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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맥을 이어온 스승들
*주: 2012년에 영담님이 올린 것을 다시 게재합니다.
고엥까의 위빳사나 수련생들과 지도 선생님들은 법맥을 이어온 스승들에게 큰 감사의 마음을 느껴야 합니다. 이 법맥은 고따마 부처님으로부터 대를 이어 담마의 귀중한 보석을, 처음의 순수성 그대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 순수한 위빳사나 수행법은 수세기 동안, 대부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비구 스승들의 계보를 따라 보존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장 최근의 우리 전통의 재가자 담마차리야(Dhammachariya) 스승들(사야지 우 바 킨과 사야 따지)과, 그 분들이 위빳사나를 가르칠 수 있도록 인가해 주신 위대한 비구 학자인 레디 사야도 뿐입니다. 우리 전통의 스승들의 간단한 이력과 전기를 읽어 보십시오.
레디 사야도(Ledi Sayadaw) 스승님(1846 – 1923)
레디 사야도(Ledi Sayadaw) 스승님은 1846년, 북부 버마, 슈웨보(Shwebo) 지방(현재는 모뉘와 Monywa 지방)의 디페윈(Dipeyin)군 사잉-퓐(Saing-pyin)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명은 마웅 뗏 카웅(Maung Tet Khaung)이었습니다("마웅"은 남자 아이나 젊은 남자를 지칭하는 "님"과 비슷한 호칭이고, "뗏"은 위로 올라간다는 뜻, "카웅"은 지붕 또는 산꼭대기라는 뜻) 이 아명은 참으로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후에 젊은 마웅 뗏 카웅은 그가 노력한 모든 일에서 정상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릴 때 마을 전통에 따라 수도원 학교에 다녔는데, 거기서는 비구 스님들이 어린이들에게 버마어를 읽고 쓰는 것과, 빠알리어 경전을 외우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버마 전역 어디에나 있던 이 수도원 학교들로 인해서 예나 지금이나 버마는 문맹률이 아주 낮습니다.
여덟 살에 그는 첫 스승이었던 우 난다-다자 사야도(U Nanda-dhaja Sayadaw)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였고, 나이 열다섯에 사미승이 되었고, 그때 냐나-다자(Nana-dhaja, 지식의 깃발)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수도원 교육은 빠알리어 문법과 빠알리어로 된 여러 경전에 대한 공부였습니다. 특히 아비담맛타-상가하(Abhidhammattha-sangaha)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는데, 이는 아비담마(Abhidamma, 논장)의 지침서로 쓰이는 주석서입니다.
그는 나중에 아비담맛타-상가하에 대한 주석서를 스스로 저술하여, 책 이름을 빠라맛타-디빠니(Paramattha-dipani, 최고 진리의 해설)라고 하였는데, 그 이전부터 인정받던 주석서에서 명백한 잘못된 점들을 찾아내어 고쳤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조금 논란이 있었지만, 이후에 이 수정본은 비구 스님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의 저서는 표준 참고서가 되었습니다.
그가 사미승으로 있었던 19세기 중반에는 오늘날과 같이 전등불이 없었으므로, 보통 낮에는 경전을 공부하고, 어두워진 뒤에는 비구 스님들과 다른 사미승들과 함께 입으로 외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아비담마를 통달했습니다.
18세가 되었을 때 사미승 냐나-다자(마웅 뗏 카웅)는 잠시 승복을 벗고 속세로 돌아와 평신도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받은 교육이 너무 띠삐따까(삼장)에만 좁게 치우쳐서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약 6개월 후, 그의 첫 스승과 또 다른 훌륭한 스승이었던 뮈인흐틴 사야도(Myinhtin Sayadaw)가 사람을 보내,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거절했습니다.
뮈인흐틴 사야도는 최소한 공부는 계속해야 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젊은 마웅 뗏 카웅은 머리가 대단히 명석하고 향학열이 강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힌두교의 고대 성전인 웨다(Vedas)를 배우고 싶으냐?"하고 뮈인흐틴 사야도가 물었습니다.
"예, 스승님" 하고 마웅 텟 카웅이 대답했습니다.
사야도는 "그렇다면 사미승이 되어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예우(Yeu) 마을의 우 간다마(U Gandhama) 선생이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을거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다시 사미승이 되겠습니다"하고 동의함으로써, 그는 다시 수행자로 돌아오게 되었고, 다시는 승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훗날 그는 그의 제자 한 사람에게 이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처음에는 웨다를 배워서, 그 지식으로 사람들 점을 쳐서 먹고 살려고 했지. 그러나 내가 다시 사미승이 된 것은 더 큰 행운이었네. 그 때 나의 스승님들은 참으로 현명하셨고, 사랑과 자비가 넘쳐서 나를 구원하신 것이었지."
