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50
3월2일[연중 제8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JI05GN0gVY
[서울대교구 하성용 유스티노(사회사목국 부국장)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실 내 흠결이 가장 큰 것이 분명한데...>
젊은 수도자들의 수련장 역할을 할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수련장은 수도회의 미래를 책임질 후배 수도자들의 전반적인 양성을 책임져야 하니 어깨가 많이 무겁습니다. 수련장은 이태리어로 Maestro, 영어로는 Master, 그러니 말마디 그대로 스승이요, 바꿔 말하면 수도자들을 만드는 장인(匠人)입니다.
주로 주어지는 일은 미우나 고우나 늘 수련자들 곁에 붙어있으면서 제발 인간 되라고 잔소리하는 일입니다.
목표치를 설정해주고 밀어붙이면서 자극도 줘야 합니다. 그러나 마냥 그래서는 어린 수사님들이 견뎌낼 재간이 없습니다. 때로 상담가가 되어 위로도 해줘야 하고, 격려도 해줘야 하고 박수도 쳐 줘야 합니다. 당근과 채찍을 바꿔가며 사용하면서 수도자로서의 틀을 만들어주는 3D 업종 종사자가 수련장입니다.
정기적으로 수련자들을 집합시켜놓고 불러 모아놓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도 많이 했습니다. “수도자 될 사람이 이래도 되냐? 저래도 되냐? 기도시간 적어도 10분 전에는 딱 나타나 있어야 된다. 묵상 시간에 졸면 어떡하냐? 나중에 사목자요 공인이 될 사람이 밥 먹을 때 그렇게 소리를 내냐?”
그래놓고 나중에는 제가 자충수에 빠지곤 했습니다. 어떤 때 수련자들은 다들 기도시간에 일찌감치 나와 있는데 제가 제일 늦기도 했습니다. 다들 진지하게 묵상에 전념하고 있는데, 저만 묵상 시간에 쿨쿨 잘 때도 많았습니다.
예리한 수련자들은 그런 순간을 또 놓치지 않습니다. 딱 기억해놓았다가 자기들끼리 두고두고 수군거립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기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아보니 제일 미안했던 부분입니다. 내가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을 형제들에게 강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내 흠결이 가장 큰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형제들의 작은 흠결에 연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름 스승이라고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던 사람들의 그런 이중적인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가 봅니다. 특별히 속에 든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잔뜩 폼만 있는 대로 잡고 다니던 스승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스승들을 향해 날리는 예수님의 직격탄은 속이 다 시원할 정도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들보라는 표현을 통해 꽤 센 과장법을 사용하십니다. 들보란 건물의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른 나무(crossbeam)를 의미합니다. 꽤 무겁고 큰 나무토막이겠지요. 아무리 우리 눈이 왕방울만큼 크다 하여도 길이가 몇 미터나 되는 들보가 우리 눈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들보입니다. 몇 미터뿐만 아니라 수십 미터나 되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허물들, 결점들, 잘못들, 죄악들, 오류들, 언행의 불일치, 그릇된 지향, 하늘을 찌르는 위선, 극도의 이기심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을 현미경으로 바라보기에 앞서 내 발밑을 먼저 자세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나란 모순덩어리의 존재를 알아가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상대방 입장에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늘 겸손한 태도로 이웃들의 의견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참 인간이요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현실과 상황을 세밀히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특히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BUCRVyepQA
++++++++++++++++++
<눈먼 인도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운명>
어느 나라건, 어느 회사건 눈먼 인도자를 가진 시민이나 직원들의 운명은 그 인도자의 운명과 같게 됩니다. 아무리 잘 나가더라도 잘못된 인도자를 뽑아 망하고 마는 나라의 예는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라고 하십니다. 부모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도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눈먼 인도자를 알아보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우리가 인도자를 정할 때 그러면 말에서 어떤 내용이 나오는 것에 유념하면 될까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잘못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타인에게 돌리며 타인의 눈의 티에만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잘한 것 자기 덕, 못 한 건 다른 사람 탓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분명 좋은 인도자일 수 없습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이런 인물이 많지만, 오늘은 미국에서 아직도 잘못된 인도자였다고 비판받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소개합니다. 리처드 닉슨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큰 정치적 스캔들인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하버드에 합격하였지만, 집이 가난한 이유로 지방대 나온 열등감의 소유자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맞붙은 사람은 존 F. 케네디입니다. 케네디가는 미국에서도 재력과 정치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가문입니다. 1960년 미국 역사상 첫 TV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잘 준비된 케네디에 비해 닉슨은 마치 병 걸린 사람처럼 비쳤습니다.
이 TV 토론에서 케네디는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닉슨의 정책을 비판하며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닉슨은 경험 부족을 비판하면서 케네디를 공격했지만, 그의 공격은 관객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습니다. 사람을 공격하는 이유는 열등감 때문입니다. 케네디는 오히려 자신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며,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비방하는 대신 정책의 차이를 부각시킨 점이 중요한 사항입니다.
