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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의 사랑 ..(🙏)
올해로 제 나이 꼭 예순 살.
제법 많은 날을 산 나이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꼽으라면
유년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1949년생이니까,
태어난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났고,
참으로 어수선한 시기였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때의 일이라
저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11남매의 넷째 딸인 제 밑으로 또
남동생도 태어났고,
하여 저는 경기도 광주에서
농사를 짓는 조부모님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들을 더욱 선호하는
때인데도 유독 할아버지께서는
여자아이인 제게
각별한 애정을 쏟아주셨습니다.
농번기의 그 바쁜 시기에도
일은 안 해도 좋으니 저는 울리지 말라고
식구들에게 당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고는 저를 자주 업어주셨는데,
등에 엎드린 내 귀에 등을 타고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음성이 얼마나 포근하게
내 가슴에 전해왔던지 지금 까지도
잔잔한 울림으로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닷새 만에 돌아오는 장날이면
꼭 저를 데리고 장에 가셨는데,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두루마기 자락으로
나를 덮어주고 막걸리를 드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난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의 부모님 곁으로 돌아오게 됐죠.
당시는 하루에 세 번씩 왕래하던
시외버스가 고작이던 때라
두 시간쯤 걸렸던
그 길이 갈 때는 왜 그리 지루하고,
또 올 때는 빨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화 같은 통신 수단이 없던 때인지라
할아버지께서는
동네 아이들에게 방학하는
날짜를 물어보시고는 한 사흘 전부터
버스정류장 신작로에
자리를 깔고 앉으셔서는
제가 오기만을 기다리셨습니다.
처음 수확한 참외며
수박을 우물 속에 넣어 두셨다가
제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꺼내 오셔서는
그 잘 익은 참외 속에다
설탕까지 뿌려가며 주셨고,
벽장 속에 제사 지낸
귀한 음식을 감추어 두었다가
꺼내주시곤 했습니다.
간혹 시일이
너무 지나 곰팡이가 슬어
못 먹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제가 오기전에는
아무도 못 먹게 했습니다.
겨울이면 소죽 끓이고
남은 장작불에 고구마를 넣어두었다가
꺼내주셨는데,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할아버지 친구분들이 집에 놀러 오시면
으레 제게 붓글씨를 써보라고 하면서
“얘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자리할 아이야” 하며
별로 잘 쓰지도 못하는
제 글씨를 자랑하곤 했습니다.
또 언젠가는 제 발가락에 커다란
종기가 나서 부풀어 올랐는데,
그걸 입으로 빨면 덧나지 않는다며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빠셨습니다.
그런데 후에 제 조카뻘이 되는
아이가 방학 때 시골에 놀러 왔는데
이마에 종기가 났습니다.
할머니는 어쩌나 보려고
할아버지에게
입으로 빨아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그냥 홱 돌아앉으며
못 들은 척하던 모습을 보고
모두가 웃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그렇게 방학을 보내고
개학날이 다 되어서
할아버지 곁을 떠나올 즈음에 는
할아버지의 흥얼거리던
노래 가사와
곡조는 슬픈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결 같고요.
사람이 늙기는 스치는 바람 같고 나”라는….
저 역시도 서울에 올라와서
한 사흘 정도는 할아버지 생각에
공연히 울적해지고
가슴이 황량해지곤 했습니다.
어느 날,
뜻밖에 도착한 할아버지로부터의
편지 한 통.
그 속에는 그야말로
제가 받아 본 편지 중에서
가장 짧은
“너 잘 있니?
나 잘 있다”라는
두 마디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짤막한
글 속에서도 할아버지의 간절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고등학교 2학년 가을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야 했는데,
그때 1,900원인가 했던
여행 경비가 없어서
어머니는
저를 할아버지 댁으로 보냈습니다.
할아버지는 농사지은 콩을 팔아
그 경비를 마련해서 제게 주셨습니다.
서울로 돌아가는
저를 배웅하러 신작로까지 따라
나오셨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아무 말씀도 않고,
그 구부정한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하신 채 부랴부랴
집을 향해 가셨습니다.
얼마 후 영문도 모르고 서 있던
제게 할아버지는 부리나케
다가오셔서 복숭아 한 개를 쥐여주며
"이건, 네가 먹어야 할 건데” 하셨습니다.
제가 시골에 내려왔다고
동네에서 복숭아
한 바구니를 얻어 오셨는데,
제가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무르는 동안 그걸 전부 먹고,
딱 한 개를 남겨두고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께서는
그 한 알의 복숭아가 생각났고,
그 걸 보면 또 제 생각이 날 것 같아서
그것마저 주려고 하셨던 모양입니다.
비록 한 개의 과일이었지만
그 속에는 많은
의미의 사랑이 담겨있었고,
또 그게 제가 마지막으로
본 할아버지의 모습이었고,
추억이었습니다.
수학여행을 가서 할아버지께
드릴 나무로 만든 재떨이랑 할머니께
드릴 참빗을 사 왔는데,
그걸 미처 전해드리기도
전에 급히 상경한 친척 아저씨로부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선물을 들고 달려
내려가 이미 싸늘하게 식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옛날에 제게 고구마를 구워주셨던
그 아궁이에 불을 지펴 소죽을
끓이다 가 부지깽이를 손에 들고
계신 채로 쓰러지셔서 불과 서너
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 열일곱 살.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 때의 그 가을을 난
온통 슬픔으로 보냈습니다.
그냥 마냥 받기만 했고,
한 번도 드려보지 못한
그 사랑이 많은 아쉬움과 후회로 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딸을 낳아
내게 외손녀가 생겼습니다.