총명한 사미승 냐나-다자(마웅 뗏 카웅)는 간다마 사야도 스승 문하에서 6개월 만에 웨다를 통달하였고, 계속해서 불경을 공부했습니다. 나이 20세가 되던 1866년 4월 20일에 그의 옛 스승 우 난다-다자 사야도(U Nanda-dhaja Sayadaw)로부터 비구계를 받고 비구 스님이 되었습니다. 즉, 우 난다-다자 사야도가 그의 은사(계를 준 스승)가 되었던 것입니다.
1867년 바로 우기 수련기(하안거) 전에 비구 냐나-다자(마웅 뗏 카웅)는 그의 은사와 그가 나고 자란 모뉘와 지역을 떠나 만달라이(Mandalay)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 1853년에서 1878년까지 왕위에 있었던 민 돈 민(Min Don Min)왕의 시대에, 만달라이는 버마 왕국의 수도였으며, 또한 버마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는 여러 권위 있는 사야도들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평신도 학자들에게도 배웠습니다. 그 때 그는 주로 마하-조티카라마(Maha-Jotikarama) 수도원에 머물렀고,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정화의 길)를 버마어로 번역한 것으로 유명한 산-캬웅 사야도(San-Kyaung Sayadaw)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습니다.
그 기간에 산-캬웅 사야도는 2000여 명의 학생들에게 스무 가지 질문을 내어 시험을 쳤습니다. 그 시험에서 비구 냐나-다자(마웅 뗏 카웅)만이 유일하게 모든 질문에 정답을 했습니다. 그 정답은 훗날 1880년에 빠라미-디빠니(Parami-dipani, 완벽해지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출판 되었는데, 이는 레디 사야도가 빠알리어와 버마어로 쓴 많은 책들 중에서 첫 번째 책이 되었습니다.
그가 만달라이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민 돈 민 왕이, 여러 나라의 비구 스님들이 띠삐따까를 독송하고 정화하는 불교 제 5차 결집을 후원하였습니다. 그 회의는 1871년에 개최되었고, 경전들을 재정비하여 729개의 대리석판에 새겼는데, 그 대리석판들은 오늘날에도 만달라이 언덕 자락에 있는 꾸토다우(Kuthodaw) 황금 파고다 옆, 조그만 탑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회의에서 비구 냐나-다자(마웅 뗏 카웅)는 아비담마를 번역하고 편집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8년간 비구 스님으로 지내면서 모든 시험을 치른 냐나-다자(마웅 뗏 카웅)는 자기가 공부해 오던 마하-조티카라마 수도원에서 기초 빠알리어를 가르치는 교수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후 8년간 그 곳에 머물면서 스스로의 학문적 수련과 교수 생활을 마치고, 1882년에 모뉘와(Monywa)로 옮겼습니다. 이제 그는 36살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모뉘와는 친드윈(Chindwin) 강의 동쪽 연안에 자리 잡은 조그만 지방 중심도시로, 띠삐따까의 일부만이 아닌, 전체를 망라하는 교수법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모뉘와에서 비구승들과 사미승들에게 빠알리어를 가르치기 위하여, 그는 낮에는 시내에 머물다가 저녁에 친드윈 강을 건너 서쪽 연안으로 가서, 밤에는 락-빤-따웅(Lak-pan-taung) 산 기슭에 있는 조그만 위하라(vihara, 수도원)에 묵었습니다. 현재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그 기간에 아나빠나(Anapana, 숨쉬기)와 웨다나(Vedana, 몸 감각 느끼기)를 강조한 버마 전통의 위빳사나 방법으로 수련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885년에 영국이 버마 북부를 정복하면서, 1878년부터 1885년까지 버마를 통치하던 최후의 왕, 티바우(Thibaw)는 망명하였습니다. 그 다음 해인 1886년에 그는 모뉘와의 바로 북쪽에 있는 레디(Ledi) 숲에서 은둔수련에 들어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비구들이 그 곳으로 그를 찾아 모이기 시작하였고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구들이 살 수도원이 지어졌으며, 그 이름을 레디-타우야(Ledi-tawya)라고 했습니다. 이 수도원 이름으로 인해, 그는 레디 사야도(Ledi Sayadaw)라는,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뉘와가 큰 도시로 발전하게 된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많은 사람들이 레디 사야도의 수도원에 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레디-타우야에서 열성적인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도, 그는 스스로의 명상 수련을 위해 강을 건너 조그만 오두막 위하라에 가서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그가 레디-타우야 수도원에 약 10년 넘게 있었을 때, 그의 주요 학문 저서들이 출판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빠라맛타-디빠니(Paramattha-dipani, 최고 진리의 해설)로, 1897년에 출판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니룻따-디빠니(Nirutta-dipani)로, 빠알리어 문법책이었습니다. 이 책들로 인해, 그는 버마에서 학식이 가장 높은 스승으로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레디 사야도는 비록 레디-타우야 수도원에 주로 근거를 했지만, 때때로 버마 전역을 다니면서 명상법과 경전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빠리얏띠(pariyatti, 담마 이론)에 뛰어나면서, 빠띠빳띠(patippatti, 담마 수련)에도 철저한 보기드문 비구로서, 많은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버마 전역을 여행하면서도 그는 많은 책을 썼습니다. 