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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Yb_cex5fEM
누가 잘못했고는 처음에 기자회견할 때 얘기했는데 너무 많이 생각되못하는 것이 나왔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검찰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정신대 대책 협의회입니다. 정신대 대책협의회는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입니다. 그런데 공장갔다온 할머니들 하면은 정신대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장갔다온 할머니하고 위안부 아주 더럽고 듣기싫은 위안부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공장갔던 할머니는 공장에서 일하고 했지만 위안부 할머니는 간데가 다 다릅니다. 잠깐 제가 간 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이로 하면 열여섯살. 만으로하면 열네살입니다.
저는 양력으로 되가있습니다. 왜. 그때에 성을 갈지 않으면 배급을 안줬습니다. 그래서 성을 갈아서 ??하라라고 갈았습니다. 그런데 학교도 그때는 일본학교입니다. 제가 삼사학년까지 다녔습니다. 학교에서 가타카나를 알았습니다. 끌려가서도 대만신주 가미가제부대 특공대부대로 끌려가서도 그 장교가 가타카나로 이래 써줘서 대화를 했습니다. 이 군인이 하는 얘기도 피해자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처음듣는 얘기라 가지고 ??상가 뭔지 적어주는 걸 ?하겠습니다. 이 군인이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도시꼬. 야스하라 도시꼬라고 지어주면서 나도 도시꼬같은 피해자라는 걸 적어줬기 때문에 히가이사가 뭔고. 몰랐습니다. 그 후에 ??에서 제가 생각할 때 끌려가서 당했던 건 말로는 못합니다. 제가 쭉 삼십년동안 해오면서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이 증언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확실하고 또 바른말하고 이러니까 정신대대책협의회라는 걸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가 92년도 6워 25일날 신고를 할 적에 윤미혜라는 간사였습니다. 간사한테 했습니다. 25일에 했는데 29일에 모임이 있다고 오래서 갔습니다. 어느 교횝디다. 교회 갔었는데 그날따라 일본 어느 선생님이 정년퇴직을 하고 돈을 천엔???인가 얼만가 줬다고 하면서 백만원씩 나눠줬습니다. 그게 무슨돈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모금하는 걸 저는 봤습니다.
왜 모금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따라다니면서 모금하는데 보니까 농구선수들이 농구를 하는데 기다렸다. 기다렸는데 기다려서 농구선수가 돈을 이래 들고 모금을 하더라구요. 그 돈을 받아오더라구요. 그게 왜 그런건지 몰랐고 그게 당연한건가 했는데도 부끄러웠다. 농구를 하면서도 이기랴고 애를 쓰는데
늦어서 배가 고픈데 좀 맛있는 걸 사달라고 하니 돈없습니다. 했다. 그래도 그것이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디가도, 교회가도 또 돈을 주면 그걸 뭐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모르고 쭉 삼십년을 해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 정신대대책협의회입니다. 그러면 공장갔다왔는 할머니들로 해야하는데 말하자면 공장갔다온 할머니들은 밀가루가지고 빚어놓고 속에는 맛있고 귀한 걸 넣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럼 그 속은 위안부입니다. ?? 그걸 해도 쭉 삼십년을 그래가와도 저는 그걸 몰랐습니다. 그그저게까지도 몰랐습니다. 어제 저녁 가만 생각하니 이것은 왜 무엇때문에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인이 위안부 생명을 걸어놓고 끌려간 위안부를 왜 즈그가 정신대할머니거 합해가지고 쭉 이용해나갔습니다. 저는 그것도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어제 제가 생각하니 이럴수가 있나. 삼십년동안 앉아서 얘기하는게 사죄해라 배상해라 하는데 일본사람이 뭔줄 알아야 사죄하고 배상하죠. 섞어가지고 이건 사죄도 하지말고 안해도 된다는 거 아닙니까. 이걸 삼십년동안 해나가면서도 사죄배상을 요구하고 학생들까지 고생을 시켜씃ㅂ니다. 그 학생들 ??돈나와서 받아가지고 챙겼습니다. 어제 이래서 잠도 못잤습니다. 왜 정신대대책협의회만, 정신대문제만 하지, 무슨 권리고 위안부피해자를 만두의 고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저는 자다 일어나서 펑펑 울었습니다 왜 내가 이렇게 바보같이 당하며 왜 말도 못했나 하는 걸 생각하니 그래, 내일 기자회견에는 이것을 반드시 밝혀야 되겠다. 저희가 사죄배상요구하는 걸 막았잖아요.