몇 년 뒤 1968년 인기가 없는 민주당 허버트 험프리와 붙었음에도 간신히 극미한 차이로 승리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처음부터 재선을 준비하였습니다. 돈을 모으기 위해 많은 로비자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재선을 위해 민주당 선거캠프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큰 위기에 몰립니다. 이때 그는 자신을 도왔던 법률 고문 존 딘(John Dean)에게 이런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려 했습니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존 딘이 법정에서 닉슨의 모든 악한 면을 폭로함으로써 닉슨은 재선이 되었음에도 스스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닉슨은 끝까지 대통령이 하는 모든 행위는 위법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며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함은 말을 들어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반대의 경우입니다.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한 3조 재산을 가진 억만장자 글렌 스턴스가 90일 동안 100불로 100만 달러를 버는 도전이 TV에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차를 사고팔고 집을 수리해서 팔며 1억이라는 종잣돈을 모아 그것으로 바비큐 대회에 나가 1위를 함으로써 자기 브랜드를 만들고 90일 만에 75만 달러의 가치를 받았습니다. 도전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도전에 너무 감사하며 특히 자신과 함께 이 도전을 한 이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했습니다. 실패한 것은 자기 탓이고 이만큼 한 것은 핑계 대지 않고 일해준 직원들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보며 상대의 눈의 티를 보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 자신의 죄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될 자격도 없다고 여겨 부제품까지만 받았습니다. 자기가 수도회의 장상이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얼마나 많은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이 있습니까? 그저 자기 들보만 보려고 해도 이렇게 훌륭한 리더가 됩니다. 하물며 우리가 장차 우리나라를 맡길 인도자를 뽑는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고도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인도자가 될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면 우리 자신들이 눈먼 이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77년이면 48년 전입니다. 당시 저는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난 사람은 성공할 수 있고, 난 사람은 권력을 얻을 수 있고, 난 사람은 재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든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든 사람은 학문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식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은 문화와 문명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까? 맞습니다. 난 여러분이 공부를 통해서 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된 사람은 나는 누구인지를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나는 어디에 있는지를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람입니다.” 48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선생님의 말씀은 제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다고 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합니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깊은 감동과 울림을 주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의 마음을 닫게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옳고 합당한 말 같지만, 듣는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는 말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판단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네가 하는 일이 제대로 되는 일이 있겠니’라고 판단하면 자녀는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피부색, 외모, 직업 등 외적인 모습으로 쉽게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비난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입니다. 바리사이파는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냈다고 비난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한 죄인은 예수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당신도 내려오고, 나도 내려오게 해 주시오”라고 비난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너는 왜 늘 그 모양이냐!’라고 말하면 자녀는 상처를 받습니다.
세 번째는 강요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재능과 능력을 보지 않고 의대나 법대를 강요하면 자녀는 상처를 받습니다. 네 번째는 당연시입니다. 한 신자가 교회에서 오랜 기간 봉사를 해왔지만, 몸이 힘들어 잠시 쉬고 싶다고 말했을 때, 신부님이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면 교우는 상처받습니다. 친구가 힘든 일을 겪고 속상해서 이야기하는데 때, 이렇게 말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정도로 왜 그래? 다들 그렇게 살아." 이렇게 말하면 친구는 상처받습니다.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힘든 일이 있어서 위로받고 싶다고 했을 때, 남자 친구가 이렇게 말하면 곧 헤어질 수 있습니다. "네가 나 좋아하면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의 독침은 죄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2000년이 넘은 지금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장례미사의 독서에도 봉독 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진실과 정의를 선포하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별처럼 빛나도록 여러분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야 합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야,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제대로 빼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형제의 눈에 있는 티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데도 자신은 뚜렷이 보고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빼내 주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뚜렷이 보지 못하고 있음을 먼저 살펴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를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상황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감정에 영향을 받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한 것이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면서 그것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단죄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상처를 받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눈에 들보가 박히게 됩니다. 상처로 내 눈에 박힌 들보를 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고와 판단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감정을 돌보고 용서하는 과정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용서에는 의지적 용서와 영적 용서 사이에 감정적 용서의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과정이기에 인내와 용기 그리고 지혜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이 이 긴 여정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나의 말들로 나의 마음속 생각들이 드러납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입으로 드러난 말들로 마음속 생각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내 눈에 박힌 들보를 빼내고 용서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39-45: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온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그가 하느님을 만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랑의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것에 대해 들었다. 오늘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행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도구 중 하나가 언어이다. 한마디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슬픔과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다. 집회서에서는 말이 인격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한다. 한 사람이 사용하는 말이나 말씨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재는 저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속뜻을 드러내신 것이 말씀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말씀은 창조적인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인간을 해방할 수도 있고 구원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니 우리가 하는 말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말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늘 하느님의 말씀과 일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평지설교의 결론 부분이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스승을 따라 행동하라고 가르치신다.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으며, 올바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쳐주는 것도 힘들다. 먼저 자신의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하신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이 스승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은 큰 잘못을 범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남이 범하는 조그만 잘못도 참아주지 못하고 드러내려는 위선적인 면을 없애라고 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 8,7)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이다.
