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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언의 노래
본문:(창9:18-29)
주요내용:구속사론
자료출처:http://cafe.daum.net/agaser
요 약
본문에서 구속사의 큰 틀을 발견한다. 인류는 단일 자손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동질성과 아울러 구원의 처방도 동일하다. 또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었다. 이처럼 인간은 모두 부끄러운 죄악에 빠졌다. 또 아들 중에 함은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었다. 이처럼 율법의 사명은 죄인임을 밝힌다. 또 셈과 야벳은 아비의 수치를 덮었다. 이처럼 죄에 빠진 인생을 구하시려고 구세주 예수가 오셨다. 그리고 노아가 깬 후에 아들들의 행위대로 축복과 저주를 했다. 이처럼 성도가 천국에 가면 지상에서 행한 대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설 명
<구속사의 모형>
☞ 노아의 사건은 구속사의 예표
(창조 - 타락 - 율법 - 구속 - 상급)
1. 한 자손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퍼지니라"(18-19)
문제도 구원의 방법도 동일 적용
2. 죄에 빠진 인간
"포도주를 마시고 - 벌거벗은지라"(20-21)
세속에 빠진 수치스런 모습
3. 율법 아래 정죄됨
"함이 - 고하매"(22)
죄를 드러냄이 율법의 사명
4. 하나님의 사랑
"뒷걸음쳐 - 하체에 덮었으며"(23)
죄를 대신 지시고 덮어주심
5. 천국 상급
"깨어 -저주 - 축복"(24-27)
성화도 상급도 행한 대로 결실 맺음
(본문)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지내었고 29 향년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 <창9:18-29>
(강해)
본문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아들들을 축복하고 저주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주는 교훈은 의인일지라도 실수는 있으므로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사람의 됨됨이는 문제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어지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실수를 통해서라도 당신의 구속사를 펼쳐 나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예언을 통해서 구속사의 전개의 기본 틀이 계시되고, 구속사적 관점에서 인류의 미래가 예언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큰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노아의 개인적인 그 추한 실수를 배경으로 인류의 미래 그것도 구속사적인 거대한 미래가 예언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노아가 원인을 제공한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거나 어버이의 심정을 버리고 너무 감정적인 것 같고, 함의 입장에서 보면 예상치 못할 만큼의 큰 저주를 받았다는 피해의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하면 바로 그러한 배경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배경으로 구속사적 미래를 예언한 것입니다. 즉 셈과 야벳이 노아의 실수를 보지도 아니하고 뒷걸음 쳐나가 옷으로 덮은 이 사건은 장차 죄인들의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담당하여 주실 메시야의 구속사를 예고하는 참으로 적절한 배경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는 함의 후손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오 다만 셈이 구속사의 귀한 줄기로서 쓰임 받으며, 나아가 셈과 야벳에게 그 복음을 전파할 귀한 임무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억울 것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성전 건축이 평화의 상징인 솔로몬에 의해서 건축됨이 합당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의 배경에 담겨진 구속사적인 진리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이 사건에서 구속사의 큰 틀이 확정됨을 언급했는데 본문은 구속사만이 아니라 분명하고도 확실한 몇 가지 큰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1. 인류는 모두 노아의 자손이라는 사실입니다.
18-19절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현존하는 인류가 모두 노아의 후손임을 증명합니다. 지금 인류는 크게 흑인 백인 황인으로 대별되는데 모두 노아의 세 아들의 자손들입니다. 실재로 함이란 뜻은 '검다'는 뜻입니다. 즉 노아는 아담의 자손이고 지금 인류는 색깔과 관계없이 모두 노아의 자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에 따라 급속도로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럼 이 말씀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한 자손이라는 사실이 바로 모두가 아담의 후예로서 원죄를 가진 죄인이며 따라서 모두 동일하게 지옥 형벌의 대상일 뿐 아니라 나아가 동일하게 구세주가 필요한 인생임을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동질성만이 아니라 죄에 대한 구원의 처방전도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2. 우리 인간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에 빠졌습니다.
20-21절에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했습니다.
