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롤로 보로메오 성인은 1538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아로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쌓는 데 힘썼다.
1560년 외삼촌인 비오 4세 교황께서 평신도인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시자,
뒤늦게 성직자 교육을 받고 1563년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밀라노의 대주교로서 교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584년에 선종한 그를 1610년 바오로 5세 교황께서 시성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을 강조하신다.
그러한 선택은 지상에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마지막 날에는 보답받게 된다
(루카 14,12-14)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보답을 받지 않아야 행복할 것이라 하십니다.
무슨 말씀인지요?
그들을 대신해 주님께서 보답하신다는 암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갚아 주시면 풍요로움이 넘칩니다.
부담스럽지도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초대하며 도울 것인지요?
누구나 도움이란 말을 들으면 물질을 먼저 연상합니다.
돈이 있어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이 원하는 것도 돈과 물질만은 아닙니다.
함께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물질의 부족만이 가난은 아닙니다.
마음의 가난, 감정의 빈곤, 지식의 부족도 가난입니다.
그런 이들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돕는 행위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초대하는 행위입니다.
조금 낫다고, 조금 높은 위치에 있다고 쉽게 무시하려 듭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무시하면 당하는 사람은 금방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존심을 상하게 해선 안 됩니다.
그것이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사는 지혜입니다.
그들은 보답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보답하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내면세계를 풍요롭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영혼이 풍요로우면 가만있어도 행복한 느낌이 듭니다.
은총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에게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잔치에 사람을 초대하여 식사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병들고 소외된 이들은 현세에서는 호의나 은혜를 갚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현세에서 보답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대신
세상 종말 때에 의인들에게 갚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선우경식 선생은 무료 진료 병원인 ‘요셉 의원’을 설립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환자들을 돌보다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평소 그의 삶을 보고 그를
‘노숙자와 행려자들의 대부’(代父)라고 불렀습니다.
언젠가 기자가 그에게 “왜 그렇게 힘들게
노숙자와 행려자들을 보살핍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은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없는 이들이기에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짧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진정으로 노숙자와 행려자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하는 선행은 참된 선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훗날 자녀에게서 보답을 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이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는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감사드리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