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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
요 4:24-26
영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강성찬 목사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여 가실 때 사마리아로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는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 쉬셨고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주실 것을 요구하시자 그 여인은 예수께 어찌하여 유다인이 사마리아 사람인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는 당시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부정하게 여겨 상종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다와 이방인의 혼혈족이었기에 유다인들은 그들을 개와 같이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 만민을 차별 없이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메시야였기에 사마리아인에게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생수를 주는 자임을 밝히셨습니다. 여인은 예수가 누구관대 야곱의 우물보다 더 좋은 생수를 줄 수 있느냐며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임을 말씀하시며 자신이 영생수를 주는 자이심을 교훈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오해하여,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게 그 물을 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 여인의 숨겨진 사실을 끄집어내며 남편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하십니다(安 文 錢 權 成) 그러자 여인이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하며 예배에 관한 문제를 꺼내어 예수께 질문헙나다. 유다인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인은 그리심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어느 곳에서 예배가 드려야 옳으냐는 질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배 드리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림이 중요함을 교훈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표현들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일종의 영'(a spirit)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는 영이시니라'(He is Spirit)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씀을 일반적으로 원시적인 관점에서 생각들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물체 안에 정령들이 있다는 사상으로, 아직도 그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골 교회에서는 뒤뜰에 있는 나무를 베는 일에도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일들도 있다 합니다.
또한 미신적인 관점에서 영을 생각 하기도 합니다. 이는 귀신을 죽은 사람의 영이라 생각하는 것이라던지, 죽은 사람의 유혼을 영이라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에, 그 영혼을 영으로 여기는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과 다릅니다.
물질적 세계는 악하고 불안한 세계요, 오직 보이지 않는 사상의 세계가 영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함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요정이나 유령, 인간의 영혼, 이상적인 세계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신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신적 특성이라 함은 인간이나 인간 세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는 독특한 성격을 말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무형적 존재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눅 24:39) 말씀하신 대로 결코 인간들의 육체적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오관으로 식별 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딤전 6:15-16)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딤전 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피조물인 태양도 볼 수가 없는데 하물며 죄인인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절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는 기록들이 있기도 합니다
(출 24: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출 24: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보았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모세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신 4:12)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영이라는 말은 철저히 비물질적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늘, 땅,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물질적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신 4:15)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신 4:16)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신 4:17)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신 4:18)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어느 날 믿음이 신실한 왕이 하나님의 초상화를 갖고 싶어 온 나라의 화가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초상화를 가장 완벽하게 화폭에 담아내는 사람에게 보상을 내리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래서 화가들은 궁전 내부 작업실에 모여 저마다 하나님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고의 걸작을 그리고자 여러 달 작업을 계속했다. 그런데 주세페라는 화가만은 달랐다. 늙은 주세페는 노상에 화판을 펴고, 그 앞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그릴까 궁리만 하다가 조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윽고 기간이 지나 왕이 그림을 심사하게 되었다. 왕은 화가들이 저마다 자신의 그림을 심사하게 되었다. 왕은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된 커다란 화랑에 들어와 천천히 그림을 감상해 나갔다. 하나님은 다정한 노인, 목자. 옥좌에 앉아 있는 임금, 십자가에 달린 사람, 비둘기 등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왕은 그 어느 초상화에도 만족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이윽고 구석으로 물러가 휴식을 취하던 왕은 주세페가 화판 앞에서 코를 골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왕이 주세페의 곁으로 걸어가 보니 앞에 놓인 화판이 텅 비어 있었다. 왕이 감탄하여 소리쳤다. “바로 이거다!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하나님의 초상화다!” 모든 화가들이 왕의 주위로 모여들어 왕이 받쳐 들고 있는 화판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잠시 후 한 화가가 왕에게 아뢰었다. “폐하, 이 화판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초상화 같은 것은 있지도 않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바로 그거요! 묘사 불가능.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란 말이오.”
