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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和會(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 會報
푸른 들 소리 [제 13권 1호](통권 216호)(2011년 1월 3일)
신 년 사
또 한해가 가고 2011년 새해가 옵니다. 시간 없는 세계는 상상은 할 수 있으나 현실은 시공간의 세계입니다. 이 바다에 몸을 맡기고 삶을 누리고 있음을 자축합시다. 삶을 북돋우는 일을 선(善)이라 하고 ‘나’를 위해 남의 삶을 해치는 일을 악(惡)이라 합니다. 또 거짓이 횡행하고 때로는 득세하여 우세합니다. 인간은 그것을 극복할 의무를 가집니다. 거짓이 있고 악이 있음은 진리와 선을 따르고 또 만들어내라는 요청입니다. 항상 타락이 있으므로 생명작용이 요청됩니다. 거짓과 악을 따르면 기쁨이 없고 진리와 선에 합세할 때 힘이 나고 기쁨이 옵니다. 누추한 것에 빠지지 말고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힘씁시다. 진선미는 하나입니다. 진선미는 인생의 목적이며 역사의 목표입니다. 그 목표가 영원하도록 우주는 구조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구조에 일치할 때 해방과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장기홍 삼가.
유럽의 겨울과 차가운 성(城): 人間惡을 직시하는 독일인들
장기홍
2010년 마지막달에 들어 스무날 동안 우리 내외는 유럽에서 ‘세기의 겨울’을 겪고 돌아왔다. 프랑스 오를레앙의 지구과학연구소에서 동아시아 지질에 관한 학술회의가 있었는데 나는 기왕 간 김에 유럽 구경을 하려던 심산이었으나 12월 1일부터 쏟아진 눈이 스무날 내내 그치지 않았다. 습기가 유럽 하늘에 머물면서 강설과 증발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잔다크의 오를레앙에서. 이번 여행의 주목적지였던 오를레앙은 잔다아크 아가씨의 고장이다. 유럽에 도착하던 첫날 우리는 빠리공항에서 거기를 가기 위해 렌트카를 했는데 눈이 쏟아져 길이 어려운데다 도로의 통행료 관문에서 잔돈을 기계 속으로 넣어야 하는 등 수금(收金)하는 사람이 없는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었다. 유리나님 같은 어학에 능통한 사람이 옆에 있어서 전화로 문의하여 요금을 지불하고 통과할 수 있었다.
잔 다르크(1412-1431)는 영국이 프랑스를 침범하여 백년이나 끌었던 백년전쟁(1338-1453) 때의 프랑스 측 영웅이다. 그는 13세 때 신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하라” 하는 계시를 받았다 한다. 그는 위기에 빠진 왕(샤를 7세)에게 진언하여 군대 지휘권을 얻었다. 1429년 그녀는 영국군에게 포위되어 기진맥진했던 오를레앙을 209 일 만에 해방시켰다. 방년 17세였다. 그는 오를레앙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으며 오를레앙을 구출했으므로‘오를레앙의 처녀’라 불린다. 그는 영국군을 빠리에서 격파하고 랭스로 진출하여 그곳 성당에서 샤를7세의 정식 대관식을 주선했다. 왕은 그녀를 귀족으로 봉했으나 사양하고 계속 백의종군했다. 그러나 그녀의 명성을 시기하던 왕 측근의 배신으로 영국군에게 잡혀 그는 어이없게도 이단이라는 종교재판을 받아 화형을 당하였다. 당시는 이단판정을 하는 것이 죽이는 가장 쉬운 방도였
다. 1920년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때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녀를 성녀로 추대했다. 지금 오를레앙에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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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념관들이 있고 거리 곳곳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는 아직 통일이 없었고 부르군느 같은 지역은 프랑스 조정에 반기를 들었었다. 그녀의 공로로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극복했으므로 잔 다르크는 구국의 영웅이 되어 있다.
