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51
3월3일[연중 제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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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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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T5BbduhYAs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박요섭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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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재물은 선행과 공덕을 쌓아 올릴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입니다!>
재물과 관련해서 참으로 특별한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재물 운도 좋았겠지만, 백방으로 노력하고 노력해서 막대한 부를 축척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눈만 뜨면 돈돈! 입니다. 입만 열면 돈돈! 입니다. 돈 외에도 더 크고 의미 있는 가치들이 부지기수인데, 완전 무시합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엄청난 재물을 탑을 쌓아 올립니다.
그렇게 발버둥 치던 어느 순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제 나는 곧 떠나가게 되는데, 그토록 애써 쌓아올린 저 재물들은 어떡하지? 재물이라는 것,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별것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목숨 걸었을까? 왜 좀 더 나누지 못했을까?”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흘러 이제 나이가 80, 90, 100입니다. 나이를 먹으니 돈이 있어도 즐길 방법도 없습니다. 어느 순간 정신도 흐려지고 기력도 흐려집니다. 이제는 그에게 통장 잔고에 찍혀있는 막대한 재산도 하나의 숫자일뿐,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후손들은 어서 빨리 그의 목숨이 끊어지기만을 간절히 학수고대합니다.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생 돈이 최고라고 외치고 다녔기에, 자녀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돈을 최우선 가치로 여길 것입니다. 다들 유산 가운데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몫을 챙길까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떠나가는 자신은 거들떠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쇠락해가며 흐려져만 가는 자신을 내팽개쳐놓고 다들 떠나갈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오늘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향해 강력한 경고 말씀을 건네십니다. “애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 24-25)
부자라고 해서 다 똑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부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나눌 줄 모르는 부자들입니다. 재물 좀 있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뻐기지만, 어려운 사람들과 단 한 푼 나눌 줄 모르는 수전노 같은 부자들을 향해 오늘 예수님께서 옐로우 카드를 내미신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것,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서 축척한 부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유분에 대한 적극적이고 관대한 나눔을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부자들을 향한 주님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그들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참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재물과 관련된 예수님의 경고 말씀 앞에 걱정을 넘어 기분이 나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내가 모은 이 재산, 거저 얻은 줄 알아? 평생 등뼈 휘어지게, 정직하게 일해 온 난데. 남들 보다 곱절로 일하고, 남들 먹을 때 안 먹고, 남들 놀러 다닐 때 더 일하고, 아끼고 아껴서 모아 겨우 이제 부자 소리 듣는데,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화내실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잘 새겨들어보시면 정답이 즉시 나옵니다. 이 텍스트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부자는 바로 이런 부자입니다. ‘재물을 하느님 보다 상위에 두는 부자’, ‘돈에 눈이 먼 나머지 세상에 다른 의미 있는 가치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부자’, ‘돈이면 다라고 생각하는 부자’, ‘오로지 돈에 목숨을 거는 부자’, ‘죽으라고 모을 줄만 알았지 조금도 나누지 않는 부자’...
손에 쥐었다 하면 어느새 빠져나가는 것이 돈입니다. 잔뜩 있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 돈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임종의 순간이 오면 다 내려둬야 할 것이 돈입니다. 물론 인간다운 생활, 품위 있는 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재물에 최상위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물론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가고 싶은 곳 가게 만들고, 먹고 싶은 것 먹게 하고, 분위기 잡고, 사람노릇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돈으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이 모든 행복의 근원은 아닙니다. 돈이 최종적인 해결사는 아닙니다. 돈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재산이 악인의 손에 들어있으면 그것은 함정과 죽음으로 향하는 근원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산이 선인의 손에 들어있으면 그것은 선행과 공덕을 쌓아 올리는 수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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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YM-mDyXFq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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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보는 법>
가끔 어떤 사람들은 “사랑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아기 엄마가 아기에게 하는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어떤 엄마들은 개나 고양이들도 조건 없이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생명을 사랑하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보답받지 못하는 데 끝까지 무조건적 사랑이 가능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메데이아와 이아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메데이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콜키스의 공주이자 강력한 마법의 재능을 지닌 인물로, 황금 양피지를 찾으려는 이아손에게 첫눈에 반하여 자신의 가문과 고향까지 등지면서까지 그를 도왔습니다.