물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손, 발, 얼굴, 등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묘사를 했으나 그와 같은 표현은 영이신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도록 한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창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 32: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창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은 사람의 형체를 취하여 유형적으로 계신 하신 것 뿐이지 하나님의 본체를 나타내신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두 사람이 등산을 갔다가 산속에서 큰 비를 만나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가까스로 비를 피해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은 겁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조용히 기도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당신은 이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여전히 찾고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바람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을 감고 기도하면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직도 못 미더워하는 그 사람에게 그는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당신은 지금 심하게 불안에 떨고 있지만 난 지금도 마음이 평안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지요.” 이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아니 하십니다.
(옵 1: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작은 식당을 경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배달을 나갈 때마다 식당 안쪽에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큰소리로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본 손님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손님은 주인에게 “아무도 없는데 왜 인사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은 “이 식당엔 하나님이 항상 계시기 때문에 그분께 인사를 드리고 나가는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크리스천들이 직장 생활에선 소극적인 경우가 종종 있다. 직장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거룩한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직장인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임재 신앙이다.
영이신 하나님은 생명을 가지신 분, 살아계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히 3: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계 7: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또한 살아계심을 말씀하기도 합니다.
(삿 8:19) 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룻 3: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삼상 14: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삼상 20:3)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왕상 1:29) 왕이 이르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삼하 2:27) 요압이 이르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삼하 4:9)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삼하 12:5)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삼하 14:11) 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사 원수 갚는 자가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렵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삼하 15:21)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영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고 하는 큰 의미는, 만물과 인생에게 생명의 근원자가 되심을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이들에게도 생명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영이신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이심을 나타냅니다.
영은 지적 도덕적 속성을 지니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라고 말할 떼에는 하나님이 자기 결정을 하실 수 있는 이성적 존재임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이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지적이라는 점에서, 목적 있는 행위의 발자취에서 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이성적 도덕적 종교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는 점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보다 더 성경의 표현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은 명백히 드러납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보는대로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오시기도 하시고 가시기도 하시며 인간과 말슴 하시고 인간의 경험 속에 들어 가시고, 시험과 고난에서 인간을 보호 하시며, 또한 승리의 기쁨으로 인간의 마음을 채워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의 묘사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최고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격적 게시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립에게 말씀 하신대로 완전한 방법으로 아버지를 계시 하셨습니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조건은 예배의 대상으로 섬겨야 합니다. 영으로 섬겨야 합니다. 진리를 따라 섬겨야 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4:25-26 / 정필도 목사
매년 12월 25일은 성탄절로 전세계 모든 민족들이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명절입니다. 이날만은 전쟁 중에 있던 나라들도 휴전을 선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성탄카드를 보내며 파티를 열고 가까운 사람들과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불우한 이웃을 돌아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독 많은 사람들이 이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메시아를 대망하며 살아왔습니다. 주변국가들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어려워지면 어서 속히 메시아가 오기를 모두가 고대했습니다. 다니엘 2:44, 7:13-14절을 보면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장차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 땅에 메시아 왕국이 세워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을 통해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었고, 메시아가 오시면 메시아 왕국이 세워지고 모든 나라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게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메시아』는 성경을 기록한 언어인 히브리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헬라어로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는 “메시아 예수”라는 뜻이 됩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동방박사들이 하늘에 나타난 별을 보고 그 별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고 자신들은 그를 경배하려고 동방에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사람들은 이들로 인해 예루살렘 일대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헤롯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불러모아 성경에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난다고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미가서 5:2절을 인용하여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답했습니다. 