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영수 여사 *
제 8대 대통령 영부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군 장교 시절에 두번째 만난 여인이다
육 여사는 1925년 충북 옥천군 출생으로 배화여자 고등학교를 졸업 후 25세에 박정희와 결혼하여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의 어머니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저격으로 48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그녀의 생은 짧고 굵게 국모로서의 품위를 지키신 분이었다
1968년 7월 3일 서울에 비가 많이 내려 잠원동 주민 300여명이 신동초등학교에 긴급 대피하고 있을 때 한 밤중에 육영수 여사가 폭우 속에 황토물 교정을 철벅철벅 걸어와 교사들 안으로 들어오며
머리를 감쌌던 흠뻑 젖은 수건을 벗었다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사님 아냐? " 누군가 소리쳤다
육영수 여사는 "여러분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라고 인사한 뒤 가져온 구호물품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나룻배를 타고 발목까지 빠지는 흙탕길을 고무신 차림으로 걸어서 그곳까지 온 것이다
육 여사는 말라 타버린 논 구석에 양수기에 올라타서 양수기를 밟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뒤덮힌 빈 양수기가 쩍쩍 소리를 냈다
육 여사는 울먹이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사람들을 어떡해 하지...'
육 여사는 소리소문 없이 봉사와 선행에 힘썼다
또한 육 여사는 보육원, 양로원 등 사회 그늘진 곳을 보살폈다
1967년 말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 열린 정부 여당 송년회에 육 여사가 불참했다
의아해 하는 참석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집사람은 보육원에 가느라 못 왔다' 고 했다
육 여사가 만든 사회봉사단체 양지회는 전국 87개 나환자촌 지원의 대명사였다
그녀는 한센인들을 찾아가 손을 덥석 잡고, 고구마를 나눠 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육 여사는 참으로 검소했다
이애주 전 의원의 증언이다
육 여사가 문세광의 흉탄에 쓰러진 1974년 8월15일 서울대 병원 간호사였다
"서거 하신 후 유품을 정리하는데, 글쎄 한복 속옷을 기워 입으셨더라고요 알뜰하고 소박한 성품을 생각하며 유품 앞에서 다시 울음바다가 됐었습니다"
남들이 화려한 자리라고 부러워하는 대통령 부인이지만 "청와대는 항상 중류 살림을 하자" 며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비싼 옷을 입는 일이 없었고 청와대는 그 흔한 꽂꽃이도 못 하게 했다
박대통령은 육 여사가 서거 후 이렇게 회고했다
"살아생전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한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절대권력의 부인이었지만 그녀는 사려 깊고 겸손했다
'육 여사는 권력을 즐기는 행세로 국민의 원성을 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만하게 보일까 봐 행사장에서는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육 여사는 국가의 대소사와 인사는 대통령의 영역이라 판단해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매일 50여통의 민원 편지를 뜯어 보고 답장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도봉동 토굴 속에 산다는 어느 소년의 편지를 읽고는 주소도 모르는 그곳 일대를 직접 뒤졌다
기어이 소년을 만나고는 아이스크림 장사에 필요한 장사 밑천을 대준 일도 있었다
한번은 박 대통령 친척이 운전하다 사고를 냈다
다들 쉬쉬하고 덮으려고 했는데 육 여사가 그 소식을 대통령에게 전하는바람에 그 친척은 구속됐다
김종필 전 총리의 회고록에서 "국민에게 퍼스트레이디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처음으로 알린 분" 이라고 평가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 분이 우리 마음에 심은 평화와 사랑의 씨가 자라 그 꽃을 피우게 해 달라" 면서 "국모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분" 이라고 썼다
그 뒤 대통령의 부인이 여럿 나왔다 ( 고현곤 칼럼 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