이아손이 위험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온갖 마법과 책략을 제공하였고, 심지어 이아손이 양피지를 가지고 도망칠 수 있도록 본인의 오빠까지 해치며 뒤쫓는 이들을 따돌리기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감수하겠다는 메데이아의 마음이 그만큼 절대적이었던 것입니다. 둘은 함께 도망쳐 코린토스에 정착하였고, 결혼하여 자녀도 낳으며 한때 평온한 삶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이아손은 정치적 이익과 권력을 위해 코린토스 왕의 딸과 새 혼인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메데이아가 받았던 상처는 매우 깊었습니다. 그동안 본인이 요구받았던 일들은 죄책감까지 감수하며 전부 들어주었지만, 막상 자신은 이아손에게서 약속에 걸맞은 보답이나 책임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힌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새로 맞으려던 신부와 그 아버지인 코린토스 왕에게 치명적인 독을 써서 죽게 만들고, 나아가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마저 해치는 극단적인 복수로 치달았습니다.
이처럼 한쪽이 모든 요구에 응하기만 하고 정작 상대는 거기에 걸맞은 보답을 하지 않을 때, 사랑은 커다란 비극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메데이아 이야기가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이 아기와 반려동물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까요? 아무리 반려동물이 사랑스러워도 그것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 아기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생존본능 우선이기 때문에 주인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국 주인을 버리고 다라납니다.
그러나 자기 반려동물이 은근히 자기를 구해줄 것이란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느낄 때는 큰 실망을 합니다. 주면서 받으려 하지 않는 그런 조건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기는 동물과는 다르게 자기가 받은 것을 반드시 되갚을 것이란 믿음을 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사랑도 하나의 투자입니다. 절대 자신은 해 주는 게 없는데 상대는 자신을 더 사랑해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계약입니다. 내가 주면 상대도 주어야 하고 사랑을 받으면 나도 주어야 합니다.
제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에게 돈이 필요할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면 다 주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체를 통해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저하다가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느꼈습니다. ‘아! 내가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건 아니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따를 제자들을 뽑을 때 배추를 거꾸로 심고 오라고 시켰다고 합니다. 자기를 버렸는지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계약입니다. 계약은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는 얼마만큼 줄 수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다 주시는 예수님께 나는 무엇을 드리며 그분께 은총을 청하는지도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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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다시 말한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비단 예수님의 제자들만의 걱정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신앙인에게도 해당하는 걱정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는 건 나쁜 걸까?’, ‘그럼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 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보면, 한 부유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선생님, 저는 계명을 잘 지켜왔는데,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왜일까요? 그의 마음이 재물에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늘귀’는 실제로 아주 작은 바늘구멍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당시 예루살렘 성벽에 있던 작은 문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문은 매우 좁아서, 낙타가 짐을 모두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야만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겸손’과 ‘내려놓음’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동굴 안에 갇힌 사람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현실은 동굴 밖에 있습니다. 우리의 재물과 소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지만, 사실 진정한 삶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보면, 톨스토이의 ‘사람은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한 농부가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하다가 결국 죽고, 그가 차지한 땅은 겨우 자신의 무덤 크기뿐이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욕심을 부리며 사는 동안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돈이 많아진다고 해서 행복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면 더 불안해지고 걱정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이 ‘소유’에 집착할 때 불안해지고, ‘존재’에 집중할 때 자유로워진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이런 삶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참된 기쁨과 자유를 찾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부유함 그 자체는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재물에 얽매여 하느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유한 인물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나 욥은 큰 부를 가졌지만, 하느님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부유했던 리디아는 바오로 사도를 집으로 모셨고, 가진 것을, 교회를 위해서 내어놓았습니다. 반면, 오늘 복음 속의 부유한 청년은 재물에 얽매여 결국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차이는 바로 ‘어디에 마음을 두었느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내 삶에서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내가 가진 것을 움켜쥐고 있는가, 아니면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눌 때, 우리는 더 큰 자유와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듯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려면 불필요한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재물뿐만이 아닙니다. ‘교만, 욕심, 미움, 나만을 위한 삶의 태도’와 같은 것들을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신뢰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하느님의 뜻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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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마르 10,17)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분을 특별한 분으로 생각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유다인들은 ‘선하다’는 낱말을 모든 선의 절대 근원이신 하느님께만 붙였습니다. 부자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그 답을 선하신 예수님께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나 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에게 십계명 가운데 ‘하느님 사랑’에 해당하는 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그가 이 계명들을 충실히 지켜 왔다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부자에게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부자는 “울상이 되어”(10,22)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울상이 되어’는 ‘충격을 받고’ 또는 ‘소스라쳐 놀라’ 등으로 의역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에게 놀랍고도 충격적인 도전이 되고, 부자는 이 도전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포기합니다.
