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티무르를 몽골제국의 최후의 계승자라고 하는것은 유목전사를 이끌고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을 정복했던 인물이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인물의 독특한 특징은 어떻게 표현하기가 어렵더군요! 이번에 약 2부나 3부에 걸쳐서 그의 프로필(어쩌면 연대기를)올릴것 같군요! 조금은 따분하지만 보세요!
출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캠브리지로 본 이슬람사, 이슬람사 참고.
티무르 Timur Timour라고도 씀. 별칭은 Timur Lenk, Timurlenk(터키어로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Tamerlane/Tamburlaine). 1336 트란스옥사니아 사마르칸트 근처 케시~1405. 2. 19 침켄트 근처 오트라르. 이슬람 신앙을 지닌 투르크인 정복자.
중국 이름은 첩목아(帖木兒)이다. 주로 인도에서 러시아를 거쳐 지중해까지 정복하는 과정에서 행한 야만적 행위와 그가 세운 왕조의 문화적 업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애]
티무르는 투르크화된 바를라스 부족의 한 구성원이었는데 이 부족은 본래 몽골족의 일원이었고 칭기즈 칸의 아들 차가타이의 트란스옥사니아(대략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됨) 정복전쟁에 참여한 후 그곳에 정착하여 차가타이 한국으로 알려진 곳에서 성장했다.
트란스옥사니아의 당시 통치자 아미르 카즈간이 1357년에 암살된후 무정부 상태에서 1361년에 이러한 혼란한 상황을 이용해 트란스옥사니아의 중심도시인 사마르칸트를 침략한 카슈가르의 칸 투글루크 테뮈르에게 티무르는 충성을 맹세했다.
25세의 무명의 티무르는 결사항전보다는 충성을 서약하고 이 기회을 이용해 경쟁자을 제거하고 자신이 바를라스 부족의 수장이자 케시의 통치자의 지위을 확고히 다졌다.
투글루크 테뮈르는 티무르의 노련함을 높이 평가하여 아들인 일리아스 호자를 트란스옥사니아의 총독으로, 티무르를 그의 자문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얼마 후 테뮈르가 벡칙이란 또다른 대신에게 막강한 권력을 주었으므로 티무르는 2인자에 불과했다.
티무르는 얼마 후에 그들과 손을 끊고 도주하여 자신의 처남이며 아미르 카즈간의 손자인 아미르 후사인과 연합했다. 수많은 방랑과 모험 끝에 경험을 쌓은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의 쿤두즈 지방에서 후사인 휘하의 병사들을 재조직하고 다시 트란스옥사니아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일리아스 호자를 케쉬와 사마르칸트 근처의 타쉬아리기, 카바마탄 사이의 한 지점에서 물리치고(1364) 호젠트을 지나 타쉬켄트에 이를 때까지 추격했다. 일리아스 호자는 겨우 일리로 도망쳤다. 이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투글루크 테뮈르는 일리에서 사망했다. 이제 위협이 없어진 그들은 트란스옥사니아 정복에 착수하여 1366년경 이 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강력한 권력자가 된 그들 사이는 곧 경쟁상태가 되었고 처음엔 후사인이 우세하여 티무르는 또 한번의 도주을 했으나 이번에는 숙적인 일리의 몽골인들을 부추겨 트란스 옥사니아 지방의 침략을 획책했다.
몽골인의 침략에 당황한 후사인은 다시 티무르에게 동맹을 제의했고, 티무르는 혼괘히 받아들여 다시 권력을 회복했다. 더 이상 티무르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엇다는 것을 안 후사인은 자신의 영지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1370년경 티무르는 기습으로 발흐에서 후사인을 포위하고 그를 항복시켰다. 후사인은 메카로의 순례을 가는 도중 암살되었다. 그의 부하에 의한 죽음인 것이다. 발흐의 주민들은 대부분 후사인에게 충성한 대가를 죽음으로 치르었다.
여기서 티무르의 태도는 전형적인 동양적 위선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우정어린 항변, 화해의 포옹, 그리고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쿠란]의 구절의 인용, 뒤이은 배반, 급습, 무자비한 처형.’
강력한 경쟁자을 제거한 티무르는 자신을 몽골 제국의 복구자이자 차가타이 계통의 칸들 가운데서 유일한 사마르칸트 주권자로 선언했다.
