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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12월 20일
필리핀 여객선 도나파즈호
유조선과 충돌… 4375명 사망
사건 당시 불타버린 도나파즈호.
1987년 12월 20일. 도나파즈호는 수도
마닐라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려는
승객들을 한 배 가득 싣고 레이테섬을 떠
나 마닐라로 향하던 중이었다.
배의 승선 가능 인원은 1424명이었지만
실제론 43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해운
사가 값싼 추가 탑승권을 불법으로 팔았
던 것이다.
원래 이 배는 63년 일본에서 608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배로 제조됐지만 몇 차례
의 개조 과정을 거치면서 1400여 명이
탈 수 있게 됐다
대다수 승객이 잠자던 오후 10시 30분에
8,800톤 가솔린을 적재한 유조선 벡터호
와 충돌하며 폭발했다. 대부분의 가솔린
이 새어나오며 불이 붙었고 벡터호와 도
나파즈호는 불길에 휩쓸렸다.
근처 바닷물까지 이 불길에 휩쓸리면서
온도가 급속도로 올라가 불바다에 수온
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바닷물까지 끓어
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모두가 즐거워야
할 성탄절 휴가여행은 생지옥이 되고
말았다.
▶2009년 이란 고위 성직자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 사망
▶2009년 여배우 브리트니 머피 사망
▶2009년 일출 명소 향일암 화재
2009년 12월 20일 오전 0시 20분쯤 발생한 화재로 향일암(向日庵·전남도 문화재자료 40호)에서 화재가 발생해 사찰 건물 8동 가운데 대웅전과 종무실, 종각 등 3동이 전소됐다.
전남 여수시 돌산읍에 위치한 향일암은 해안의 대표적인 해맞이 명소로 연초마다 6만~8만명의 인파가 몰리는 곳이다. 화재 당시 사찰에는 스님과 신도 등 26명이 있었지만, 긴급대피해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사찰이 가파른 산 중턱에 있고 날씨가 건조했던 터라, 불은 약 3시간여 계속됐으며 건물 3동과 대웅전 안에 있던 청동불상과 탱화 등 문화재도 상당수 소실됐다. 소방서 측은 이번 화재로 약 5억9000여만원 상당의 재산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향일암은 화엄사의 말사(末寺)로, 원효대사가 659년(의자왕 19년) 원통암(圓通庵)이란 이름으로 창건했으며 1715년 인묵(仁默)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암자를 옮기고, ‘해를 바라본다’(向日)는 뜻의 향일암으로 명명했다. 국내 4대 관음기도 도량 중 하나로 1984년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됐다. 대웅전 등은 1986년 새로 지었다.
▶2008년 미(美) 인권운동가
베벨목사 사망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후보
정계은퇴 선언
▶2000년 프로야구 6개 구단, 선수
협의회 회장단 6명을 방출한다고 발표
▶1999년 국내최초 관측위성
‘아리랑1호’ 발사
▶1999년 한국-미국 범죄인
인도조약 발효
▶1999년 마카오
, 442년 만에 중국에 반환
▶1999년 최병모 특별검사,
옷로비 의혹사건 발표
▶1998년 한국, 제13회 방콕아시안게임
에서 종합2위(금메달 65, 은메달 47,
동메달 52)
▶1998년 이봉주,
제13회 방콕아시안게임 남자마라톤에서
2시간 12분 32초로 우승
▶1997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사면 복권 발표
▶1996년 천문학자 칼 세이건 사망
세이건 [Sagan, Carl Edward, 1934.11.9~1996.12.20]
세이건이 미국 교회협의회 사무총장인 캠벨 목사에게 물었다. “당신 같이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가.”
그녀는 바로 반문했다.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을 믿지 않는가.” 캠벨은 실제 두 눈으로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블랙홀의 존재는 믿으면서 그런 질문을 하는데 깜짝 놀랐다.
그러나 ‘오직 증거가 있어야 믿는다’는 세이건의 고집은 확고했다. 캠벨은 답답했다.
“당신은 사랑을 믿는가?”(캠벨)
“그렇다.”(세이건)
“사랑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가?”(캠벨)
사랑은 신앙과 마찬가지로 그 한가운데에 입증하지 못할 무엇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데 세이건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임종 마지막 순간에도 귀의하지 않았다. 죽음의 피난처를 구하지 않았다. 부인의 회고. “남편은 믿음을 갖고자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알고자 했을 뿐이다.”
칼 세이건. 그는 죽음도 삶과 마찬가지로 오직 사실(事實)로 직시하고자 했던 과학자였다.
그만큼 과학의 경이와 신비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퍼뜨린 사람은 없었다. 그의 저작은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했으나 대중들은 그의 시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색에 매혹됐다. 그의 ‘코스모스’는 천문학의 문외한들을 지구 밖으로 초대했다.
‘태양계가 너무 비좁다’고 생각했던 세이건.
외계생명체에 대한 그의 집착은 대단했다. “만약 우주에 우리뿐이라면, 공간의 엄청난 낭비일 것이다.” 그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콘택트’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우주에 티끌처럼 외롭게 떠있는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명명했다. 맹목적이고 공허하며 침묵할 뿐인 우주.
