치 종교 박람회를 보는 듯 합니다.
한국의 4대 종단이 다 모였네요. 불교와, 기독교와, 천주교와, 원불교가 돌아가면서 축원을 합니다. 죽은 자의 원혼을 달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천국에서 살게 해 달라고 합니다.
다른 종교에서 하는 것이야 그렇다 쳐요. 어차피 뿌리가 같으니 한 통속으로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예수를 믿는 목사라고 한다면 달라야지요. 목사라는 자가 기도하는 것을 보니 가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공헌을 하였으니 참작해 달라고 합니다. 아니! 지옥에 간 사람에게 무슨 자비를 베풀어요. 이런 거짓 목사가 한국 기독교 단체의 회장이라고 합니다.
명성교회에서 나온 성가대는 한 술 더 뜹니다. 죽은 자를 위해 찬양을 부릅니다. 아니 찬송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지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찬송이 뭔지도 몰라요. 왜? 죽어 지옥에 간 사람에게 찬송을 부릅니까? 한마디로 세상의 모든 만신(萬神)들이 모여서 하늘을 향하여 소리치는 현대판 바벨탑을 보는 것 같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약에 예수를 믿었다면 저렇게 자살하지 않았을 겁니다. 누가 도적놈이라고 하면 예! 저 도적놈 맞습니다.
그러고 도적놈으로서 예수 믿고 살면 될 것 아닙니까? 욕을 하면 예수 안에서 욕을 먹고 살면 되요. 도적질 했다고 예수님이 속에서 가출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성도는 책임질 인생이 없어요. 책임질 것이 없으니 자살할 이유가 없지요. 죄로 인하여 자살을 한다는 것은 자기가 책임을 지고자 함입니다. 죄인은 죄를 책임 질수가 없어요. 자살 한다고 하나님 앞에서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여전히 선악 간에 판단을 받아야 해요.
노무현씨가 예수를 믿었으면 자살 하지 않았을터인데! 아쉽게 예수를 몰라서 자살을 한 겁니다. 책임지지도 못할 죄를 책임지겠다고 죽었으니 개 죽음인거지요. 검찰이 추궁하는 뇌물죄는 자살로 면피 될 수 있어도, 죄인으로서 받아야 할 죄는 자살한다고 끝나지 않아요. 그러니 하나님 안에서 보면 헛 죽음인 겁니다.
예수를 믿는 여러분들은 세상 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도 자살하지 마세요. 누가 여러분더러 욕을 하면 욕을 먹으세요. 그 욕을 먹는다고 여러분이 믿어지는 그 믿음이 사라지지 않아요. 구원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아요.
막말로 여러분들이 살인을 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아요. 살인을 하면 세상 법에 따라 사형을 당하겠지요. 하지만 사형을 당한다고 하여도 천국 가는 것에는 전혀 지장이 없어요.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에요.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성도의 구원을 취소되지 않아요.
만약 노무현씨가 뇌물죄로 감옥살이를 하여도 그가 만약 예수를 믿었다면 감옥 속에서 예수 믿으면서 살면 되요. 감옥에 갇힌다고 마음으로 믿어지는 예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잠시 감옥에 갔다가 나오면 되잖아요. 누가 손가락질 하면 손가락질 받으면 되요.
하지만 그 속에 예수가 없으니 그 손가락질 안 받으려고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서 자살을 한 겁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자기 딴엔 자기 명예를 지킨다고 하지만 그 명예가 지옥 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어요.
목사라고 하는 자가 죽은 자를 위하여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남에게 욕을 먹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에요. 기도하라고 해도 죽은 자를 위해 하지 말고 산 자들을 위해서 예수 안 믿고 죽으면 지옥에 간다고 해야지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후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말해줘야지요. 인생은 안개라고 해 줘야지요. 안개 같은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고 해야지요.
그랬으면 욕 뒤지게 먹었을 겁니다. 아마 난리가 났겠지요. 목사는 어떤 장소이든지 어떤 모임이든지 복음 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해요.
목사가 되어서 욕을 안 먹으려고 하면 안 돼요. 목사는 욕 먹게 되어 있어요. 죄를 고발하고 세상을 악하다고 하는데 어찌 욕을 먹지 않겠어요. 복음엔 반드시 미움과 반발과 욕이 따라 다녀요. 그게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살아야 하는 성도의 아픔이에요. 다름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미움을 받는 겁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미운 오리새끼들이에요. 다른 종자란 말입니다. 다름으로 살라고 예수를 믿게 해 주었는데 왜? 다름으로 살지 않고 같음으로 살고자 합니까?
