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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4: 30. 바람을 보고 31. 저를 붙잡으시며 32. 배에 함께 오르매
마 14: 30. 바람을 보고 -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
그러나 베드로는 얼마 걷지 못하여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갔다.
그리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다.
1] 바람을 보고
그러나 베드로는 얼마 걷지 못하여 ‘거센’(전통본문)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갔다.
충동적인 성격의 베드로가 예수에게로 나아가는 동안 관심의 대상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믿음'의 고갈(枯渴)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었지만 폭풍의 위험에도 침착히 인내할 수 있을 만큼의 더 큰 믿음이 없었다는, 즉 믿음의 수준의 문제이다.
그는 예수(앞)만 바라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람(밑)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삼킬 듯이 달려드는 풍랑에 대해 두려워하게 되었다. 정녕 온전한 믿음의 눈은 결코 두 개의 초점 (예수와 세상의 풍파)을 가질 수 없다.
2]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베드로는 예수와 그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앙하는 믿음의 빛을 잃었을 때, 그 즉시 예수의 보호권에서 벗어나 중력에 의해 빠져드는 자연 현상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신앙 세계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물 위(완전한 믿음)가 아니면 물 아래(완전한 의심), 둘 중 하나에만 머무르는 것이다.
3]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퀴리에 소손 메) 하니
'구원하소서'의 뜻인 '소손'은 '구원하다'란 의미인 '소조'(*)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그때의 상황이 매우 긴박했음을 시사해준다.
물론 본문에서의 이 말은 물에 빠지게 된 베드로 자신의 몸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종종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영혼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이 그 죄악의 구덩이에서 헤어 나오기를 원할 때 부르짖는 소리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한계를 깨닫고 절망 가운데서 비로소 주님께 돌아설 때 하는 첫 마디에 해당한다.
마 14: 31. 저를 붙잡으시며 -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
주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주시며 그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세상의 어려운 현실만 보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낙망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주님의 신속한 구원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물에 빠지는 그를 건지기 위해서는 단 한 마디의 명령으로 충분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친히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붙잡으셨다.
이 말은 특별히 주의 '붙잡으시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거친 죄악의 세상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즉시 붙잡아 주시는 주 손길에 의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존, 유시될 수 있을 뿐이다.
2] 이르시되, 믿음이 적은 자(*, 올리고피스토이)여.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 모두 다섯 번 나온다.
* 마 6: 30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마 8: 26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 마 16: 8 -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 눅 12: 28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항상 제자들에게 말할 때 사용되었다. 이는 가장 믿음이 깊어야 할 그들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예수로 하여금 그들을 책망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태는 막 4: 30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표현을 '믿음이 적은 자'라고 말하였다. 이는 예수의 제자가 된 사실 자체가 어느 정도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충동적이나마 그리스도와 그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소유했었다(28절).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원했던 것은 '오라'하신 말씀을 끝까지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었다.
예수의 책망은 믿음의 양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도 예수에 대한 영속적 신앙을 간직하는 믿음의 질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다.
3] 왜 의심하였느냐(*, 에이스 티 에디스타사스) 하시고
'왜'(*)라는 말은 히브리어 '레마'(*)에 상당하는 말로 일반적인 표현인 '디아 티'(*)와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디아 티'는 '무엇 때문에'(because of what)라는 의미의 '왜'이며, '에이스 티'(*)는 '무엇을 위하며'(in order to wher)라는 의미의 '왜'이다.
'에이스 티'는 '디아 티'의 물음에 비해 보다 호의적인 의도에서의 물음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왜(because of what) 의심하였는지 그 의심의 원인을 알고자 하신 것이 아니다. '무슨 목적으로', 즉 '무엇을 위하여'(to what end) 의심하였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예수가 손을 내밀면 잡을 듯 한 가까운 거리까지 도달한 베드로는 무엇을 의심하였는가(Turner)?
한편 여기서 '의심하였느냐'란 말의 원뜻은 '이중적으로 하다'는 의미로서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어찌할 바를 모르는 체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다혈질적인 베드로의 심히 당황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표현이다.