오를레앙에는 지구과학연구소를 포함하는 넓은 과학단지가 있다. 이 연구소의 한 청년이 1970년대에 한국에 와서 옥천대의 지질을 연구하고 그것으로 박사논문을 삼은 일이 있는데, 그는 지금 프랑스의 한 대학에 교수로 가 있다 하나 이번 만나지는 못하였다. 이번의 회의 주제는 백악기 동안의 신장성 구조운동이었다. 지각의 어떤 부분은 주름이 잡혀 면적이 주는 대신 어떤 부분은 늘어난다. 그 늘어지는 것을 신장(伸長)운동이라 하는데 백악기 때의 동아시아 지각의 신장운동이 이번의 주제이다. 이처럼 자연과학의 첨단적 연구를 이 연구소는 주도하고 있다. 회의를 마치는 날 오후에는 부근의 한 대표적인 성을 구경 가게 되어 있었으나 눈으로 취소되었다. 오를레앙을 끼고 흐르는 르와르강은 대서양으로 흘러드는데 강변 일대는 유명한 프랑스 포도주의 생산지이다. 곳곳에 고성들과 수도원이 있어 관광지가 되어 있으나 눈이 쌓여 차 운행이 어려웠으므로 우리는 전차를 타고 시내구경만 했다.
12월 5일은 일요일이라 전차가 드문드문 다닌다. 전차를 기다리며 붐비는 손님들께 물으니 두시간만에 전차가 온다고 한다. 너무 붐벼서 결국 못타는 손님도 있다. 전차 운전석은 넓고 편안하게 되어 있고 객석과는 칸이 막혀 있어서 마치 휴식처 같다. 그런데도 승객들의 편의를 따돌리고 이렇게 뜨문뜨문 운행한다 생각하니 노동자들이 괘씸했다. 계속 눈이 와서 차 운행이 어려운 때에는 왜 좀 자주 운행하는 배려를 않는가?
칼스루에(Karlsruhe)를 향하여. 6일은 빠리로 나와 동부 정류장에서 떼제베를 타고 유리나님이 사는 독일 칼스루에를 향했다. 기차는 동쪽으로 달리다가 칼스루에에 이르기 전 알사스 로랭 지방을 통과한다. 이 지방은 1차 대전 전에는 독일이었으나 지금은 프랑스 땅이 되어 있다. 스트라스부르그는 그 지방 수도인데 그곳을 통과하면 곧 독일 땅이고 곧 칼스루에에 이른다. 빠리에서 3시간 걸려 도착했다. 1, 2차 대전의 패전국 독일이다. 그러나 대전후 55년 세월이 흐른 후 지금 독일과 프랑스는 대등해 보인다. 독일인들이 그만큼 노력과 고생을 많이 했다는 뜻이 된다. 말해 무엇하랴? 그런 독일에 우리네 청년들은 광부와 간호사가 되어가서 외화를 벌었던 것이니! 독일 사람들이 지금 남한을 보면 대단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칼스루에의 시내 구경은 때마침 성탄절 계절이라 성탄장식품 가게들로 실로 볼만했다. 구경을 위해 일부러 오는 외국인 단체 관광객도 있다. 집사람이 따뜻이 덥힌 포도주를 시음하는 동안 나는 책방에 들렸는데‘내 안에 있는 악(惡)’이라는 소설도 있고 ‘악’이라는 제목의 철학서도 있다. 연말이라 잡지들은 많은 특집을 내고 있는데 ‘왜 우리는 악하면서 동시에 선한가?’라는 특집 책자도 있었다. 히틀러를 낳았던, 그리고 대전 때 고생했던 독일인다운 반성이다. 악의 정체를 정면으로 문제 삼고 있다.