요즈음에는
할머니들이 자기 손자들을 키우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저는 그 아기가
제 어미 배 안에 있을 때부터
내가 꼭 키우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제 딸아이도 맞벌이하는
처지인지라 자연스레 내가 데려다 가
키울 수 있게 되었죠.
저는 늘 옛날에 할아버지가
내게 쏟은 정성을 기억하며‘
나도 이 땅에 태어나서 받은 사랑을
그대로 갚고 간다’는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할아버지 등에 업혔을 때의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아이가
울면 운다고 해서 업어주고,
웃을 때면 예쁘다고 업어주고,
어부나 하고 달려들면
또 신이 나서 업어주고…
아예 등에 달고 살 정도로
업어주다가 허리를 다쳐
고생했던 적도 있습니다.
제 남편의 환갑 때
미국에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만 두 살 된 아기를 기어코 데리고 가서
미국 전역을 구경시켰습니다.
내 자식 키울 때는 몰랐는데
손녀를 보니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 손녀가 다섯 살이 되어
추운 겨울날 밖에서 유치원 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면
난 외투안에 그 아이의 얼굴을
꼭 감싸 안고 내 할아버지가
두루 마기로 날 찬바람으로부터
보호해 주셨던 것 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유치원에 입학시키러 가던
길에는‘어린 것이 이제부터는
고생길로 들어서는구나’라는
생각에 코끝이 찡했습니다.
또 간혹 늦게 일어나서
내가 유치원 앞에까지 데려다줄 때면
내게 손을 흔들고 묶은 머리를
팔랑거리며 뛰어가는 뒷모습은
아주 선명한 한 장의 사진으로
나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과연 나는 그 아이에게 무얼
남겨줄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한 끝에 육아일 기 쓰는 걸
생각해 내서 변화가 많은
24개월까지만 기록해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먹은 맘과는
달리 그 아이의 동생이 태어나
이제는 그 애의 일기는
그만 써야겠다고 맘먹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휑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아니구나’ 싶어
두 권의 일기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시골에 살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환경의 정서를
베풀어 주 실수 있었지만
저는 그렇지 못한 도시에
살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늘 생각합니다.
손톱에 봉숭아 물 들이는
걸 시작해서 지워지면 들여 주고
또 들여 주 고….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놀러 나가면 아이들이 놀고 있는 동안
잔디 밭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습니다.
그렇게
찾은 네잎클로버를 책갈피에
곱게 말렸다가 비닐로 코팅을 해서
일기장 곳곳에 붙여놓습니다.
가을이면 단풍 잎을
또 그렇게 만들어서 사진 붙인 옆에다
장식해 놓고….
그래서
우리 집의 냉장고, 신발장,
탁자 겉면은 온통 아이들 사진과 풀잎,
꽃잎으로 도배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지난가을,
제 친구가 사는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난 굳이
외손녀를 데리고 다녀왔습니다.
일부러 KTX를 타고 가며 달걀도 까먹고,
오징어도 사 먹으며,
즐겁게 다녀온 그 여행이 결국
내가 손녀를 데리고 있을 때의
마지막 추억이 되었습니다.
외손녀가 만 5세가 된 지난
3월, 딸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게 되어
아이들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떠나보내면
많이 서운할 것이라고
생각을 미리 했지만 막상 그 애들이 제
어미 품으로 떠나가고 나니
마음에 찬바람이 일었습니다.
아침마다 머리를 빗기며
무엇을 꽂을까 궁리하게 했던
예쁜 머리핀들이 가득 찼던
필통이 텅 비어 있는 걸 보며
아이들의 부재를 느끼는 순간,
전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목욕탕엘 들어가니
그 애들을 씻기던
기억들이 나를 울게 만들고,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그 애들이 먹다 두고
간 음식들이 저를 울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 할아버지께서도
그 한 알의 복숭아를 끝내
내 손에 들려 주신거구나’했습니다.
저는 꿈을 꿉니다.
시골마을에 자그마한 텃밭과
집을 마련하는 꿈을 꿉니다.
그 옛날 내가 그랬듯이
내 손자·손녀들이 방학 때면
놀러 와서 잠시라도
좋은 추억을 만들고 갈 수 있게요.
텃밭엔 꼭 봉숭아를 심을 겁니다.
장작 때는 아궁이도 만들어서
고구마도 구워줄 겁니다.
마당엔 멍석을 깔아놓고 누워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와루르 쏟아질 것
같은 별 무리를 보며
옛날 얘기도 해줄 겁니다.
작고 소박한 추억들이
험난한 생을 살아가는
길목 길목에서 얼마나 큰 위안과
안정을 주는지 나는 압니다.
그 꿈을 위해 나는
더욱 건강해야 되고
또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처럼
내 손녀도 아주 훗날까지
나를 기억하고 그리워할 수 있다면
난 참 잘 살아낸 사람일 겁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이 키운 공은 없다고요.
하지만 난 이미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기쁨으로 보상받았고,
아이들과 이루어 갈 꿈을 통해서
하루하루가 빛을 냅니다...♣
【"감동의 글-中.."📝】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건강과 행복 가득한 하루가 되세요^.
안녕하세요? 푸른나비님
감사해요..♧
한주동안 고생한
내 몸과 마음을 위로해 주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너는아니님
감사해요..♧
한주동안 고생한
내 몸과 마음을 위로해 주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장님
감사해요..♧
한주동안 고생한
내 몸과 마음을 위로해 주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감사
안녕하세요? 무등산지님
감사해요..♧
한주동안 고생한
내 몸과 마음을 위로해 주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