성도가 세상의 어려운 현실만 보면 믿음을 잃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낙망하며 시험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4] 왜 의심하느냐? - 강동수 목사
"오래 전 노벨상을 수상한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Bernard Shaw)는 ""로마에 가면 로마인같이 살라(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 지역 특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동시에 버나드 쇼는 인생을 그 삶의 형태로 나누어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개미 같은 인생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해(害)나 유익을 주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만 부지런히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는 거미 같은 인생입니다. 거미는 곤충들이 날아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쳐 놓고 한쪽 모퉁이에 숨어 기다리다가 먹이가 걸리면 재빨리 달려와 잡아먹습니다. 셋째는 매미 같은 인생입니다. 여름 내내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면서 구애하고 노래하며 즐겁게 사는 인생입니다. 이 중에서 버나드 쇼는 개미 같은 인생을 높이 평가하면서 거미나 매미 같은 인생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물론 로마에 가면 로마인처럼 살라는 말이 지역의 변화를 의미한 것이지만 이는 또한 시대적인 변화, 시간적인 변화도 함께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새 시대에는 새 시대답게 살라는 뜻입니다. 옛 사람들은 구식(舊式)으로 살아야 하지만 가치관이 변하고 부자의 개념과 삶의 형태가 달라진 오늘날에는 현대인같이 살아야 한다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개미 같은 인간이 바람직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거미 같은 인생이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그저 자기만 부지런하고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었고, 장사도 잘 되고, 농사도 잘 짓고, 목회도 잘하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마치 거미와 같은 정보망을 통해 세계 정보에 밝아야만 시대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농사도 정보 없이 구태의연하게 지을 수 없습니다. 장사도 정보에 신속해야 합니다. 빌 게이츠처럼 세계 시장 정보에 빨라야 합니다. 부자도 옛날에는 재산으로 평가했지만 지금은 얼마나 많은 정보와 정확한 정보, 이에 대처하는 지식이 있느냐로 평가합니다.
마이클 잭슨같이 노래만 하든지, 박찬호나 박세리같이 운동만 잘해도 남 보기에는 노는 것 같고 마치 매미 같아 보여도 한 가지만 잘하면 부와 명예까지 한 손에 쥘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물 위로 걷던 베드로가 물에 빠지자 예수님이 건져주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고, 어떻게 하면 실패 없이 살 수 있는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선교 초기에 주로 갈릴리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에게 천국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때는 주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바다를 건너다니시면서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을 행하시며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벳새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모인 무리들에게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산으로 기도하시러 가시면서 제자들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쯤 왔을 때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큰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원래 갑작스런 풍파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해발 250미터나 낮은 곳이고 사면이 높은 산들로 둘러쌓여 있었으므로 기압의 변동이 심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바다 위, 물위로 걸어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멀리서 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하여 무서워했고 이를 본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난 베드로가 만약 예수님이라면 나도 예수님처럼 물위로 걸어서 예수님께 가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놀랍게도 베드로는 물위로 걷게 됩니다.
하지만 곧 물에 빠집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손을 잡고 구해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배에 타시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고 이 광경을 본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말씀, 즉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교훈하시는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I. 순풍과 역풍의 함수 관계(Functional Relation)
인생 행로는 바다 항해와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다나 광야는 많은 경우 인생길을 의미합니다. 인생길을 바다에 비유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것처럼 인생 역시 출생에서 시작하여 죽음 저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배가 바닷물의 부력을 따라가는 것처럼 인생도 자연의 순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생길을 항해에 비유하는 것은 순풍과 역풍의 함수 관계 때문일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잦은 기압의 변화 때문에 바람의 방향이 수시로 바뀌었습니다. 인생의 바다에도 순풍이 불어 즐겁고 평안한 길로 항해할 때도 있지만 갑자기 역풍이 불고 태풍이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지금 순풍으로 평탄하고 행복한 인생 항로에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역풍으로 심히 고생하는 분도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병이 들거나, 사업이 부진하거나, 실직하거나, 자녀 문제로 고통 중에 있거나, 심지어 부부관계, 가족관계 또는 교우들과의 인간관계, 이웃과의 사이에서 폭풍우를 만나 환난 중에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풍파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 기적과 같은 능력으로 다가 오시는 것과 같이 지금도 주님은 여러분 곁에서 도와주시고 더 큰 은혜 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우리를 돕고 계시며, 우리 곁에 계시고, 파도를 밟고, 우리 곁으로 다가오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다가오고 계시는 주님을 유령이라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시인이요 수필가인 알렉산더 스미드(Alexander Smith)는 인생길을 마치 밤과 낮과 같다고 했습니다. 낮에는 밝은 태양과 떠도는 구름이 있고, 밤에는 침묵 속에 비취는 달빛이 있으며 밤하늘에 영롱한 별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아름다움이 있고 뜻과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순풍일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역풍일 때 주님께 구하므로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제자들은 깊은 밤 파도에 시달릴 그 때에 바다 위로 걸어오시며 제자들을 도와주시는 주님의 능력과 사랑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지금 인생의 밤길에 서 있는 여러분,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시편 134:1-3).""라고 하였습니다.