수도원, 고성(古城), 기계악기(樂器)박물관. 칼스루에 사시는 지금은 은퇴한 페펄(Pfefferle, 건축학)교수는 우리를 옛 수도원 몰브론 모나스트리(Maulbronn Monastry)와 브룩살 고성(古城)을 안내해 주고 대접도 해 주셔서 참으로 고마웠다. 수도원 구경을 가던 중 페펄 교수는 차창 밖으로 어느 집 2층을 가리키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패배하고 귀국길에 하루밤 숙식했던 집이라고 일러주었다.
시스테리안 계통의 이 수도원은 1147년에 최초의 초석이 놓인 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건물들이 연달아 세워져서 하나의 성이 되어 있다. 처음에는 가톨릭 수도원이었으나 종교개혁 이후에는 프로테스탄트 파가 득세하면서 그들의 관할 하에 들어가서 신교의 수도원이 되었다. 부속고등학교(일명 ‘신학교’)에는 천문학자 케플러, 문인 헤르만 헤세 등 많은 인재가 거기서 일시 공부했다. 수도사들은 스스로 격리하여 기도하고 공부했으나 이렇다 할 유명인사가 배출되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수도사들과는 별도로 자원봉사 일꾼들은 ‘형제’라고 호칭되었는데 그들은 건물과 예술적 석물(石物)들을 남겼다. 2차대전 때 폭격을 면하여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그래도 세월에 파괴된 것들의 보수가 한창이다. 건물 안은 춥기 그지없었다. 이런 곳에서 수도하느라 고생했겠구나 하고 느껴졌다.
일꾼들은 수도원 건물 안에 단 한번 들어올 수 있는데 그것은 죽어서 시체가 되어서야 잠깐 들러서 정원의 묘지로 나가는 문이 따로 있어 그것을 통과한다. 수도사들도 그 묘지에 묻히지만 특별 인사들은 수도원 예배당 바닥에 묻힌다.
일꾼 형제들은 건물과 예술을 남기고
부속학교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건만
수도사들은 건물 바닥에 뼈를 남겼을 뿐.
다음날은 칼스루에 북동쪽에 있는 브룩살 고성(古城)을 구경했다. 이 고성의 최고의 기록(796년)에는 그것이 프랑크 왕국의 왕족 저택이었다고 한다. 1056년에는 스파이어(Speyer, 지명)의 왕자-주교들(prince-bishops)의 소관으로 넘겨졌고, 그 후 이 지방 귀족들의 관할 아래 있게 되면서 지금과 같은 로코코 식(式) 성채로 변신했다(1722-32년간 축조).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을 본뜬 저택이다.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복구과정이 세세히 전시되어 있다. 복구를 위한 학과가 있고 학생들은 복구의 기술을 배우면서 재건을 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했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성안에는 박물관들이 있는데 그 중 독일에서 발달된 기계악기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은 일품이었다. 기계가 자동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놀라왔다. 그런 기계의 역사가 350년이 된다고 한다. 초기 컴퓨터의 구멍뚫인 카드가 음악을 만들어낸다. 아마도 컴퓨터의 전신 같다. 이 악기박물관에는 그런 기계들이 500개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하이델베르그. 칼스루에 북쪽으로 기차로 40분 거리에 하이델베르그가 있어서 두 번이나 가보았다. 괴테 등 문인들의 낭만이 깃든 이 도시는 2차 대전 중 폭격을 면한 극소수의 독일 도시 중 하나이다. 전후 미군이 그들의 사령부를 여기에 두었으니 그럴 목적으로 폭격을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여하간 운 좋게도 중세 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버스를 타고 도심에 들어서면 거기가 하이델베르그 대학, 독일 최고의 대학이다(1386년 창립).
1196년에 이 도시는 최초 기록을 남겼으므로 1996년에는 그 800주년을 자축했다. 그 이전에도 고고학적 유적은 켈트족과 로마인들의 주거였음을 알려준다. 하이델베르그 성은 1225년에 이미 그 기록이 나오는 고성이나 17세기말 프랑스 군이 침입하여 크게 파괴했다.
