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건축설계사를 인터뷰하고 나오던 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인생에 대해 불평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적어도 내 분야의 연구는 내가 구상한 대로 드러내 보일 수는 있다. 물론 그 연구주제의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무척 힘들지만, 그 결과가 나타난다. 그런데 설계란 건축주가 짓지 않으면 태어나지 못하는 작품이었다. 또한 짓는다 하더라도 설계대로 한다는 법도 없다. 게다가 기술적인 면이 설계자의 디자인을 따라 주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작품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태어난 건축물은 분명 당시 사회의 문화적 결집체이며 공감을 일으킨 합의의 산물이다.
1960, 70년대 교회 건물의 대부 ‘알빈 신부’
성당은 ‘성스러운 하느님의 집’만이 아니라 만남의 장소이다. 신자가 하느님을 만나고, 교우들끼리 만나고, 또 교회와 사회가 마주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성당은 신자들이 하느님 면전에서 갖게 되는 기쁨, 고통, 경제적 여건 등 모든 인간적 관심사를 반영해 왔다. 영남지역을 다니다 보면 외관은 뭉툭하나 내부로 들어가면 밝은 빛이 집중되는 성당들이 있다. 대부분은 베네딕도수도회 알빈 신부의 작품이다. 그는 1958년부터 20년 동안 한국에 122개소의 성당과 공소를 포함, 무려 185개소에 달하는 교회건물을 설계했다.
뮌헨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알빈신부는 사제서품 1년 후인 1937년 한국인이 많이 살았던 만주 연길교구로 파견돼 선교사로 일했다. 거기서 그는 당시 한국인 신자들을 위해 한옥모양의 상여마차를 만들었고, 연길성당 등 성당도 설계했다. 그는 광복 이듬해 공산당에 체포돼 수용소 생활을 하다 1949년 독일로 추방됐다. 이후 독일에서 교회건축을 공부했다. 그가 독일에서 설계한 김천평화동성당과 점촌성당 등이 호평을 받자 1961년 한국으로 왔다.
알빈 신부는 성당에서 전례공간의 본질적 요소에 충실했다. 그리고 열린 교회, 사람들을 압도하지 않은 교회, 도시환경과 대지에 순응하는 건물을 설계하되 건축주의 경제력을 고려해가며 설계했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일어난 전례운동의 지향과 맞아떨어졌다. 그리하여 부산 해운대성당, 청주 보은성당, 대구 복자성당, 서울 구로3동성당, 전주 복자성당 및 수원 장호원성당 등 전국에 그가 설계한 건물들이 분포되었다.
건축이란 설계자의 마음을 말하고, 건축주의 꿈을 품으며, 보는 이의 희망을 담는다. 그래서 오래가는 건물일수록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옛 성당처럼 화재를 만났거나, 전주의 덕진성당, 대구의 효목성당처럼 건물의 증개축은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인천 산곡동, 대구의 봉덕동성당 등과 같이 새 건물의 신축으로 사라진 작품들도 적지 않다. 특히 알빈 신부가 벽화를 그린 건물들도 헐리고 있다. 그는 단순한 그의 건축물에서 내부 벽화로서 따뜻함을 보완하려고 했다. 벽화가 있는 건물은 그가 더 심혈을 기울인 곳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베네딕도수녀회 옛 신암동 본원은 파티마병원 증축으로 없어졌다. 왜관수도원 성당에도 새 건물이 섰다.
매번 짓고 다시 정리했던 성당
한국엔 천주교가 전래된지 100여년 동안 정식 교회건물이 없었다. 박해시대에는 고정적인 전례공간을 지니기도 어려웠다. 9월에 판공성사가 시작되면 회장들이 모임이 있게 될 집을 결정하고 신자들에게 날짜를 알려주었다. 신자들은 살던 집 내부를 치장하여 전례공간을 만들었다. 구석구석 청소하고, 벽지도 새로 바르고 벽에 장막이나 휘장을 치고 예수상이나 수난상이 그려진 족자를 걸어 놓았다. 한옥 벽장이 미사 제대로 이용되기도 했다. 한번 쓰고 사라질 제대였지만 신자들은 설레며 정성껏 준비했다.
신앙의 자유가 온 뒤에도 한동안 주교는 전북 용안군 안대동 공소, 경북 의성의 쌍호공소 등에서처럼 견진성사 예절을 마당에서 하곤 했다. 거제도 저산공소를 방문한 드망즈 주교는 “공소 마당에서 많은 외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다에서 해가 떠오를 때 주교가 목장을 짚고 주교관을 쓰고 한 예절은 그림과 같았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소방의 천장이 주교관을 쓰고 있기에는 너무 낮아서 밖에서 행해진 의식이었다. 이러한 때에 신자들은 민망하고 조급해진다.
현재 영남대학교에는 캠퍼스 미사를 정착시키려는 젊은 사제가 오고 있다. 매주 가톨릭 학생회 행사용 장소를 빌리면서, 매번 제대를 차리고 허물어서 다른 용도로 쓰던 박해기 신자들을 생각한다. 신자들이 선교사에게 안타까워했던 마음도 그려진다. 지어진 모든 성당에 감사하게 된다. 이와 함께 사라진 교회 건물들도 신앙을 매개로 한 물질적 협력과 정신적 유대감의 산물이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싶다. 성당은 과거, 현재, 미래신자의 대를 잇는 협력이며 혜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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