부자가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아야 하듯이, 우리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도전을 받고는 합니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사과해야 할 때도 있고, 자존심이 상해도 상대의 말을 일단 들어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그 도전이 너무 충격적이고 감당할 수 없을 때, 이웃 사랑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어떠한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으로 그 도전 앞에서 용기를 낼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10,27)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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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0,17-27: 부자 청년의 이야기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생명으로 나아가고 싶거든 계명들을 지켜라. 고약한 악의와 사악함을 버려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그리하여 ‘마른 땅’(느헤 9,11; 시편 66,6)이 드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19절 참조)이 싹트게 하라고 하신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20절).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율법의 계명들을 잘 지킨 것처럼 보이던 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고 그분을 따라가지 않았다.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 욕심에 묶인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 자기 탐욕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짓눌리는 일이 없이 높이 솟아오르는 가벼운 날개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져서 말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부자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을 의미한다. 진정한 부자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맡겨주신 분의 뜻에 따라 잘 사용하는 사람이다. 재물이라는 말 자체가 소유한다는 데서 나오지 않고 사용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른 이차적인 선(善)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나를 돌아보아야겠다. 그리고는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채워 나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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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나 - 하느님 = 0”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1-27)
1)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말씀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23절과 24절의 “참으로 어렵다.”도 “불가능하다.”입니다. <‘어려운 것’과 ‘불가능한 것’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뜻이 분명하고 단순해서, 제자들은 그 뜻을 바로 알아들었고, 또 아주 단호한 말씀이어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말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되는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면, 그러면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부유함’을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복’으로, ‘가난함’을 ‘하느님의 벌’로(또는 하느님의 복을 받지 못한 상태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입니다. 바로 그런 사고방식을 정반대로 뒤집은 말씀이 ‘참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 말씀입니다.(루카 6,20-26)
2) 예나 지금이나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은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불편해 합니다. “나는 나쁜 짓을 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다. 성실하게 일하고 노력해서 겨우 이만큼 재물을 모았을 뿐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라고 항의하거나 화를 내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는 예수님께 항의하지는 않고 그냥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났기 때문에 순진하고 여린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1절의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라는 말은, 그의 신앙생활을 예수님께서 인정하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아마도 착하고 경건하게 사는 신앙인이었던 것 같은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는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음을 생각하면,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고, 바로 그 애착심이 그의 ‘부족한 점’이었습니다. <마음속에서 ‘재물’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부자들의 ‘부족한 점’입니다.>
3) 신앙인은 “나 - 하느님 = 0”인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서 하느님을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사람, 즉 하느님만이 모든 것인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8-9ㄱ)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신앙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만’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는 부자들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4) 21절의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루카 12,33ㄱㄴ)
27절의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은, “사람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 즉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셔야만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하는 사람만이, 또 “나 - 하느님 = 0”인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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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딱 한걸음>
마르코 10,17-27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딱 한걸음>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내 안에서
수만 걸음
부족한
딱 한걸음
나에게서
너에게로
딱 한걸음
나를 위한
수만 걸음
부족한
딱 한걸음
나를 열어
너를 품는
딱 한걸음
내가 되는
수만 걸음
부족한
딱 한걸음
너를 품어
나를 이룰
딱 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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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귀웅 토마스 신부님]
<면피 신앙>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에게 예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는 이미 많은 부분 잘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지요.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그런데 이것들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활에 불과합니다. 죄를 짓지 않았다 해서 잘했다고 할 수 없지요. 적극적으로 선을 만들어낼 때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지요.