도심의 성령(하일리게 가이스트)교회는 본래는 가톨릭 성당이었고 그 옆의 광장 곧 장터는 중세에는 공개재판소였고 마녀사냥터요 이단(異端)화형장이었다. 1572년 한 교구감독은 여기서 아리우스파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목이 잘렸다. 성령교회는 후에는 신교를 믿는 영주가 들어서서 신교의 교회당으로 변신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독일에서는 30년전쟁(1618-48)이라 하여 신구교 간의 종교 전쟁이 있었다. 그런 역사의 나라답게 지금은 신구교가 반반이라 한다. 이는 구교가 거의 전부인 프랑스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성탄절 분위기로 붐비고 있는 이 시장터가 그런 피비린내나는 곳이었구나 생각하니 금석지감이 있었다. 프랑스에 의한 파괴의 흔적이 역력한 고성에 오르니 라인강의 지류 넼카 강이 내려다보인다. 날이 춥고, 어두어져서야 네카강의 다리를 건너면서 사진을 찍었다.
기독교 ‘카타리’파(派)의 사상. 유럽에 가면 프랑스 남부에 가보리라 염원했는데 이번 유리나님의 수고로 그것을 이루었다. 잠시 까르까손느에 들려, 시간의 소독작용으로 너무나 깨끗이 세탁이 된 세상에 서서 다만 상념으로나마 옛 일을 회상해보았다.
독일의 칼스루에에서 출발하여 차로 근 하루를 가서 리용에서 일박하고 다시 하루를 더 가서 까르까손느에 이르렀다. 지도상에서 보면 우리는 아비뇽(한때 로마교황청이 있던 곳이다), 역사 오랜 도시 마르세이유, 대학도시 몽펠리에 등을 경유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지피에스는 경유지를 다 피하여 우리를 목적지에다 데려다준다.
내가 가보고 싶어 하던 랑그도크 일대는 12세기의 기독교 이단 ‘카타리’의 터전으로 유명하다. 그들 사상의 요지는 선(善)한 창조주 외에 어떤 어둠의 신이 있어 그가 악, 물질, 육체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악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게 되었다는 그들의 사상을 사람들은 이원론(二元論)이라 한다.
그 비슷한 생각은 세계사상사에서 뿌리가 깊고 그 유파는 곳곳에 분포해왔다. 그런데 유럽 중세에 랑그도크와 부근에 퍼진 카타리파(派)는 스스로 기독교라 자처해서 문제가 커졌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를 하느님의 (창조적)말씀이라 한 구절이 있고 이어“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어진 것이 없다”고 했다. 영어로는 “nothing was created without him"인데 그 사람들은 그것을 특이하게 해석하여 “그이가 없는 데서 어떤 ‘어두운’ 조물주가 nothing(무, 허무)을 창조했다”고 보았다. 이 허무가 악인데 그것이 항상 선(善)과 대결한다는 것이다. 자연히 자기네는 선(善)이고 자기네를 멸망시키려 드는 로마교황청의 종교는 악(惡)의 세력이라는 구도(構圖)가 된다.
랑그도크(Languedoc)라는 지명은 'Langue de Oc'의 준말이다. ‘오크 말을 쓰는 지방’이라는 뜻이다. 지중해와 산으로 둘러싸여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Oc語라는 방언이 생겨나 있었다. 그들이 독특한 기독교를 개발하게 된 것도 그런 자연환경의 격리 탓일 것이다. 프랑스 말로는 ‘예’를 ‘위’라 하는데 오크말로는 ‘오크’라 한다. 카타르파의 멸망과 함께 랑그도크지방은 확실히 프랑스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오크말은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어 언어학적으로는 Occitan language(오크 언어)라 불린다.
