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말랭이떡과 고구마빼떼기죽
박정도
경남 사천의 자그마한 농촌에서 태어나 스무 살까지 자랐다. 가난한 농촌이었지만 집에서 열 마지기 정도의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기에 배를 곯지는 않았다. 철마다 논에서는 벼, 보리, 밀을 재배했고 밭에서는 배추, 무, 시금치,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박 등 다양한 채소를 재배해 식량으로 삼았다.
동네에 가게가 없어서 과자나 빵 등 가공음식은 구경을 거의 하지 않았다. 논밭에서 기르는 곡식이나 채소, 과일 따위로 식량을 삼거나 주전부리를 만들어 먹었다. 아버지는 근엄했지만 어머니는 한없이 자상하여 자식인 우리 4남 1녀의 형제들을 따뜻하게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 그래서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랄까 추억은 늘 가슴을 포근하게 적시는 감동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가 해 주신 주전부리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고 맛이 좋았던 음식은 ‘호박말랭이떡’과 ‘고구마빼떼기죽’이었다. 이 둘은 밥 대신에 먹을 수도 있었고 식사 시간 사이에 주전부리로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이 두 음식은 일단 은은한 단맛이 있으므로 싫지가 않았고 언제 어디서 먹어도 입을 황홀하게 했다.
호박말랭이떡은 재료가 호박, 찹쌀, 강낭콩이다. 찹쌀을 가루로 빻고 강낭콩을 삶아 무르게 한 뒤에 가을에 수확한 늙은 호박을 말려 적당한 길이로 잘라 찹쌀가루에 넣고 시루에 찐 떡이다. 농사를 지었기에 찹쌀과 강낭콩은 언제나 집에 있었고 호박도 많아서 말려 보관하면 장기간 보관할 수 있었다.
이런 재료를 준비해 두었다가 명절이나 생일 등이 되면 어머니는 우리 가족을 위해 호박말랭이떡을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표 호박말랭이떡은 정말로 맛이 있었고 자주 먹어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맛이 좋을뿐더러 영양도 만점이었다. 배가 출출할 적에 한 조각 먹는 호박말랭이떡은 꿀맛 그 자체였고 숭늉이나 단술과 같이 먹으며 한 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었다. 차진 찹쌀에 호박. 강낭콩이 들어 기막힌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고구마빼떼기죽은 고구마가 주 재료인데 가을에 고구마를 수확하면 그대로는 오래 보관하기가 어렵다. 고구마는 쪄서 먹거나 구워 먹는다. 또한 생고구마를 얇게 썰어 지붕 위에서 햇볕에 말리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말린 고구마가 바로 고구마빼떼기다. 경상도 말인데 고구마빼떼기는 오래 보관하며 그대로 과자처럼 씹어 먹거나 죽을 끓여 주식 및 간식으로 먹는다. 겨울에 산으로 지게 지고 땔감 구하러 가거나 학교 가는 길에 호주머니에 고구마빼떼기를 넣고 다니며 우적우적 씹어서 먹곤 했다.
고구마빼떼기죽은 물에 고구마빼떼기를 넣고 죽처럼 끓여 먹는다. 여기에다가 팥이나 쌀을 추가해 넣고 끓여도 된다. 고구마빼떼기죽은 약간 달면서 은은한 고구마 향이 나는 게 상당히 먹을 만하다. 이것도 한 끼 식사대용으로 만족스러운 음식이다. 밥맛이 없을 적에는 고구마빼떼기죽으로 식사를 대신하곤 했다. 집에는 고구마 농사를 지었기에 가을이 되면 언제나 방안 한 구석에는 고구마가 가득했다. 일부는 다 먹지 못해 썩혀 버리곤 했지만 고구마빼떼기를 만들어 다음 해 고구마 수확할 때까지 먹곤 했다.
농촌에서 스무 살까지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 와서 30년 이상 살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내가 어린 시절에 고향에서 구경하던 두 음식은 찾기가 불가능하다. 틈틈이 시간을 내서 부산 변두리 장터로 가도 호박말랭이떡과 고구마빼떼기죽은 찾을 수가 없다. 이곳 사람들은 그런 음식을 알지 못하고 만드는 방법도 모르는 것 같다. 고향이 강원 영월인 아내에게 물어봐도 그런 음식은 처음 들어본다고 한다.
