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동안 쌇인 눈이 녹기를 바라며 책세상에 빠졌었다.
읽었던 책도 다시 읽고 새로운 책도 읽느라 시간이 어찌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하고 마음이 아파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눈길은 책에 가있지만 마음은 자꾸 한데를 헤매는 것이다.
부모님 살아 생전에 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부모님에게 참으로 녹록치 않은 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또한 부모님의 유전자를 받았을 일이요 자주 독립적으로 당당하게 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해주시던
부모님 탓이기도 하다.
어쨋거나 한길호 선생의 "나는 어머니와 산다" 를 읽으며 울컥하긴 했다.
치매 초기의 어머니를 혼자된 아들이 수발들며 벌어지는 일상사를 조근조근하게 담아놓은 글을 읽으며 내 엄마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급박한 상황에는 분명히 짜증을 낼만도 하였을텐데 그렇지 않았던 엄마를 생각하면 자꾸 미안해진다는 말이다.
어렵고 힘들고 지쳤을 시기에도 자존심 강한 엄마는 대놓고 자식들에게 투정을 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으셨던 기억이고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는 것.
또한 말년에는 약국을 경영하던 시기에 강도가 들어와 그 강도와 맞싸우느라 엄마의 다큰 아들이 강도에게 칼로 위협을 받고
옆구리를 찔리기 직전 엄마는 그 아들을 대신하여 강도가 들고온 부엌칼을 맨손으로 잡아내어 단져버리는 와중에
두손 중에서도 특히 오른손을 난도질 당하는 사건을 겪으시면서도 마치 엄마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큰 아들이 괜찮은지만 챙기고 곧이어 혼절하여 병원으로 실려가셨다.
그 부엌 칼날에 조각조각 난도질 당한 손은 오래도록 엄마의 신경줄을 건드렸지만 그래도 아들을 지켜낸 뿌듯함이 더 크셨던 엄마.
그런데 우리는 사건 이후로 엄마에게 손이 괜찮아졋는지 진심으로 물어보지 못했다는 기억이 또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셨던 친정엄마를 모시고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정말이지 그토록 친정엄마가 소원하셨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별별 핑계와 더불어 계획하였다고 하더라도 예기치 않은 돌발상황이 생기거나
이런 저런 여건의 불발로 결국은 이 나라를 떠나 외국이라 불리는 남의 나라를 가보고 싶다던 소망을 이뤄드리지 못했다는 말이다.
김.옥.채...경주 김가로서 태생이 넉넉하여 유복하게 자란 친정엄마는
그 시절의 신여성으로 대변될 똑똑하기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야무진 여자였다.
한학자였던 아버지로 부터 대물림 된 공부는 물론이요 웬만한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남자라 할지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 배포를 지닌,
치마만 둘렀지 남자 보다 더한 판단력과 능력으로 대장부 기질을 지닌 신여성이었다.
돌아가실 때 잠깐 '섬망' 이라는 수술 후유증으로 일주일 치매를 걸렸을 때도 자신이 졸업한 여고 교가를 2절까지 멋지게 불러내시고
경성제국대에 다니시던 아버지와 연애할 때 부르던 일본 가요를 간드러지게 부르던 신여성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감추고 일반적인 아녀자로 살아내셧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놀랍기도 했더랬던...
허나 여자로서 똑똑하다는 것은 그 시절에는 불명예요 잘남으로 맞설 시대적 여건은 가당치 않을 일이었으니
그저 결혼해서 시어른들 모시고 아들 딸 낳아 잘사는 것이 예의범절이던 흐름을 따라서
부잣집이면서도 종갓집 이었던 전주이씨 맏며느리로 입성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맏며느리의 고단하고 버겁고 힘든 상황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일이요 두말 하면 잔소리겠다.
그리하여 가족이라 일컬어지던 사람들은 물론이자 일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된 그 많은 식솔을 거느리고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힘든 와중에도 오로지 자식들과 함께 누리는 소소한 일상을 행복이라 생각하셨다.
그런 엄마였기에 자신의 삶을 챙기기 보다는 자식의 앞날을 위한 날들로 엄마의 삶이 점철되었어도
흐뭇해 하셨으니 친정엄마의 희생은 보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겠다.
그렇다고 무지막지하게 자식을 끼고 살며 애면글면 하지는 않았으나 단지 자식이 가야 할 길을 위해서는 미리 비켜주시기도 하고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대처할 능력을 키워주시거나 누구보다 넒은 혜안과 선견지명으로
남보다 한 발 빠르게 자식들을 앞서 가게 만들어 주셨으니 그 또한 고맙고도 고마울 일이다.