그리스 말 카타로스(순수하다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한 카타리교(敎)는 선(善)을 따르고 사모하는 종교답게 도덕적으로 고상했다. 물욕과 육체를 억누르며 정신을 존중하고 도덕을 실천하여 랑그도크 지방에서는 교세(敎勢)가 대단했고 영주들 중에는 카타르교도가 생겨났으며 교도들을 영접하고 옹호하는 영주도 늘어났다. 카타리(Cathari, Cathar)교는 로마교 교리를 부인하고 교황청의 타락과 비리를 비판했다. 교황청은 카타리를 이단으로 정죄(定罪)하고 주교들은 교정을 시도하여 점잖게 타이르는 순서를 밟았다. 그러다 13세기에 들어서서는 이단 척결을 위한 십자군을 조직하여 정벌에 나섰다.
교황은 십자군 기사들에게 이교도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약속하고 기사들은 과오를 범해도 용서된다고 선언했다. 십자군은 잔인했다. 1209년 베지에(지명)에서는 2만명의 시민이 학살되었고 미네르브에서는 140명이 화형을 당했다. 피레네 산맥의 험난한 암벽 정상의 몽세귀르 산성(山城)에서는 끝까지 저항하던 카타리 225명이 1244년 끝내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십자군의 정벌은 대략 끝났으나 무력만으로는 카타리파를 절멸시킬 수 없었다. 교황청에서 보낸 이단심문관들이 그 멸망의 사업을 완수했다. 화형과 고문과 회유, 끈질긴 설득으로 뿌리를 뽑고 말았다. 이단심문은 1329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해에 최후의 네 사람 카타리신자들이 까르까손느 성밖의 강둑에서 화형되었다. 이단에 대해 관용이 없는 것은 기독교의 나쁜 습관이다. 불교의 이단에 대한 관용을 배워야 하겠으며, 크게 반성을 요하는 대목이다.
까르까손느. 스페인의 피레네 산맥 가까이에는 지금도 아라곤 주가 있는데 그 일대는 옛날 아라곤 왕국의 영토였다. 11, 12 세기의 아라곤 왕국은 랑그도크의 일부도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번 구경한 까르까손느 성 혹은 구시(舊市)는 아라곤왕국 관하의 트랑카발 가(家)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1247년 십자군에게 정복되어 십자군 총수 시몬 드 몽포르의 소유가 되었고 프랑스 왕에게 지배권이 넘어갔다.
십자군 거병(擧兵)은 교황과 프랑스왕의 합작이었다. 그들의 영토확장을 위한 공동전선에서 카타리 사람들은 희생을 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정치와 종교는 흔히 합작하여 권력의지의 화신 노릇을 한다. 종교는 말로는 욕망을 멀리하고 자기를 이기자고 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욕을 한껏 발휘하고 누리는 습성이 있다.
만일 그 때 십자군이 없었더라면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라곤이라는 국가는 지금도 존속할는지 모른다. 카타르교도 존속할 수 있다. 하늘은 권력의지의 손을 들어주었는가? 십자군 거병으로 프랑스는 유리하게 되었고 지금도 가톨릭의 나라가 되어 있다.
관광객이 드문 계절이라 까르까손느 성 안의 요소요소는 문이 꼭꼭 닫겨 있었다. 다행히 고문(拷問) 박물관은 문이 열려 있어서 우리는 그 구경으로 만족해야했다. 이단 심문 때 쓰이던 고문기구가 진열되어 있다. 송곳의자도 있고, 젖통을 찝던 집개, 질 속에 넣어 구멍을 확장시키는 확대장치도 있다. 십자군 출정 때 아내에게 사용했다는 정조대도 있었다.