연대기적인 추측은 노아가 일상생활의 안정을 되찾았다 못해 방심한 상황이고, 이 때 이미 함의 아들 가나안이 존재한 때로 보아 그의 생애의 말기로 추측됩니다. 노아는 포도농사를 하여 포도주를 먹고 취하여 그만 장막 안에 벌거벗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 보면 '하'(the)라는 정관사가 포도주란 단어 앞에 붙어 있어 인간을 넘어뜨리는 문제의 그 진한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그리고 '벌거벗은지라'는 재귀적 용법으로 '스스로 벌거벗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한 번의 실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은 노아의 모습은 바로 그가 중시조로서 인류 언약의 대표자요 모두가 그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세속에 취한 우리 인생의 죄악된 모습을 예표합니다.
이 진한 포도주라는 전문 용어는 나중 계시록에서는 물에 타지 않은 진한 세속의 포도주를 먹이던 세상 바벨론을 묘사하는데 쓰였습니다. 즉 세속은 얼마나 매력이 있고 독하든지 한 번 맛보면 끊을 수 없게 되고 마시게 되면 아주 취해 버리게 됩니다.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이 포도농사를 주업으로 했듯 우리 인생들의 주업은 바로 죄짓는 일입니다. 누구든 마음으로든 인생이라면 죄지을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본문을 보면서 역사적으로는 펼쳐지는 기독교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보는 듯하고, 또 구약에서 마치 신약의 로마서를 발견한 느낌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로마서에는 본문과 같이 굵직한 구속사의 틀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인간은 모두 아담과 노아의 자손으로 죄인임을 암시하듯 바울도 로마서에서 먼저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죄인이라는 선언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세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3:9-18에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한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늘 강조하지만 인죄론의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멸망 받을 죄인임을 기억하십시다.
3. 또 한 가지의 틀은 율법의 틀입니다.
22절에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그랬습니다.
여기 "보고"는 성경 여러 곳에서 "알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으로 단순히 발견하는 것 이상의 의미입니다. 남녀간일 때는 성적인 관계를 암시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모욕적인 뜻이거나 혹은 구경할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떤 흥미스러운 신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고했다"란 원문의 의미는 신나게 떠들어댔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포도주의 효력이 일생 경건하게만 살아온 아버지를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을 보고서 아마도 신기하고 통쾌하게 여기고 아버지의 모습을 이야기하며 크게 웃어댔습니다. 노아가 950세를 살았고, 함의 자녀들도 있고, 대개 족장들의 축복은 말년에 이루어진 점을 보아 이 때가 노아의 말기였으리라고 추측됩니다. 그래서 아마 노인장 노망 운운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수치를 덮을 줄 몰랐습니다.
이처럼 덮을 줄 모르고 우리 인생이 죄인이라고 드러내고 외쳐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도 하나님께서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전 그 예비적 사역으로 이 인죄론의 기초를 튼튼히 하시려고 이스라엘에게 무려 1450년 동안 율법을 주사 실패하고 넘어지고 죽어가면서 자신들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전적인 죄인으로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으며 구세주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게 하셨습니다.
어쩌면 함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특징 그 대로 율법의 특징이 그러한지 한 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즉 함이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듯이 율법의 주 임무는 인간의 죄악된 본질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또 함의 모습이 검듯 사람을 율법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정죄합니다. 또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처럼 율법은 죄인으로 저주를 받게 합니다. 그리고 함이 아비의 수치를 떠벌리므로 셈과 야벳이 그 수치를 덮었듯이 율법은 비록 간접적이지만 죄인을 속죄의 주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합니다(갈3:24-25). 그리고 가나안이 저주받아 종의 종이 된 것처럼 율법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입니다(롬8:15). 아무리 짜 맞춘다 해도 이렇게 성경적인 근거로 정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해석의 재치가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3:19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했고, 롬3:20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했으며, 갈3:10에서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역할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입니다.
4. 가장 중요한 틀로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23절에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하였습니다.
