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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시장백과 -보령중앙시장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1. 18. 9:21
국내 시장백과 -보령중앙시장
2023.11.09. 02:55조회 18
보령중앙시장
요약 보령중앙시장은 보부상 단체가 주요한 활동 무대로 삼았던 대천장을 계승한 유서 깊은 전통시장이다. 3, 8일에 정기시장이 열리며 과일전, 패션거리, 음식을 파는 거리, 건어물 및 제수를 파는 거리 등으로 구획이 나뉘어 있어 장보기에 편리하다.
1. 보령중앙시장 개요
보령은 바닷가에 위치해 다양한 해산물이 많이 생산되었고, 일찍부터 항구가 발달해 교역이 활발했다. 여기에 과거 문인들이 많이 쓰던 벼루와 비석의 재료인 청석과 오석이 많이 나고 모시 산업이 발달했으며, 석탄 매장량까지 더해져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이런 지리적인 환경으로 보령은 예부터 시장이 활발하게 개설되었다. 특히 이 지역은 인근의 서해안을 중심으로 어염뿐만 아니라 모시의 생산이 많았기 때문에 보부상의 활동이 왕성했다. 일제강점기 때 보령 지역은 대천항을 중심으로 인천이나 군산과 교역을 했으며, 그 중심에 대천장이 있었다.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대천시가 보령군과 합쳐져 보령시가 되면서 과거 대천리에 있던 대천장이 자연스럽게 보령의 시장으로 변모했고, 그중에 보령중앙시장이 있다. 보령중앙시장은 상설시장과 정기시장이 함께 서고 있으며, 2014년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면서 기존의 시설 현대화는 물론 다양한 행사를 통해 이용객들과 만나고 있다.
보령중앙시장의 입구
보령중앙시장의 내부 모습
2. 보령중앙시장의 어원
보령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했는데 신촌과 사포현이 있었던 곳이다. 신라시대에 신읍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사포는 남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고려 초에 보령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보령중앙시장은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3. 보령 지역 시장의 형성과 발달
보령 지역은 차령산맥이 서해를 향해 흘러나오는 서해안에 위치해 있다. 산맥의 영향으로 평야가 넓게 분포되어 있지 않지만 곳곳의 농경지와 서해안 바다에서 농산물과 해산물이 다양하게 생산되고 있다. 특히 보령의 해안은 서해안 특유의 갯벌이 발달해 있다.
이 갯벌이 준 선물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 보령을 상징하는 머드축제이다. 머드축제는 보령에 속한 대천해수욕장의 진흙이 화장품의 소재로 쓰일 만큼 피부 미용에 좋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를 홍보하기 위해 시작했다. 축제는 매년 대성황을 이루고 있으며 2014년 기준 329만 명의 관광객이 머드축제를 방문했다. 또한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축제이기도 해서 세계적인 축제로 발돋움하고 있다.
보령은 이처럼 바다를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해 시장이 탄생하고 발전하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동국문헌비고》(1770)에 따르면 당시 보령에는 읍내장(1, 6일)을 비롯해서 수영장(2, 7일), 대천장(3, 8일), 주교장(5, 10일) 등 4개의 정기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보령 지역의 시장에서 많이 거래되었던 것은 어염을 비롯한 다양한 해산물과 농산물 외에 모시, 그리고 이 지역 특산물이자 과거 문인들이 많이 사용하던 청석과 오석이었다.