그러면서도 자주 독립적이고도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랐으므로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식들을 키워 내셨음이나
소중한 일곱 자식들 중에 둘을 먼저 앞세운 엄마는 멍든 가슴으로 깊어진 한을 가슴에 품고서도 의연하게 나머지 삶을 헤쳐 나가셨지만
자식들이라는 우리는 제 코가 석자라 고단해보이는 자신들의 삶만 부여잡고 사느라 그 시절 그때는 잘 몰랐다.
그저 엄마는 모든 것을 감내하고 인내하며 참아내야만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나중에서야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고
또 누구나 엄마라면 의례히 당연하게 죄다 그렇게 살아내는 줄 알았다는 말이지만 살면서 겪어보니 친정엄마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이웃의 다른 엄마들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는 말도 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자식의 뒷전에서 한 자리 물러나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힌 채 살아냈음이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인간으로서, 한 여성으로서의 엄마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가당치 않을 삶이기도 하겠다는 말이다.
이 시점 21세기 즈음에 친정엄마가 내 나이였다면 누구보다도 여자로서의 삶을 당당하게 헤쳐나감은 물론
정치를 하셨어도 무색할 만큼의 현명함과 지혜를 지닌 분이었으니 아쉽다 는 말이다.
그리하여 친정엄마 대신 큰 딸을 그렇게 키우셨건만 큰 언니 역시 너무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을 살아낸 까닭에
39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으니 엄마의 대리만족을 시켜줄 정치인은 두 번 다시 우리 집 전주이씨 가문에서 나올 일은 없겠다.
그 친정엄마, 결국 드토롣 원하시던 해외여행 한 번 못해보고 지금으로 부터 16년 전인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던 그해
2000년 1월 28일에 자식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자식들과의 거리를 벌린 채 눈물의 이별 여행을 떠나셨다.
그날은 쥔장의 큰 딸이 외고를 입학하고 앞으로의 고교시절을 위한 학교 워크 삽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날이라
딸내미를 데리러 가던 날이어서 엄마의 곁을 하루 종일 지키지 못했던 애통한 날이기도 하다.
그 하루의 오전을 친정엄마 곁을 오롯이 지키다 문득 손톱 발톱을 깎아드리며 나갔다 올 것이라는 예고를 엄마에게 하였고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다녀오라는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잠깐의 외출로 딸아이를 맞으러 갔건만
그새를 참지 못하고 큰 아들 곁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신 담대한 여성이었던 내 엄마.
아무리 곁에서 수발을 들고 붙어살았어도 임종을 지키는 자식은 따로 있다고 했던 말이 현실이 되니
실감이 남은 물론 서럽기까지 하였다....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친정아버지 돌아가시고 딱 3년이 되는 날, 같은 날에 수명이 다하신 친정엄마는 예기치 않게
우리의 아버지이자 엄마의 남편을 먼저 보내고 세상사와 무관하게 살면서 간신히 간신히 억지로 세상 속에 존재하고 계셨다.
아니 세상 속을 거부하고 세상 밖의 울타리를 뱅뱅 돌며 자신의 수명을 거부하며 더 이상 살아내야 할 이유도 없을 만큼
남겨진 수명을 제지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겠다.
그 3년 동안 나는 친정엄마 때문에 분노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살아내야 한다며 다그치는 냉정한 딸로 돌변하여
때로는 엄마의 가슴 시리고 뻥뚫리도록 아픈 감정에 모르쇠로 일관하기도 하고 철판을 깐 얼굴로 엄마에게 악다구니를 하기도 했었다.
아마도 온전하게 빼앗긴 3년간의 내 생활에 대한 억울함 같은 것 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하니 어이가 없고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린 딸년의 행태가 미치도록 부끄럽다.
그 엄마,
워낙 남에게 민폐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의 친정엄마는 많은 것을 혼자 해결하고 스스로 처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분이셨다.
헌데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는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하여서 나는 그런 엄마가 이해되질 않았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에 세상에서 최고로 똑똑한 엄마라고 알고 있었던 그 엄마가 어느 날 세상 바깥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살림을 하지 않고 멍한 상태로 지내기 일쑤고 잡다한 일상조차 포기하시니 한심하기도 하고
기가 막혀도 한참 기가 막힐 일이 비일비재니 아이들 키우며 안 그래도 간신히 엄마네 살림까지 봐주면서
두 집 살림을 하던 나는 모즌 것을 접어두고 아예 날이면 날마다 친정으로 출근을 해야 했다는 것.
