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gall.dcinside.com/napolitan/3079
해당 시리즈는 [초자연 대책국] 나폴리탄 시리즈 1탄입니다.
1탄 - 375번 버스 이용 안내문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자면, 귀하는 귀하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지 마시고, 바로 앞쪽의 이 수칙서에만 시선을 집중해주십시오. 주변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고,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면 귀하는 지금 375번 버스에 있는 것입니다.
귀하는 아마 버스를 타던 중 좌석에서 잠이 들었다가 이제 막 일어났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 문제없이 타던 버스에서 그대로 일어나지만, 가끔 아주 희귀한 확률로 이 375번 버스에서 깨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정안전부 소속 초자연대책국은 이러한 현상을 해명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귀하가 저희 기관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것에서 짐작하다시피, 저희 기관은 언제나 시간과 예산, 인력이 부족합니다. 하다못해 대국민 홍보를 할 예산조차 부족한 실정입니다.
저희는 그 예산을 배정해주는 국회의원들에게 많아봐야 한 달에 한 번 꼴로 발생하는 괴이현상을 소명하기 위한 연구용역 예산으로 3,825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납득시키지 못했습니다. 귀하도 익히 아시다시피, 어차피 그 사람들은 버스를 이용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그 많은 버스 이용객 중 왜 하필이면 귀하가 375번 버스의 희생양으로 낙점되었는지는 저희 기관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건 귀하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도 아닙니다.
그곳은 산사람들이 탑승하기 적합하지 않은 버스이며, 귀하는 그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오고 싶을 것입니다. 다음의 수칙들이 귀하의 탈출에 보탬이 될 수 있습니다.
부디 버스가 종착역인 유도산에 도착하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실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0. 초자연대책국의 번호는 국번없이 1004번입니다. 만약 버스에서 탈출하게 된다면 바로 이 번호로 전화를 걸어주십시오.
하지만 지금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귀하와 같은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배정된 상담 인원은 단 한 명이며, 375번 버스 사건만 관여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즉, 여러분이 이 번호로 통화를 하면 높은 확률로 ARS 응답 서비스가 여러분을 맞이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문제가 있는 그 시스템은 ‘만약 문제가 있어서 연락하셨다면 1번, 없으시다면 2번을 눌러주세요.’ 부터 시작해서 여러분에게 여러 번 버튼을 누르라 지시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승객들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저희는 그 낙후된 시스템을 개편할 계획은 있지만, 시간과 예산의 한계로 아직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단기간 내에 저희 기관의 재정상태가 극적으로 좋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휴대폰이 있으시다면 아예 꺼주십시오. 최대한 알람이나 벨소리, 진동이 울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 승객들에 대해서,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들의 성향, 취향, 반응 역치 등 많은 정보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단 그들의 관심을 끌고도 살아 생환한 생존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희망을 놓치는 마십시오. 귀하는 현재 위급한 상황에 놓여있기는 하지만, 삶을 스스로 포기할 정도로 위태롭지는 않습니다.
생존에 대한 의지를 유지하셔야만 합니다. 집에 두고 온 애완동물. 귀하의 배우자나 자식. 친했던 친척. 살아계신 부모님. 친구나 애인, 하다못해 명탐정 코난 최종화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귀하가 살아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떠올리십시오.
나는 살 수 있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다지십시오.
본 수칙서가 작성되기 전에도 375번 버스에 피랍되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온전히 스스로의 능력만을 이용해 버스로부터 살아남았습니다. 생사가 갈리는 극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개 수칙이 아니라 귀하의 정신력입니다.
스스로를 믿고, 행동하십시오.
2. 창문 밖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당신이 떠나보낸 이들을 다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창밖을 보는 순간 당신이 그리워하지만 당신 곁을 떠난 사람들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환상일 뿐인지 진짜 저승에 있는 그들인지는, 조사가 (예산의 문제로) 불발되어 저희 기관도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귀하가 계시는 그 버스는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고, 여러분의 지인 호소인들은 여러분도 그곳의 주민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점이 중요할 뿐입니다. 보지 않으면, 심란해할 일도 사라집니다.
3. 일단 한 번이라도 창밖을 본다면, 시선을 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부터는 계속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귀를 막아도 그 소리는 들립니다. 생존자 중 한 명은 후에야 그 목소리가 사실 ‘그들 곁에 남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청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내놓았습니다.
그렇지만 생존자들이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귀하의 삶에 대한 의지가 충분히 굳건하기만 하다면 아직은 살아 돌아올 가망이 있습니다. 속삭임은 속삭임일 뿐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커튼은 닫아주시는 걸 추천합니다.
4. 버스가 종착역인 유도산 정거장에 도달하는 것까지 보고 살아 돌아온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귀하가 첫 예외가 될 수도 있지만,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 것을 권장합니다.
