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질 날들
박미숙
1.
7월이 시작되고 첫 토요일, 삼한골로 답사를 갔다. 며칠째 이어지던 장맛비가 다행히 산행 전날 그쳤다. 숲길로 들어서자 골짜기는 물소리로 가득했다. 비탈 아래 계곡은 나무들에 가려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맹렬한 소리로 압도한다. 가뭄이 길었던 지난달에 왔을 때와는 다른 생명력을 발산한다.
삼한골은 군사지역으로 묶여 한동안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지난해 숲 체험장으로 공개되었다. 오래도록 사람 손을 타지 않아서인지 계곡은 비밀스러운 기운을 품고 있다. 지난봄, 춘천 출신 문인 추월秋月 남옥(1722-1770)의 무덤에 제례를 드린 뒤로 모임이 시작됐다. 답사는 한 선생님이 주도하는데 삼한골에서 남옥의 무덤을 찾아낸 장본인이고,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옛 문사들의 시문에 기록된 삼한골 곳곳의 이름과 유래에 밝은 분이다.
계곡은 폭이 그리 넓지 않은데 골짜기로 모여드는 비탈이 가파르고 암벽이 많아 숲길을 얼마 걷지 않아도 깊은 숲에 들어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또 산길 곳곳이 끊어지고 풀들에 묻혀서 바깥 세계의 편리함은 금세 잊게 된다. 산 정상에서 쏟아져 내려온 물은 촌각을 다투는 무리들처럼 바로 휩쓸려 사라진다. 찰나의 물방울이 모여들어 대지를 훑고 가는 소리는 매끄럽지만 질긴 직물처럼 치밀하게 짜여있다. 멀고 가까움이 있고, 높고 낮음이 있고, 빠르고 느림이 있다.
오래전 사람들은 춘천과 화천을 오갈 때 삼한골을 넘어 다녔다. 수리봉 중턱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문사들과 연루되어 고초 끝에 세상을 떠난 남옥의 묘가 있고, 계곡 안으로 들어가면 터를 다지고 단을 세워 지었던 절터의 흔적이 있고, 골짜기 안쪽 깊숙한 암벽 사이에는 남몰래 떨어지는 폭포 구담臼潭이 있다. 좀 더 올라가면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들이 넓어진 계곡 아래로 한꺼번에 하강하는 폭포도 있다. 폭포 위 왼쪽으로는 커다란 암벽을 층층이 잘라서 쌓은 듯한 구층대九層臺가 눈길을 끈다. 조선의 문신이고 춘천 부사를 지냈던 송광연(1638-1695)은 ‘삼한동기’三韓洞記(1686)에서 “바위 꽃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으며 녹음은 새로 피어났다”라고 기록한다. 구층대의 돌단풍꽃과 녹음은 그해 여름에도 푸르렀던가 보다.
삼한골에서 폭포나 절터의 흔적을 살피고 옛사람들의 자취를 거니는 즐거움보다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스며드는 밝은 햇살과 바위를 타고 흘러가는 세찬 물소리와, 쏟아지는 폭포 물보라에 흩날리던 거미줄 한 가닥이었다. 너울대던 거미줄은 쓰임을 다한 뒤 끊어졌거나 아니면 저편 어딘가에 미처 닿지 못했을 텐데, 그 마지막 흔적을 나는 한참 바라보았다.
2.