바라건데 완벽하게 살려고 하지 마세요. 죄인이 완벽해 지고자 하는 것은 교만이고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때론 실수를 하더라도 부엉이 바위엔 가지 마세요.
살다가 보면 도적질 할 수도 있고, 남을 두들겨 팰 수도 있어요. 도적질 했으면 감옥에 가고, 두들겨 팼으면 두들겨 맞으면 되요.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이런 일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성도가 구원을 받는데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괜히 머리가 둔해서 제 말귀를 알아먹지 못해서 야! 정낙원 목사는 살인해도 되고, 도적질해도 되고, 남을 두들겨 패도 된다고 하더라고 하지 마세요. 자기 머리 나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남 탓하면 안 되지요.
이런 말을 안 해도 되는데 굳이 하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제 말을 알아먹지 못하고 시비 거는 돌 + 아이 = 천재들이 있어서 그래요. 일 못하는 놈이 연장 나무란다고 복음을 듣는 귀가 없어서 말귀를 알아먹지 못한 것으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증인이 되어 주세요.
다시 때와 기한에 대하여서 말해 봅시다.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때가 있느니라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고 하지요.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고 하지요. 대표적인 것만 살펴봅시다. 나머지는 응용하시면 되요.
웃을 일이 생기면 아! 하나님께서 웃게 하셨구나! 하고 웃으세요. 하나님께서 웃으라고 웃을 일을 만들어 주셨어요. 그러니 마음껏 웃으세요.
반대로 울 때가 생기면 아! 하나님께서 울 일을 만들어 주셨구나! 생각하고 우세요. 사고를 당했으면 아! 하나님께서 날 정신 들게 하려고 일으켰구나! 생각하세요. 주일날 교회에 갔다가 집에 가 보니 도둑 들어서 패물을 다 도둑맞았다고 한다면 아! 하나님께서 보내셨구나! 생각하세요.
성도는 어떤 사건을 당하면 뭔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사건 속에는 모두가 의미가 있어요.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은 여러분 몫이에요.
왜? 그랬을까? 그건 하나님하고 면담해 보세요. 성도에겐 의미 없는 일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전도사 기자는 인생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열거하여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남편이나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면 하세요.
바울이 그러지요.
누가 이혼 하자고 하면 까짓거 해 줘라! 그러잖아요. 이는 이혼 하는 것하고 예수 믿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이혼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복음을 제쳐두고 남편이나 아내에게 매이지 말란 말입니다.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라는 말도 예수님보다 더 가치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일에 올인하고 살란 말입니다.
그럼 이런 시각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약 4:13-17=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어떤 사람이 돈을 벌려고 멀리 장사 길에 나셨다고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이면 돈을 많이 벌게 될지 모른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런 일을 허탄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냥 허탄하기만 하면 덜하겠는데! 이런 일을 “악한 것” 이라고 합니다. 아니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일이 악하다고 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뭔가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왜? 이런 일을 악하다고 할까요.
그것은 내일 일을 알지도 못하는 자가 내일 일을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미리 미리 준비성 있게 사는 것을 지혜라고 배웠습니다. 요즈음 보험이 유행입니다. 살기 어려울수록 보험을 많이 든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앞날에 대한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앞날을 왜? 불안해할까요? 모르기 때문입니다. 앞날을 알면 불안해하지 않지요.
그럼 묻습니다. 성도는 앞 날을 아는 자입니까? 모르는 자입니까? 아는 자들이지요. 장차 이 세상이 어떻게 되고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잖아요. 천국에 간다는 것을 알잖아요. 죽어도 부활을 한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렇지요. 설마 이것도 모르고 예수 믿는다고 하진 않겠지요.
성도가 되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앞 일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뭔가 수상해요.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천국이나 부활을 관념으로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관념은 믿음이 아니에요. 안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두려운 겁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뭔가 하면 죽음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전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흥분이 되요. 설교 할 때도 죽음에 관한 설교를 할 때가 기쁘고 힘이 나요. 왜냐하면! 죽음 이후를 알기 때문이지요.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무(無) 계획적으로, 무(無) 개념으로 살란 말이 아닙니다. 무(無) 책임하게 살란 말이 아니에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를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의미에요.
오늘본문에서 인간을 뭐라고 합니까?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간 보이다 사라질 “안개” 라고 하지요. “안개!” 그것도 “잠간 보이다가 사라질 안개” 라고 합니다. 해가 뜨면 금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안개라고 합니다. 누가! 우리 육신의 생명이 그렇답니다.