나무에 대한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잘 기른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절대로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반대로 나쁜 나무 즉, 손질을 받지 못한 나무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열매를 맺는다.(43절) 나무가 어떤지는 그 나무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아주 맛있는 무화과를 거둘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둘 수 없다.(44절) 이제 이 비유는 사람에게 적용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착하다면 좋은 나무와 같이 자기 마음의 좋은 보물창고에서 선을 내어놓을 것이다. 반대로 악한 사람은 그의 마음의 악한 창고에서 오직 악만 흘러나올 것이다.(45절) 사실 인격을 나타내는 마음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통하여 말하게 되는 것이며, 선이나 악을 말한다면 그것은 각자 안에 담겨 있는 창고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입은 인격의 도구이며, 행위에 있어서 전 인격을 가리킨다. 이것은 긍정적일 수 있거나 파괴적일 수 있다.(45절) 그러므로 좋은 나뭇가지에 시간에 맞추어 붙어있으면서 좋은 나무를 기르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자녀의 마음에 하느님 자신이 주시는 아주 귀한 보물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 있어서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의 희망이 주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 때문에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은 헛되지 않다고 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닮고 또 잘 따라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행하지 않고 사탄의 말에 마음을 빼앗긴 결과 죄를 지었다. 잘못된 말과 거짓된 말을 받아들여 표현한 것이 죄를 지었고 죽게 되었다. 우리 마음의 창고가 악으로 가득 차 있어 거기에서 거짓된 말이나, 잘못된 말을 꺼내게 되면, 죽음으로 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참된 좋은 말을 꺼내면 우리를 또 다른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사탄과 거짓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주셨다. 거짓된 마음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우리의 마음에서 좋은 것을 꺼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할 때,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다. 그러기에 주님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다고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이제 우리의 마음이라는 창고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재고조사를 해보자. 재고조사를 하면서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더럽힐 수 있는 악한 것들은 모두 버리고 좋은 것들을 잘 정리하여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좋은 것을 꺼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 보자. 항상 좋은 열매를 꺼낼 수 있으려면 이러한 마음의 정리를 통하여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내 마음의 창고에서 무엇을 꺼낼 수 있을까?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부터 회개해야 하고, 형제를 타이르는 일도 해야 하고.>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39-45)
1) ‘티’와 ‘들보’에 관한 말씀은, “하느님 행세를 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단죄’와 ‘심판’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단죄하고 심판할 권한이 없습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마태오복음 18장에 있는 말씀과 모순된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내 눈에 있는 들보’부터 빼내려면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겨를이 없을 텐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짓는 형제를 타이르라는 예수님 말씀을, “너, 회개하여라.”라고 명령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라고 권고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형제를 타이르는 일은, ‘죄인이 아닌’ 사람이 죄인을 꾸짖는 일이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회개해서 함께 구원받자고 권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즉 “너부터 회개하여라.”는, 모든 신앙인을 가르치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타이르거나 꾸짖는 일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부터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자기부터 먼저 회개하는 것은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너부터 먼저 회개하고, 그다음에는 형제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여라.”입니다. 자기 자신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서 형제의 회개와 구원을 외면한다면, 즉 형제의 죄를 모른 척한다면, 그것은 ‘사랑 없는’ 일이고, 잘못하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타이르는 말과 꾸짖는 말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부터 잘해라.”, 또는 “너나 잘해라.”라는 말을 하면 안 되고, 함께 회개하자는 ‘형제의 권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에 형제가 와서 나의 죄를 꾸짖고 타이를 때, 반성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너부터 잘해라.”, 또는 “너나 잘해라.”라는 반응을 보이고 화를 낸다면, 사랑을 거부하는 ‘더 큰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좋은 나무일 수가 없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나쁜 나무일 수가 없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처음에는 좋은 나무였지만 마지막에는 나쁜 나무로 변질되었고, 그냥 그렇게 끝나버렸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박해자 시절에는 나쁜 나무였지만, 회심한 다음에는 좋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과 중간 과정에서는 남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최종적으로)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서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4) 야고보서에 있는 다음 말을,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야고 3,9-10)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온다면, 그 찬미는 거짓 찬미이고, 위선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는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하는 말을 하십시오.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에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티토 2,1.7-8)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건네고픈 말>
루카 6,39-45 (남을 심판하지 마라.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건네고픈 말>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5)
당신이 좋아요.
당신을 믿어요.
당신을 바래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당신만 있으면 돼요.
당신이 제게 축복이에요.
당신이 있어 기뻐요.
당신이 있어 살맛나네요.
당신을 닮고 싶어요.
참 착하시네요.
참 고우시네요.
참 진실하시네요.
참 올곧으시네요.
참 겸손하시네요.
참 해맑으시네요.
참 귀여우시네요.
참 어여쁘시네요.
참 따뜻하시네요.
참 부드러우시네요.
너무 애쓰셨어요.
참 잘 하셨어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늘 한결같으시네요.
역시 당신다우시네요.
늘 행복하세요.
맘껏 즐기세요.
편히 쉬세요.
활짝 웃으세요.
한껏 울어도 괜찮아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어서 훌훌 털고 일어나세요.
자,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예요.
이미 충분히 잘 하셨어요.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마음 편히 가지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쉬엄쉬엄 하세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 탓이 아니에요.
앞으로 잘 될 거예요.
이제부터 잘 하면 돼요.
정말 미안해요.
너무너무 고마워요.
오롯이 사랑해요.
그래요, 바로 당신이에요.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당신 말이에요.
=====================
[서울대교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
<내로남불'과 '마음의 선한 곳간>
오늘 우리는, 루카복음 6장 예수님의 '평지 설교'의 한 부분을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첫 부분은 '형제 눈 속의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내용이고,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라는 말씀은 두 번째 부분입니다. 마태오복음의 '산상 설교'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작은 차이점은, 마태오복음은 '좋은 열매, 나쁜 열매'를 언급하신 다음,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7,19)라는 심판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는 데 반해, 오늘 루카복음에서는 '좋은 열매, 나쁜 열매' 언급 후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6,45)라고 '마음의 문제'로 결론을 맺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잠시 마태오복음의 '산상 설교'에 나오는 참된 행복 선언을 떠올려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반면에 루카복음의 행복 선언에서는 단순히 "행 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지요. 희랍어 원문의 표현을 찾아보면, 오늘 루카복음에서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마음의 문제'를 언급할 때 '마음'은 '심장'(καρδία, 카르디아)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마태오복음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할 때의 '마음'은 '영'(πνεύμα, 프네우마)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성경의 세계에서 '심장'은 '육체적 생명의 자리'로 이해되고, '영'은 '육체에 생명을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생각합니다.
이제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을 다시 봅니다. "너는 어찌 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6,41)는 예수님의 아픈 질타를 묵상하면서, 어쩌면 이런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공통된 인간 속성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내로남불'을 넘어서서, 마음에 선한 곳간을 가꾸는 제자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6,45) 이기적이고 나약한 우리가 선한 마음의 곳간을 짓기 위해서는 하느님 영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마음의 선한 곳간'을 넓혀가려는 우리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겸손되이 하느님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 봅니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아멘. (서울주보 '오늘의 말씀')
=====================
[전주교구 유승현 마리오 신부님]
<라손 하라(Lashon hara)>
히브리어로 ‘라손 하라’(Lashon hara)는 말이 있습니다. ‘나쁜 혀’라는 뜻의 이 말은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의미합니다. 험담은 비록 사실일지라도 상대방을 깎아내리게 되는 모든 부정적인 말들까지도 포함합니다.
