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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4: 26. 유령이라 하며 27. 안심하라 28. 물 위로 오라 29. 오라. 하시니
마 14: 26. 유령이라 하며 -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풍랑 이는 바다 위로 걸어오실 수 있으셨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제자들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고 말하며 무서워하여 소리를 질렀다.
1]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유령(*, 팥타스마)은 꾸며서 나왔다는 뜻인 '판타조'(*)에서 유래한 말로서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 곧 망령 또는 귀신을 의미한다.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기(寄)현상 앞에 제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환각 내지는 미신적 현상으로 오판(misjudgement)하였다.
적어도 그들은 '유령이라' 외치면서 그들의 눈앞에 직면한 죽음의 위기에 몸이 굳어버렸을 것이다.
마 14: 27. 안심하라 -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
그러나 예수께서는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잠시라도 그들을 놀라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거센 바람과 물결로 인해 고난 겪는 제자들을 도우려고 오신 것이었다.
1]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안심하라'(*, 달세이테)는 말은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는 뜻이다.
'두려워말라'(*, 메 포베이스데)는 말은 즉시 '두려움에서 헤어 나오라'는 뜻이다. 두 용어는 결국 안심하라는 의미의 중복적 권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안심하라', '두려워말라'는 예수의 권고의 말씀은 '나다'(*, 에고 에이미)라는 확신을 주는 말씀에 의해 더욱 밑받침이 되고 있다.
그는 잠시라도 그들을 놀라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거센 바람과 물결로 인해 고난당하는 제자들을 도우려고 오신 것이었다.
2]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나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하셨으며,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셔서 권능을 주신 분으로서의 예수 자신을 저들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한 친근한 말씀이다.
* 출 3: 14 –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 위대한 위로의 말씀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이 파선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제자뿐만 아니라 압제자들로부터 박해를 당하여 신앙과 삶의 위협을 받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며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힘을 주는 것일 것이다.
3]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본문은 풍랑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과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그들을 안심시키시는 주님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면 여기서 바람이 불고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 제자들이 직면한 고난의 의미와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을 안심시키시고 도우시는 예수님을 살펴보자.
(1) 제자들이 직면한 고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던 제자들은 거친 바람을 만났다. 파도는 거세지고 배는 심하게 흔들렸다. 예기치 않은 폭풍으로 그들은 극심한 고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생의 과정은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고 그 바다에서 만나는 거친 바람은 우리가 살면서 직면하는 고난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고난이나 고통을 당하지 않고 탄탄대로를 달리는 만사형통의 축복을 주십사고 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삶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의 인생은 꼭 그렇게 되어지지 않고 늘 시련을 동반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실까?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다. 악인의 고난은 그 자체가 형벌이요 저주다. 그러나 성도가 겪는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이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관심 대상이다. 시련을 겪는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의 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자.
비바람을 겪은 뒤 곡식은 알차게 익어간다. 거친 질곡(桎梏)의 세월은 위인을 배출하고 성도는 고난을 즐겨 받으라는 베드로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자.
* 벧전 4: 13 -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2)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
제자들이 폭풍을 만나 사투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바람을 뚫고 파도를 넘어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로 다가오셨다.
①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두운 밤에 찾아오셨다.
제자들에게 닥친 환경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무기력을 유감없이 드러나게 하였다. 대자연의 무서운 위력 앞에 인간은 차라리 연민을 느낄 만큼 초라해졌다. 절박한 상황에 놓인 외롭고도 고독한 인간, 위급한 상황에서 아무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뻗칠 수없는 절망과 체념의 인간, 바로 이러한 인간을 위해 주님께서 오셨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때는 선지자의 예언이 끊겨진 시대였다. 진리가 단절된 시대로 종교가 빛을 잃고 비틀거리는 시대였다. 그는 시대의 어둠을 뚫고 흑암의 기운을 관통하여 우리의 곁으로 다가오셨다.
위급한 상황에서 공포에 질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절망의 순간에 성큼 다가와 구원의 손길을 펼쳐 주셨다. 죄로 오염된 이 밤에도 홀로 깨어 죄악의 폭풍우 앞에 떨고 있는 심령을 위해 주님께서는 지금도 발걸음을 옮기고 계신다.
②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는 어두운 밤에 오셨다.
제자들은 도움을 청하려 해도 그들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설사 제자들의 위급한 상황를 목격했다 할지라도 인간의 능력을 비웃는 듯한 무서운 자연의 위력 앞에 감히 나설 자가 없었을 것이다.