아마도 예수께서 부자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며 가진 재산을 다 팔아 나누어주라 하신 것은 그에게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부족함을 지적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매 주일 귀한 시간 내서 주일미사 빠지지 않고, 교무금, 헌금은 물론 2차 헌금을 애원하는 어려운 본당도 도와주고, 레지오 마리애 활동도 하고…. 우리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쬐끔이 아니라 가진 것을 전부 내주라 하십니다.
겨우 면피나 하며 지내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쁘고 좋아서 내가 먼저 나누려고 찾아가는 마음이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복음의 부자는 자신이 구원받을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나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기보다 이웃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내가 조금 어려워져도 조금이지만 그만큼 행복해질 이웃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것, 바로 그럴 때에 참된 삶, 곧 영원한 생명은 이미 시작된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느끼게 해주고 싶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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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상각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신부님]
<아주 작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라고 부자 청년은 이야기한다.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좀 더 완전한 존재가 되어 당신과 함께하는 삶으로 초대하신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과 깊은 친교로 들어가는 삶에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제껏 자신이 누려왔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게 느껴졌다. 그는 슬픈 마음으로 예수님을 떠나갔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주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제외시키곤 한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나 삶 전체에서 볼 때 아주 작고 사소한 것처럼 느껴지며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혼란시키며 주님께 응답하는 것을 방해하기에 충분하다.
부자 청년의 경우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잘 지켜왔음에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 가진 것을 나누라는 예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아름답고 의로우며 존재의 완성에 더 적합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더 익숙하고 편안하며 더 큰 안정감을 주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부자 청년에게 재물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그것을 제외시켜 놓고 다른 모든 계명은 잘 지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주님을 따른다는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잘못은 반드시 우리가 어떤 나쁜 행위를 하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과 우리 마음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주님한테서 결코 제외시켜서는 안 되며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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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 이야기가 만약 여기서 끝나 버린다면, 오늘 복음의 주제는 부자는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전날 밤 겟세마니 동산에서 또 한 번 사용하십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코 복음 14장 36절 참조).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기에 예수님을 위하여 다른 길을 마련해 주실 수도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원하시는 바를 실현하는 분이시고, 예수님 역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고자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서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예수님과 달리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고유하게 마련해 놓으신 그 길을 걷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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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2년 뉴욕에서 시작해서 매년 전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특이한 행사가 있습니다. 바로 ‘바지 안 입고 지하철 타기’입니다. 참가자들은 바지를 제외한 모든 옷을 똑바로 입고 평소와 똑같이 행동해야 합니다. 이 기사를 보고서는 별 희한한 행사도 있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이 행사에 함께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자그마치 60개 도시가 이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초반에는 풍기 문란 행위로 체포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이 행사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사를 왜 할까요? 이 행사의 목적은 예상치 못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루를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매일 매일의 삶이 똑같은 삶의 반복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기 힘듭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많은 이가 똑같은 생각과 행동으로 행복과 먼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질적인 것에 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채우고 채워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채우고 채워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물질적인 재화가 아닐까요? 계속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을 반복하고 이를 위한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먼저 십계명의 준수를 이야기하시지요. 그는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것 하나를 발견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아마 부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 채우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족한 ‘나눔’을 이야기하십니다. 지금과 다른 나눔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하십니다. 단순히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더 채우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나눔의 삶, 사랑의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라고 말씀하시지요.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면서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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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코.10,17)
