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에서는 설화雪花가 볼 만하다. 바람기 없이 소복소복 내린 눈이, 빈 가지만 남은 나무에 쌓여 황홀한 눈꽃을 피운다. 눈이 아니라도 안개가 피어오른 자리에는 차가운 기온 때문에 가지마다 그대로 얼어붙어 환상적인 눈꽃을 피운다. 마치 은은한 달빛에 만발한 벚꽃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잎이 져버린 빈 가지에 생겨난 설화를 보고 있으면 텅 빈 충만감이 차오른다.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는 빈 가지이기에 거기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난 것이다. 잎이 달린 상록수에서 그런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거기에는 이미 매달려 있는 것들이 있어 더 보탤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 도반인 그는 맑음을 만들어내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다. 그의 생활공간인 방에 들어가 보면,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텅 빈 벽에 방석만 한 장 달랑 방바닥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가 즐기는 차의 도구마저도 눈에 띄지 않도록 벽장 안에 넣어둔다. 가사장삼은 아예 법당 안에 걸어 두었다. 눈에 거치적거릴 게 아무것도 없다. 불필요한 것은 깡그리 치우고 필요불가결한 것만을 놓아둔 그의 방은 그대로가 커다란 침묵이다. 이런 방에 앉아 있으면 오고 가는 말이 없어도 부담스럽지 않고 넉넉하기만 하다.
청빈淸貧과 貧困은 가난을 동반하면서도 그 뜻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쪽은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고, 다른 한쪽은 결핍에서 온 주어진 가난이다. 오늘처럼 모든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부자가 되기는 어렵지 않지만, 투철한 삶의 질서를 지니고 스스로 가난하게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 물론 누구나 부자가 될 수도 없듯이, 아무나 가난하게 살 수도 없다. 문제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냐 아니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평가될 것이다. 그가 몸담아 살고 있는 둘레는 늘 맑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개인의 성곽이라고 할 수 있는 방 안은 텅 빈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바깥은 청결과 잔잔한 아름다움으로 가꾸어졌다. 마당은 늘 싸리비로 말끔히 쓸리고, 그의 방 앞 섬돌 위에는 오지 그릇 수반에 작은 꽃잎이 두엇 떠 있었다. 토담 밑에는 철 따라 꽃이 피어나도록 모란과 협죽도와 도라지, 창포, 국화가 심어져 있고, 여름철 마당 한쪽 공지에는 채송화가 온통 꽃방석을 이루었다. 담장 위로 넝쿨을 뻗어 주렁주렁 매달린 주황색 당호박이 토담 위에 덮인 기와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화목花木을 사랑하기 때문에 꽃나무에 대한 이름도 많이 알고 있었다. 누구나 경험한 터이지만, 그 이름을 알고 실물을 대했을 때와 이름을 모른 채 실물과 마주했을 때의 그 감흥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마치 별자리의 이름을 알고 밤하늘을 우러를 때 하고 전혀 백지상태에서 별밤을 대했을 때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식물도감을 비롯해서 야생화에 관한 책자를 구입해두고 읽으면서 뜻을 함께하는 이웃에게 나누어 주기를 좋아한다. 그가 맡은 소임 일로 신도들이 정재淨財를 내놓으면 그는 결코 그것을 사재私財로 쓰지 않고 새로 나온 양서를 수십 권씩 구해두고 보시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건네준 책들은 그의 인품처럼 하나같이 맑고 조촐한 내용으로 채워진 것들이었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그는 타인에 대한 말은 가급적 하지 않는다. 음성의 톤이 낮은 그는 필요 이상의 말은 결코 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리고 화내는 일을 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단 한 번 몹시 언짢아하는 것을 보았다. 다른 일에서가 아니고 이웃 방에 사는 노 스님 한 분이 곁방에서 몇 차례 고기를 끓여 먹는 것을 코로 냄새 맡고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로 해서 그는 그가 머물던 곳에서 한때 떠나갔었다. 청정한 수도 도량에서 대중생활의 규범을 어기고 육식을 한다는 것은 누가 보든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남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그곳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쫓아낸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흐린 물에 섞이다 보면 스스로도 흐려지게 마련이다. 설득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그 흐림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결코 범하지 않는다. 이웃의 초대를 받고 차를 마시러 갔다가도 머물 만큼만 머물고 주인에게 폐가 될세라 이내 떠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차 향기처럼 은은한 여운이 남는다. 차를 마시는 맑은 자리에서 함부로 지껄이게 되면 모처럼 차를 대하면서도 차가 지닌 맑고 고요한 청적淸寂의 덕을 나누기가 어렵다. 그의 방 앞 처마 끝에 달아두고 듣던 조그만 풍경을, 한 도반이 그 맑은 소리에 유심히 귀 기울이는 것을 보고 그는 넌지시 그 풍경을 떼다가 도반의 거처에 달아 주었다. 그 도반은 맑은 풍경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의 해맑은 인품을 연상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맑고 조촐한 삶은 그 자신이 의식을 하건 말건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 달빛 같은 혹은 풀 향기 같은 은은한 그늘을 드리우게 마련이다. 그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그를 생각할 때마다, 꽃가지를 스쳐오는 부드럽고 향기로는 바람결을 느낀다. 그는 이 겨울에 어느 산을 마주하고 앉아 있을까. 지난 초겨울 인편에 부쳐온 책, 아메리칸 인디언의 지혜를 담은 <나는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를 읽으면서, 그가 여전히 그답게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삶의 향기란, 맑고 조촐하게 사는 그 인품에서 저절로 풍겨 나오는 기운이라고 생각된다. 향기 없는 꽃이 아름다운 꽃일 수 없듯이 향기 없는 삶 또한 온전한 삶일 수 없다.
(법정스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