리용의 차가운 성. 우리는 귀로에도 리용에서 일박했다. 역사 오래고 엄청난 대도시다. 아침에 일어나 나는 홀로 호텔을 나와 부근의 기차역을 구경할 심산으로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추운 날씨라 방한복을 덮어쓰고 걸어가는데 가도 가도 거리(距離)가 잘 정복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 크나큰 건물이 닥쳤다. 들어서니 상가에는 모든 종류의 가게가 다 있는 것 같았다. 좌왕우왕, 나는 기차역 쪽으로 빠져나갔으면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마치 성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결국 아는 길로 되돌아가는 편이 안전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을 빠져나왔으나 목적지에 미련이 있어 기웃거리다 보니 지하실 같은 구석으로 돌아들어가는 길이 있고 내 걸음은 저절로 걸어졌다. 막다른 데가 있고 거기 서니 훈기가 느껴졌다. 목 고개를 한껏 뽑아 들여다보니 작은 천막이 있고 방한용으로 담요가 천막 일부를 덮고 있었다. 그 안에는 분명히 사람이 누워있을 것이다! 아직 누워 있는 것은 체온을 보존하고 추위를 이겨보리라는 심산에서거나 혹은 병이 들어서일 것이다. 나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 일깨우려 들지는 않았다. 분명한 것은 어디를 가나 번영이 있는 이면에는 참상(慘狀)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독일에서 책방을 기웃거리다가 잡지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Unser Wohlstand geht oft zu lassen der ganz Armen. 우리의 번영은 흔히 남의 절대빈곤의 원인이 된다. 또 생각건대 난들 삽시간에 거지가 될 수 있고, 내 주머니에 가진 것이 없으면 그 옆에 즐비한 상점이 마치 절벽이나 성벽 같이 소용이 없다. 돌을 쌓아 세운 성 밖에서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들어갈 수 없다. 반대로 그 안에 갇히면 빠져나올 희망이 없다.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아무리 허우적여도 구원받지 못한다. 성을 빠져나갈 수도 없고 성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죽음이라는 그 순간이 온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12월 20일 우리는 처음에는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려 했으나 눈이 쏟아져 기차를 이용했다. 오후 7시 경 출발예정이던 항공편이 3시간이나 연기되고 항공사에서는 한사람 당 만 오천 원쯤 되는 쿠폰을 주면서 마실 것이나 사마시면서 기다려 달라 했다. 유리나님을 작별한 뒤 나는 ‘왜 인간은 선하면서 악한가?’ 하는 특집의 잡지를 사지 못한 것이 아쉬워 공항 안의 서점 두 곳을 누볐다. 결국 사들고 읽으려니 사전들을 가진 것이 요긴하게 쓰인다. “권력행위로의 전환은 어떤 조건과 상황이 주어지면 누구나 할 수 있다.”(“유대인 수용소의 간수로 배치되면 할 수 없이 간수노릇을 한다.”라는 말로 들린다.) “사람의 뇌에는 죽음에의 욕망이 뉴론의 구조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것 같다고 연구가는 말한다.”(살인과 자살 같은 극도의 부정적 죄악행위의 소질이 본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 같다는 뜻.) “인종청소를 하는 자들은 자신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악하다 하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탑승시간이 되어 표와 여권검사를 받으러 들어가려는데 한 영어 쓰는 여인이 사색이 되어 여행가방을 찾고 있다. 방금 둔 가방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여인은 문자 그대로 얼굴이 검푸르게 사색(死色)이 되었다. 나는 옛날 외국여행을 마치고 서울역에서 가방을 잃어본 일이 있다. 1960년대에는 그런 일이 흔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는 남의 가방을 가져가는 일은 없었다. 찾으러 가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 유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프랑크푸르트공항의 이 여인은 세상이 근래 더 악해졌다는 사실의 증인이다. 이런 악의 횡행은 지금이야말로 선을 기리고 북돋우어야겠다는 요청이다. 악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대결하려는 독일인의 자세에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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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 시 항 : 2011년 1월 모임
1木 모임 -- 2011년 1월 6일 (목) 7 시
3木 모임 -- 2011년 1월 20일 (목) 7 시
장소: 경북대학교병원 606병동 7층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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