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祖)의 현륭원(顯隆園) 천봉(遷奉) 이야기
조선왕조 500여 년간 27대에 걸친 제왕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계몽군주였던 정조(正祖)는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희생당한 사도세자(思悼世子, 정조 즉위 후 莊獻世子)를 신원(伸寃)하여 권위를 높이는 일이야말로 생부에 대한 효도를 다하고 나아가 적통(嫡統)군주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필수요건이라고 생각하였다.
즉위 직후 정조는 효장세자(장헌세자의 이복형)를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추숭(追崇)하는 한편 생부인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 뒤의 고종 3년에 莊祖로 추존)로 추상(追上)하고 사당을 세워 궁호를 경모궁(景慕宮)이라 했으며 그 묘소인 수은묘의 원호(園號)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다. 그 뒤 1783년(정조 7)에는 생부의 존호를 추상하여 수덕돈경(綏德敦慶)이라 올리고 얼마 후 그에 대한 의전(儀典) 기록들을 모아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를 편찬하였다. 이어서 이듬해에는 ‘홍인경지(弘仁景祉)’라는 존호를 다시 추상하였다.
이와 같이 정조는 불과 1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백부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면서도 14년간 대리청정한 생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지 못하고 존호를 추상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그 까닭은 정조가 생부의 사후 영조의 명으로 효장세자의 종통(宗統)을 잇는 후사가 되었고, 또 후일 생부에 대한 추존을 운운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를 물리쳐야 한다는 영조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장헌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일에 일체 간여하지 말라는 영조의 임오의리(壬午義理)가 있었으므로, 즉위 후 정조의 보복은 최소한의 범위에 그쳤다.
11세 때 생부의 참혹한 죽음을 경험했던 정조는 선친에 대한 사모의 정이 절실했으나 선친의 묘를 전배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다가 세손 때인 1774년(영조 50)에 비로소 영조를 수행하여 수은묘를 전배할 수 있었다. 그 뒤 1776년(영조 52)에 영조의 명으로 다시 묘소를 참배했는데 이때 그는 선친의 묘소를 찾아 정자각(丁字閣)과 묘상[墓所]을 살펴보고 상설(象設) 앞에 엎드려 옷소매를 적실만큼 오열하여 신하들의 만류로 겨우 환궁할 수 있었다.
즉위 후 정조의 영우원 전배는 매년 한 차례 또는 두 차례씩 계속되어 왕이 몸소 작헌례(酌獻禮)를 드렸으며, 1781년(정조 5)에는 전배를 마치고 묘역 일대를 두루 살펴보았다. 1783년(정조 7)과 1786년(정조 10)에는 작헌례를 드린 후 재실에서 밤을 지내고 환궁할 만큼 비명에 세상을 떠난 생부에 대한 추모의 정이 매우 극진하였다. 특히 1786년(정조 10)에는 영우원의 국내를 살펴본 후 뒷산 기슭에 이르러 고모부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과 지사(地師) 차학모(車學模)를 소견하고 지세를 자세히 살피게 하였다. 이 때 묘소에 흐르는 물줄기가 뒷산 기슭을 안고 돌면서 흐르고, 지세 또한 좁고 불길하다는 뜻의 의견 교환이 있었다.
정조는 즉위 초 수은묘의 원호를 영우원으로 고치고 원침의 형국이 협소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 길지를 택하여 묘소를 이장할 뜻을 품고 있었다. 왕실의 능묘를 옮기려면 연운(年運)·산운(山運)·본명운(本命運) 등을 헤아려 때와 장소를 선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였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기유(己酉)년이 상길년(上吉年)에 해당되므로 지사들을 파견하여 길지를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정조 13년 7월 11일 국왕의 심중을 잘 알고 있던 금성위 박명원(朴明源)으로부터 양주 남쪽 중량포(中梁浦) 배봉산의 영우원은 묘역이 매우 비좁고 초라하여 서둘러 천해야 한다는 상소가 있었다.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이 간절했던 정조는 이를 계기로 숙원이던 선친묘의 천장문제를 공론화시켰다. 정조는 7월 11일 2품 이상의 대신들을 희정당(熙政堂)에 모이게 한 후 이 자리에서 박명원의 상소를 낭독케 하였다. 국왕이 가슴이 막힐 정도로 울음을 삼키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니 대신들은 어느 한 사람도 천봉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왕은 예로부터 능터로 미리 봉표(封標)해 둔 국내의 여러 길지(吉地)들, 예컨대 영릉(寧陵)과 건원릉(健元陵) 오른쪽 등성이인 원릉(元陵)과 함께 3대 길지의 하나로 지목되어 온 수원도호부 읍치가 들어앉은 수원 화산(花山) 등을 후보지로 하 였다.
그리고 일찍이 효종의 사후 윤강(尹絳)·윤선도(尹善道) 등의 조신(朝臣)과 홍여박(洪汝博) 등의 술사가 능묘 후보지로 적극 추천할 만큼 ‘반룡농주(盤龍弄珠 : 좌정한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은 형국)’ 또는 ‘대주향공(對珠向空 : 구슬이 서로 마주보면서 하늘을 향하는 형국)’ 의 형국을 지닌 최길지의 명당으로 꼽혀 온 수원부 용복면(龍伏面) 화산이 최종 낙점되었다. 그리하여 정조는 드디어 즉위 초부터 숙원(宿怨)해 온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를 이장할 수 있게 되었다.
첫댓글 즐감
할아버지 영조에 대한 능역은 어영부영 대충 조그막게 만들어 놓고 1789년 현륭원에 대한 건립은 그야말로 갖은 공으 다해서 만들었습니다. 화성주민에게는 가을에 소나무를 심게하고 다음해 봄이되어 살아난 것에 대해서 임금을 지불했습니다. 한번은 현륭원 소나무숲에 송충이들이 극성을 부리자 정조가 송충이를 잡아 씹어 물며 "이놈에 송충이..." 또 화성 주민들을 동원해서 송충이를 잡아오면 그에 대한 품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죽으면 아버지 발밑에 묻어달라고 유언하기도 했답니다. 실제 융릉 남쪽에 파묘자리가 있으나 실제 그런지는 잘 모르겠고 지금은 융릉의 우측 언덕에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