청석과 오석은 벼루를 만들거나 비석에 많이 쓰이는 돌이다. 특히 보령의 남포 지역에 나오는 오석은 신라 때부터 좋은 품질로 이름이 높아 비석으로 많이 쓰였다. 또한 청석은 벼루를 만드는 데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많이 거래되는 특산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많이 거래된 특산물은 저포, 즉 모시였다. 보령의 남포는 저산팔구, 즉 모시를 많이 생산하는 여덟 지역인 부여, 홍산, 남포, 비인, 한산, 서천, 임천, 정산 중 한 곳이었다. 모시는 충청과 전라 등 삼남 지역에서만 생산되었고, 충청도 일대의 저산팔구가 모시의 명산지였다. 그에 따라 모시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인들이 별도로 있었고, 이들을 지원한 것이 보부상들이었다. 이들이 움직이는 요충지에 시장이 형성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동국문헌비고》에는 남포에 장이 섰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그 까닭은 남포의 행정기관이 조선 초기까지 고남포(지금의 보령시 웅천면 수부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남포로부터 서남쪽으로 3km 떨어진 대천리 하구 지역에 청연포, 웅천포 등의 포구가 발달해서 물자가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대천장이 섰던 대천리는 고남포보다 하류에 있어서 수로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청석과 오석, 모시의 산지인 남포에 시장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래에 있는 대천에 대천장이 섰고, 그곳에 중심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니까 행정기관은 고남포에 있고, 경제생활의 중심은 대천리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거리가 멀지 않은 대천장을 두고 인구도 많지 않은 남포에 굳이 장이 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훗날 남포에 개설되는 간치장은 해안가에 장이 많이 서는 과정에서 대천장이 읍내장 역할을 할 때 그 보조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시장에 나온 말린 생선들
1) 보령의 보부상
보령 지역은 특히 보부상의 활동이 왕성했던 곳이다. 보부상은 보상과 부상으로 나뉘는데 보상은 상품을 보자기에 싸서 휴대하거나 질빵을 메고 다니며, 시장에 앉아 보자기 위에 상품을 펼쳐놓고 파는 상인으로 봇짐장수라고도 불렀다. 부상은 상품을 지게에 메고 다니면서, 시장이나 마당에 상품을 내려놓고 파는 상인으로 등짐장수라고도 불렀다.
보상들은 주로 정교한 세공품이나 가볍고 작으면서도 비싼 상품, 이를테면 유단이나 포목, 유기, 금은 세공품, 완구, 지필묵 등을 주로 팔았다. 부상들은 목기나 연초, 토기, 어염, 도자기, 바가지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싸고 운반하기 편리한 상품들을 팔았다.
보령 지역에서 활동한 보부상은 보령현을 관할하던 ‘원홍주등육군상무사’(이하 육군상무사)와 남포현을 관할하던 ‘저산팔구상무사’가 대표적이다. 이 보부상들이 주로 역사의 기록에 나오는 것은 19세기 전반부터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이며,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인 것은 개항 시기 전후였다. 일제강점기에 들면서 우리나라의 보부상들은 대부분 일제의 식민정책에 따라 붕괴하고 말았다.
그러나 보령 지역의 ‘육군상무사’는 특유의 조직력과 협동 정신, 규율, 해산물 유통의 지배를 토대로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육군상무사’는 1851년에 국가의 허가를 받아 홍주, 결성, 보령, 청양, 대흥 등 5읍의 상계를 창설하고, 보부상단을 조직해 시장의 관리와 상품 유통을 독점적으로 관장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보부상 단체 결성의 시초였다. 위의 5읍에 광천이 추가되면서 6읍, 훗날 6군으로 확장되었다.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1909년 당시 홍주, 청양 등에 시장이 열리는 날에 보부상들이 200~300명씩 몰려들어 매매했다고 한다. 육군상무사의 6군은 주로 서해안과 가까워 포구의 시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보령의 경우에는 오천과 쇳개(김포)가 포구의 시장으로 유명했다. 오천이 크게 성황을 이룬 것은 태안반도 남쪽 천수만에서 광천항에 이르는 곳이 크고 작은 섬과 좁고 깊숙한 만으로 이루어져 천연적으로 파도를 피하기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고 있어서였다. 그 입구에 있는 포구가 오천이었다.
또 하나 쇳개는 대천천의 하구에 해당되는 곳으로 과거 대천시장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장날이면 인근의 섬에서 배가 들어와 해산물을 내놓고, 생필품으로 바꾸어갔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산과 인천에서 출발한 정기연락선이 쇳개를 찾아와 쌀을 내려놓고 광목과 설탕, 시멘트, 양잿물, 성냥 등 생필품을 풀어놓았다.