과연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유대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똑바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라 말하고 더러는 엘리야로, 또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제자들에게 친히 물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한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된 말씀이었습니다. 메시아 왕국은 예수님이 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마리아 땅 수가성에 사는 한 여인에게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 믿으며,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게 말하는 내가 바로 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메시아가 세우실 왕국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다스리는 나라로,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믿음이 좋은 사람, 충성한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많은 사람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9:1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어떤 사람들이 먼 나라로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각각 열 므나를 나누어주며 장사하여 이를 남겨보라고 말했습니다. 후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 한 종이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다고 보고했습니다. 주인은 이 사람을 칭찬하며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도 역시 칭찬하며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비유는 나로 말미암아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부흥되며,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 충성한 것에 따라 에수님께서 각 사람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26절 이하를 보면,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내 일』은 주님의 일을 말합니다. 예배드리고 전도하고 교사로 가르치고 성가대원으로 봉사하고 그외 여러가지로 예배를 돕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입니다. 목사도 선교사도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과 같은 엄청난 권세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21).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끝까지 승리하고 사명을 완수하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듯이 저와 여러분도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믿음으로 승리하면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4절에서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이와같이 예수님을 믿어도 적당히 믿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예수님을 증거하고 말씀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악한 자들이 권세 있는 자리에 앉아 권세를 휘두르는 것입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고 범죄한 자들을 다스려야 하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보다 더 나쁜 짓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나라가 잘 되겠습니까? 누구나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등용한 사람들이 그 권세를 이용하여 이권에 개입하고 문제를 자꾸 일으키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저는 어느 날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있는 꿈을 꾸었는데, 잠을 자다가 깨면 또 나타나고 밤새도록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가득한 얼굴이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그 다음 신문보도를 보니 김 대통령에게 속상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국정에 전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용단을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천년동안 주님과 왕노릇하는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 이 세상에서 불과 몇 십년 잘 살다가 지옥가는 어리석은 삶을 택 하시겠습니까? 메시아 왕국은 이 세상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우리 주님이 왕이시며, 가장 믿음이 좋고 성령충만한 사람들과 충성한 사람들 그리고 주를 위해 순교한 사람들이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더구나 순교자들은 천년동안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5:40절 이하를 보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 이를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며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순교자의 반열에 선다는 것은 장차 메시아 왕국에서 누릴 영광을 생각하면 너무나 황송한 것이기에 핍박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충성하며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을 믿어도 적당히 믿고 십자가는 지려고 하지 않으며 헌금에 인색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들은 구원은 받았다할지라도 장차 그 나라에 가서는 정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철이 난 것같습니다. 저는 어른들의 고약한 모습을 보며, 저분들이 바로 살기 위해서는 오로지 예수 믿는 길밖에 달리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제 인생의 큰 목표와 소원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 백성을 모두 다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는 제 자신이 훌륭한 목사가 되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도 잘해야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대통령도 목사 앞에 나아와 안수기도 받고 정치를 하는 그야말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는 기특한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비록 나이 어린 초등학생이었지만 메시아 왕국 비슷한 꿈을 꾼 것입니다. 제가 공군 군목으로 일월산에 근무할 때 그곳에 일개 대대가 주둔해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저들을 모두 예수 믿게 하여 전군 신자화를 이루어 메시아 왕국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죽을 각오를 가지고 헌신했습니다. 