위안부하고 정신대하고 어떻게 같습니까. 위안부는 생명을 걸어놓고 거기가서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데 이런 그걸 삼십년을 이용해왔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내일 기자회견할때는 이것을 내가 반드시 밝혀야겠다. 일본인 그 사람들 바봅니까. 정신대대책협의회가 위안부문제를 하는데 그게 해당치도 않았는데 뭣하러 그 사람들이 사죄하고 배상하겠습니까. 안한 이유를 저는 알았습니다. 이것또한 무엇입니까. 사진 한 장만 모르구로 해도 이걸 법에 걸고 했는데 이것은 할머니들로 위안부할머니들로 팔아먹었습니다. 팔았습니다. 내가 왜 팔려야됩니까.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아들?? 딸 아래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불면 날아갈까 ??? 엄마가 치마로 감춰서 수야 일로 온나 해서 부엌에 가서 먹이고 했습니다. 이런 남의 집 귀한딸, 고명딸을 끌고가서 대만 신주 가미가제부대를 가서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끌고가서 전기고문과 갖은 칼가지고 몸을 그래가지고 이렇게 죽여놨습니다. 이런데 군인이 보니까 방에 들어가라고 담요를 드는데 안들어가려는데 와서 머리를 끌고 가서 광아래 자물쇠 큰걸 탁 떼고 문열더니 확 밀었다. 엎어지니 또 일으켜 발로(돌보다?한 군화발이었다) 허리를 발로 차서 엎어졌는데 너무너무 배가 찢어지게 아파서 저 잘못한 거 없는데도 잘못했다고 빌면서 살려달라 했다. 이런데도 머리를 잡고 앉혀서 두 팔을 ?? 에 놓고 여기에 하나 감고 여기에 하나 감고 머리에, 귀에 소리납니다. 그때 엄마라고 크게 불렀는 얘기 귀에서 났는지 머리에서 났는지 이것을 어린나이에서 부터 지금까지 지금도 납니다. 이래도 이걸 왜 그런지 누구한테라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정신대대책협의회라면 이걸 밝혀줘야 안됩니까. 할머니 어디갔다왔습니까 해가지고 밝혀야하는데 한번도 할머니를 앉혀서 받아적지 않았다. 어디갔다왔습니까 이거가지고만 책을 냈다. 93년부터 ??동에 집이 있었습니다. 책을 놓고 책을 6500원에 파는 걸 봤습니다. 그래도 그걸 몰랐습니다. 그런 그걸 챙겼는줄 모르고 그것이 당연한가보다 하고 다니면서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제가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증언도 하고 또 정신대대책협의회 박물관을 짓는데 서대문형무소에서 짓는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박경임씨하고 큰조카 내외와 저와 가서 시??반을 받고 정신대대책협의회에서 증언을 했습니다. 이러면 그 박물관에 든지 대표가 있습니다. 대표란 소리 하지마라. 창피하다 했습니다. 그러면 대표 소리는 안해도 대표 대우는 해줘야될 거 아닙니까. 하지만 끝까지 3월 30일에 전화했다. 미향씨. 이럼 안되지 않나. ????? 안그러면, 그렇지 않음 내가 기자회견할란다 했는데 아주 큰소리로 당당하게 기자회견 하라고 해서 제가 5워 7일날 기자회견 한겁니다.
