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는 어쩐일인지 '좌파' 지적질을 불특정 관계에서 간간히 당하고 지극히 세상 정치에 대하여 사실상 무가치하다고 치부하는 저인지라 이것에 대해 복음적 의미를 묵상하는 일이 잦습니다. 더구나 이런 일이 '믿는자들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냥 털고 모른척하고 사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그들의 내면에 무엇이 있던 것일까요?
이처럼 한국 개신교 내부에서 "공동체적 사랑, 약자에 대한 긍휼, 사회적 정의"라는 지극히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가치를 '좌파'나 '이념적 편향'으로 몰아세우는 현상은, 한국 교회가 걸어온 역사적 파행과 개인의 심리적·신학적 불안이 복합적으로 작동한 결과로 보여집니다.(어쩐 일인지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이 생활 주변에 자주 출몰하네요. 다들 나이가 들어서 겁쟁이가 된 것일까?)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제자들만 남겨졌던 그 상황에서 예수를 주(퀴리오스;Kyrios)라 호칭하는 고백은 단지 관념적 세계에서의 종교용어가 아닌 '나의 삶의 전반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의미였기 때문에 당시 로마제국이나 때로는 속국일망정 헤롯왕 같은 정치가들에게는 '체제반복을 꾀하는 역도들'을 의미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성령이 압도하는 사건을 내적으로 체험하는 이들이기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내 목숨을 포함하여)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 곧 신앙'이 된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나의 안전과 생명을 위탁하는 결속력으로 서로를 믿고 의지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보통의 의미가 아니었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그 본래 의미는 한국 교회가 오랫동안 주입해 온 복음인 "예수 믿고 축복받아 성공하고, 죽어서 천국 간다"는 것과는 결이 몹시도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그런 값싼 은총이 대량으로 유통된 후유증 속에는 삶에서 복음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자기 정당화와 내면의 죄책감이 '좌파 프레임'을 통해 심리적 도피처로 삼아 '성경적 가르침이 아닌 좌파적 선동구호'로 몰아세울 수 있는 신학적,정치적 면죄부를 스스로 획득하는 셈입니다.
복음적 야성은 삶에서 거대하고 항거 불가능한 압도적 물량의 힘 앞에서도(미성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마주했을 그런 느낌?) 주저하지 않고 당돌하게 부딪히는 무모함을 기본 전제로 가지고 가는 것 아닐까 합니다. 때로는 그 야성을 잃지 않기 위해 주저없이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 앞에 타협 없이 맡겨버렸던 수많은 선례들을 떠올려 봅니다.
이러한 성경적 가치에 '좌파'라는 딱지를 즐겨 붙이는 이들의 내면은 "기독교의 탈을 쓴 사상적 공포,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아의 방어 기제, 그리고 복음의 야성을 잃어버린 영적 빈곤함"이 교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좌파나 우파라는 인간의 미미한 이념적 카테고리에 갇힐 수 없는 혁명적인 사랑과 공의의 실재입니다. 성경의 핵심인 긍휼과 사랑을 이념으로 매도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으로 예수를 따라 살 마음이 적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안타까운 신앙적 자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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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감합니다.
저들이 추구하는 것이 예수의 가치가 아닌 교회의 안녕이다 보니 교회에 이득을 주는 쪽이 정의라는 비뚤어진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건강한 신앙에 필수적 요소중에 간헐적으로라도. 몸의 수고 적극적으론 고생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저의 관점으로는 몸땡이가 너무 편해놔서 소위 복된 행실에 대해서는 거의 무덤 근처에 살고, 입은 예수님도 못따라갈 유창함이 한몫하는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