유대인 속담에 “살인은 한 사람을 죽이지만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험담을 퍼트리는 사람,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는 사람, 그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험담을 ‘악마’라고 하면서 ‘남을 험담할 때 악마는 찾아온다.’라고 말씀 하시면서 우리가 잘 아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험담에 대한 주의를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에 관한 말을 할 때 거짓이거나 꾸며낸 말이 아니면 험담은 아니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번 시험 망쳤다네” “남편이 먼저 떠났다고 하더라!” “어제도 술 많이 먹었던데” “여태 놀고 있더라고” “아이가 셋이나 되는데 결국 이혼을 했어, 어쩌려고…” 이런 말들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는 “체로 치면 찌꺼기가 남듯이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하는 말들을 점검해 볼 것을 가르칩니다.
제가 있는 사회복지관은 많은 후원자, 봉사자분들의 관심과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와 직원분들이 지역에 소외되고 어려움에 계신 분들을 만나고 전달해 드립니다. 그 과정에서 말로 인해 봉사자 사이에 오해와 다툼이 생기고, 도움을 받는 분들이 자존감에 상처를 받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선행에는 격려하는 말이, 약자에게는 존중하는 말이 필요합니다. 이런 모습은 사회복지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본당에서, 가정에서도 필요한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인도자’,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을 권고하십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우리 마음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살펴보고, 가시덤불이 아닌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 뿌리를 두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타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칭찬하는 말을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노력, 내가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말)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가 상대방을 다 알고 있다는 교만에서 벗어나 내가 모르는 상황과 입장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겸손은 중요합니다.
오늘 제2독서 사도바오로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라손 하라’의 사람과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표정이- 다릅니다. 거울 속에 내가, 나를 보는 상대방이 웃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 지 확인하며 노력하는 이번 한 주 되시면 좋겠습니다.
=====================
[청주교구 정남규 비오 신부님]
<우리 눈 속에 티를 먼저 제거하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너그럽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실수나 허물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두 눈이 충혈될 때까지 흥분하고 단죄하는 저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매일의 미사 때마다 가슴을 치며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는 고백이 무색해집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마저 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잘못으로 내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게 되는 것일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내 스스로 형제의 허물과 잘못된 점을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의 나쁜 점을 찾아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헐뜯는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높아지는 법은 없습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의 허물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내 허물이나 잘못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셋째로 시기심에서 남의 결점을 찾아내려 하는 수가 많습니다.
먼저 남의 허물을 비판하는 것이 비판의 악순환을 가져옴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의 조그마한 잘못을 헐뜯는 버릇은 자신과 이웃과 나아가 우리 주님에게 상처를 입히는 잔인한 무기입니다. 이러한 어두움의 영성이 우리들을 오염시킵니다. 우리는 남의 눈의 티를 찾는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용서를 통해서 스스로 미움의 굴레에서 떠나지 않는 이상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처럼 사람을 가리고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아파하고 고통받고 있는 형제들을 따뜻한 손길로 보호해 주시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셨습니다. 내 옆에 나와 함께 앉아 있는 형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죽게 하실 만큼 사랑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비판하는 형제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런 하느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좋은 점을 본받아감으로써 단점을 보지 않는 아름다운 생활 태도를 가졌으면 합니다.
형제의 허물과 잘못을 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어린이처럼 맑고 순수한 눈으로 형제의 좋은 점을 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
[수원교구 김준교 스테파노 신부님]
<"아우야! 가만!">
어릴 적, 집에서 형과 컴퓨터 게임을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풍선 게임이었는데 (일명, '크아'), 형과 저는 자주 같은 팀으로 게임을 했고, 형이 저보다 게임을 잘하는 편이어서 저는 형의 말에 따라 플레이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제가 먼저 죽으면 형이 '거기서 죽으면 어떡하냐? 제대로 했어야지!' 하고 화를 내는 바람에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형이 인원수가 불리한 게임에서도 승리하는 모습 또한 자주 봤기에 그런 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근데 한 번은 먼저 죽은 형이 옆에서 하는 저의 플레이를 뺏어서 했는데, 그것마저 죽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때다 싶어 형에게 막 뭐라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찌 됐을까요? 호되게 맞고 다시 게임에 집중했습니다.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 같은 저의 형입니다.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라는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저의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 눈은 바깥쪽으로 향해있기에 나의 부족한 모습을 발견하기보다 타인의 부족함을 더 쉽게 발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의 부족한 모습을 잘 발견하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부족한 모습 또한 잘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의 여부에 따라 남에게 뭐라 하는지, 그러지 않는지가 달라지기 때문이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안다면, 다른 이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감히 뭐라 할 엄두도 내지 못 할 것입니다. 자신이 그런 말 할 처지가 안되기 때문이죠. 들보도 없고 티도 없는 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적어도 자기 눈에 '들보'는 없다 치더라도, '티'는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 선하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또 이번 한 주를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고자 하십니다. 선한 것을 받은 사람은 선하게 변해갑니다. 근데 선한 것을 악한 것으로 변질시키는 사람 또한 존재합니다. 자신을 올바로 돌아보는 사람은 선함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나는 "아우야! 가만"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 자신을 조용히 돌아볼 줄 아는 사람입니까? 마음의 선함을 입으로 말할 줄 아는 우리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루카 6,43,44)
우리는 좋은 나무입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뿌려주신 생명의 씨앗이 자라는 좋은 나무입니다. 하늘의 빛을 받으며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물로 자라는 우리는 하늘에 속하는 좋은 나무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물을 마시며 자라기에 우리는 하늘 나무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심으신 것은 이 땅에 하늘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이 땅에 하늘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하늘 나무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나쁜 나무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나무임을 우리가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심었고 주님이 내려 주시는 물로 자란 주님의 나무임을 우리가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휘몰아치는 이 땅의 거친 바람은 하늘나무인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어 일깨워주는 주님의 입김입니다. 이 땅에서 더욱 튼튼한 하늘나무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잊었던 하늘나무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바람에 흔들린 나무는 튼튼하게 자랍니다. 이 땅의 고통과 두려움과 유혹으로 흔들렸던 만큼 하늘나무는 튼튼히 자라고, 흔들렸던 만큼 정체성을 가집니다. 하늘나무의 정체성을 가지는 만큼 좋은 열매를 맺고 좋은 열매를 맺는 만큼 우리는 이 땅에 하늘정원을 꾸밉니다.