이런 등등을 제가 하나하나 말씀을 못드리겠습니다. 빨리 생각이 안납니다. 이래서 제가 했다고 기자회견을 했는데 어느날입니다. 여기 와있을겁니다. 소위 그 국회의원으로 나올적에 전심전력을 다하며 도와준적은 없지만 가보고 되어야한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저따위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날 저녁에 나갔다 들어오니까 문을 열어달라고 해서 열어주니까 윤미향씨가 싹 들어오는 거예요. 놀라서 넘어갈뻔했습니다. 그러면서 와서 무릎을 꿇고 무슨 말인지 용서?를. 뭐를 용서를 합니까. 뭘 가져와야 용서를 하지요. 하든가 안하든가 하는데 뭐를 용서? 그니까 엄청 나구나. 그것은 검찰에서 할 것이고 내가 며칠 후에 기자회견을 할때는 그때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갔는데 나가보니까 소위 교수라하는 사람들도 있고 여러 사람이 있는데 내가 말을 안했습니다. 밖에 ??실히 차에 내려서 휠체어타려고 하는데 어디서 뻔뻔하게?? 짝이없어요. 무엇입니까. 해서 윤미향이 한테 며칠 후에 내가 기자회견을 한다고 하고 나가보니 뭐가 있더라구요. 거기서 ??? 삼십년을 지내왔습니다. 한번 안아달라 합디다. 그래서 저는 생각에,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안아주니, 저도 인간입니다. 삼십년을 같이 하니 ???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왈칵 나서 제가 안고 울었는데 이걸 가지고 기자님들 좀 부탁드립니다. 명백하게 좀 기사를 내주세요. 그걸가지고 용서했다. 이런 기사 너무 황당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이건 확실하고 명백히 여러분들도 다 책임을 질 일입니다. 제가 이걸 명백하게 하려고 했는데 혼자 생각은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걸 그만둬라. 하지말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자기 맘대로 뭐 하고싶으면 하고 팽게치고 하는데 어떻게 삼십년을 같이 하고 나왔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가가지고 맘대로 팽게쳤다. 저만 ??아닙니다. 우리 국민들, 세계 여러분들이 그 데모에 나오십니다. 그분들도 다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팽게쳤습니다. 이래놓고 자기가 사리사욕을 차려가지고 마음대로 국회의원??대표도 나갔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저한테 얘기도 없었고 하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는거니까 제가 무엇을 용서를 구합니까. 이름도 성도 없는 용서? 자기 마음대로 했으니까 그분도 자기 마음대로 하던지 말던지 하는거지 저한테 책임을 미룰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무엇때문에 용서를 바랍니까.
속이고 이용하고 제주는 곰이 하고 돈은 사람이 받아먹었다 삼십년동안 재주했다. 그 돈은?? 받아먹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무엇을 용서를 바랍니까. 해서 저는 데모 방식을 바꾼다는거지 끝내는 건 아닙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시작했고 또다시 새롭게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이거를 하기 위해서 제가 이걸 바꾼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먼저도 얘기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입니다. 이러면 이 학생들이 결국에는 그 나라 주인아닙니까 하니까 이 학생들이 알아야 사죄 배상을, 뭣때문에 하는 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아베는 ??? 그래놓고는 한국이 거짓말한다. 학생들에게 물으면 한국이 거짓말한다고 나오니까 그것도 몰라서 그런거 아닙니까. 우리 학생도 몰라서 그렇고 일본 학생들도 거짓말하는 한국이라고 생가갛ㅂ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합니다. 