예수님 시대의 부자는 오늘날의 시장 경제와 같은 제도를 통한 재산 증식이 아니라, 제도적 불합리성으로 인해 획득된 소수의 부자가 더 많았습니다. 로마시대 이스라엘은 농경 사회로서 몇 명의 대지주가 땅을 소유하고 나머지 일반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제도적 가난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가진 재산이나 곡식은 생산이 제한적이었고, 일부 부자들이 가난한 소작농들과 빵을 나누지 않는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세금을 낸 후에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일부 부자들만 풍족한 생활을 하였고, 나머지 백성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가난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로 받아들여졌고, 많은 재산을 가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의 나눔이 없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극도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적어도 나쁜 짓은 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며 남 부러울것 없는 넉넉한 삶을 살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어느 부자 청년이 오늘 앞으로 더욱 풍부한 영성적인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주님께 여쭈어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자 그 청년은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도적 불합리성을 간파하고 계시던 예수님의 요청은 자신을 넘어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인류애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부유한 재산에 의지하여 미래의 안정과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의지하여 참 평화를 차을수 있도록 초대하십니다.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하느님께 되돌아 가도록 되어있는 우리는 가진 것을 다 나누어야 하느님 품안에 갈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동안 나누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다 나누지 못하면, 죽음 후에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세상에게 빼앗겨서라도 빈손이 되어야 주님께 되돌아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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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많은 재물을 가진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지요.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벅차서 병을 고치거나 배불리 먹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여느 백성들과는 달리, 영적 가치를 얻고자 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우선 하느님께 받은 계명들을 철저히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그런 것들은 자기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답하지요. 아마도 그는 경제적으로 모자랄 것 없는 바리사이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을 겁니다. 율법을 어기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그들의 특성상 계명을 어기는 일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드러내보이기를 좋아하는 것이 바리사이이니 나름대로 극기와 자선도 열심히 실천했겠지요. 사람들 눈에는 팔자 좋아보이는 그 모습이 얄미워보였겠지만, 예수님 눈에는 나름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습이 대견해보였기에, 그에게 영원한 생명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길, 그러나 그만큼 더 어려운 길을 알려주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예수님은 그에게 무조건 가난하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절대 아무 것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무소유’를 명령하시는 것도 아니지요. 재물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시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고, 재물을 잘 활용하는 것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물에 대한 도를 넘은 탐욕과 집착 때문에 무엇이 옳은 길인지를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할 정도가 되면, 그건 분명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재물에 의지하는 마음이 커져버린 그가 재물에 집착하는 마음을 돌려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이지요.
그 부유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부른 호칭은 ‘선하신 스승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주 가르치셨으니 그분을 ‘스승님’이라고 부른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분에 대해 잘 모르면서 그분이 ‘선하다'고 단정지은 것이 이상하지요. 그 모습에서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는 아마 자기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특별하게 율법을 어긴 적도 없고, 나름대로 극기와 자선도 실천하고 있으니 그 정도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여겼겠지요. 그럼에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은 것은, 예수님께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던 율법학자처럼 짐짓 자기 의로움을 과시하려는 교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 그 젊은이의 모습은 나름대로 의롭게 살고 있다 자부하지만 하느님의 기준에는 한 없이 부족한 모습으로 사는 우리를 상징하지요. 영원한 생명의 본질은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주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사랑과 봉사로 섬겨야 합니다. 세상 종말의 날에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느님 나라를 눈앞에 두고도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지금 즉시 그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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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회개와 하느님의 나라”-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시편32,1-2)
참 빠르게 흐르는 세월입니다. 벌써 2025년도 3월 성요셉성월에 사순시기를 바로 앞두고 있습니다.