그 결과 전 장병이 모두 세례 받고 예배를 드리다 보니, 탈영하려던 사병도 탈영하기 전에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왜 탈영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고 부대장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휴가증을 끊어주어 탈영을 막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메시아 왕국 비슷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1차 목표는 부산을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잘 믿는 시장이 세워지고 청장이 세워지고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부산을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법죄 없는 도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민족을 복음화하고 더 나아가 세계를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이천 년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영적으로 타락하여 영이 매우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똑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메시아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보면 왕으로 오셔서 왕국이 세워지고 그 왕국에서 잘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메시아가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고난을 많이 받을 것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정반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고 그들이 받고 있는 저주를 속량해주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사야 53:1-3절을 보면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을 자세히 예언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예언된 것으로, 이 말씀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기 위해 일부러 가난하게 사셨으며, 누명을 쓰셔도 변명하지 아니하셨고,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순순히 다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도 얼마든지 부요하게 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재판을 받으실 때에도 얼마든지 권세 있는 말씀으로 무죄를 증명할 수 있었으나 끝까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원수들이 때리고 채찍으로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할 때에도 열두 영이나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저들을 한순간에 멸하실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이렇게 죽기까지 복종하셨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친히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왕국을 세우고 강력한 왕권을 가진 큰 나라가 될 줄로 믿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도무지 왕이 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가난하셔서 도저히 메시아라고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메시아 왕국을 세우시기 전에 먼저 자기 백성들을 위해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시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큰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시면 먼저 주안에서 죽은 자들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고 그 다음으로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이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각 사람들이 이 땅에 살며 행한 대로 상을 받게 될 것이며, 메시아 왕국에서 다스리는 권세를 얻어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충성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그후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이어받아서 천국복음을 전하고 주님이 분부하던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며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이 하시던 일을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이 사명에 충성하여 주님 앞에 서는 날 흠과 티와 책망 받을 것이 없는 모습으로 칭찬듣고 상급을 받을 뿐만 아니라 다스리는 권세와 축복과 더 나아가 영광스러운 왕노릇하는 권세까지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의 봄
요한복음 4:25-30 / 석원태 목사
남쪽 문이 열렸다. / 오너라, 나의 봄아 오너라! / 너는 내 가슴에 떨리는 대로 떨리는구나. / 나의 봄아 오너라. / 나무 잎새들의 속삭임 속으로 / 들어오너라. / 젊디젊은 꽃의 신도(信徒) 속으로, 피리 속으로 / 들어오너라. / 봄의 나른한 / 탄식 속으로 / 네가 털어놓는 두루마기로 / 취한 듯 비틀거리는 봄바람으로 / 사납게, 사납게 쳐 오너라. / 오너라, 나의 봄아 오너라. (R. 타고르 ‘오너라, 나의 봄아’에서)
정말 뜨거운 봄맞이를 나타낸 춘심(春心)의 고백처럼 생각이 됩니다.
오늘 받은 요한복음 4장 중에서 메시야가 가져다 줄 생명의 봄을 기다리는 한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 춘심(春心)의 고백소리를 듣게 됩니다. 바로 요한복음 4장 25절에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라고 한 그녀의 기다림의 고백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기다리는 생명의 봄, 만족의 봄이 오실 메시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녀가 만난 봄은 마침내 사마리아의 봄을 꽃피우고 말았습니다.
사마리아의 봄! 그것은,
Ⅰ.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남쪽 유대를 떠나 북쪽 갈릴리를 향해 가시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남쪽 유대와 북쪽 갈릴리 사이에 자리잡은 사마리아도를 바로 통행하였습니다(요 4:3-4). 이러한 예수님의 걸음은 실로 놀라운 행동이었습니다. 적어도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에 쌓였던 수백년 동안의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인 장벽을 무너뜨리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이 갖고 있던 혼혈 민족의 역사적 비극 때문에, 정통을 견지하던 남쪽 유대와 대치하여 상종조차 단절되어버린 사마리아성을 감히 통과하던 중 수가성 우물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때는 6시쯤(정오)이라고 하였습니다. 행로에 곤하시어 우물곁에 앉았던 예수님은 마침 그곳에 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습니다(요 4:6-7).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리에 들어가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였습니다(요 4:7). 그러자 그녀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독설 섞인 항변을 토하였습니다(요 4:9). 지금 그녀는 혈통이라고 하는 아픔과, 멸시를 받고 있는 여자라고 하는 남녀성차별에 불만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녀에게 당신은 ① 하나님의 선물이나 ② 물 좀 달라 하는 이 사람의 정체나 ③ 또 예수 자신이 생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당신은 나에게 생수를 구하였을 것이요, 나는 생수를 당신에게 주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4:10).
이때 그녀의 반응은 참으로 민감하였습니다. 그녀는 생수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에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랑하고 있는 이 수가성 우물이 생수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녀와 사마리아인들은 이 수가성 우물이 그 조상 야곱으로부터 받은 기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생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에 “그러면 당신은 야곱보다 크신 분입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요 4:11-12). 그렇게 주어진 역사의 비극 앞에서도 조상을 자랑하는 마음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녀가 자랑하던 조상 야곱의 우물을 일소에 부쳐버렸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다」라고 하였습니다(요 4:13). 결코 역사와 전통의 우물이 인생을 만족케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요 4:14).