우리 모두는 하늘 정원에 속하는 좋은 나무입니다. 나쁜 나무는 한 그루도 없습니다. 단지 주님이 심은 하늘 나무임을 우리가 가끔 잊고 살 뿐입니다.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리라." (시편 92.13-14)
주님께서 심으신 우리는 하늘나무입니다. 은총의 나무이기에 우리가 이제는 주님의 앞뜰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하십시오." (코린토15.58)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6,45)
『 하늘 안에 내가 있고 내 마음 안에 우주가 있다. 그래서 내 마음에 항상 해와 달과 별과 형형색색 구름과 굽이굽이 절경을 이룬 산과 들과 사시사철 피어나는 들꽃과 탐스럽게 익은 열매 한가롭게 뛰어노는 들짐승과 온갖 새들이 날고 폭포가 있는 안개 덮인 깊은 계곡에서 콸콸콸 흐르는 물은 넓고 푸른 바다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내 마음의 곳간은 항상 풍요롭고 아름답다. 』 ( 내 마음의 곳간, 유철상)
하늘 안에 내가 있고 우리 마음 안에 우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곳간은 넓습니다. 그 넓은 마음에서 우리는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향한 아름다운 말이 나오고 선한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6,45)라는 말씀이 제 마음을 흔듭니다. 오래전부터 늘 들었던 말씀이었는데 그땐 듣고서 아무런 느낌이나 생각이 없었다가 이제야 무겁게 들립니다. 그래서 새삼스레 말이란 마음에서 넘치는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오늘 독서 집회서 또한 말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27,6~7) 이처럼 독서나 복음에서 언급한 마음의 곳간과 말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말이란 음성학적인 면에서 부호이며 소리입니다. 집회서의 표현을 하이데거의 관점에 근거해서 보자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인간은 언어 속에 거주한다.』라는 그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의 말은 그 사람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내듯이, 존재가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며, 언어 또한 존재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우리는 평소 듣긴 하지만 제대로 듣지 않습니다. 존재의 언어에 대해서 깊이 경청한다는 것은 말이나, 말하는 그 존재에 대해 판에 박힌 듯 익숙하게 들어선 안 됩니다.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낯설게 곧 새롭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들어야 그 말이,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존재와 그 존재의 말을 낯설게, 새롭게 듣는 순간 사유는 시작되고, 그 사유 과정에서 파생된 생각은 언어를 통해서 표현됩니다. 이렇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에, 새 언어가 자신의 사유체계에 들어오는 일은 완전히 다른 존재를 집에 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기존 관념에 균열을 내며 들어옵니다. 고정불변이라 믿으며 고착되거나 화석화되어 버린 생각에 이런 과정은 커다란 구멍을 내는 것이며 벽을 뚫는 것과 같습니다. 썩은 냄새가 나는 웅덩이에 새롭게 깨끗한 물이 들고나오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처럼 다른 존재를 자기의 집, 마음의 곳간에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로써 새로운 존재 변화의 가능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도대체 내 마음의 곳간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아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집회서의 울림에 응답하듯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6,45) 하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곧 말이란 그 사람이 무엇을 듣고 보고 있으며 그 들음과 봄을 통해서 그의 사유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의 입으로 표출하는 겁니다. 마음속 생각이 무언의 언어인 몸짓이나 표정으로, 유언의 언어인 말로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표현되는 겁니다. 그러기에 말과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을 바꿔야 하고,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마음을 바꿔야 하는 이치입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이며, 그 사람의 시그니처와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에 대한 두 가지 비유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첫 번째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비유입니다. 눈먼 이는 바로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영적으로 눈먼 이는 자신 안의 어둠의 들보들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서도 언제나 이웃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판단하고 단죄하고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처럼 잘 드러나지 않은 허물과 약함을 고쳐주겠다고 생색을 내면서 형제의 티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며 떠듭니다. 이것이 곧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다는 예수님 가르침의 본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직설적으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6,42)라며 위선적인 행위를 일삼는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질타하셨습니다. (마태 23장 참조) 두 번째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6,44) 하고 말씀하신 배경에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6,43)라는 것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시고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좋은 나무는 결국 선한 곳간을 지닌 사람이고, 바쁜 나무는 악한 곳간을 지닌 사람으로 그들의 외적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열매처럼 인간의 행동은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의 곳간에서 흘러나와 드러난 열매와 같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 위선자를 가려내는 방법은 바로 그들이 맺은 열매를, 행동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권고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 2,5)라고 강조한 까닭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복음 환호성에서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필 2,15참조) 하고 권고하신 것은 어두운 세상 안에 살면서도 별처럼 아름다운 존재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세상을 본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꿋꿋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오로는 당신의 편지를 읽는 우리에게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 15,58) 하고 재촉합니다.