모시를 주요 거래 품목으로 삼는 이들은 한산 읍내장을 기점으로 서천, 비인, 남포, 은산, 홍산, 정산, 부여, 임천을 하나의 시장권으로 묶었다. 이른바 저산팔구가 그것이다. 육군상무사와 함께 활동했던 저산팔구상무사는 1845년에 국가의 인가를 받았다.
보부상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개항을 전후한 시기였다. 그 이유는 개항 직후 외국인들의 상행위를 개항장에서 4km 이내로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농촌의 일반 소비자와 외국의 상인들이 직접 대면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들이 서로 필요한 물건을 사고팔게 도와주는 매개가 바로 보부상들이었다.
보부상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을 받아 농촌으로 가서 쌀과 바꾸었고, 다시 한국 도매상이나 일본 상인에게 넘겼다. 이때 농촌의 쌀이 무제한으로 유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 보부상들의 중간 매개 역할로 인해 전통적인 시장의 질서가 붕괴되지 않을 수 있었다.
산도라지를 저울에 달아보는 상인
황기, 가시오가피, 산수유, 헛개나무 가지 등의 약재를 조금씩 늘어놓은 노점상
2) 대천장의 변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착취와 약탈을 쉽게 하기 위해 시장을 확대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로 한반도 전체에 걸쳐서 시장의 숫자가 급증했다. 보령 지역의 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 기존에 있던 시장에 더해 옹암장이 개설되고, 보령 읍내장이 사라지는 대신 청소장이 등장했다. 1924년의 기록에 따르면 수영장이 사라졌고, 대신 오천장이 등장했다. 또한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들어 옹암장이 번성했고, 오천장이 크게 위축되었으며, 청소장이 성장했다.
보령 지역은 1914년 군의 통폐합에 의해 보령, 오천, 남포 등 3군이 통합되어 보령군이 되었다. 보령군청은 당시 대천에 두었고, 충남의 중요한 포구였던 대천은 이를 계기로 크게 번영하게 된다. 또한 대천에 있던 대천장 또한 지역의 성장세에 따라 크게 확장되었다.
대천은 인천이나 군산의 물자가 유입되는 통로였고, 성어기 때는 해산물을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당시 보령의 수출입은 대천과 오천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대천항은 수출이 74만 8,000원, 수입이 33만 8,000원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오천항의 경우는 수출이 15만 원, 수입이 9만 5,000원으로 대천항에 미치지 못했다.
대천은 인근 지역에서 포획한 해산물이 모여드는 항구였다. 이 때문에 항만과 도로가 확충되었는데 1930년대 장항에서 천안에 이르는 도로와 장항선 철도가 갖추어졌다. 대천에서 청양 등으로 가는 교통로가 열리면서 내륙으로도 편리하게 해산물을 공급하고, 내륙의 농산물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 대천시장이었다. 1941년에 출간된 문정창의 《조선의 시장》에서도 대천장을 크게 다룰 정도로 큰 장이었다.
대천장이 열리는 날은 3, 8일이다. 정기시장이 개설되었던 위치는 일제강점기까지 구시가지에 있었지만 철도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신시가지로 이동했다. 그 이후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이 상권을 장악했다.
당시 가장 성황을 이룬 곳은 아무래도 싸전이었다. 농민들이 쌀을 팔아 그 돈으로 개항 이후 쏟아져 들어온 물품들을 구입했기 때문에 싸전이 시장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 대천장의 싸전은 몇 차례의 이전을 겪은 뒤 곡물시장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대천장은 현대증권 건물 뒤편에 서는데, 장날이 되면 이른 아침부터 상인들과 주민들이 모여든다. 요즘 5일장 이동 상인들은 대개 트럭에 상품과 판매 장비를 싣고 온다. 트럭을 이용해 과거 보부상들이 짊어지고 다니던 짐을 손쉽게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트럭을 이용해 다니는 상인들은 인근의 홍성장(1, 6일), 대천장(3, 8일), 광천장(4, 9일), 예산장(5, 10일)을 다니고 2, 7일에 장이 서는 웅천장이나 청양장은 많이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5일장 상인들의 경우 나흘은 장에 나가고 하루는 물건을 구입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5일장 상인들은 대체로 광천에 거주지를 두고 있다. 그것은 과거 충남 서남부의 중심지가 광천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보부상의 후예로 자부하고 있으며 육군상무사 또한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노점상에서 채소를 고르는 사람들
나무로 만든 키, 체, 소쿠리, 대나무 덮개채반 등을 길가에 늘어놓고 팔고 있다.
