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서 얻어낸 대답
앞서 언급(言及)한 것처럼 포로송환 방법 타결(捕虜送還方法妥結)은 사실상 휴전(休戰)을 예고(豫告)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휴전이후의 한국 방위(防衛)에 관해서는 말만 무성(無聲)했지 확실한 보장이 없는 상태여서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불안감(不安感)은 최고조(最高潮)에 이르렀습니다.
그 만큼 당시 대한민국은 가진 것은 없었고 부족(不足)한 것만 많았던 약소국(弱小國)이었습니다.
결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안전한 미래(未來)를 위한 위험한 줄타기를 벌어야 했습니다.
↑휴전 반대는 사실 휴전 이후의 안전 보장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송환 협정이 조인(調印)되기 직전(直前)인 1953년 6월 6일, 헌병 총사령관(憲兵總司令官) 원용덕(元容德, 1908년 2월 29일~1968년 2월 4일) 중장(中將)을 은밀(隱密)히 불러 반공포로 석방 방안(釋放方案)을 모색(摸索)하도록 지시(指示)했습니다.
지시를 받은 원용덕은 육군 헌병사령관 석주암(石主岩, 1916년 6월 9일~1999년 7월 19일) 준장(准將) 등과 협의(協議)를 거쳐 '포로수용소(捕虜收容所)의 경비(警備)를 담당(擔當)하고 있는 육군 헌병대(陸軍憲兵隊)가 기습적(奇襲的)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한 후 이를 사전(事前)에 약속(約束)된 인근(隣近) 민가(民家)로 도주(逃走)를 유도(誘導)하여 안전(安全)하게 보호(保護)한다'는 작전(作戰)을 수립(樹立)하였습니다.
↑원용덕은 훗날 불법적인 방법으로 자유당 정권을 옹호한 정치 군인이었지만 반공포로 석방 실행을 기획하고 총 지휘하였던 인물입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捕虜收容所)에 밀사(密使)가 파견(派遣)되었고, 6월 18일 00시를 기해서 동시(同時)에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명령에 따라 수용소를 경비하는 헌병대는 미군(美軍)을 따돌리고 27,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釋放)하는데 성공(成功)하고 그 날 06시에 중앙방송(中央放送)을 통해 '반공포로의 석방에 관한 담화문(談話文)'을 발표(發表)함으로써 거사(擧事)를 공식화(公式化)했습니다.
불안한 휴전(休戰)을 반대(反對)하던 국민(國民)들은 우리의 의지(意志)를 만천하(滿天下)에 보여주었다고 환호(喚呼)하였습니다.
↑1954년 1월 20일 벌어진 반공포로 환영대회(歡迎大會)의 현수막(懸垂幕)
반면 북한과 중국은 경악(驚愕)하였습니다.
원하는대로 포로송환이 매듭지어진 것으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던 그들은 전혀 예상(豫想)하지 사태(事態)에 몹시 당황(唐慌)하였습니다.
최소한 10만이상의 병력(兵力)을 새롭게 보충(補充)하여 전력(戰力)을 강화(强化)하고 전후(戰後) 복구사업(復舊事業)에도 투입(投入)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던 그들은 이 상태에서 포로송환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게 되었습니다.
↑휴전 회담의 형식상 공산군 대표인 남일(南日, 1913년 6월 5일~1976년 3월 7일), 권위를 높이기 위해 호화롭게 차려입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놀랐던 것은 이승만의 예상대로 휴전을 목전에 두고 있던 미국이었습니다.
공산군 측과 지난 2년간 팽팽한 줄다리기를 거듭하여 간신히 일을 끝낸 미국은 휴전 협정에 사인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였는데, 순식간 일이 틀어져 전쟁이 더욱 장기화(長期化) 될까봐 걱정이 커졌고,
당연히 한국 정부에게 엄청난 항의(抗議)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급변(急變) 된 사태(事態)의 결과(缺課)는 이승만의 의도(意圖)대로 흘러갔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반공포로들을 순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먼저 미국, 중국 모두가 휴전(休戰)하겠다는 의지(意志)가 너무 강했습니다.