그럼 안개로서의 지혜는 뭘까요? 금방이라도 해가 뜨면 사라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해가 뜨기 전에 사라질 안개라고 한다면 내일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없지요.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를 내일처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기름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 비유가 나오지요. 이 모든 비유는 어떤 자세로 살았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현재 신랑이 오는 것처럼 살았어요. 하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올 날을 예측하고 살았어요. 아마도 지금은 안 올꺼야! 아직 올 때가 안 되어서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는데 신랑이라고 하니 그때 준비한다고 하니 늦은 겁니다.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에요. 착한 종은 주인이 멀리 갔다고 생각하지 않고 현재 있다고 살았어요. 장차 닥칠 일을 현재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악한 종은 주인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주인이 올 때가 되어서 준비하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처럼 말하면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내일 일을 알지도 못하면서 내일을 위해 산다고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난 오늘 밖에 없는 안개야! 라고 한다면 내일은 없는 겁니다. 그러면 항상 오늘로 살수가 있어요.
이 말은 지금을 내일같이 살란 말입니다. 나중에 예수 잘 믿으려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살려주는 생명으로 사는 자들에겐 내일이란 없어요. 하나님이 언제 그 생명을 거두어 가실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겐 나중에 형편 되면 예수 잘 믿을께요! 라는 말이 성립이 안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우리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지금 현재 믿는 겁니다. 지금 현재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지요. 이는 현재 살아있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예수 믿는 신앙을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내일 일이 아니고 오늘 지금 당장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지금 하는 겁니다. 지금 예수를 믿음으로 사세요.
오늘 주어지는 은혜로 사셔야 해요.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구하세요. 지금 은혜가 없으면 달라고 하세요. 내일 달라고 하지 마세요.
내일은 우리에게 올지 안 올지 몰라요. 그건 하나님 마음이에요.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살려주면 살고 살려주지 않으면 죽어야 해요.
그러니 지금 하나님을 만나셔야 해요. 지금 믿어야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갑니다. 나중은 우리에겐 없어요. 그래서 내일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하고 악하다고 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내일 다시 만난다는 것은 보장 할 수가 없어요.
지금 헤어져 집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을지 몰라요. 아니면 잠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을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 지금 만났을 때 복음을 들어야 해요. 저 역시도 지금 복음을 전해야 해요.
그래서 전 교인들을 믿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다음 주일날 교회에 올지 안 올지 모르잖아요. 툭 하면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다 라는 생각을 해요. 그러니 설교가 때론 책망이 담기고 애탐이 담기게 되는 겁니다.
상대방에게 죽는다고 하면 기분 나쁘니까 전 제가 오늘이라도 죽을지 모르니 복음을 들으라고 소리치는 겁니다. 내일은 우리 날이 아니에요. 성도에겐 내일이란 없어요. 항상 오늘뿐이에요. 우리더러 안개 그러니 기분 나쁘지요. 우리 인생을 잠간보이다가 사라질 안개라고 하는 것은 가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인간을 가치 있게 안 봐요. 하나님은 죄인을 지렁이 이고 바퀴벌레로 봐요. 오죽 했으면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했겠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게 생가하지 않아요. 이게 문제입니다.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자기를 치장하게 되는 겁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약 자신이 지렁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자살하지 않았어요. 자기의 죄는 자기가 감당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인사가 자기가 자기 죄를 자기가 책임지려고 자살 한 겁니다. 죽으면 자기 죄가 사라지는 줄 여긴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책임 지려고 죽은 겁니다.
그냥 죄인으로 살았으면 될터인데 의인이라고 착각한 겁니다. 남에게 조롱당하는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서 자살한 겁니다. 자기 명예를 지키려고 부엉이 우는 바위에 올라가 투신한 겁니다.
이 양반이 오늘 본문만 알았다면 자살하지 않았어요. 모두가 예수 밖에 있으니 이런 말씀을 몰랐던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자살하고! 지옥에 가고!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 주변에 수많은 목사들이 포진해 있어도 그 어떤 인간도 이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어요.
예수를 알고 하나님 앞에선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차라리 욕을 들어 먹더라도 그래도 추종자들이 있으니 전직대통령 예우를 받으면서 주군(主君)으로 살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불쌍하게도 죽으면 지옥으로 가는 것을 모르고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겁니다.
노사모에 있는 목사들이 뭘 했는지 몰라요. 하기야 그 놈들이 복음을 알았으면 노사모 활동을 하지 않았겠지요. 복음을 알았으면 그런데 활동할 에너지로 복음 증거하는데 사용했지요.
여러분 이 세상을 아무리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어도 세상 나라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지않았어요. 12제자나 바울도 세상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지금도 복음을 아는 목사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요. 목사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나라가 민주주의가 된다고 하나님 나라가 되지 않아요. 아무리 아름답게 채색을 해도 이 세상은 예수님을 죽인 세상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돼요.