스무 살까지는 시골에서 호박말랭이떡과 고구마빼떼기죽을 심심찮게 먹었는데 도시 부산으로 와서는 아예 구경을 할 수가 없다.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그런 음식은 이제 꿈속에서나 구경할 수박에 없는 실정이다. 비록 직접 먹지는 못하지만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하면 그 시절 고향으로 돌아간 기분에 사로잡힌다.
호박말랭이떡과 고구마빼떼기죽에 들어가는 농산물 재료는 시장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다. 요즘 대기오염으로 호박과 고구마를 햇볕에 그대로 말리기는 어렵다. 고추, 감, 대추 등을 햇볕 대신에 전기건조기로 말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의논해 호박과 고구마를 전기건조기로 말리려고 기계를 하나 샀다. 전기건조기가 하나 있으니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갖가지 채소도 말려 나물로 무쳐 먹으니 퍽 좋다.
얼마 전에 휴일을 맞아 늙은 호박과 고구마를 구입해 전기건조기로 말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두 가지 요리를 해 보았다. 어머니가 해 주신 요리보다는 맛이 좀 덜하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집에서 아내, 아이들과 같이 먹으니 아내는 맛이 좋다고 했는데 대학생인 두 아이는 부모의 성의를 생각해서 좀 먹었지만 자기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역시 음식에서부터 세대차이가 극명하게 느껴졌다. 요즘 아이들은 피자, 치킨, 햄버거, 라면 등 가공음식에 길들여져 있어서 고향의 독특한 맛을 모르는 것 같아 약간 아쉬운 기분마저 들었다.
어쨌든 이제 집에 전기건조기가 있으니 어려서 먹던 호박말랭이떡이나 고구마빼떼기죽이 먹고 싶으면 언제라도 만들어 먹을 생각이다. 호박과 고구마는 값이 그다지 비싸지 않아서 구하는데 애로가 없다. 찹쌀과 팥, 강낭콩 등도 재래시장이나 할인매장에 가면 국산이든 외국산이든 언제라도 구할 수 있는 풍요로운 세상이다.
다행히 아내도 내가 가장 노릇을 잘해서 그런지 몰라도 내가 부탁하는 요리는 돈이 많이 들지 않는 범위 안에서는 해 주는 편이다. 아내가 만들어 주는 호박말랭이떡과 고구마빼떼기죽은 어머니에 비해서는 맛이 좀 떨어지지만 다른 요리는 남에게 자랑할 만할 정도로 맛이 빼어나다. 그래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직장생활에도 충실할 수 있는 기력이 생긴다.
사람의 본능적인 욕구는 식욕, 성욕, 수면욕이듯 식욕은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하다. 음식을 잘 챙겨 먹고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건강해지고 무병장수할 수 있다. 평균수명 백 살 시대에 먹는 음식은 수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갖가지 화학첨가물이 든 가공음식보다는 어린 시절에 고향에서 즐겨 먹던 토속적인 음식이 건강과 수명을 든든하게 지켜줄 음식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지금껏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열정적으로 살 수 있었던 바탕은 시골에서 다진 체력과 토속음식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갓 농사를 지은 싱싱한 농산물은 그 자체가 보약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나는 행운아라는 생각이다. 그 당시엔 농촌에 사는 것이 부끄러웠으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농촌이 바로 행복한 삶의 안식처이고 행복을 위한 꿈의 보금자리였다는 생각이다.
음식은 건강과 수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지금부터 생활양상을 바꿔 가공음식은 가급적 멀리하고 고향에서 먹던 음식으로 무병장수의 꿈을 실현해 나가야겠다. 그 시작은 당연히 호박말랭이떡과 고구마빼떼기죽이다. 돌아오는 일요일에도 아내에게 부탁해 두 음식 가운데 하나를 만들어 먹으며 식도락의 즐거움을 찾을 생각이다. 휴일에 고향에서 먹었던 진귀한 토속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온몸에 힘이 나고 입안에는 군침이 가득 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