며칠 뒤,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러 갔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안 본 지 오래였다. 엄밀히 말하면 영화 자체와 멀어져 지냈다. 한때는 영화를 보러 서울로 다닌 적도 있었는데. <헤어질 결심>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기대가 없진 않았지만 두 주인공인 탕웨이와 박해일의 연기와 ‘미묘하고 우아한 방식’으로 표현하려 노력했다는 감독의 말에 왠지 끌렸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작품 구성이 치밀하다. 중국에서 온 서래(탕웨이 분)와 두 건의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해준(박해일 분) 사이의 심리 묘사와 사건의 단서를 찾아가는 전개가 몰입감을 높인다. 또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도 탁월하다. 어두운 실내 장면과 인물에 집중하는 카메라 앵글이 그렇다. 딱히 한두 장면으로 꼬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씬마다 인물과 인물의 배치, 공간 속 인물의 위치, 산과 바다에서 벌어지는 죽음 장면은 대담하면서도 능숙하다. 거장 반열에 오른 감독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휴대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메시지를 입력하고 사진을 찍는 것은 기본이고, 대화 내용을 녹음하고, 녹음 파일을 전송하고, 위치를 추적하고, 낯선 단어를 검색하고, 노래를 주문하고, 통역 앱을 사용하고. 이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특징적이고 지배적인 소통 도구로서 휴대폰의 쓰임은 예상보다 훨씬 다양하다. 어쩌면 앞으로 인간의 역할은 휴대폰으로 대신할 수 없는 기능들을 지원하거나 보완하고, 상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 마음의 의미를 알아내려 골몰하는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감독은 인물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와 상황을 자주 투 샷으로 설정한다. 휴대폰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지만 그들 사이의 복잡 미묘함을 휴대폰 밖에 펼쳐놓았다고나 할까. 암벽에 매달린 채, 취조실에 마주 앉아, 말뜻을 곱씹으며, 범인을 쫓다가, 법고를 가운데 두고, 침대에 누워서. 그들은 친절하게 도와주고 사랑하거나, 냉정하게 의심하고 추적한다. 결국은 자신의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지키려다 파국을 맞는다.
오랜만에 영화관에 온 탓인지, 아니면 박찬욱 영화의 강렬함 때문인지 멍한 상태로 엔딩 크레딧을 보았다. 디테일한 장치나 에피소드 연결이 선명히 잡히지 않았다. 밀물이 몰아치는 해변에서 사라진 여자를 찾는 마지막 장면에 압도됐는지 모른다. 영화의 도입과 결말에서 인물들이 각각 산과 바다에서 죽음을 맞아 벌어지는 파장은 강렬했고, 한밤중 눈발이 흩날리는 산 위에서 죽은 자의 유골 가루를 뿌리는 장면은 아득했다.
3.
일주일 뒤, 엄마가 심장마사지를 받고 있다는 메시지가 왔다. 책 모임에 가려고 머리를 감고 나와 본 메시지였다. 몇 주 전부터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의식이 없어졌다고 한다. 곧이어 서울 사는 동생한테 전화가 오고, 소아과 의사인 조카도 전화를 했다. 춘천에서 부산으로 가는 교통편을 예약하고 가방을 쌌다. 며칠 뒤면 병간호하러 부산으로 갈 예정이었고 그전에 춘천에서 할 일들을 정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저녁 8시, 중환자실로 면회를 갔다. 임종을 앞두고 가족들에게 특별히 허용하는 면회였다. 깊은 잠이 든 것처럼 두 눈을 굳게 감은 엄마. 인공호흡기가 삽입되고 약물이 투입되는 관들이 복잡하게 연결됐지만, 엄마는 온전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현실적이지 않은 장소와 시간 앞에서 엄마를 보고 있었다.
올해 아흔이어도 전화기로 들리는 엄마의 말투나 정신은 늘 또렷했기에 금세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 예상하지 못했고, 큰언니 집에서 지내시니 걱정도 크지 않았다. 압박성 척추 골절로 입원 치료를 받으며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혈변을 멈추려고 와파린(항응고제) 복용을 중단한 상태에서 혈전이 폐동맥을 막았을 거라고 의사는 추정했다.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한 채 큰언니 집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럽게 엄마의 죽음을 맞아야 할 가족들. 멀리서 보면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죽음은 믿기지 않는 현실이다.
가족들이 각자 잠자리를 찾아가고 나는 비어있는 엄마의 침대에 누웠다. 어둠 속에서 조금씩 뒤척일 때마다 베개 속에서 메밀껍질 눌리는 소리가 났다. 눈을 감고 엄마의 지난날들을 그려보았다. 초등학교 때 강릉 노암동 집에서 엄마와 찍은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지나간 기억들이 흩어진 사진처럼 다가오고 지나갔다. 시간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엄마의 손길이 지나간 흔적들을 더듬었다. 왼손으로 환자용 침대의 손잡이를 잡아보고, 오른손으로 침대와 닿은 벽을 쓰다듬었다. 벽지에 입혀진 양감이 손끝에서 도드라졌다. 작은 알갱이들이 뭉치고 번져나간 무늬에 규칙은 없었다.
다음날 오후,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엄마의 시신을 모시고 강릉으로 돌아왔다. 아주 먼 길이었고 달빛이 밝았다. 부산에서 강릉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들을 스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