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사람
[아무튼, 주말]
[봉달호의 오늘도, 편의점]
봉달호 편의점주·에세이스트 입력 2023.06.17. 03:00 조선일보
일러스트=김영석
“아빠는 얼굴도 기억이 안 나요. 엄마랑 아빠랑 자주 싸웠는데, 그때마다 아빠가 집에 있는 물건을 던지고 부순 것만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어요.” 스물셋 S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근무 중 계산대에 나란히 앉아 대화하다 “엄마랑 산다”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고, 그래서 슬며시 “아빠는…?” 하고 물은 것이 실마리였다.
서울 어느 주택가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던 시절 알바로 일했던 S는 오전엔 편의점에서 일하고 오후엔 만화를 그렸다. 계산대에 놓인 스케치북을 본 손님들이 “정말 잘 그리시네요!” 감탄하고, 매장 내외부 홍보물도 손수 그려 붙이는, 우리 편의점의 보물이 아닐 수 없었다. 돈을 모아 미국이나 일본에 유학 가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주말에는 학원에서 학생들 가르치고, 식당인지 카페에서도 일하는 것 같았다. 물 위론 부지런히 살아가는 평범한 20대. 밑으론 곡절 많은 삶이 흐르고 있었다.
주말 알바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온 L은 이력서 한 페이지가 다양한 경력으로 빼곡 채워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현주소를 봤는데 우리 편의점 근처에 있는 신축 아파트였다. “좋은 데 사시네요.” 무심코 한 말인데 돌아온 대답이 의외. “하우스 푸어예요.” 그러더니 자신이 ‘영끌’해 그 집을 사게 된 경위에 대해 한참 말했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할머니 밑에서 자라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했는데 ‘5년 안에 1억 모으기’라는 신문 기사를 보고 온갖 알바 섭렵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나. 하루에 다섯 군데 알바를 뛴 적도 있었단다.
한 달에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만 얼마라며, 우리 편의점에서 채용해주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막무가내 졸랐다. “열심히 일할게요. 꼭 뽑아주세요. 저 같은 사람,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어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그러다 편의점을 한번 쓱 둘러보더니 물었다. “화재보험은 들어 있으세요?” 아니라고 했더니 다시 묻는다.
“실손보험은요?” 고개를 저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L은 가방에서 파일을 하나 꺼냈다. S사 보험 상품을 소개한 팸플릿을 펼쳐 보이며 내게 일단 실손보험부터 하나 들라고 권유했다. 하마터면 가입할 뻔했다.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한가한 시간에 계산대 안에 들어가, 알바 면접 보면서, 상품 진열 끝내고, 음료 박스를 깔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세상엔 정말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많구나. 웃기도 하고, 손뼉 치기도 하고, 때론 찔끔 눈물이 솟기도 하면서, 편의점 식구들의 인생사를 듣는다. 소설보다 소설 같은 이야기를 매일 듣고 있으니 내가 감히 소설 쓸 엄두를 내지 못하는가 보다. 우리 각자의 인생이 이리 소설일진대….
점장으로 일했던 P는 아버지가 요양원에 계셨다. 결혼한 누나가 풍족하게 사는 편이라 아버지 생활비를 보내드리고 있었는데, 많이 보내면 술로 탕진하고, 적게 보내면 더 보내라고 투정 부리고, 여간 골치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간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할 상황이 되었다. 가족 가운데 한 명이 기증하면 될 텐데 누나는 매형이 펄쩍 뛰고, P는 지방간이 심해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그러다 갑자기 형을 찾으러 가야겠다고 휴가를 청하길래 “형이 있었어?” 하고 놀랐다. 알고 봤더니 P의 아버지는 의붓아버지였고, 형이 친아들이라나. 형은 사업을 한다며 베트남에 가서 10년 넘게 연락이 없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 주소였던 곳에 찾아가 보겠다고. 이 무슨 아침 드라마 같은 사연인가.
이러고 보니 편의점에서는 온통 곡절 많은 사람만 일하는가 싶겠지만, 우리 편의점을 거쳐 간 수십 수백 명의 사연 가운데 골라 본 이야기다. 그러는 한편으로, 세상엔 정말 쾌활한 웃음 뒤로 갖은 사연이 숨은 사람이 많더라. 당신의 인생에도 소설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듯.
며칠 전에는 우리 편의점에서 4년째 일하는 J가 난소에 커다란 낭종(물혹)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작년부터 자꾸 아랫배가 나온다고 투덜거리기에 “운동 좀 해!” 하고 놀렸는데 알고 보니 종양 탓이었나 보다. 무슨 수치가 높다고 하기에 혹시 암인가, 아내랑 폭풍 검색하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양성이었다. 그 질환은 한쪽 난소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또 누군가 말하기에 놀랐는데 “경과를 지켜보며 약물 치료만 하면 된다”는 의사의 소견에 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불행은 겹으로 온다 했던가. J는 작년에 동생을 잃었다. 인연을 끊고 산 탓에 동생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있다가 지난달에야 소식을 듣고 충격이 컸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에게 닥쳐온 현실에 상심이 클 텐데 놀랍도록 태연하다. 오늘도 평소와 똑같이 웃으며 출근했고, 상품을 진열하고, 명랑하게 손님을 맞는 중이다.
“나중에 혹시 수술하게 되면 가게를 얼마간 못 나오게 될 텐데… 그냥 저 자르셔도 돼요.” 최종 진단 결과가 나오기 전에 J는 이렇게 말했다. 괜히 화가 났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근무는 내가 100년이라도 설 테니까 빨리 나을 생각이나 해!” 이 말은 아껴두었다. 너보다 귀한 사람이 어딨다고….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 ㈜ 파우스트 칼리지
전 화 : (02)386-4802 / (02)384-3348
이메일 : faustcollege@naver.com / ceta211@naver.com
Blog : http://blog.naver.com/ceta21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Cafe : http://cafe.daum.net/21ceta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Web-site : www.faustcollege.com (주)파우스트 칼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