끼니는커녕 손 하나 까딱하기 싫다는 엄마가 굶을까 걱정이고 몸을 안 움직이고 누워만 계시니 그것도 고민이고
하나에서 열까지 이제는 막내딸의 손을 빌려 생활을 하시려 하니 정말 내가 죽을 일이다 싶게 원망스러웠다.
하늘 아래 둘도 없을 만큼 똑똑한 여자가 왜 저리 되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던 엄마의 세상 밖 살이....
피눈물이 나도록 슬퍼서 더욱 화가 났고 속상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살아계신 동안에는 틈만 나면 날이면 날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한날에 돌아가시기를 청하시더니 결국은 그 소원을 이루셨다.
말하자면 결혼을 하지 아니한 큰 아들 대신에 자청하여 제사를 지내 줄 막내딸을 위해 배려를 하셨다는 말이다.
하긴 친정 부모님 살아생전에 워낙 막내 사위가 아들만큼이나 아니 아들보다도 더 장인장모님을 챙겼으니
그 사랑이 오죽했겠는가 만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처갓집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만만치 않을 일이요
본가의 시선 또한 무시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당당하게 자청한 막내 사위 덕분에
친정엄마는 대신 장인어른 제사를 지내오는 것을 좋아하시기도 하고 미안해 하셨다.
그래서 매번 “내가 자네에게 할 말이 없네...빚이 많아. 고맙네” 라고 하시면 번번이 막내딸로부터
“그게 뭐 대수야. 어떻다고 그래.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이나 상황이 되면 하는 것이지..유세 떨 일도 아니구만“
이라는 지청구 듣기 일쑤요 미안해 하는 마음에 못을 박고 오히려 팩하고 토라져 성질부리는 꼴을 보아야 했으니
아마도 친정엄마는 속내와 다르게 말을 하는 딸을 보면서 더욱 더 미안하기도 하셨을 것 같다.
그러나 나와 내 남편은 정말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던 것은 사실이고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다른 상황이 되긴 했다.
아뭏든 막내사위는 장인어른이 돌아가시자마자 약속대로 장인의 제사를 챙기기 시작했고 막내 딸인 나 역시
남편의 마음에 고마움을 표하면서 흔쾌히 제사를 지냈음이니 이를 지켜 본 친정엄마의 마음 한 편이 또 편편치는 않으셨을 듯도 하다.
어떤 이유든지 간에 친정엄마는 자신이 세상을 뜨고 나서의 일이 걱정되었음은 물론이었을테요
평상시에도 늘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으로 전전긍긍하시더니만 결국은 자신의 죽음마저도 아버지와 한 날로 정하여 돌아가시게 되었을 것이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막내딸인 나는 친정엄마의 배려로 동시다발 한날의 기일을 챙기며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내리 사랑을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직은 살아가는 동안에는 막내딸인 나의 책임이 될 일이지만 다음 세대를 넘어가면
아무래도 어려울 일이 되겠다 싶었지만 이미 상황은 변했다.
그 엄마...음식 솜씨 좋고 통큰 살림에는 혀를 내두를 만큼이지만 젊은 시절엔 시집살이 하느라고 힘들었고
중년의 나이에는 자식들 키우느라 골몰하셨으며 노년에는 세상발이 약하신 아버지 대신에 삶을 나눠지느라 고단하셨다.
그중에서도 큰딸에 대한 기대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이었으나 그 언니는 일찌감치 제 몸을 축내고 세상과 결별을 하였으니
그 후로는 얌전한 언니들에 비해 제 목소리 크게 내며 친정엄마가 일러 준대로 당당하게 제 삶을 거머쥔 채로
타석에 들어서게 된 막내딸에 대한 기대치가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디를 가든지 간에 막내딸과 동행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막내사위 앞장 세워 나들이 하는 것을 좋아하셨으나
그 즐거움을 천배 만배로 늘려드리지는 못했으니 그 또한 아쉬움이 더욱 크다.
그래도 간간이 국내여행을 함께 다닌 기억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행만큼은 언니와 남동생이 두루두루 모시고 다닐 기회가 많았던 터라 나름 재미를 누렸을 테지만
그에 비하면 시댁 일에는 열성이면서 제 엄마와 나눌 시간은 많지 않았던 그 시절에 친정엄마는 불편한 마음이었겠지만 늘 이해하셨고
그런 막내딸과 함께 한 여행은 손에 꼽을 정도요 새발의 피 정도이니 참으로 매몰찬 딸 인 셈이다.
암튼 그중에서도 일찌감치 세상 버린 언니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친정식구들이 그들의 식솔까지 챙겨
몽땅 경북 영덕 해안가의 시아버님 별장을 근거지로 하여 그 일대를 여행 다니던 기억은
가족 모두가 함께 한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으니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되겠다.