배는 서서히 침몰하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그들을 엄습하고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위급한 순간에 주님께서 찾아오셨다.
그것은 환희요 축복이다. 구원의 기쁨은 바로 이러한 감격이다.
③ 구원의 능력으로 오셨다.
주님은 메시야로서의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권능의 소유자이시다.
사망을 깨뜨리고 사탄을 제어하고 자연을 주관하신다. 그는 모든 인간을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 구원시킨 인류의 메시야이시다.
(3) 예수님의 위로
① 안심하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말씀은 '안심하라'였다.
폭풍우에 밀려 배가 요동하여 목숨이 촌각을 다투는 긴급한 상황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부드러운 어조로 그들의 놀란 마음을 달래 주셨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볼 때 안심할 수 있다. 주위의 파도와 바람을 바라본다면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우리의 환경은 늘 우리의 마음을 불안케 하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평안케 해 주신다.
② 두려워 말라.
죽음의 공포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킨 주님은 이어 '두려워 말라'고 하셨다.
주님의 이 한마디는 모든 피조세계를 향한 창조주의 생명력있는 말씀이다. 그의 말씀 한마디에 자연 세계는 순종하였다. 바람은 그치고 물결은 잠잠해졌다. (32절)
세파의 거센 파도에 밀려 파선을 당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는 오늘도 동일하게 주어진다.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 28. 물 위로 오라. 하소서 -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었다.
1]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기록은 이곳에서만 나온다.
이 부분은 14-17장 가운데서 베드로가 예수께 특별한 취급을 받는 세 경우(16:13-23. 17:24-27) 중의 하나다.
베노이트(Benoit)는 이 기사에서 이미 베드로가 수석 제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2]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에이 쉬 에이)
앞에 '에이'는 접속사이며, 뒤에 '에이'는 '...이다, 있다'의 뜻인 '에이미'(*) 동사의 2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형태이다.
접속사 '에이'는 가정적 조건문에서는 '...인지, 아닌지'의 뜻이 있다. 본문의 경우와 같이 결론이 확실한 내용에서 도출(導出)되어 직설법 동사와 연합되는 경우에는(εἰ + 직설법) 토론적으로 사용되어 '과연 주님이시므로'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만일 주시어든'이라는 말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는 사람이 주님이신가? 아닌가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 지금 물 위로 걸어오신다고 하는 사실과 주님의 명령과 그 능력에 의해 그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베드로의 일면을 보여준다.
3]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베드로가 '나로 하여금 물 위로 걷게 하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의 '명령'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분 자신의 말씀보다 그분의 초자연적 능력을 더 신뢰하는 오류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말씀(*, 로고스)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셔서 그 말씀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천국 비밀을 선포해 주심과 같이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 한마디에 의해 자신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물 위를 걸으라고 하는 허락과 능력이 주어지기를 요구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비록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그분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 14: 29. 오라. 하시니 -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
그는 잠시 바다 위로 걸었다.
그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물 위로 걸어본 자이었다.
1]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예수님은 소박한 베드로의 믿음의 요청을 거절치 않으시고 그에게 “오라”고 말씀하셨다.예수의 '오라'는 명령에는 이미 당신을 믿고 오는 자에 대해 보호와 안전을 마련해 두고 계신 권위에 찬 명령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인격을 복종시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과 같다. 아브라함도 그의 나이 75세에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오라' 부르시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히 11: 8).
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히 11: 29).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믿음으로 알지 못하는 세계(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다)로 나아갔다.
베드로는 잠시 바다 위로 걸었다. 그는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물 위로 걸어본 자이었다.
(1) 믿음으로 걸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자신이 인류를 모든 부족함과 죄의 고통에서부터 구할 수 있는 메시야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신 예수께서는 그 후에 홀로 기도하시기 위해 제자들만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다.
기도를 마치신 뒤 예수께서는 배로 떠난 제자들에게 가기 위해 바다 위를 걸으셨다. 바다 위로 걸어오는 예수를 보고 베드로도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다.