목사가 노사모 활동을 한다는 것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바른 정치를 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고 믿고 활동하는 겁니다. 다 부질 없는 안개 같은 세상일인데 말이죠. 안개 같은 것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내일을 위하여 살았으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여러분은 인간이 “안개” 라는 것을 알았어요. 안개들이 살아가는 세상도 안개에요. 그러면 누가 세상일에 열을 올리면 이런 짓이 “안개” 라고 일러주어야 합니다. 아마도 욕을 무지 먹을 겁니다. 욕 먹을 것 감수하시고 하세요. 어차피 어둠에게 빛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미움 받을 일입니다.
안개에게 의미를 두지 마세요. 마귀는 안개에게 의미를 두라고 해요. 인생이 안개 같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게 해요. 세상에서 오래 오래 살라고 해요. 밝은 미래를 계획하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살라고 합니다.
목사들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 가르쳐요. 세상에서 성공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가르쳐요. 그래서 자식들에게 안개라고 가르치지 않고 영웅이 되라고 세뇌 교육을 시킵니다. 목사들이 서울 대학에 들어가는 것인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유명인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해요. 그래서 박사가 되라고 하고, 판 검사가 되라고 하고, 국회의원이 되라고 하고, 대통령이 되라고 합니다.
대통령이 되면 뭣합니까? 안개인데! 큰 교회 꿰차고 있으면 뭣합니까? 자신이 안개인 줄도 모르고 있는데!
목사이면 뭣하고, 대통령이면 뭣합니까? 잠시 보이다가 사라질 안개인데!
구약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인간은 풀이라고 했어요.
사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사 40: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사 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풀이라고 알려 주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냅니다.
그러자 이사야가 내가 가서 뭐라고 전하면 됩니까? 라고 물었어요. 이에 하나님께서 너희는 풀이라고 말해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풀을 말리려고 그 위에 뜨거운 기운을 분다고 합니다. 아주 죽이기로 작정을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약속만 영영히 서게 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약속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약속만 남고 다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부귀영화를 꿈꾸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게만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실체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남기고 다 풀처럼 쓸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예수를 모르는 놈들은 풀처럼 몽땅 태워버리겠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포악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해도 너무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 같지 않은 소리를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라고 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서 전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교인들에게 안개라고 전하랍니다.
이사야는 이런 말을 하다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재수 없는 말을 한다고 이사야를 통 속에 집어넣고 톱으로 켜서 죽였지요. 얼마나 미웠으면 사람을 통 속에 집어넣고 톱질해서 토막 내서 죽였겠어요.
지금도 이런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미워합니다. 부정적인 설교를 한다고 다 떠납니다. 세상 살아가는데 있어 소망 적인 설교를 해야지 맨 날 망한다는 소리만 한다고 싫어해요.
바른 말을 하면 싫어하는 것은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해서입니다.
렘 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귀가 할례 받지 않아서 여호와의 말씀을 욕으로 여긴다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귀를 할례 시키지 않아서 그럽니다.
예수님께서 귀구녕에 손가락을 넣고 에바다 소리쳐 주지 않아서 그러는 겁니다. 지금도 교인들의 귀에 귀머거리 독사가 앉아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소식을 욕으로 듣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를 재수없게 듣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의 날 계수하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겁니다.
시 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시 90: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시 90: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시 90: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한 경점이라는 것을 알게 해 달라고 하고 있어요. 화살처럼 날아간다고 합니다. 아침에 돋는 풀과 같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인생 잠간입니다. 우리는 “풀” 이고, “안개” 에요. 제발 이 사실을 알고 사세요.
하루 하루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세요. 대통령도 자살하는 세상입니다. 더 무엇을 바랍니까? 세상 영광은 다 허망한 겁니다. 화려하면 할수록 마약처럼 빠져들게 되요.
예수 밖은 항상 파도가 잘 날이 없는 고해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은 파도가 없는 잔잔한 유리바다에요. 파도가 없으니 슬프고 근심된 일이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실패한 것 같으나 성공한 인생입니다.
이미 천국을 받았으니 잠간 안개 같은 인생사 고난 좀 받고 살지 뭐! 이런 자세로 살면 그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습니다. 안개 같은 인생이니 하루 하루 살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지요.
난! 살아야 돼! 라고 하지 말고, 난! “안개” 인데!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아니! 내가 안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세요.
성도의 행복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이 안개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질 세상에 목을 매지 말게 하시고 영원히 쇠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게하옵소서. 내일은 우리 날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이진 날은 지금 현재라는 것을 알게 하셔서 지금 주님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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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
감사해요.
설교자료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