집회서의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27,7)라는 권고를 마음속에 새기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참뜻을 깨닫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느 순간에 자신이 한 말을 듣게 되고, 그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원의를 느끼고, 반복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변화된 경험이 있습니다. 빈말도 자주하다 보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즉,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사랑합니다, 고 계속 상대방에게 말하고 작은 몸짓으로 표현하다 보면 정말 우리 마음속의 곳간은 점점 더 넓어지고, 넓어지는 만큼 선한 말과 선한 행동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깊은 의도 역시 같다고 봅니다. 즉 비록 그 사람이 예전에는 선인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비록 하찮은 행동이며 특별한 행동은 아닐지라도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들은 말씀을 실제로 실천하다 보면 이러한 행위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이”(6, 48)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인격으로 변화될 수 있고 되어갈 것이라는 초대라고 봅니다. 당신을 만나기 이전, 곧 자기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판단해 왔던 과거와 달리, 지금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살아가면서, 악한 곳간을 온전히 비우고 비워진 그 곳간에 생명의 말씀으로 가득 채운 마음에서 솟아난 아름다운 말과 선한 행동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마음의 곳간에서 선한 말과 선한 행동으로 변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닮으려 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아침에는 당신 자애를, 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 아멘”(시 92, 2-3)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 조금 특별한 곳에서 강의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천주교 교정사목위원회에서의 부탁으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강의입니다. 간곡한 부탁에 허락을 하기는 했지만, 강의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걱정이 커졌습니다. 솔직히 구치소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고, 그래서 우락부락한 험상궂은 사람이 가득할 것만 같았습니다.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게 욕하며 소리치지는 않을까?, 전혀 관심이 없어서 ‘너는 말해라. 나는 자련다.’며 잠만 자는 것이 아닐까? “그만합시다”라며 강압적으로 나를 통제하려 들지는 않을까? 등의 부정적인 생각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생각들로 전날 밤을 꼬박 새우고 구치소에 갔습니다. 입구에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간 뒤, 몇 개의 문을 통과해 넓은 강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재소자들을 드디어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긴장하며 강의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어떤 곳에서 보였던 반응에 뒤처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대답해 주었고, 힘찬 반응을 보여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가지고 있던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잘못된 생각을 했던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미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누구를 판단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죄 많은 사람입니다. 그 판단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만이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들보’는 조그마한 것이 아닙니다. 무거운 하중을 지탱하는 구조물 또는 구조 요소입니다. ‘보, 빔(방긋)’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자기 안에 커다란 문제를 안에 가지고 있으면서 남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죄를 안고 있을까요? 교만, 육욕, 재물에 대한 욕심의 죄 등등 적지 않은 죄로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남 탓만 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좋은 나무의 모습을 갖춘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남을 고쳐주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부터 깨끗하게 하고 고쳐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죽음을 너머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
[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 옵니다.’라고.
그런데 가끔은 이 ‘내 탓이오.’가 어렵습니다. 입으로는 ‘내 탓이오.’라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그 사람 탓이오.’라고 할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미사 중에 우리가 말하는 ‘내 탓이오.’라는 말이 우리를 어떻게 하늘나라로 이끌고 있는지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내 것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사람이 위의 말씀과 같을 것입니다. 내 탓임에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위의 말씀과 같을 것입니다.
내 탓이 아님을 내가 알고 있음에도 내 탓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것일까요? 자기 것도 못 챙기는 멍청이가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다큐멘터리 ‘바보야’가 생각납니다. 오늘은 용기 내 온종일 ‘내 탓이오.’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
⭐시절인연
‘시절 인연’이란 말 아시나요? 이 말의 의미는 ‘영원한 관계는 없다.’라는 말입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인연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거야.’
그러나 관계는 늘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절 인연’이란 말이 나왔나 봅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시절 인연’이란 말이 그리 나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관계의 유한성을 인정한다면 끝으로 가는 그 시간까지 서로에게 최선과 예의를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렇게 최선과 예의를 갖추다 보면 ‘시절 인연’은 짧은 시간이 아닌 긴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관계가 ‘시절 인연’이라면….그대의 인연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예의를 다해보세요.*_*
=====================
[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벌써 20년도 훌쩍 넘은 일입니다. 1988년 한국 천주교회는 “내 탓이오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당시 한국사회에 만연했던 반목과 갈등, 그리고 분열과 다툼이 자기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마음자세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부터 솔선수범하여 남탓이 아니라 자기 성찰을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나아가고자 한 것이지요. 이런 계몽 운동을 시작한 것은 천주교였지만, 언론과 방송에서도 주목하여 소개하였고, 그 취지에 공감한 많은 이들이 호응하며 동참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남의 말을 들어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려고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 배려의 자세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은 그냥 ‘적’으로 간주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의견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는 강압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범국민적인 “내 탓이오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지요. 20여년전 그때처럼 지금도 우리 먼저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미사의 시작예식 때마다 바치는 “고백 기도”의 내용처럼 나 자신이 한없이 부족하고 약한 죄인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는 자비를, 성모님과 모든 성인들에게는 전구를 청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성찰과 통회의 메시지입니다. 부족하고 약한 우리가, 그래서 자꾸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답게 그리고 온전한 하느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잘못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잘못 틀어진 방향을 되돌리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너나 잘 하세요!”라는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자기성찰과 변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다른 이의 잘못을 비판할 자격도 단죄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를 내 기준으로 저울질할 생각 말고, 먼저 나 자신이 그 저울 위에 올라가봐야 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비난과 원망의 마음이 아니라 ‘나라도 그랬을거야’라는 공감으로, ‘나도 언제든 그럴 수 있어’라는 경각심으로,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라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으로 그 사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를 누군가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힌 ‘죄인’으로 만들지 않고,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훌륭한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와 나 모두에게 가장 좋은 길이겠지요.