① 믿는 자의 능함
* 막 9: 23 -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②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삶
* 롬 1: 17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2) 믿음이 연약해져 빠짐
베드로는 믿음으로 바다 위를 걸었다. 그러나 바람이 거세게 불어 풍랑이 일자 베드로는 곧 두려움에 빠져 물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베드로는 처음에 믿음으로 걸었으나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에 빠져 믿음을 상실했다. 우리도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가면서 믿음으로 섰다가 세파에 시달려 다시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주께 책망받을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약해져 세상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① 두려움이라는 불신앙
* 마 14: 30 -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② 믿음
* 마 17: 20 –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3) 예수에 의한 구원
베드로는 믿음이 연약해져 바다에 빠졌으나 죽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능하신 주께서 그를 건져 주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비록 우리가 이 세상의 파도에 의해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질지라도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우리는 결코 낙오되지 않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교훈한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유기하지 않으신다.
① 세상을 구원할 자.
* 요 3: 17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② 예수로 인해 생명에 이름
* 롬 5: 18 -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2] 신앙의 모험이다 - 김홍도 목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마 14:28~29)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믿음이 없이 세상에도 도덕적이고 훌륭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보다 세상적으로는 허물이 많고 죄를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회개하여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더욱이 믿음 중에도 큰 믿음을 소유할수록 하나님은 더 기뻐하시는데 여기에서 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험적인 결단과 행동을 단행해 나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미지근하게 또는 내 생각과 계산대로 내 뜻대로 행해 나가는 사람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 라고 하는데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그 행동에 있어서 모험적으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서를 볼 것 같으면 그는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했을 때 이유를 묻지 아니하고 순종했습니다. 또 백세 때 난 외아들 이삭을 잡아 제사로 드리라고 했을 때에도 무엇으로 보나 불합리해 보이지마는 모험적으로 실천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훗날에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수제자인 베드로를 보십시다. 그는 원래 불학무식한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주저하지 아니하고 배도 그물도 다 집어 던지고 모험적으로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생활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물론 부모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해야겠지만 주님의 명령이 먼저 나를 따르라고 할 때는 용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본문의 내용을 보면 한 번은 제자들만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깊은 밤중에 바다 한 가운데에서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럴때에 풍랑이 일어나는 저편에서 흰 그림자가 물 위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난 줄 알고 더 무서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유령인 줄 알았던 그 물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안과 공포에 싸여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내니 두려워 말라”고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심한 풍랑 속이라 그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바로 듣지 못했지마는 베드로만은 제일 먼저 주님의 음성인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심한 풍랑의 물결을 헤치고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소리쳤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하고 애원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베드로의 용감함을 보시고 “내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이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계산으로는 바다에 빠질 것 같았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만 의지하고 뛰어 내렸더니 예수님과 같이 바다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그는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던 눈은 요동치는 물결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던 귀는 물결 소리만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물 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왈칵 겁이 나 그만 물에 빠져 버렸습니다. 여러분! 신구약 성경에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지만 물 위를 걸어본 사람은 베드로밖에 없습니다. 모세나 엘리야 같은 사람도 홍해나 요단강이 갈라진 다음에 걸었지 베드로처럼 물 위로 걷지 못했습니다. 이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불학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고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성격이 급하고 과격하여 실수한 적도 있었지만 주님의 명령이라 할 때는 목숨 걸고 덤벼 드는 모험적 행동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신앙은 모험적인 신앙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신앙은 모험일까요?
1. 신앙은 감각과 계산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보고 이치에 맞으면 행동하겠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한 행동은 믿음 없는 사람도 다 합니다. 계산을 해보고 합리적으로 맞으니까 한다는 것은 계산이 들어맞은 것이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영적인 행동은 우리의 계산과 이성을 초월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의 감각으로는 하나님도 우리 속의 영도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과 공기가 있지마는 우리의 눈에 안 보이듯이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므로 인간의 감각과 계산을 초월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거기에는 반드시 모험이 따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는 적당히 믿어야지 너무 열심히 믿으면 망해!”하고 말하는 것을 듣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정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체험하려면 모험적으로 달려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위험과 고난이 와도 생명까지 내걸고 덤벼드는 신앙적 모험이 있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종종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이 예배당을 지을 때 단 백만 원도 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백이면 백 사람 다 너무 무리라고 말했지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믿음으로 확신이 왔기 때문에 밀고 나갔더니 이 큰 예배당을 무사히 짓게 되었습니다. 또 무엇 하려고 이 큰 예배당을 망우리 구석에다 짓느냐고 반대하는 이가 많았지만 짓고 나니까 지금 이 예배실도 차고 넘쳐 현재 2부로 예배드리는 것을 앞으로는 3부로 드리게끔 되었습니다.할렐루야! 물론 그동안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모험적인 신앙이었기에 우리 주님은 기뻐하셨고 축복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의 만용을 부리라는 말이 아닙니다.하나님을 이용하고 시험하기 위한 것도 안 됩니다.모험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에 있어서 이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이라 믿어질 때에 좌우를 분별하지 말고 계산을 따지지 말고 해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할 때에 거기에 위대한 신앙과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내 머리로 계산해서 움직인다고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로 뛰어내리라고 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감히 생각지도 못할 일이지만 모험적으로 단행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훗날에 순교를 당했는데 전설에 의하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진정 위대한 신앙의 모험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뜨뜻미지근하고 타산적이고 감각적입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우리가 바둑을 둘 때 급수가 높은 사람하고 두면 그 사람이 왜 바둑을 그곳에 두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죽는 자리 같지만 그 급수가 높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옳습니다! 우리가 바둑의 급수로 따진다면 인간의 급수는 초보자의 급수입니다만 하나님의 급수는 우리가 말로도 표현할 수도 없는 급수인 것입니다.