일본과 한국을 학생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이게 시간이 오래갈겁니다. 가도, 학생들이 알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왜 일본에게 배상하고 사죄하라 하는지 얘기하면 그러면 일본에는 왜 하지 않는가 하면 그게 아니라 하고 거짓말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그 말부터 들었다. 한국이 거짓말만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이걸 학새들에게 가르쳐서 싫어해도 서로 왕래하고 친해지면 서로 배워야합니다. 배워야 알지요. 그래서 제가 짧은 생각인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대구에 ??사관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이것도 누가 했습니까. 대구에 유명한 최범태변호사가 대표로 이걸 했다. 그래놓고 지금 윤미향을 밀고 있으면서 어느날 아침 할머니 윤미향 욕하지 마세요. 김복동할머니 존대받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에 돈을 많이내고 하니까. 그럼 ??기금이라던지 하는거 김복동이 할머니 이름으로 했다고 김복동할머니 돈입니까. 어느날 미국가기로 했는데 윤미향이 모금을 했다. 모금을 육백만인가 했는데 저한테 하는 말이 전화로, 할머니. 할머니는 정대협사람 아니라고 못오라고 해요. 이것또한 말이 됩니까. 제가 간다고 했습니까. 이런 등등 그뿐 아닙니다. 많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삼십년동안 그것만 얘기했는데 줄줄 나오는게 엄청 나옵디다. 그럼 할머니들 팔아서 그렇게 했으니까 왜 위안부 할머니를 즈그가 했습니까 하니까 이것도 부정아닙니까. 이것도 죄 받아야한다 하는데 그래도 끝까지 사죄? 무슨 사죄입니까. 저는 김복동 할머니요? 김복동할머니를 저는 왜 김복동할머니만 했습니까 했는데 김복동할머니는 한쪽 눈이 실명입니다. 저보다 두살 위입니다. 실명이고 한쪽 눈 조금 보이는 할머니를 끌고다녔죠. 미국이고 어디고 끌고다니면서 내지는 회관까지 지어준다고. 있을때 잘하고 할머니 있을 때 그래야했는데 고생시키고 끌고다니면서 이용해먹고 그래놓고도 뻣뻣이 그 묘지에 가서 눈물흘려요? 그건 가짜눈물입니다. 병주고 약주고 하는 이런. 그도 천대. 죄를 모르고 아직까지 이렇게 있는데 그것은 다 검찰에서 밝힐 겁니다. 하지만 정신대 대책협의회에서 위안부를 이용한 거 가지고 한 건 도저히 용서 못합니다. 이것또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해서 저는 끝까지 제가 나이가 들다보니 자신이 없습니다.
헌데 우리 학생들로 올바르게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학생들로 해서 친하게 지내서 올바른 역사를 공부해서 위안부 문제 사죄, 배상하라는 걸??? 이건 천년이가도 만년이 가도 일본이 해야한다는 걸 가르치기 위해서는 양국이 친하게 지내면서 역사공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이 사람들이 꼭 역사의 주인이니까 이분들은 올바른 역사교육을 시켜서 이 억울하고 누명쓴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 해결 해줄 사람은 우리 학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저희는 당해야하고 내가 이렇게 늦게까지 살아있는게 죄입니까. 끝까지 이렇게 당하고 있는 제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할머니들한테 내가 이렇게 해결하고 왔다 언니 동생들 내가 이렇게 해결하고 왔으니 나를 용서해달라고 빌랍니다. 그래서 그걸 생각하니 너무 제가 미안하고 한데 저는 하나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렇게 위안부입니다. 위안부. 위안부가 그 두가지가 여자입니다. 이것이 저는 세계의 여성분들께 피해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참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세계의 여성여러분들. 