늘 거기 그 자리의 수도원에 정주해도 흐르는 세월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지도 엊그제 같은데 벌써 11년이 지났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 이후 강론에 가장 많이 사용한 주제가 ‘여정’이요 오늘 강론 역시 ‘회개의 여정’입니다. 피정중 여정에 관한 강론후 결론때 늘 제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아침 6시에 시작하여 오후 6시에 끝나는 하루중, 봄-여름-가을-겨울 1년중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가?”
저의 경우 수도원에 부임할 때는 나이 40으로 하루중 정오쯤이고 일년중 늦여름쯤이었는데, 지금은 하루로 하면 오후 5시쯤, 일년계절로 하면 초겨울에 접어든 느낌입니다. 이렇게 지금의 시점을 확인할 때 하루하루 날마다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있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사부 성 베네딕도의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을 자주 연상하게 됩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도 회개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진심을 다할 때, 상대에 대한 진심도 흘러나온다.”<다산>
“자로가 군주를 섬기는 자세를 묻자 공자가 답했다. ‘속이지도 숨기지도 말고, 바른 말을 하는 것이다.”<논어>
이런 솔직한 자세야 말로 회개의 정신입니다. 어제 잠시 나눴던 금주 본기도 후반부, ‘교회가 자유로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소서.’ 내용을 보면서 ‘섬김을 위한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자유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섬김의 사랑과 책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런 섬김의 실천이 없는 자유는 길을 잃고 방종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의 삶은 섬김의 삶으로 입증됩니다. 오늘 집회서도 강조하는 바 회개의 정신입니다.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돌아올 기회를 주시고 인내심을 잃어버린 자들은 위로하신다.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 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오고 불의에서 돌아서라. 그분께서 너를 이끄시어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살았을 때 회개요, 기도요, 공부요,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회개하라고, 기도하라고, 공부하라고, 사랑하라고, 감사하라고, 찬미하라고 연장되는 선물같은 절박한 하루하루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누가 저승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찬미를 드리겠느냐? 죽은 이에게서는 찬양이 그치지만,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이는 주님께 찬미를 드리리라.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시며,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용서는 얼마나 크신가?”
바로 오늘 복음의 젊은 부자는 이런 회개의 겸손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음을 봅니다.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에 대해 제시한 물음은 옳았습니다.
회개의 실천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젊은 부자가 지켰다는 6섯 계명들중 부모공경을 제외한 5섯개 “안된다”의 부정적 금령들은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말해 줍니다.
소극적이고 모범적 좋은 신자일지는 몰라도 적극적 진취의 성화의 여정을 걷는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회개는,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는 추상적 명사가 아닌 구체적 실천의 동사입니다. 젊은 부자의 심중을 꿰뚫어 통찰한 주님의 직격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팔라-주라-따르라 실천적 동사의 연속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부자의 삶에서 나눔과 따름을 통해 하늘에 보물을 쌓는 회개의 삶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는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 나눔과 섬김, 주님을 따름이라는 회개의 삶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슬퍼하며 떠났으니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대화를 통한 제자교육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부자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회개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가난하다 구원이 아니라 가난하든 부자든 전격적 방향의 전환인 회개 하나가 구원의 요건입니다. 나눔과 섬김과 따름을 통해 자기를 비워가는, 무욕과 이탈의 초연한 ‘가난한 부자’의 역설적 삶을 산다면 바로 하느님 나라의 구원에 영원한 생명의 실현입니다.
구원의 잣대는 가난도 부요도 아닌, 나눔과 섬김 그리고 따름으로 표현되는 구체적 회개의 실천에 있음을 봅니다. 바로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회개의 여정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피신처, 곤경에서 저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환호로, 저를 감싸시나이다.”(시편 3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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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재물과 보물>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오늘 주님께서 재물과 보물을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재물과 보물의 차이를 묵상해봤는데 제 생각에 재물은 필요한 것이고 그 이상이 아닙니다.