세이건은 우주로 나아가자고 주장한다. “우주의 외딴 시골구석에서 원숭이의 사촌으로 태어난 인간에게 유일한 기회는 광활한 우주뿐이다.”
그는 ‘외계생명체 탐색(SETI)’ 계획을 적극 격려했다. 세이건은 “SETI는 우주의 바닷가에 처음 발을 담그는 위대한 시도”라고 말했다.
▶1994년 국내 최장 슬치터널
(6,128m) 착공 5년 만에 관통
▶1989년 국방부, FX기종 FA18기 확정
▶1989년 미국, 파나마 침공
미국은 파나마의 권력자인 마누엘 노리에가를 마약 밀수 혐의 죄목으로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병력 2만4000명을 파나마에 파병했다. 1984년 파나마를 장악한 노리에가는 애초에는 미국과 사이가 좋았으나 점차 미국의 이익과 배치되는 노선을 걸어 미국에는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다.
미국의 파나마 침공은 국제법 위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유엔도 ‘군사적 침공’으로 규정, 미국규탄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일단 미국이 침공하자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났다. 세계 최초의 스텔스 기종인 F-117기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는 등 양측의 전력은 애당초 비교가 되지 않았다.
노리에가는 미군의 체포를 피해 바티칸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미군이 대사관을 포위하고 바티칸에 그를 내보내도록 압력을 넣자 결국 투항해 미국으로 송치됐다. 미국의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노리에가는 “나는 마약 거래와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40년형을 선고받고 지금도 복역중이다.
미국의 파나마 침공의 공식적인 명분은 노리에가의 마약 밀매였지만 파나마 운하와 관련된 경제적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는 게 국제 사회의 시각이었다. 미국이 임대한 파나마 운하 사용 기간이 1997년 만료되고 이를 기화로 노리에가가 국유화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당한 명분'작전(The operation of 'a just cause') ?!
▶1983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아라파트파 4000명 레바논 철수
▶1983년 유전자공학육성법 제정
▶1983년 코모로 북한과 단교
▶1982년 미국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 사망
Chopin - Heroic Polonaise Op. 53 - Arthur Rubinstein
▶1982년 터키 에브렌 대통령 내한
▶1982년 1천만 이산가족
재회추진위원회 발족
▶1980년 국내 최초 프로축구팀
할렐루야 창단
▶1980년 조자양(趙紫陽)
중국수상 평양 방문
▶1979년 군사재판, 김재규 김계원 등
피고인 7명에 사형선고
▶1978년 제8회 아시안 게임 폐막,
한국3위
▶1977년 이란에 대지진, 800여명 사망
▶1976년 고물카 폴란드 전 수상 사망
▶1974년 문세광 사형집행
▶1973년 블랑코 스페인 수상 피살
▶1971년 파키스탄 대통령에 부토 취임
▶1968년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사망
1968 년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 (John Ernst Steinbeck) 미국 뉴욕
에서 사망( 1902년 2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 설리너스 에서 출생~ )
미국 경제구조의 모순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가난한 삶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작품 활동을 하였다. 윌리엄 포크너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뒤를 이은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히며, 그의 작품은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문체에 특징이 있다 /1962년 노벨 문학상
수상. 대표작: 에덴의 동쪽 1952년, 분노의 포도 1939년,
통조림공장 골목 1945년, 찰리와 함께한 여행 (1962)
▶1967년 을지로1가 '새서울 지하상가'
오픈
▶1965년 섬진강댐 준공
▶1964년 월남군부쿠데타
(구엔 칸 최고사령관 주동), 최고회의 해체
▶1961년 UN총회,
대기권 평화적 이용안 가결
▶1960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
결성
▶1955년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처형
▶1945년 합동통신 창립
▶1945년 조선연극동맹 결성
▶1942년 노기남 신부,
한국 최초로 주교에 임명
▶1930년 중국, 치외법권을 철폐
▶1917년 광복단 총사령 박상진 체포
▶1916년 윌슨 미국 대통령, 강화각서
발표
▶1916년 미국 월스천문대의 100인치
대망원경 완성
1917년 완성된 윌슨산 천문대에는 20세기 경이로운 공학 기술의 완성품으로 꼽히는 무게 100톤, 구경 2.5m(100인치)의 반사만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의 망원경은 헤일이 1908년부터 1917년 11월까지 10년이나 걸려 완성한 것이었다. 9만2천분의 1의 비율로 완벽한 상태로 연마된 무게 약 4톤의 주거울은 8천㎞ 밖의 거리에서 촛불이 반짝이는 것도 포착할 수 있는 당시 최대의 것이었으며, 포도주병 1만개 분량의 용융유리를 필요로 했던 그 때까지 만들어진 가장 큰 유리조각이었다. 자신이 MIT에 들어가 별의 신비로운 현상 등을 연구하면서 천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망원경이라고 결론을 내린 헤일은 이런 천문대의 건립에 일생을 바쳤다.