3) 그 밖의 시장
* 웅천장
웅천장은 과거에 모시로 유명한 남포의 중심 시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천리에 속해 있다. 원래 큰 강이 흐른다고 해서 큰 내 또는 한내라고 불렀고, 이곳에 섰던 시장을 한내장이라고 불렀다. 행정구역으로는 대천리이지만 그곳 사람들은 구장터라고 부른다. 조선 후기의 기록인 《충청도읍지》에도 웅천장이 나오는 것을 보아 그만큼 전통이 오래되고 매우 번성했던 시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웅천장이 크게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포구가 있었기에 그렇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도로와 장항선 철도가 부설되기 전까지는 포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웅천장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장항선이 개통되면서 면사무소를 이전하고, 새로운 장터로 이전하면서 장날 또한 2, 7일로 변했다. 장날이 바뀐 것은 저산팔구의 상권이 몰락하고, 대천장이 중심 상권으로 성장하면서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웅천장 또한 대천장처럼 상설화된 상설시장을 중심으로 정기시장이 열린다. 웅천장의 경우 이동 상인들의 편의와 시장 활성화를 위해 장옥과 작은 창고를 2동 지어 물건을 보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 오천장
오천장이 성행했던 이유는 광천과 가까운 지리적인 환경과 포구라는 이점 때문이었다. 《동국문헌비고》에 나오는 오천면에 개설되었던 수영장은 충청 수영성 남문 안쪽 산기슭에 있었다. 하지만 1900년대 전후로 소멸되고 말았다. 수영장 대신 오천면에 새롭게 개설된 장이 바로 오천장이었다.
오천장은 일제강점기 때 매립해 조성한 땅이 지반 침하가 일어나 1m 정도 돋우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이후 한국전쟁 때까지 장이 서지 않았고, 오천면 주민들은 인근에 있는 청소장과 대천장, 광천장을 이용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이후 오천면에서 시장을 세우고, 면에서 제공하는 배를 이용해 각 섬을 돌면서 사람과 물건을 싣고 와서 장을 보게 했다. 이렇게 해서 오천장이 되살아났다. 도서 지역 사람들은 장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정보도 교환했다.
따라서 주거래 품목은 해산물이었다. 장이 활성화되면서 섬마다 어선을 개조해 장날이면 그 배를 타고 시장에 왔다. 그러다가 1969년에 섬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생겼다.
이후 1978년부터 오천을 중심으로 운항하던 여객선이 육로 교통이 좋은 대천항으로 옮겨가고, 대천과 오천을 오가는 시내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오천장은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 청소장과 청라장
보령 지역에는 한때 성행했다가 사라져버린 정기시장이 꽤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청소장이다. 이 외에도 주포장, 옛 문헌에도 나오는 주교장, 남포장, 우시장 등도 사라지고 말았다.
청소장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번성했던 시장이었다. 처음에는 진죽리 남쪽 끝, 진죽천 옆에 위치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장항선이 부설되었을 때만 해도 청소장은 무척 큰 장이었다. 당시 주변의 오천과 주포 등에서 장을 보러 올 정도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면서 상권이 대천과 광천으로 옮겨 가면서 청소장은 소멸되고 말았다. 지금은 몇몇 가게만 남아 옛 저잣거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청소 주민들은 물건을 팔 때는 대천장을 이용하고, 물건을 구입할 때는 광천장을 주로 이용한다.