그녀는 예수님이 갖고 있는 생수 때문에 더욱 목이 말랐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주님이 갖고 계시는 생수를 달라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요 4:15).
이때 주님은 뜻밖에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였습니다(요 4:16). 실로 그녀에게 기상천외의 소리였습니다. 당황했던 그녀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였습니다(요 4:17-18).
이제 그녀의 마음은 자연적인 목마름에서 도덕적인 허물과 아픔을 지나 종교적 차원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심 산에서의 예배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산에서의 예배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요 4:19-20). 이때 예수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4:21-24).
여기까지 이끌림을 당한 그녀는 마침내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시는 ‘메시야’에 그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그녀는 예수 앞에서 자신이 ① 혈통의 아픔에서 불만하고 있음을 토로했습니다. 자기와 말하는 그 남자는 유대인이고 자신은 사마리아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② 성(性)의 불만에서 아파하고 있음을 토로했습니다. 그는 남자이고, 자신은 ‘여자인 나’라고 하였습니다. ③ 자기에게 나타난 그 남자가 가진 생수가, 그녀가 자랑하던 조상 야곱의 우물보다 크다는 사실 앞에서 역사와 전통의 우물에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녀에게 조상 야곱의 우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이 마르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결코 역사와 전통이 그녀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음을 주지시켰습니다. ④ 그녀는 남편 다섯 앞에서도 만족하지 못했음을 주님 앞에 실토하고 있습니다. ⑤ 더욱이 그리심 산록의 사마리아인의 예배도 그녀를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음을 주님은 알려주었습니다.
결국 이 모든 인생고의 문제해결은 오실 메시야 그분에게만 있다고 하는 사실에까지 그녀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라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요 4:25). 그녀가 만난 춥고 답답한 긴 겨울의 어두움은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만이 풀어줄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고 메시야인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었습니다(요 4:26). 실로 단호한 예수의 자기 선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구약(겨울)에서 신약(봄)의 도래를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나타난 단순한 유대인 그리고 남자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그녀가 본 선지자 정도가 아니었습니다(요 4:19). 바로 유대의 그 남자, 그녀와 말씀하시던 그 사람이 그녀가 기다리던 메시야였습니다. ① 그분은 종족(혈통)적 편견을 초월하신 메시야였습니다(요 4:3-4). ② 남과 여라는 성(性)을 초월하신 메시야였습니다(요 4:9). ③ 그분은 물긷는 그릇 같은 인간적 수단을 초월하신 메시야였습니다(요 4:11). ④ 그분은 인간적 조상 이상의 메시야였습니다(요 4:12). ⑤ 그분은 인간 수요 이상의 것을 갖고 계시는 바로 그 생수요 샘물이었습니다(요 4:10, 14). ⑥ 그분은 인간의 기만을 초월하시는 전능하신 메시야였습니다. 남편 다섯 앞에서도 인생을 불만하고 있는 그녀의 아픔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메시야였습니다(요 4:16-18). ⑦ 그분은 인간의 가사(可死;죽음)를 초월하시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분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었습니다(요 4:14). ⑧ 그분은 공간 곧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 산을 초월하시는 메시야였습니다(요 4:21). ⑨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메시야였습니다. 때가 오나니 곧 이 때였습니다(요 4:23). ⑩ 그 분은 인간의 생리적 욕구를 초월하시는 메시야였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4:32). ⑪ 그분은 자기 본위적인 삶을 초월하시는 메시야였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 4:34). ⑫ 그분은 지금, 현재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고 하였습니다(요 4:26).
바로 생명의 봄 그 자체였습니다. 「세상의 구주」였습니다(요 4:42). 예수 자신이 바로 사마리아의 봄이었습니다. 예수 앞에 서있는 그녀에게, 그녀가 만난 모든 인생고를 풀어주실 생명의 봄이었습니다. 구약이 아닌 신약, 율법이 아닌 사랑, 정죄가 아닌 용서의 봄이었습니다. 구원의 날, 은혜의 날이었습니다.