[정복기]
그후 10년 동안 티무르는 자타(동부 투르키스탄)와 화레즘의 칸들과 싸워 1380년 마침내 카슈가르를 점령했다. 그후 러시아인들(그들은 마마이의 금장 한국, 즉 킵차크 한국에 대항해서 일어났음)에 대항해서 크림 반도의 몽골 칸인 토흐타미시에게 군대를 지원했다.
그의 군대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폴타바 근처에서 리투아니아군을 물리쳤다. 1383년에는 헤라트 점령과 동시에 페르시아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페르시아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일 한국 왕조로 알려진 몽골족 말기 지배자들의 통치 아래 나타나게 된 회복의 기미도 일 한국 마지막 왕인 아부 사이드가 죽은 후에는 좌절되었다(1335).
권력의 공백은 경쟁적인 여러 왕조들의 내부 불화와 분열을 야기했다. 서로 전쟁중이던 이들 공국들은 티무르에 대항해 상호협력하에 효과적인 저항을 도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호라산과 동부 페르시아 전역은 1383~85년 함락되고 말았다.
그리고 파르스와 이라크·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그루지야등의 서부 이란의 정복원정의 구실은 메카로 가는 대상단을 약탈하는 루리스탄 지방의 산간민들을 응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의 갑작스런 종교적 충동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치안조치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수많은 산적들을 붙잡아 산꼭대기에서 던져버렸다.”
서부 이란 지역은 모두 1386~94년에 함락되었다. 그 사이 간간이 당시 킵차크 한국의 칸인 토흐타미시와 교전을 벌였는데 토흐타미시의 군대가 1385년 아제르바이잔을, 1388년 트란스옥사니아를 침략하여 티무르의 장군들을 패퇴시켰다.
1391년 티무르는 토흐타미시를 러시아 스텝 지역으로 추격하여 그를 패배시키고 왕위를 빼앗았다. 토흐타미시는 군대를 다시 일으켜 1395년 카프카스를 침략했는데 쿠르 강에서 결정적으로 패한 후에야 전투를 포기했다.
티무르는 러시아로 진군하여 1년 동안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하지만 아무런 지배체제을 구축하지 않고 돌아갔다. 오히려 티무르는 킵착을 황폐화 시켰다. 그는 타나와 사라이를 파괴시킴으로써 유럽과 중앙아시아 사이의 교역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엿다.
즉 그는 마르코 폴로가 묘사했던 고대의 대륙간 교통로를 막아버렸고, 칭기스칸의 정복을 거치면서 그나마 잔존하여 유럽에게도 도움이 되었을 그러한 흔적조차 지워버렸던 것이다.
다른 곳이나 마찬가지로 킵착에서도 그는 모든 것을 파괴하였고 아무것도 건설하지 않았다. 티무르가 원정 나가 있는 동안 페르시아 전역에서 발생한 반란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동부 이란의 도시 사브제와르가 1383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티무르는 끔찍한 보복을 가했다. “거의 2,000명의 죄수들이 산채로 차곡차곡 쌓이고 진흙과 벽돌이 함께 섞여 탑을 이룰 지경이었다.” 세이스탄도 같은 운명을 맞앗다. “우리의 병사들은 시체로 산을 만들었고 해골로 탑을 쌓앗다” 세이스탄의 수도인 자린지에서 티무르는 남녀 노소을 불문하고 요람에 있던 아이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을 모두 처형시켯다.
서부 이란에서는 자신의 가신의 죽음을 호기로 삼아 반란을 일으킨 무자파르 영토로 침공해(1387년 10-11월) 하마단을 거쳐 이스파한으로 진군햇다. 이스파한의 태수는 곧 항복했지만 주민들이 반항을 하자 곧바로 학살을 명령했다.
티무르의 입장을 변호하는 공식적인 기록인 [승전기]는 “7만개의 머리가 이스파한 성벽밖에 무더기로 쌓였고, 시내 곳곳에 해골무지가 생겨났다”라고 적혀잇다.
티무르는 문화적 세례을 받은 투르크인이었고 페르시아 시인의 열렬한 애독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란문명의 꽃을 파괴해버렸으며, 독실한 무슬림이었지만 무슬림 세계의 중요한 도시들을 파괴해 버렷던 것이다.
첫댓글 오호, 티무르... 제 아이디의 주인공이기도 하죠. ^ ^
정말 무자비하게 파괴했군요. 책에서 간략하게 내용만 봤는데 이정도로 파괴할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