청라장은 1960년대 초반에 개설된 시장이다. 1970년대 보령 지역에서 광산 붐이 일어났을 때 청라의 인구가 1만여 명에 육박했고, 이들을 위해 상인들이 왕래하면서 지금의 면사무소 옆 넓은 부지에 장이 섰다. 그러나 1989년 정부가 석탄산업의 채산성 악화에 따른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를 내리면서, 많은 탄광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주민 또한 크게 줄었고, 시장 역시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4) 보령중앙시장의 발달
보령중앙시장의 내력을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보령시의 행정 개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에 행정 지역 통폐합의 의해 보령군과 남포군, 오천군이 보령군으로 개편이 되었고, 그 중심은 대천면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에 보령의 시장을 찾아보면 대천장(3, 8일), 웅천장(2, 7일), 간치장(1, 6일), 청소장(2, 7일)이 개설되어 있고, 중심 시장의 역할을 한 것은 대천장이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1963년 이 지역의 중심인 대천리가 대천읍이 되었다가 1986년에 대천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에 대천시와 보령군이 통합되면서 보령시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보령의 중심은 과거의 대천리와 대천읍이다.
따라서 보령의 시장은 1907년에 보령 읍내장이 사라진 이후 대천장을 중심으로 해서 발전해왔다. 대천장의 명맥을 이어받은 시장이 오늘날 대천동에 있는 보령중앙시장이다. 보령중앙시장은 아직도 명맥이 끊어지지 않은 보부상 단체인 ‘원홍주육군상무사’의 활동에 힘입어 시장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1990년대 전후로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이 유통 구조와 소비 패턴의 변화를 주도하며 기존 전통시장의 자리를 위협했다.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6년에는 시장 주변에 있던 버스터미널이, 2007년에는 1929년에 개통한 장항선 보령역이 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활기를 잃고 말았다.
보령중앙시장은 과거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2007년 3월 8일에 중앙시장으로 등록하고, 2011년에는 시장 안내 간판 설치, 화장실 신축 등 편의시설을 정비했다. 2014년에는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면서 다양한 행사를 통해 고객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장이 열린 날의 시장 풍경
싱싱한 채소가 가득한 채소 노점상
고등어자반을 파는 매대
생선장수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가장자리가 많이 패인 통나무 도마가 놓여 있다.
내장을 제거하고 깨끗이 잘 손질되어 조리하기 좋게 판매되는 말린 생선들
보기 좋게 진열된 과일들
직접 담근 장아찌들을 파는 사람에게 깻잎 장아찌를 사고 있다
보령중앙시장 인근에는 한내시장이 있다. 어물전과 채소전이 활발한 한내시장은 중앙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상인회가 새롭게 결성되면서 생긴 시장이다. 한내시장 뒤쪽에는 동부시장과 현대시장이 있지만 현재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내시장 입구
한내시장의 깔끔한 내부 모습
바구니마다 다양한 농산물을 담아놓은 노점상
4. 보령의 지리적 환경과 주요 생산 품목
보령은 동쪽으로 청양군, 부여군과 접하고 서쪽으로 서해에 면하며, 남쪽으로 서천군, 북쪽으로 홍성군과 접하고 있다.
지형은 차령산맥의 남서 끝부분에 있어 동북부에 오서산, 중앙에 성주산과 봉화산, 남동부에 월명산, 남부에 장태산 등으로 산악 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 중 오서산은 충남의 차령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서부 해안 지대는 대체로 평지를 이루고 있다.
산들과 해안 사이에 농경지로 활용할 수 있는 경사면이 발달해 있다. 다만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고 넓은 간석지가 발달해 일찍부터 간척지로 개발되었다.
보령의 주요한 산업은 농업, 수산업, 광업 등이다. 농업은 논농사가 대부분이며, 청천저수지, 성연저수지, 진죽저수지 등은 관개용 수원이 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 저마, 대마, 과일 등이다. 이 중 쌀은 서부 평야 지대에서 많이 생산되고, 그 밖의 작물들은 동부 산지에서 주로 생산된다.
수산업은 죽도와 녹도를 중심으로 조기와 갈치, 새우, 조개류 등이 많이 잡힌다. 양식업으로는 패류와 해조류가 주종을 이루며, 제염업도 활발하다. 성주산과 옥마산 일대의 보령탄전에서는 저질탄인 무연탄이 1950년대 말경부터 채굴되어 1980년대 중반에는 연간 채탄량이 150만 t을 넘어섰다.
이러한 석탄산업은 당시 보령의 경제를 크게 떠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