저희가 위안부지 하지만 여성이라는 그 두글자가 너무 미안하고 해서 어떡하면 내가 이런것도 미안한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 했는데 이 기회를 빌려서 모든 여성분들께 미안합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누명도 쓸 것이고 여자이기때문에 위안부는 여자다 하는 것때문에 여러분들도 그런 소리를 들으실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기자회견을 통해서 세계 여성분들한테 이 확실한 위안부가 여러분들의 여자라는 두글자가 손상을 입었다는게 참 죄송하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다. 제가 어떻게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제가 교육을 확실히 두 나라가 서로 왕래하고 친하게 지내서 이 역사를 아셔가지고 이 억울하고 억울한 위안부 문제를 사죄받고 배상해야 제가 사죄를 받아야 위안부 누명을 벗습니다. 제가 왜 위안부고 성노예입니까. 그 더러운 성노예소리를 왜 하냐니까 미국사람들으라고, 미국사람 겁내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팔아가지고.. 그렇게 파는 줄 몰랐습니다. 저 안성이라 하는 곳도 나왔는데 쉼터를 화려하게 지어놓고 그 윤미향대표, 위대한 대표 그 아버님이 사셨다고 하더라구요. 이런거 엄청나게 나왔는데 그것은 다 검찰청에서 다 밝힐 겁니다. 이 죄를 모르고 아직까지도 큰 소리하고있는 이 사람들 죄는 지은대로 가고 공은?? 대로 갑니다. 꼭 이 죄를 물어서 죄를 살려야합니다. 살린다고 제가 마음이 풀리는 건 아닙니다. 고쳐야죠. 이 후에 두번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벌받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또 무슨 말씀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이걸 밝히기 위해서 여러분이 오셨는데?? 가 너무 좁습디다. 기자여러분들 부탁드립니다. 꼭 했던 말 그대로 해주세요. 없는 말 추측해서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저희들을 욕보이는 겁니다. 기자분들이 이것을 다 옳은 말로 기사를 내줬으면 두번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장소를 바꿔 여러분과 앉아서 마지막 얘기를 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많다. 여러분도 들으면 가슴아파해서 이정도 얘기했다. 이렇게 알고, 지금 정말 죽겠습니다.
연합뉴스 기자
Q. 윤미향당선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오늘 알았는데 지금 마음이 어떠신지 그리고 앞으로 윤미향당선자가 어떤 활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묻고싶다
A. 네, 기자회견을 한다고 오라고했습니다. 아직까지 그 사람은 자기가 당당하게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죄를 지었으면 죄를 받아야죠.
엠비씨 기자
Q. 윤미향당선인이 사퇴하길 바라시는지 입장 여전하신가요
A. 그것은 제가 할 얘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했으니까 사퇴를 하던지 말던지 말 안하겠습니다.
일본인
Q. 2015년 위안부합의때 윤미향씨가 다른 할머니한테 일본쪽 돈을 받지 말라는 보도가 나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A. 2015년에 돈이 나왔는지 마는지 그건 비밀로 했다. 말 안했기 때문에 모른다. 그 후에 외교통상부에 장관 윤병세 편지를 가지고 화해와 치유재단 대표가 남자두분하고 가지고 왔었다. 그걸 가지고 왔던게 1월?2월? 29일날짜였다. 누구한테 받아라 받지 말라 한 적도 없고 제가 안받으면 된다. 국민뭐고 전부 반대했다. 그래서 누가 받는지 안받는지도 몰랐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Q. 정의연, 정대협에서 돈을 모으고 할머니들에게 많이 돈을 쓰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구체적 사례가 있는가. 다른 경제적인 요청을 했는데 거절받으신 적이 있는가.