협상장(協商場)에서 공산군(共産軍) 측 대표단(代表團)은 반공포로석방(反共捕虜釋放)에 대해 엄청나게 항의(抗議) 하였지만, 휴전 자체(自體)를 깨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만큼 그들도 피곤(疲困)해 있던 상태였고 배후(背後)에서 이를 조종(操縱)한 소련(蘇聯)의 의지도 컸습니다. 미국은 로버트슨(Walter.s. Robertson, 1893~1970) 국무차관보(國務次官補)를 특사(特使)로 파견하여 휴전직후 최대한 빠른 시일(時日) 내에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을 체결(締結)하겠다는 의사(意思)를 표(表)하며 이승만을 달랬습니다.
↑1953년 경무대에서 한 미 상호방위조약 조인식. 이 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등 벼랑 끝 전술로 얻어낸 외교결과이다. 외무부 장관 변영태. 덜레스 미국무장관.
휴전을 공약(公約)으로 내세웠던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년 10월 14일~1969년 3월 28일)는 약소국(弱小國)의 대통령(大統領)이었던 이승만의 노련함에 이끌려 한국 정부가 휴전을 막지 않겠다는 약속(約束)을 받아내는 대신 예상보다 빨리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의 체결(締結)을 약속하였습니다.
애초 아이젠하워,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년 2월 25일~1959년 5월 24일) 국무장관(國務長官), 콜린스(Joseph "Lightning Joe" Lawton Collins, 1896년 5월 1일~1987년 9월 12일) 육군참모총장(陸軍參謀總長) 등이 한국에 대한 방위조약(防衛條約)을 반대(反對)하였을 만큼 미국은 부정적(否定的)인 견해(見解)가 컸었는데,
반공포로석방(反共捕虜釋放)은 이를 일거(一擧)에 뒤엎었던 것이었고 이는 현재 한미동맹(韓美同盟)의 근간(近刊)이 되고 있습니다.
↑반공포로석방은 치밀하게 계산된 쾌거였습니다
사실 반공포로석방은 즉흥적(卽興的)으로 나온 구상(構想)이 아니라 이처럼 치밀(緻密)하게 국제 정세(國際政勢)를 제단(梯團)한 후 그 방법론(方法論)을 찾아 이룬 쾌거(快擧)였습니다.
이를 이끈 이승만은 1951년 휴전협상 개시이후 통일(統一)이 군사적(軍事的)으로 불가(不可)함을 일찌감치 깨닫고 그 이후를 생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반공포로석방의 구체적 실행 내용(具體的實行內用)과 관련(關聯)하여 그 동안 막연(漠然)하게 잘못 알고 있던 부분(部分)이 있습니다.
바로 거제포로수용소(巨濟捕虜收容所, Geoje-POW Camp)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곳에서 탈출은 없었다
요즘 많은 이들이 온라인 백과사전(百科事典)인 위키피디아(Wikipedia)를 애용(愛用)하지만 사실 곳곳에 오류(誤謬)가 많은 편입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이하 거제도수용소)와 관련하여도 일부 오해(誤解)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소개(紹介)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의 일방적(一方的)인 석방(釋放)으로 27,389명이 탈출(脫出)하였고, 친공 포로(親共捕虜)의 소환(召喚)과 등으로 존재(存在)의 이유가 없어져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조인(休戰協定調印)으로 인해 폐쇄(閉鎖)되었다. (2014년 6월 24일 검색 기준)
마치 거제도수용소에서 27,000여명의 반공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수용소를 탈출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지(素地)가 많습니다.
↑최대 14만 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던 거제도수용소
다음은 요직(要職)을 두루 거치고 퇴역(退役)한 모 4성 장군이 최근 집필(執筆)한 한국전쟁(韓國戰爭) 관련(關聯) 책자(冊子)에 수록(收錄) 된 내용(內用)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헌병사령관(元容德憲兵司令官)을 불러서 거제도 포로수용소(巨濟島捕虜收容所)에 수용(收容)한 반공포로(反共捕虜)를 모두 석방(釋放)하라고 지시(指示)한다. 6월 18일 밤 수용소의 문이 열리고, 반공포로 대부분이 자유(自由)의 몸이 되었다.
이처럼 최대 14만 명의 포로를 동시에 수용하였던 거제도수용소에서 많은 반공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脫出)하였고, 드라마나 각종 언론(言論)의 보도 자료(報道資料)에서도 그렇게 묘사(妙思)되고 있습니다.
↑거제도수용소에 반공포로가 석방된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1953년 6월 18일 0시에 전격적(電擊的)인 반공포로석방이 이루어졌을 때,
정작 거제도수용소에서는 단 한명도 석방이 되지 않았습니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엄연한 사실(事實)입니다.