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비난하고 단죄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한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기 어려운 건 기본이고 제대로 마주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든 자기 잘못을 감추려고 하고, 감추어지지 않는 부분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리화하며,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랬을 거라고 정당화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대로만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은 ‘이상적’ 모습에 나의 ‘현실적’ 모습을 억지로 끼워맞추려고 하다보니, 실제로는 선하지 않은데도 선한 척, 의롭지 않은데도 의로운 척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삶이 행복할 리 없지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커질수록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자괴감도 커지고, 결국엔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경계하라고 하시는 ‘위선자’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보고 싶은대로만 보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서 보여주시는대로 봐야 합니다. 그러면 내 눈에 들보가 박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이 지닌 참된 모습을 알아볼 넓고 깊은 ‘안목’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안목을 지닌 사람은 남이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같이 마음 아파하고, 그가 그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정말 필요한 경우에만 그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린 뒤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해 줍니다. 그를 ‘남’이 아닌 ‘형제’로 바라보기에 그의 눈에 박힌 티를 제대로 보고 빼줄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참된 ‘형제애’의 모습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 맑고 평화로우면 내가 만나는 사람이 예수님으로, 천사로 보이는데, 내 마음이 죄악의 어둠과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내가 만나는 사람이 사탄으로, 원수로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니 지금 내 눈에 나쁜 사람으로, 상종 못할 죄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잠시 눈을 감고 주님의 뜻과 가르침에 비추어 나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내 마음 깊숙이 박혀있는 죄의 들보가 보일 겁니다. 상태가 그 지경에 이르도록 방치한 스스로의 안일함과 나태함을 깊이 반성하며 통회의 ‘내 탓이요’를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위선과 교만으로 뿌옇게 가려졌던 눈이 맑아져 자기 자신과 이웃의 참된 모습을 알아보게 되지요. 그러면 비로소 깨닫게 될 겁니다. 이 세상에 선하기만 한 사람도 없고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각자가 선택의 순간을 마주했을 때 마음에 있는 ‘선한 곳간’ 쪽 문을 여는지 아니면 ‘악한 곳간’ 쪽 문을 여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선택은 어느 날 갑자기 우연처럼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불이익과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꾸준히 선한 곳간의 문을 열었던 경험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고 삶이 됨으로써 ‘관성’(慣性)처럼 떠밀리듯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렇기에 평소에 잘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그러니 평소에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찾는 일보다, 내 눈에 박힌 들보를 있는 그대로 보고 빼내는 일에 더 집중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호의’, 즉 상대방을 진심으로 위해주는 마음, 그가 잘 되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빌어주며 축복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다른 이의 과오와 부족함이 먼저 보여 불편하다면, 그런 점들을 ‘뒷담화’하고 싶은 욕망이 마음에서 꿈틀거린다면 마음을 더 독하게 먹어야 합니다. 그저 단죄를 하지 않는, 뒷담화를 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는 소극적인 수준에 머무를 게 아니라, 다른 이에게 자비와 선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수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연중 8주일입니다. 3월의 첫 주일입니다. 기승을 부리던 겨울이 가고 봄이 옵니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사순시기를 준비하면서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우리의 ‘혀’와 ‘눈’을 통해서 ‘마음’을 보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혀)에서 드러나고”(집회 27,4), “사람의 말(혀)은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낸다.”(집회27,6)고 말하며,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5)라고 말합니다. 또한 <복음>은 눈 속에 있는 ‘티’와 ‘들보’도 ‘마음의 곳간’에서 흘러나옴을 말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루카 6,45)
그러니 이제는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찬미하오며, 우리의 ‘혀’가 “아침에는 당신 자애를, 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시 92,3) 하고 <화답송>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마음의 “선하신 뜻”(루카 10,21)을 품으신 아버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1코린 15,57).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고, 그 승리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14-15)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1코린 15,58)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며,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시 13,6) 하고 <영성체송>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실,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하신 말씀입니다.
먼저 “눈 먼 스승의 비유”, 곧 제 눈에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형제 눈에 있는 티를 빼려고 하는 위선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앞 장면과 연결해 볼 때, 결국, ‘판단하지 말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판단보다 앞서, 하느님의 “선의(호의, 자애)의 마음”(헤세드)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3)
구약에서 ‘열매’는 주로 행동을 가리키고(이사 3,10;예레 17,10;21,14;호세 10,13), ‘나무’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거짓 열매를 맺고, 참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참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가시나무가 무화과를 내지 못하고, 가시덤불이 포도를 내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매’는 ‘혀와 눈’, 곧 ‘말과 판단’을 통해 드러나는 행실로, ‘나무’는 ‘마음의 곳간’으로 표현됩니다. 곧 ‘열매’는 우리의 입으로 하는 ‘말’과, 눈으로 하는 ‘판단’으로 드러납니다. 곧 ‘마음의 곳간’에 선한 것이 담겨 있는지 악한 것이 담겨 있는지에 따라 말과 판단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말과 판단의 곳간이요, ‘말과 판단’은 마음의 열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열매인 말과 판단을 보면, 나무인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분명,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기에, ‘그리스도의 마음’, 곧 ‘호의의 마음’을 품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과 판단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몸으로 하는 ‘실행’으로 드러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하면서 “아버지의 선하신 뜻”(루카 10,21)을 실행하는 것을 당신의 ‘일’로 삼으셨고, 오늘 <복음>의 뒷 절에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라고 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선하신 뜻”(루카 10,21)의 ‘실행’이야말로 진정한 향기일 것입니다. 비록 홍수가 들이닥쳐도 떠내려가지 않는 반석 위의 집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말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되게 하소서!
------------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형제의 눈에서 티가 아닌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_*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마음의 곳간을 잘 관리하기>
-주님을 사랑하라-
“주님은 내 버팀목이 되어 주셨네. 내가 그분의 마음에 들었기에.”(시편18,19)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우리의 영적 삶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사랑은 고차원의 덕목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다산>
“가엾이 여기는 마음,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맹자>
사람이라해서 다 사람이 아니라, 맹자의 사단칠정(四端七情)중 사단의 네가지 본성에서 나오는 마음이 있어 비로소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맹목적이 아닌 사심없는 눈밝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님 말씀은 지혜의 눈을, 혜안(慧眼)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뜬 맹인도 많습니다. 마음따라 보기에 마음이 없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눈먼이가 눈먼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혜안의 분별이 참 중요합니다. 겸손과 지혜로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릴 때 비로소 올바른 분별입니다.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 때 이런 자기를 아는 겸손에 지혜의 눈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그대로 우리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눈의 들보를 모르기에 남눈의 티를 뽑아내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때로 “니가 뭔데?” 또는 “니나 잘해!” 같은 반발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모를 때 남을 판단하지 정말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는 절대로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선입견, 편견에 눈멀어 남 판단했다가 착각과 오해로 밝혀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복음의 나무 열매의 비유도 아주 적절합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듯이 말이나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압니다. 좋은나무는 나쁜열매를 맺지 않고 나쁜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합니다. 너무 자명한 사실입니다.