예를 들면, 배로 만달라이에서 쁘로메(Prome)로 가는 도중에 이틀 만에 빠띠짜-사뭅빠다-디빠니(Patica-samuppada-dipani)를 저술했습니다. 여행 중에 여러 참고서적들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지만, 경전에 관한 그의 방대한 지식 덕분에 아무런 참고서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불교 총서(Manuals of Buddhism)에 나오는 76 편람과 주석서와 수필 등이 그의 저술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훗날, 그는 버마어로도 담마에 관한 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는 평범한 시골 농부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담마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쓰는 것은 보편적이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면서 직접 가르치는 경우에도, 비구들이 빠알리어로 긴 경전 구절을 외우고, 그 다음에 그것을 문자 그대로 번역해 주었으므로,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아주 어려웠습니다. 담마를 사회의 모든 계층에 널리 전파하겠다는 레디 사야도의 원력이 넘쳐 흘렀던 것은, 경전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에서 오는 강력한 힘과, 그로 인한 멧따(사랑과 자비) 때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쓴 빠라맛타-상케빠(Paramattha-sankhepa)는 아비담맛타-상가하(Abhidhammattha-sangaha)를 버마어로 번역한 2000여의 시구들인데, 이는 젊은이들을 위해 쓴 것으로, 오늘날에도 대단히 인기있는 책입니다.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으로 아비담마를 배우는 여러 모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버마 전역을 여행하면서, 레디 사야도는 소고기를 먹지 말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고-맘사-마띠까(Go-mamsa-matika)라는 책을 썼는데, 이는 식용으로 소를 살생하지 말 것과, 채식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20세기로 접어들던 이 시기에 우 포 따는 레디 사야도 스승를 처음으로 방문했는데, 우 포 따는 레디 사야도에게 위빳사나를 배워, 버마에서 평신도 명상 스승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 중 하나가 되었고, 고엥까 선생님(Goenkaji)의 스승인 사야지 우 바 킨(Sayagyi U Ba Khin)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1911년에 이르러, 학자로서 그리고 명상 대가로서 레디 사야도의 명성은 대단하여, 버마를 통치한 인도 주둔 영국정부로부터 악가마하-빤디따(Aggamaha-pandita, 최고의 학자)라는 칭호를 수여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랑군대학교로부터 문학 박사학위도 수여받았습니다. 1913년부터 1917년 사이에 런던의 빠알리어 경전 학회의 라이스-데이비즈(Rhys-Davids) 여사와 서신으로 교류하였고, 아비담마의 여러 논란들에 대한 그의 토론문이 번역되어 영국 빠알리어 경전 학회의 논문집에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조명시설이 좋지 않은 곳에서 오랫동안 독서와 연구와 저술을 했기 때문에, 말년에 레디 사야도의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나이 73세에 시력을 잃었고, 남은 여생동안 명상 수행과 명상법 전수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1923년, 나이 77세에 만달라이와 랑군의 중간에 있는 퓌인마나(Pyinmana)의 한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이 수도원은 그가 버마 전역을 여행하면서 명상을 가르친 곳으로, 그의 이름으로 설립된 수많은 수도원 중 하나였습니다.
아마 레디 사야도 스승은 그 시대 가장 휼륭한 불교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담마의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 학자이자 성자와도 같은 스님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위빳사나 수행을 부흥시켜, 출가자는 물론 일반 사람들에게도 널리 전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역할 외에도, 간결하고 명확하며 방대한 그의 저서들은 담마의 체험적인 면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1. 사야도(Sayadaw)라는 칭호는 존경스런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국왕에게 담마를 가르치는 장로 스님들(Theras, 테라스)에게 주어지는 호칭이었으나, 이후에 일반적으로 높이 존경받는 스님들을 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thera(장로 스님) + s(영어 복수 형 어미)]
2. 아비담마(Abhidhamma)는 빠알리어로 쓰여진 세 번째 경전으로서, 부처님이 마음과 사물에 관해서 심오하고, 자세한, 기술적인 설명을 하신 경전입니다.
3. 띠삐따까(Tipitaka)는 불교경전 전체를 말하는 빠알리어로서, 세 바구니(삼장)라는 뜻입니다. 즉 위나야(Vinaya, 율장), 숫따(Suttas, 경장), 그리고 아비담마(Abhidhamma, 논장, 주 2 참조)입니다.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_()_ _()_ _()_
고맙습니다 .... _()_
감사합니다.
버마도 인도 식민지 였군요
사두 사두 사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