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동 글 ]
※ 마지막 인사
아픈 친구 때문에 오랫동안 병원에서 지낸 적이 있다. 친구 바로 옆 침대에는 80세가 넘으신 할아버지가 누워계셨다. 할아버지의 병은 회복할 수 없는 중병이었다.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아픈 할아버지를 돌봐주고 계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두 분 다 산골 초등학교의 선생님을 지내셨다고 했다. 아침 저녁으로 할아버지의 가족들이 다녀갔다.
“니 아버지... 이제는 못 일어나신다.”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아들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아버지 다시 일어나실 거예요.”
“아니다. 지난번하고는 많이 달라. 정신까지 놓으시고 이젠 화장실에 걸음도 못하셔. 조금 전에도 의사가 와서 호스로 오줌 빼주고 갔다.”
그날 저녁 할아버지의 막내딸이 병실로 찾아왔다. 지방에서 올라온 막내딸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한참 동안 소리내어 울었다. 할아버지는 눈만 깜박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막내딸은 3일 동안 할머니와 함께 병실에서 잠을 잤다.
“아빠, 나 이제 가봐야 하거든... 아빠하고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김 서방 출근도 시켜야 하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야 해. 아빠, 다시 일어날 수 있지...?”
그녀는 울먹이며 늙은 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빠, 옛날 일 기억나? 아빠하고 나하고, 매일매일 들길을 걸어서 학교에 갔었잖아....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어. 여름 장마 때면, 아이들은 잔뜩 분 개울물 앞에서 늘 아빠를 기다렸어. 감자처럼 작은 아이들을 아빠는 한 명씩 한 명씩 가슴에 안아 개울물을 건너주었고... 아빠는 사랑이 많은 선생님이었으니까. 아빠... 아빠가 학교에서 숙직하던 날 기억나지?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눈밭을 걸어서 아빠에게 갔던 날이 지금도 내 가슴엔 선연한데.... 내 발바닥이 꽁꽁 얼었다고 하면서 아빠의 따뜻한 배 안으로 내 차가운 발을 집어넣었잖아. 얼마나 차가웠을까...”
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아버지 가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딸의 울음소리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빠, 나 이제 가야 돼. 꼭 다시 일어나야 돼. 아빠... 꼭.”
눈물을 닦던 할머니가 그녀의 손목을 끌었다.
“어여 가거라. 어여... 네 아버지 다 알아들으셨을 거야.”
“미안해, 엄마.”
“난 괜찮다. 혹여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할게. 지금 출발해도 집에 도착하면 해 떨어지겠다. 어서 서둘러라.”
할머니는 종종걸음으로 막내딸을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할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할머니 얼굴은 이전보다 슬퍼 보였다. 할머니는 아프게 한 숨을 내쉬며 내게 말했다.
“조금 전에 나간 아이가 우리 막내딸이라우. 늦둥이로 태어나 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지요. 응석받이로 자라 지금도 아빠 아빠 하잖아요. 딱해 죽겠어요. 저 멀리 여수에 사는데, 자식들 중에 형편이 제일로 어려워... 이제, 지 아버지 눈이나 감으면 와야지 뭐... 아버지를 끔찍이도 좋아했는데, 아버지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얼마나 폭폭했을까... 참으로 덧없는 게 인생이지요...”
그때 바로 옆에서 할아버지의 신음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자... 임자...”
할아버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으켜달라고 할머니에게 손짓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침대에서 일으켜주었다. 할아버지는 창가 쪽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나와 할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할아버지는 한걸음 한걸음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할아버지는 힘겹게 숨을 고르며 유심히 창밖을 살폈다. 창문 밖, 멀지 않은 곳에 병원 정문이 보였다. 정문 쪽으로 걸어가는 막내딸의 뒷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오른팔을 힘겹게 들었다. 할아버지는 딸의 뒷모습을 어루만지듯 유리창을 쓰다듬고 계셨다. 딸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하는 할아버지의 눈가로 눈물이 가만가만 흘러내렸다.
[출처] 이철환, 『반성문』 pp.104~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