사람의 경우도 그대로 통합니다. 글이나 말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좋아야 그 열매들인 말도 글도 행동도 생각도 좋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마음이 나쁘면 말도 글도 생각도 바르지 못하고 나쁩니다. 바로 이래서 부단한 회개와 사랑의 수행을 통해 마음의 정화와 성화에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 평생 정성을 다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전례 공동기도 수행의 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도 “말”에 대한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체로 치면 찌꺼기가 남듯이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 말을 듣기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유창해도 진정성이 없어 혐오감을 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어눌해도 진정성 가득해 감동을 주는 말이 있습니다. 이래서 말한마디 천량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 하지만 참 좋은 적절한 감동의 말은 금 이상입니다. 우선 사람이, 마음이 선해야, 좋아야 합니다. 쏟아내는 말의 열매는 정직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습니다. 선한 곳간에서 쏟아내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청담, 유모어, 적절한 칭찬과 격려, 위로의 말은 분위기를 밝게하고 힘을 북돋아 주지만, 악한 곳간에서 쏟아내는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악담, 불평, 불만, 비난, 험담, 잡담, 단죄의 배설물같은 말은 분위기를 어둡고 무겁게 하며 공동체를 오염시킵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입니다. 말의 정화에 앞서 사람의 정화가, 마음의 정화가 우선임을 절감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마음의 가난에, 마음의 순수입니다. 마음의 곳간 관리에 한결같은 주님 사랑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요 마음 곳간은 사랑의 보물창고로 변합니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이런 마음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궁극의 희망이 되어 우리의 희망을 더욱 북돋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우리는 고백할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영적승리와 더불어 우리 마음의 곳간을 사랑의 보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 물이 올라 싱싱하리라.”(시편19,15).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마음의 곳간엔?>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평소에는 말 없는 사람이 술을 먹으면 말이 많아지고, 그리고 술에 취해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은 바람에 술 깨고 후회하기도 하고 술 취해 한 말이라고 변명이나 발뺌도 합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얘기하면 술에 취해서 한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 얘기하곤 내가 한 얘기가 아니라 술이 한 얘기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실은 속에 있는 얘기 곧 마음에 있는 얘기이고 누르거나 가두고 있던 얘기가 술기운에 봉인이 해제되어 밖으로 나온 것이라고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가 말하는 그대로입니다.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
오늘 복음도 같은 취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마음 곳간에 무엇이 있느냐, 무엇을 쌓아놓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제일 많이 쌓는 것은 불만입니다. 요즘은 불만을 넘어 분노를 많이 쌓습니다.
분노는 불만과 미움이 같이 쌓인 것입니다. 불만이 거듭거듭 쌓이고 미움이 거듭거듭 쌓이면 분노가 쌓이고 분노는 에너지화하고 폭발 에너지로 바뀝니다.
그래서 분노 곧 화가 나기도 하고 화풀이하기도 하는데
곳간 이론에 의하면 화를 쌓지 않는 것이 우선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화가 나면 화를 억누르기보다는 화를 잘 푸는 것이 낫지만 화풀이를 잘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아예 화가 나지 않게 하는 것이고 화가 나더라도 그것을 마음 곳간에 쌓지 않는 것이 우선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화가 나더라도 화를 내지 않거나 화를 잘 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예 화가 나지 않도록 하거나 화가 나더라도 화를 쌓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마음 곳간에 무엇을 쌓지 않는 것, 특히 좋지 않은 것들을 쌓지 않는 것, 이것이 제가 보기에 비움이고 가난입니다.
욕심의 비움과 가난,
미움의 비움과 가난,
애착의 비움과 가난 등입니다.
이렇게 비움과 가난을 통해 악한 곳간에 쌓인 불만과 미움과 분노를 제거한 뒤에 우리는 그 곳간을 선한 곳간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곳간을 선한 것들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우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하느님의 진리로 채우고,
하느님의 정의로 채우고,
하느님의 평화로 채웁니다.
그런 다음에는 입에 자물쇠를 채울 필요가 없고, 무슨 말을 할까 조심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뭘 말해도 자기 말과 악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니
말함에 있어서 자유로워도 될 것이고, 선한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 오히려 말을 많이 할 것이며,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복음 선포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되고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의 곳간에는 무엇이 쌓여있는지 무엇을 비워내야 할 것인지 먼저 성찰하고 비워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내 마음의 선한 곳간!>
오늘 복음(루카 6,39-45)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과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말씀입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인데, 이는 '자신은 괜찮고 타인의 행동만 문제를 삼는 것'을 빗대어 이르는 말입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41-42)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4ㄱ.45)
그러니 '내 마음의 곳간(창고) 안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믿는 이들의 신앙 행위'는 '내 마음의 곳간 안에 성령 채우기'입니다. 이 성령이 악한 것들을 몰아내고, 이 성령이 너를 기쁘게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성령께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내 마음의 곳간에서 어떤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는지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를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너를 죽이는 말인지?'
"사랑해, 고마워, 잘했어!"
너를 살리는 말들이 우리 안에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 44)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압니다.
나무는
열매 이외의
것들은
바라지 않습니다.
좋은 나무는
하느님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을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열매로
좋은 지향을
드러내며
좋은 길을
냅니다.
좋은 열매를
봉헌하며
그 열매마저
붙잡지 않는
나무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가장
좋은 때를
놓치지
않습니다.
꽃피고
열매 맺어야 할
가장
좋은 때를
압니다.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묻게 됩니다.
우리가 맺는
일상의 열매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됩니다.
마음에서 나와
언어가 되고
행위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좋은 마음의
선택과 행동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좋지 않은
마음에 대한
진실된
회개를 합니다.
좋은 마음은
상황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고
과거를 바꿉니다.
좋은 나무는
먼저
자신에 대한
회개로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열매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선한
주일 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