구약 이사야 55장 8-9절에“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신앙이 그토록 순수하고 모험적이었던 반면에 가룟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원래 예수님의 신임을 받던 머리가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귀한 옥합을 깨뜨려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으려고 할 때 가룟 유다는 왜 허비하느냐고 하면서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계산적으로 생각해 볼 때 아무리 예수님을 따라다녀 보아야 아무런 소망도 없음을 알고 예수님을 은 30에 팔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계산적인 사람은 근심도 앞당겨 하게 됩니다.예수님도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고 하셨는데, 우리의 매일 매일의생활 속에서도 내일의 걱정을 앞당겨 하지 말고 순간순간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바라는 믿음을 가지고 모험적으로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바닷가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는 피곤과 실의에 가득 차서 물가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서 베드로에게“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짜증도 나고 화도 났겠지만 그는“밤이 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겠나이다”하고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사람이요, 예수님은 한낱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목수가 전문적인 어부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같으면 순종하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순종하고 모험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이 되어 나올 때 앞에는 홍해가 물결치고 뒤에는 추격하는 군사의 말발굽 소리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그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한 후 손을 들어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킬 때 그 험한 바닷물이 갈라져 무사히 건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때로는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오도가도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은 절망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은 막히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만 해 나간다고 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어떠한 기적이라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40년을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강가에 발을 적시며 믿고 들어 설 때에 그 강물은 갈라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지도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던 제사장들과 같이 죽음이라도 각오하는 모험적인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고난과 고통과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나갈 때에 주님도 기뻐하시는 것이지 안일무사주의는 신앙의 성장도 없고 하나님의 축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치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갖고 왕에게 나갔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모험과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오락삼아 장난삼아 신앙의 생활을 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는데 전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목 베임을 당하고 어떤 이는 불에 타죽고 또는 펄펄 끓는 기름 가마에 들어가 죽기도 하고 무서운 참형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신앙을 지켜 나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시간에 주님을 믿는 신앙을 어떻게 하나님께 보이시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부모나, 처자식, 물질, 명예, 생명까지도 버릴 각오를 하고 있습니까?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모험적으로 따라 나서면 진정으로 그 사람에게는 행복한 삶과 하나님의 기적의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굶주릴 각오를 하고 헐벗을 각오를 하고 죽을 각오를 하면 오히려 배불리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고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존 웨슬리(J. Wesley)는 “하나님 외에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백 명만 있다면 이 영국을 다 뒤집어 놓고 세계를 뒤집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아합 왕 때에 3년 6개월 간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었을때 엘리야를 대접한 사렙다 과부는 하나님의 종을 섬기기 위해 자기는 굶주리는 모험적인 행동을 해서 그 흉년이 다하기 까지 굶주리지 않고 무난히 지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여러분! 지금 이 땅은 아름다운 땅, 살기 좋은 땅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아직까지는 신앙의 자유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과거 일제시대와 공산당의 치하를 생각해 볼 때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신앙으로 철저히 살아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앞으로 어떤 위협이 닥쳐와도 순교할 각오를 갖고 모험적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게 되는 것을 분명히 믿고 절대로 안일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험적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도는 고난을 즐겨 받으라는 베드로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자.
💖보좌의 능력과 축복을 가진 자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멋진 날 되시길 바랍니다.💖
성도는 고난을 즐겨 받으라는 베드로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자.
설교 감사합니다.
성도는 고난을 즐겨 받으라는 베드로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