A. 해외다니면서 돈걷은 거 전혀 모릅니다.
동아일보
Q.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왜 이제야 이 일이 이렇게 문제제기가 되었을까 왜 일이 커졌을까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할머니가 이제야 문제제기할 이유가 있었다면 듣고싶다. 그리고 윤미향 전 이사장이 기자회견에 참석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만약 자리했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삼십년을 참았던 건 제가 이 데모라든지 이걸 하지마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렇게 했기때문에 제가 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엇이든지 바른말로 하니까 저를 전부 감췄습니다.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 십억엔 왔을 적에도 제가 알았으면 돌려보냈을 겁니다. 그런데 자기네들 말고 자기가 전대협에 있는 할머니가 피해자입니다. 나눔의 집에 있는 피해자만 할머니입니다. 도대체 이거부터인가 하며 털렸습니다. 전국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할머니만 도왔지 저는 저한테도 그런 얘기한적이 없고 비밀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이 데모도 고만두고 뭐 해라 할수가 없었다. 그랬는데 제가 일년전부터 곰곰이 생각했는데도 그럴수가 없었는데 자기가 먼저 삼십년을 하고도 아주 ??없이 하루아침에 배신했습니다. 이 배신당한 제가 너무너무 분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났지 다른 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모르고 다만 삼십년간 같이 했는데 어떻게 그래 하루아침에 자기가 하기 싫다고 배반해버리고 또 국회의원 뭔지 모릅니다. 자기가 사리사욕채우는 거 아닙니까. 자기가 했습니까. 즈그 마음대로 하니ㄱ까 하는일이지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많이 부정확함)
마지막으로 한말씀 드리겠다.
저희가 피해자라고 해서 저희만 있는게 아닙니다. 여러분들 다 책임이 있습니다.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피해자입니다. 조상님들도,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여성입니다 .저는 지금의 여성이 아닙니다ㅏ. 저는 조선때 여성으로서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저희 위에 오빠가 있었는데 몰랐습니다. 그 부산에 고깃배를 타고 열살에 들어갔는데 들어갔다 나왓는데 중국옷입고 나갔습니다. 오빠는 내가 조선찾아온다고 하고 갔는데 나는 몰랐다. 이러다 오빠가 육이오 칠월에 형무소에 끌려가서 양민학살당했습니다. 독립운동했습니다. 그럼 저희는 독립운동 선두자입니다. 목숨을 놓고 그 폭탄이 빗발치는데서 여자입니다. 어린아이입니다. 이렇게 가서 독립운동 선두잡니다. 꼭 그러면 독립운동자라 하고 나서야 됩니까. 그런 오빠가 육이오 칠월달에 끌고나가서 학살당했습니다. 이런 부모님이 딸도 그랬고 아들도 그랬고 이러니 얼마나 부모님이 상처가 크겠습니까. 여러분들 제가 또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 피해자가 아니라고 해서 여러분들이 안심하면 안됩니다. 여러분들도 다 피해자입니다. 조상님들이 다 끌려갔고 또 대한민국의 형제자매 이런 사람들이 다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이 문제 해결에 앞장서서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을 시켜서 이 위안부문제 강제연행문제를 해결안하시면 안됩니다. 대대로 내려갑니다. 제가 이렇게 있어도 분명히 거짓말하고 우리 대한민국 사람도 그걸 모를겁니다. 모르는 사람 많습디다.그러니 서로서로 가르쳐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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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왜곡 되어 전달 되는 게 많은 것 같아서 영상의 전문을 받아 쓴 글을 퍼왔어. 내가 쓴 건 아니고 전문을 받아 쓰신 분이 오타랑 부정확한 부분 있다고 명시하면 퍼가도 된다 하셨음!
첫댓글 내가 알던 정의는 어디로 갔나.. 모든게 무너지는 기분... 그리고 죄송스럽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나 몰랐는데 글보고 찾아보니까 이렇대 존나화나고슬픔..
진짜 너무 슬프다
미친놈들아 진짜 열받아..어떻게 그럴수가있냐 사람들이 너네 믿고 기부한걸.. 쓰레기 새끼들이.. 다뱉어내 할머니들한테 꼭 돌려드리길..너무 화난다
왜 이렇게 화제가 안되는 느낌이지..마음아프다 정말..
기자회견 실시간으로 봤는데
눈물 나더라..어떻게 할머니들 이용해서 저런 짓을 하고 살았는지ㅠㅠ 할머니들께 고통을 또 안겨 준거잖아
위안부는 건들면 안되지 우리나라 평생 아픈 상처인데.....
진짜 빡치고 속상하고...시발 다 죽여버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