▶1905년 일본, 한국통감부 및
이사청관제 공포
▶1901년 시인 박영희 출생
▶1880년 개화추진 위해
통리기무아문 설치
▶1876년 미국 천문학자
월터 시드니 애덤스 출생
▶1848년 루이 나폴레옹,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
▶1803년 미국,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구입
루이지애나와 영국
제퍼슨의 업적 중 하나는 미국의 영토를 두 배로 늘린 것이었다. 7년전쟁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는 미시시피 강의 서쪽 지역을 스페인에 양보했다. 미시시피 강 하구에 뉴올리언스 항구가 있었는데, 이 항구는 오하이오와 미시시피 계곡에서 생산된 물품을 선적하려면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곳이었다. 제퍼슨이 대통령이 된 직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스페인에게서 루이지애나라 불리던 그 거대한 영토를 되돌려받으려고 허약한 스페인 정부를 윽박지르고 있었다.
이 일을 지켜보면서 미국인들은 우려하고 분노했다. 합중국 바로 곁에서 거대한 식민 제국의 야심을 불태우는 나폴레옹의 계획은 모든 미국인들의 교역권과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때 제퍼슨은 단호하게 말했다. 만일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영국 함대와 행동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영국과의 또 다른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던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를 영국의 손길이 닿지 않게 미국에 팔아넘김으로써 성가신 일을 피하면서도 금고에 돈을 챙기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이런 제안은 제퍼슨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헌법은 그 누구에게도 영토를 사들일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제퍼슨은 헌법을 수정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그 사이에 나폴레옹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충고를 듣고 그 방법은 포기했다. 그리고 외국으로부터 영토를 사들이는 행위는 외국과 조약을 맺을 권한에 포함된다는 해석이 제도화되었다. 그러자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다.
“법과 제도가 비록 미숙하고 모자란다 하더라도 공익에 대한 선의가 이를 보완해줄 것이다.”
제퍼슨 행정부는 1803년 1,500만 달러에 루이지애나를 사들였다. 뉴올리언스 항구를 포함해서 26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였다. 이 광대한 영토의 비옥한 토지와 산, 숲 그리고 강은 이후 80년 만에 미국의 심장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가 되었다.
두 번째 임기에 들어간 1805년에 제퍼슨은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미국은 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비록 영국이나 프랑스 모두 상대국으로 향하는 배를 나포했지만, 해상에서 우위를 차지했던 영국이 나폴레옹의 프랑스보다 더 심각한 타격을 안겼다.
1807년에 영국은 7백 척 이상의 전함과 거의 15만 명에 달하는 해군 병력으로 막강한 전력을 갖추었다. 이 막강한 해군력이 항로를 장악하고 프랑스와의 교역을 가로막고 자기 식민지들과의 교역을 보호했다. 하지만 영국 함대의 수병들은 가혹한 조건에서 근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영국 함대에서 근무하려는 사람을 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한 영국의 수병들이 도망쳐서 미국 선박에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군 장교들은 미국 선박을 수색해서 이들을 색출하는 게 자신들의 당연한 임무이자 권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이걸 굴욕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미국인 선원을 영국 해군에 강제 징용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제퍼슨이 영국 전함은 합중국 해역에 머무를 수 없으며 즉각 떠나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영국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강력한 강제 징용으로 맞섰다. 제퍼슨은 영국에 경제적인 압력을 가해서 물러서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1807년 12월, 의회는 외국과의 모든 교역을 금지하는 통상금지법을 의결했다. 모순되게도, 정부의 권한을 축소하자고 주장하던 공화당원들이 정부의 권한을 엄청나게 강화하는 법안을 의결한 것이다.
1년 만에 미국의 수출은 전 해에 비해 5분의 1로 줄어들었다. 해운업자는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렀으며 뉴잉글랜드와 뉴욕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농민들도 심각한 피해를 입긴 마찬가지였다. 남부와 서부 지역 농민들이 곡물과 목화, 고기, 담배 등의 잉여 수확물을 수출하지 못하자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영국을 괴롭혀서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국내에서 불만이 고조되자 1809년 초에 제퍼슨은 국내 해운업자를 달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영국과 프랑스 및 이들의 보호령을 제외한 모든 나라와는 통상을 할 수 있게 하는 비통상법에 서명을 한 것이다.
1809년 제임스 매디슨이 제퍼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영국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전운이 무겁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의회에서 영국이 미국 시민을 강제 징용한 수천 건의 사례를 자세하게 보고했다. 게다가 북서부 지역의 정착민들은 인디언의 공격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이들은 캐나다의 영국인 관리들이 인디언을 사주했다고 믿었다.
이 일에 격분한 사람들은 캐나다를 정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디언에 대한 영국인의 영향력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고 나아가 새로운 식민지 영토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캐나다 정복에 대한 이런 열망은 미국인 강제 징용에 대한 분노와 함께 영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타올랐고, 마침내 1812년 합중국은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1722년 청나라 2대 황제 강희제 사망
▶1550년 황해감사 주세붕, 수원서원 창건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사망
▶69년 제8대 로마제국 황제
비텔리우스 암살
https://youtu.be/-_aKfAQfPBE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위hi스토리,섶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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