사실 사돈끼리는 그저 데면데면을 겨우 면한 각자 양반의 체통을 지키는 정도였으나
기꺼이 시아버님께서 영덕 해변에 마련하신 조촐한 한옥을 빌려주셨음으로
간만에 친정식구 모두가 참석으로 대 가족이 이동하여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친정엄마와 함께 한 최대치의 여행 기억이긴 하다.
와중에
놀자고 떠난 여행에서도 부엌살림의 끈을 놓지 못하고 매일 끼니 해결을 위해 먹을거리 담당을 자청한 친정엄마와 나는
친정아버지께 아이들을 맡기고 엄마의 막내 사위까지 합세하여 함께 영덕 시장으로 해산물을 사러 다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뭇하고 즐거웠던 기억으로 떠오른다.
장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끼니 재료를 구하자니 서울 말씨 덕분에 흥정하기가 녹록치 않았다.
그리하여 아무 것도 모른 채 비싸게 필요한 것을 구입하여 돌아서 나오려는데
서울 사람이라고 된통 바가지 씌움을 당하고도 모르고 지나갈 일을 사위가 나서서 해결해 주니
"김서방...자네, 정말 센스 있구먼...고맙네" 특별히 누구에게 애정도를 나타내지않는 무뚝뚝한 친정엄마였음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담아 대견한 듯 바라보시던 모습과 밤새도록 영덕 대게와 씨름을 하며 내장은 물론 껍데기에 밥까지 말아 먹어치우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따스하고도 포근한 기억이다.
그러나 나 역시 느물거리지도 못하고 사근사근한 딸내미가 되질 못하여 장을 보러 다니는 내내
맛있어 보이고 뭔가 색다르게 보이면서도 푸짐한 길거리 표 음식에 눈길 한 번 주지않고 서둘러 돌아와 버렸으니
그때 엄마는 혹시 뭔가 드시고 싶은 것은 없으셨는지 새삼스럽게 궁금한 오늘이다.
또한 일이라고는 해 본적 없는 바이올리니스트 며느리에게는 손에 물을 대지 않게 하고 늘 노심초사로 걱정을 늘이시면서
"웬만하면 막내야 네가 해라.." 종용하시고 “알았어...무수리꽈인 내가 해야지“ 라며 척척 팔을 걷어 부치는 딸내미를 바라보며
흐뭇해하시며 웃던 모습을 기억하자니 어쩐지 가슴이 뻐근하다.
그렇게 대진 해수욕장 해변가 모래밭에 앉아서 세대를 건너 뛴 손자손녀들을 바라보며
언제 또 이런 날을 맛볼까 싶은 표정으로 회한에 찬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호탕하게 마음껏 웃으셨던 일 등은
여전히 내 가슴에 한 폭의 그림처럼 남겨져 있다....눈물이 날 정도로,
과연 시댁 식구들과의 여행이었다면 그렇게 아무런 부담 없이 불편항 마음 없이 놀아낼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언감생심,
그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겠다.
이후로 장소를 옮겨 백암 온천에서의 문 열리지 않는 황토방 난입 사건과 수영장 물에 빠진 다 큰 외손자 모습에 놀라 기절초풍하실 뻔 한 일.
이른 아침부터 그 많은 가족들의 성찬을 준비하시면서도 화도 한 번 내지 않고 자청하여 손수 요리를 만들어 주시다가도
이왕이면 집 나온 김에 음식점을 옮겨가며 다양한 맛을 즐겨보자는 자식들의 요구에는 흔쾌히 따라 주시던 일...
결국엔 식탐이 승리하여 나머지 끼니는 대세였던 외식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그래도 다들 행복해 했던 그 여행 이후로
우리는 친정 식구가 모두 함께 떠나는 일을 이뤄내지 못했다.
살다보면 각자의 역할과 여건이 간발의 차이로 삐그덕 거리고 자기들만의 삶으로 바쁜 나머지
웬만해서는 한 날 한 시에 어딜 가게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요 일일이 시간을 맞춰 다니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 이니
여행이라고 이름 짓기보다는 그저 되는대로 떠난다는 컨셉이 주를 이뤘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어찌됐던 국내 여행도 그러했건만 친정 엄마와의 국외여행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였고
서로가 바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핑계를 대며 미루다 보니
결국엔 친정엄마는 해외여행을 해보겠다는 희망사항을 이루지 못한 채 불발로 세상을 하직하시고
하늘 여행을 떠나시게 되었다 는 말이다.
오늘, 문득 그 엄마가 더욱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