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44]첩어(疊語)로 한자 공부를!
첩어(疊語) 또는 중첩어(重疊語)는 같은 음이나 비슷한 음을 가진 단어의 반복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복합어를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말 누구누구, 울며불며와 한자 呱呱(고고), 明明白白 등이 첩어이다. 한문이나 한시에서도 종종 쓰이는데, 고3시절 한문시간에 배운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을 지금도 외운다. <舟遙遙以輕颺/風飄飄而吹衣> <景翳翳以將入> <木欣欣以向榮/泉涓涓而始流> 구절을 보라. 遙遙(요요: 흔들흔들), 飄飄(표표: 솔솔), 翳翳(예예: 뉘엿뉘엿), 欣欣(흔흔: 살랑살랑), 涓涓(연연: 졸졸) 등은 소리내어 낭송을 하면 더욱 맛이 있다. 전체를 낭랑하게 낭송하며 스스로 취한, 돌아가신 스토리텔러 한문선생님이 그립다.
그 이후, 김삿갓 풍자시에 첩어가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엊그제 후배가 선물한 <정본 천자여구>(김시습 지음)를 보고 깜짝 놀랐다. ‘천지현황’으로 시작하여 ‘언재호야’로 끝나는 1천자의 글자에 7언의 대구(對句) 14자씩을 일일이 달았으니, 모두 1만4천자. ‘5세 신동’으로 알려진 조선 500년의 으뜸천재 매월당이 <천자문>을 익히는데 재미가 붙으라고 여기(餘技)를 한껏 부린 듯한 대구에는 첩어들이 '세상을 만난 듯' 차고 넘쳤다. 대구 7언중 6자가 첩어(사진 2, 3 참조)인 것도 부지기수. 이렇게도 글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어렵고 잘 쓰이지 않는 글자도 많으나, 공부하는데 질리지 않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매월당의 머리 속에는 5만여자도 넘는 한자(漢字)가 모두 살아 펄펄 날뛰고 있는 듯했다. 천의무봉(天衣無縫)같다. 몇 개 표시를 하다 지레 지쳐버렸으니.
와아-, 이런 재주가 있다니. 근 600년 전에 계유정난으로 삼촌이 조카를 죽이는 세상에 거짓 미치광이가 된 매월당이 '무슨 정신'으로 이런 ‘고품격 한자 학습서’를 지을 생각을 했을까? 대구의 내용도 자연, 사람, 역사 등 다채롭다. 문학적 감수성조차 엄청 차고 넘쳐, 가히 ‘인간 삶의 대서사시’라고도 하겠다. 혹시 중국의 수많은 한시 구절에서 따온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천재가 그럴 이가 없지 않은가. 자유자재, 무궁무진, 마치 화수분처럼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7언 대구의 성찬(盛饌)’이다. 심심하면 머리맡에 놓고 아무 쪽이나 펼쳐보시라. 볼수록 신기하고 놀랍다. 우리 훈민정음이 표현하지 못하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없다지만, 상형문자인 한자도 참 가지가지로 어떤 형상을 막론하고 명사든, 형용사로든, 의태어, 의성어로든 얼마든지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조선은, 수양은 그런 천재를 무도한 정치로 일거에 망가뜨렸다.
<천자여구>의 첩어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문득 고려 문인 정지상과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일화가 생각났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135년 서경 천도를 주장한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의 제일대 사건>이라 했다지만, 김부식은 그 난리 통에 시인으로서 항상 열등감을 느낀 정지상을 애꿎게 죽였다한다. 김부식이 어느날 <柳枝千絲綠 桃花滿點紅>(유지천사록 도화만점홍: 버들가지가 천가닥 푸르고/복숭아꽃이 만송이 붉구나)이라는 시를 짓고 흐뭇해 하는데, 귀신이 되어 나타난 정지상이 네가 버들가지와 복숭아 꽃송이를 세어보았냐며 귀뺨을 때린 후 ‘千絲’ ‘滿點’을 ‘絲絲(가지가지)’ ‘點點’(송이송이)으로 고쳐 김부식의 기를 꺾었다는 이야기말이다. 5세때 대동강물 위를 떠도는 오리를 보고 지었다는 정지상의 시를 보라. <何人把新筆 乙字寫江波>(하인파신필 을자사강파: 누가 새 붓을 들어 강물 위에 새을(乙)자를 써놓았을꼬). 고려의 정지상, 조선의 김시습이 천재가 아니면 그 누가 천재일 것인가? 현대의 천재는 도올 선생인가? 아지모게라.
아무튼, 1천개의 한자 중 첩어로 된 대구가 최소 200여개는 되는 듯하다. 김시습의 ‘첩어 대구’만 모아서 석사논문도 쓸 수 있겠다. 참 별난 일이다. 이 책이 번역돼 나오기까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지만, 그 자세한 내막을 자세히 쓸 수 없는 게 아쉽고 안타깝다. 김시습의 유작집인 <溟源散稿>(명원은 강릉의 옛이름 溟洲와 같은 지명. 산고는 흩어진 글들. 김시습은 강릉김씨의 중시조격 인물? 강릉에는 ‘김시습 기념관’이 있고, 부여 무량사에는 김시습 시비와 묘가 있다고 한다)에는 <천자문>중 405번째 글자인 ‘好’자의 대구까지만 <천자여구>로 실려 있었는데, 2년여전 전남 장흥의 어느 고택에서 1천자의 대구가 제대로 기록된 목판본이 발견됐다는 것. 그 책을 우연히 접한 젊은 한문학자(1965년생 정주호)가 공들여 번역해 세상에 빛을 본 것이다. 참 알 수 없는 게 세상일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재미난 중첩어 투성이의 대구(對句)로 천자문을 공부하게 되었으니 행운아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