Ⅱ. 은혜받은 여인의 전도였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요 4:26)!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영혼에는 생명의 봄이 오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바로 자기와 말씀한 그 분이 자신이 만난 모든 인생고의 비극을 풀어주실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믿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생수를 마셨습니다. 그녀가 그처럼 기다리던 문제해결의 메시야를 만난 결과, 이제 그녀의 인생은 꽃처럼 활짝 피어나고 말았습니다. 아니 다이너마이트처럼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물동이를 그 자리에 버려둔 채 사마리아 동네로 좇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소리치고 말았습니다(요 4:29). 그녀의 이 기막힌 소리는 일종의 선언이었습니다.
이 폭탄적인 그녀의 선언은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소리가 얼마나 힘이 있고 감동이 있었는지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고 하였습니다(요 4:30). 그녀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은 지체하거나 머뭇거리거나 의심할 줄 모르고 그녀의 말과 행동에 압도당하여 나왔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몰려나왔음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①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요 4:39). ② 예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거기서 함께 이틀을 유하시게 되었습니다(요 4:40). ③ 이제 그 여인의 말이 아닌 예수의 말씀을 친히 듣고 그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습니다(요 4:41). ④ 저들의 믿음은 예수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아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요 4:42). 예수를 친히 보고, 그 말씀을 친히 듣고, 깨달은 체험적인 믿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은혜받은 한 여인의 전도로 말미암아 사마리아도는 영계의 봄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전도는 ① 체험적인 전도였습니다. 예수를 친히 보고, 친히 대화하고, 깨달은 후의 전도였습니다. ② 사죄체험의 전도였습니다.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고 한 사실입니다(요 4:29, 39). ③ 확신에 넘치는 자원적인 전도였습니다. ④ 가까운 이웃(자기 동네)에게 우선하는 전도였습니다. ⑤ 전도의 중심내용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 그 자체였습니다. ⑥ 결정적인 결과(열매)를 보는 효과적인 전도였습니다. ⑦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전도였습니다. 마침내 사마리아에 영계의 봄을 꽃피운 전도였습니다. 믿음의 사마리아, 구원의 사마리아, 찬미의 사마리아, 소망의 사마리아를 만들고 만 전도였습니다.
예수를 전하는 사람에 대한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되돌아가신 후의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천사장 가브리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보좌에서도 못자국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장 가브리엘이 묻기를 “주님의 이 못자국을 보니 얼마나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셨는가를 알겠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께서 하신 이 일을 다 알고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알고 말고. 나는 이 사실을 갈릴리에 사는 몇 사람의 제자들에게 부탁을 하고 왔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가브리엘은 못마땅한 듯 “그 몇 사람의 갈릴리 사람들이 지쳐버리면 어떻게 되죠? 뭔가 다른 방법이 강구되어야 될 터인데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가브리엘, 나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겠다. 그 갈릴리 몇 사람들의 입에서 전달되는 십자가의 소식은 또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 의해서 전달될 것이다. 그 이유는 내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믿고 또 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믿는 자를 구원하는 결정적인 방법은 전도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마리아의 봄! 그것은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바로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 이유는 그가 세상의 구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 기쁜 소식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봄이 되고, 땅끝에까지 봄이 됩니다. 또한 사마리아의 봄! 그것은 은혜를 받은 여인의 전도였습니다. 그녀는 현재보다 천 배나 나은 축복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전도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봄소식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는 우리 손 외에는 그의 일을 할 손이 없습니다. 우리 발 외에는 사람들을 그에게로 인도할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혀 외에는 그가 어떻게 죽으셨는지를 말해 줄 혀가 없습니다. 우리 외에는 그의 곁으로 사람들을 데려다 줄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의 삶 자체가 곧 전도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현재보다 천 배나 많은 축복의 봄을 맞이하기를 축원합니다. 시작하는 봄, 깨어나는 봄, 소생하는 봄을 맞이하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봄의 전령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