다음은 1996년 국책 기관(國策機關)인 국방군사연구소(國防軍史硏究所)에서 발간(發刊)한『한국전쟁의 포로』에 수록된 당시 수용소별 반공포로 석방 현황(現況)입니다.
이처럼 반공포로석방은 위에 언급한 8개 포로수용소에서만 있었습니다.
위 수용소들에서 탈출한 총 27,389명이 공식적(公式的)인 전체 탈출 인원(全體脫出人員)입니다.
그렇다면 수용소가 들어서자마자 제1수용소(收容所)로 지정(指定)되었고 70% 이상의 공산군 포로(共産軍捕虜)가 항상 집결(集結)하고 있었을 만큼,
흔히 한국전쟁 당시에 포로수용소의 대명사(代名詞)였던 거제도수용소에서 막상 단 한 명의 반공포로 석방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理解)하여야 할까요?
↑거제도수용소에서 밥을 짓고 있는 모습
그것을 이해(理解)하려면 거제도수용소에서 벌어진 잔혹사(殘酷史)에 대해 먼저 알아 볼 필요(必要)가 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이 성공(成功)하고 아군(我軍)이 북진(北進)을 개시(開始)하면서 체포(逮捕)되거나 투항(投降)하는 공산군 포로들이 하급수적(下級數的)으로 늘어나기 시작(始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50년 11월 최후방(最後方)인 거제도에 수용소를 만들기로 결정(決定)되었고,
1951년 6월말부터 포로들이 이송수감(移送收監)됨으로써 본격적(本格的)인 거제도수용소의 역사(歷史)가 막(幕)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개설 초기의 거제도수용소 모습, 포로를 수송한 LST가 해안가에 정박해 있습니다
그런데 워낙 규모(規模)가 크고, 통제(統制)가 안 되다보니 반공포로(反共捕虜)들에 대한 친공포로(親共捕虜)들의 테러(terror)가 공공연히 자행(自行)될 정도로 이념갈등(理念葛藤)의 장(場)으로 변하였고,
포로수용소장(捕虜收容所長)이 포로들에게 납치(拉致) 감금(監禁) 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事態)까지 발생(發生)할 정도로 상황(狀況)이 악화(惡化)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포로들을 강제 진압(强制鎭壓)한 후,
반공포로들을 분리(分離)시켰고 이후 휴전 직후(休戰直後)가 되었을 때는 북송(北送)을 원하는 자들만이 주로 거제도수용소에 몰려 있었습니다.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반공포로들. 그런데 정작 거사 당시에 가장 규모가 컸던 거제도수용소에서는 단 한 명의 포로도 탈출하지 않았다.
/사진=전쟁기념관
따라서 이곳의 경비(警備)를 책임(責任)진 미군의 감시망(監視網)도 엄중(嚴重)하고 만일 탈출(脫出)하여도 섬 밖으로 나가기 힘든 구조(構造)였지만,
그보다 우리 정부(政府)도 굳이 위험(危險)을 무릅쓰고 석방(釋放)시킬만한 포로(捕虜)들이 거제도 수용소(巨濟島收容所)에 있다고 판단(判斷)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들 중 북송(北送)을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중립국 감시위원회 심사(中立國監視委員會審査)를 받는 마지막 길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가장 컸던 포로수용소였지만 역사적(歷史的)인 반공포로석방에서 거제도수용소는 빠진 것이었습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이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 북한의 김일성 등 공산정권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그려 전시하고 있다.
그해 5월 모든 포로의 일괄 송환을 내세운 공산포로들이 자유송환을 원하는 반공포로들을 살해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폭동을 진압하는 모습
그렇지만 석방(釋放)이 국군 경비대(國軍警備隊)의 도움이 있었다고 쉽게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탈출 과정(脫出科程) 중에 미군 경비병(警備兵)들의 사격(射擊)으로 인하여 모두 61명의 고귀(高貴)한 인명(人名)이 자유(自由)를 눈앞에 두고 생(生)을 마감(磨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무려 47명이 부평(富平)에 있던 제10수용소(收容所)에서 한군데서 발생(發生)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부평의 도심(都心) 한가운데서 있었던 비극(悲劇)의 역사(役事)를 알고 있는 이들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다음은 그 비극의 현장(現場)에서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