돈을 똥 보듯 하라고 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 삶에서는 돈이나 재물 없이 살아가기가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보물로 여길 것까지는 없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칼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내 보물 1호로 정하고 애지중지할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그런데 임금이 신임의 표시로 장수에게 장검을 선물하였다면 그것은 필요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사랑과 신임의 표시이기에 그 장수는 그것을 보검으로, 자기 보물 1호로 여길 수는 있겠지요.
이렇듯 보물이란 필요한 것을 넘어 애지중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지중지(愛之重之)란 말이 어떤 뜻입니까?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까?
거듭 말하지만 재물은 필요한 것이지 사랑할 것이 아니고, 소중히 여긴다 해도 보물처럼 소중히 여길 것은 아닙니다.
오늘 부자의 문제는 재물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법을 알려달라고 왔던 그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재물을 버리라고 하니 포기치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재물을 생명 그것도 영원한 생명보다 보물로 여긴 셈입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우리는 압니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고 생명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처음부터 그것을 안 것은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건강이 그렇게 소중한지 몰랐기에 몸을 상해가며 돈을 벌었는데 그렇게 자신하던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이 재물보다 소중함을 알게 됐지요.
아무튼 부자는 마태오 복음이 젊은이라고 하듯 젊었기 때문인지 재물을 아직 보물로 여겼기에 버릴 수 없었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라고 한 마태오복음과 달리 마르코복음이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이라고 한 점을 보게 되는데, 자기가 얻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곧 주님께 받는 것이라면 받기 위해서 비워야 한다는 것을 그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
양동이에 물을 받으려면 양동이에 있는 것을 비워야 받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쥐고 있으면서 또 쥐려는 어리석음이 보통 부자들의 어리석음이고, 재물도 소유하면서 영원한 생명도 소유하려는 것이 또한 부자들의 어리석음입니다.
부자의 더 어리석음은 주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점입니다. 재물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주 부잣집 아들이 집안이 반대하는 여인을 사랑하기에 재산을 다 포기하고 여인을 선택하는 것을 볼 때 그가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주님을 재물보다 더 사랑하는지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재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갈 때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부자는 영원한 생명을 받고자 했지만 재물을 보물로 소중히 여기는 어리석음 때문에, 주님을 재물보다 더 사랑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도 다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부자가 아니라고요? 재물을 보물로 여기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나는 어리석지 않다고요?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에게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요?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못함이 나의 부족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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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10,21)
<하느님 나라와 부자!>
오늘 복음(마르 10,17-27)은 '하느님 나라와 부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어떤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10,18)고 하시면서, 그가 지켜야 할 계명들을 알려주시자, 그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마르 10,20)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3.24-25)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와 메시지는 무엇일까? 문자 그대로 부자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의미일까?
그것보다는, 재물에 대한 집착과 집착하고 있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을 너를 위해 기쁘게 내어놓지 못하면,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 큰 장애물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묵상했습니다.
울상이 되어 예수님을 떠나간 사람에게는 '재물이 존재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재물에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 참으로 소중한 것을, 너를 위해 기쁘게 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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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르 10, 21)
우리는
사라질
재물에
의지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헛된 것에
빠져있는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길
기도드립니다.
모든 욕망에는
근심걱정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는
거기에서
우리는
하늘의 보물을
만납니다.
더 가지려는
세속적인
부(富)의 축적이
영원한 생명의
보장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늘의 보물은
영원합니다.
하늘의 보물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게 합니다.
더 나은 행복을
위해 매 순간을
가장 소중한
보물의 실천으로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소멸되어 버리는
욕심의
재산이 아니라
해야할 바를
실천하는
사랑의
보물입니다.
하늘의 보물은
버릴 줄
아는 것이
나눌 줄
아는 것이
곧 우리를
살리는 참된
변화임을
깨닫게 합니다.
하늘의 보물은
우리자신의
참된
변화입니다.
현실 속에서
살아 숨쉬는
하늘의 보물을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우리가
있습니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우리의
마음 씀씀이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귀하고 소중한
베풂과
나눔이며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따름과
구원입니다.
그 보물을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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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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