함과는 달리 셈과 야벳은 아비의 수치를 누가 볼 새라 사랑과 존경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스스로도 보지 않으려고 옷을 취하여 뒷걸음쳐서 들어갔습니다. 아주 사려 깊은 행동으로 비록 실수와 수치 중에 있는 아비라 할지라도 최대한의 존경과 효로서 자식의 예를 표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들의 이 덮어주는 사랑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까? 마치 덮어줄 옷을 자기들의 어께에 메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성전 물두멍의 아래도 이 어께 모양으로 되어 있었는데 만민의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상징합니다. 또 그들이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쳐 들어갔듯 우리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의 죄악을 보지도 묻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보지 않으려는 모습을 상당히 길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이 일을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칭의와 성화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죄값만이 아니라 죄성까지도 책임지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85:2에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했고, 렘31:34에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고, 사38:17에서는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했으며, 사43:25에서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사44:22에서는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하셨으며, 단9:24에서도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라고 하셨고, 롬 8:30에서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ㅇ리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5. 우리는 행한 대로 결과를 받을 것입니다.
24-27절에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습니다.
술에서 깬 노아는 아들들의 행한 것을 알고 함에게는 저주를 했고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했습니다. 즉 그 내용은 대략 가나안의 저주, 셈의 영광, 야벳의 창대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의 노래는 노아는 물론 이삭(창27:27-29), 야곱(창49:2-27), 모세(신33:2-29) 등 구약 족장들의 이러한 축복과 저주의 노래는 그 마음과 입술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역사상 그 효력을 지닙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노아가 말한 것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술에 깨듯 우리도 이 세상을 작별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약 두 면에서 그렇게 되는데 하나는 죄를 떠남으로 영적으로 거룩함을 입음으로이고, 하나는 육체의 죽음으로 세상을 작별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여기도 약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이 세상 작별하고 천국에 갔을 때 우리의 충성을 보시고 행한 대로 하나님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모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시는 칭찬과 상급의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성화와 관련하여 천국에 가면 즉각적인 성화가 이루어지지만 이 지상에서는 우리가 신앙생활에 힘쓴 만큼 거룩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계22:12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마25:12) 한 이 말씀 앞에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22:11) 한 말씀을 볼 때 12절은 상급만이 아니라 성화와 관련하여 쓰여졌으며 지상에서는 성화를 위해서 수고한 만큼 변화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수고는 양상에 따라서는 나의 수고일 수도 있고 지체들의 도움일수도 있습니다. 즉 칭의는 은혜로 받지만 성화는 참된 신앙생활이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이 귀한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함이 받은 저주도 복음 안에서는 축복으로 바뀝니다.
25절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함은 저주를 받아 그의 아들 가나안이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었습니다. 본래 종의 종이란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의 표현 방식으로 가장 비천한 종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런 종의 종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으니 불행 중에도 큰 한 몫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신앙의 귀한 덕목입니다. 즉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본 받아 종의 종이 되어 섬기는 겸손한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귀한 모든 은혜로 가득히 채워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낮아진 자는 그만큼 영화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의 종이 될 만큼 주님을 본받는 신자라면 그 신앙이란 믿음의 최고봉입니다. 이런 믿음의 신자라면 찾아보기 힘든 귀한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진실로 겸손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의 저주도 큰복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내가 죽어져야 한다고 기도합니다. 전에 아담이 받은 저주도 여자가 받은 저주도 모두 복음 안에서 귀한 복이 되는 것을 살펴 본바와 같습니다. 어쩌면 큰 저주일수록 예수 안에서 더 큰복이 되어 다가오는지 감사할 뿐입니다. 종의 종이 된 요셉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의 제일 가는 신하인 총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도 낮아지셨으나 아버지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섬기고 섬기며 낮아지고 낮아지는 이 종의 종이야말로 우리가 항상 추구해야 할 가장 귀한 복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노아의 사건을 통하여 인간의 실상과 여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즉 인간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보내주신 구세주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 충성하면 영원한 영광과 상급과 거룩함으로 갚아 주시며 예수 복음 안에서 저주도 고난도 박해도 영원한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이 귀한 사실을 믿고 감사하며 신앙생활 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