반드시 그 전 어딘가에서 내리셔야 할 테지만, 타이밍을 잘 잡으셔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버스에서 내리는 방법은 다른 버스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벨을 누르고 내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 정거장에서 내리는 것이 귀하 혼자여야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생환하는데 성공한 생존자들은 언제나 ‘혼자만’ 그 정거장에서 내렸다고 증언했습니다.
다른 승객이 당신과 같은 정거장에서 내릴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저희 기관도 알지 못하며, 만약 귀하가 알려주신다면 정말로 감사할 테지만...
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언제나 예산이 부족하고, 귀하의 정보에 대한 호의로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은 많아봐야 천만원 정도가 전부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커다란 액수는 절대 아닙니다.
미지를 밝혀내는 것은 저희가 할 일입니다. 귀하는 생존만 생각하십시오.
5-1. 귀하 말고 다른 승객들의 발을 보지 마십시오. 그들이 발없이 둥둥 떠있다는 것을 괜히 인지해서 좋을 것은 없습니다. 괜스레 심란하기만 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승객들이 귀하의 발을 보는 일도 좋을 것이 없습니다. 이 경우는 심란한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절대 그들에게 귀하가 발을 가진 생자라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됩니다.
그 버스는 언제나 굶주려있고, 사람의 피를 연료 삼아 달립니다. 귀하는 피가 전부 빨려 미라처럼 말라붙은 변사체로 발견되고 싶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다리 부분을 숨겨주셔야 합니다.
그들은 옷으로 가려진 부분까지는 통찰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긴바지를 입고 계신다면 바지를 조금 내려 발을 완전히 가리도록 해주십시오. 만약 치마나 반바지를 입고 계신다면, 가지고 계시는 손수건이나 가방으로 다리와 발목 부분을 최대한 가려보십시오.
5-2. 몸에 걸치고 있는 외투나 조끼를 둘러 다리를 가려도 됩니다. 하지만 다리를 가리느라 상반신을 아예 탈의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귀하라도 누군가가 버스 안에서 웃통을 훤히 까고 있다면 한번쯤은 바라보지 않겠습니까?
다리를 가릴 것이 없었던 한 탑승객이 정말로 그렇게 했다가 오히려 더 큰 관심을 사서 생환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휴대폰에 유언을 녹음하지 않았더라면, 추풍령 저수지에서 발견된 그 휴대폰이 방수를 지원하는 기종이 아니었다면 이 5-2 항목은 쓰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승객들이 귀하를 관심 깊게 쳐다보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귀하도 휴대폰을 켜고 유언을 녹음해주십시오.
아직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으시다면, 그들에 대해 알아낸 것들도 같이 말씀해주시면 더욱 좋습니다. 그 경우 귀하의 가족에게 소정의 위로금이 지급될 수도 있습니다.
5-3. 다리가 훤히 드러난 옷을 입고 있고, 마땅히 다리를 가릴 물건이 없다면 포기하고 운에 맡기십시오. 어쩌면 최대한 그들의 이목을 끌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버스 승객들이 그러하듯, 그들도 귀하가 조용히만 계신다면 다른 승객들에게 별 관심을 두지는 않습니다. 큰 소리를 내지 마시고, 숨을 조용하게 쉬십시오. 미니스커트나 반바지, 짧은 치마를 입은 생존자들은 분명 있었습니다.
6. 마찬가지로, 버스에서 내릴 때도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말고 조심조심 내리십시오. 대부분의 경우 승객들은 귀하의 하차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만, 이미 충분한 의심을 샀거나 발소리를 낸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기사가 바로 반응해 문을 걸어잠글 것입니다.
신발은 조용히 벗어 좌석 밑으로 구겨넣고, 양말만 신고 내릴 것을 추천합니다. 그게 아무리 비싼 신발이라도, 귀하의 목숨보다 비싸지 않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7. 어떻게 다른 모든 승객을 피해 혼자만 버스에서 내리는 데 성공하셨다면, 귀하는 머지않아 현실로 돌아오실 수 있습니다. 숲길을 좀 헤치며 걷다 보면 금방 GPS가 다시 작동할 겁니다.
현실로 돌아오면, 국번 없이 1004번으로 전화를 걸어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보십시오. 만약 375번 버스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시면 소정의 사례금이 지급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귀하가 재력가시고 이 수칙서가 생존에 도움이 되셨다면, 형편이 되시는 선에서 기부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후원자님의 기부는 더 많은 피해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사용되며, 수칙서를 업데이트하고 더 많은 연구를 진행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제, 행동하십시오. 버스는 대략 40분 이내에 종착지까지 도착합니다.
부디 살아서 뵐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첫댓글 아 근데 중간중간 자조적인 말투가 좀 웃겨서ㅋㅋㅋ무서운데 덜 무섭다
일단 항상 긴바지라 다행인데 눈치싸움 못해서 종점까지 그냥 갈듯 ㅋ큐ㅠㅠ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