II. 신앙과 불신앙의 함수 관계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바다에 뛰어 들었을 때 그는 인간 초유의 기적으로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세찬 바람을 바라보고 파도를 보면서 예수님 생각을 잊고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여기에서 믿음과 의심, 신앙과 불신앙의 함수관계를 발견합니다. 믿음이란 자기 생각, 자기 의지를 내 놓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만 불신앙은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 자기에게 둘러싸인 주변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걷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기분 전환이나 장난으로 해 본 일도 아닙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함도 아니요, 단지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물 위로 걸었습니다.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 놀라운 권능과 능력을 힘입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우심을 세상적인 유익보다 영적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사역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주님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믿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고 하셨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시고 은혜를 주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함과 동시에 인생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척도가 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III. 의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의심에는 긍정적 결과를 낳는 의심도 있고, 부정적인 의심도 있습니다. 의심을 불신으로 빠져들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오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므로 물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한 베드로와 같이 인생 바다에 환난이나 역경의 바람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하고 그의 사랑과 도우심을 의심하게 되면 하나님을 저버리고 지옥의 바다, 죽음의 바다에 빠져 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백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의심은 일종의 병이요, 영혼의 독이다.""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군인이요 문필가인 바나비 리치는 다음 세 가지 외에는 믿어야 산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여자의 눈물이요, 둘째는 장사꾼의 맹세요, 셋째는 술주정뱅이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고(故) 김활란 박사는 세상을 떠나기 몇 일 전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겨 놓았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는 믿음이다. 금, 은, 보화보다 더 귀한 보배는 믿음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믿음으로 영생을 얻으며, 믿음으로 축복을 받는다. 믿음은 천국을 얻으며, 믿음은 고난을 극복하며,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믿음으로 능력을 얻는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믿음은 기적은 낳는다. 믿음으로 승리하고, 믿음으로 영원히 산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점점 과학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풍요한 삶을 즐기며 세상 것에 흠뻑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노하는 그 날이 오기 전에 생각지 아니한 때, 서야할 곳에 가기 전에 믿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믿음만이 마지막까지 나의 보배요 능력이십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 14: 32. 배에 함께 오르매 -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셨다.
1]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 풍랑 중의 첫 번째 기적이라면 배에 오르자마자 즉시 바람이 그친 것은 두 번째 기적이다.
'수고', '고통', '피곤'을 의미하는 '코포스'(*)에서 나온 '그치다'라고 하는 동사는 바람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 고통 속에서 헤어 나와 잠잠케 되고 평온함을 찾은 것을 의미한다.
막 4: 41은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표현하였다. 예수는 모든 만물을 지배하시는 만유의 주이신 동시에 모든 혼란과 두려움을 잠재우시는 질서와 평화의 왕이시다.
* 요 14: 27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가 거하시는 장소나 머무시는 인격에는 영원한 샬롬만 있다.
2] 적은 믿음과 큰 시련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두 개의 말씀이 있다.
* 욥 5: 6-7 – 6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 요 16: 33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전자의 말은 고난을 승리한 욥의 말이고 후자는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한결같이 전제하는 바가 고난은 결단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인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필연의 산물임을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인간이 고난을 당하는 원인과 고난을 이기는 승리의 비결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고난의 원인을 네 가지로 강조하고 있다.
(1) 고난의 원인
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본문 22절의 말씀을 보게 되면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라고 말한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것은 결단코 제자들의 뜻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주님 곁에서 이적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가라고 명하시므로 순종하며 가다가 풍랑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할 때에 도리어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 올 때가 있다.
예수를 믿을 때에는 병도 고쳐보려 하고 축복도 받아보려고 예수를 믿었는데 이 예수를 믿은 다음에 우리 생활에 고난이 찾아온다. 이 고난이 바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찾아오는 고난이다.
② 시대에 역행할 때 찾아온다.
본문 24절의 말씀을 보면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라는 말은 바로 제자들이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서 항해했더라면 바람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 그들이 거슬리는 바람을 뚫고서라도 목적지에 달성하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에 고난의 바람이 직면하게 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이 시대에 불어오는 시대적인 바람에 순응해서 바람 부는대로 살게 되면 절대로 고난이 없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불의의 바람도 있고, 죄악의 바람도 있다. 또한 불법의 바람, 음란의 바람, 유혹과 불신의 바람도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정말로 죄악의 바람이 가득한 곳이다. 이러한 시대의 바람에 도전하여 내가 바로 살아보려하고 이 시대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세상을 승리해보려 할 때에 우리에게 시대적인 바람이 필연적으로 불어오게 된다.
③ 예수보다 앞서 나아가려 할 때 찾아온다.
예수께서 본문 22절에서 "이제 너희는 내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난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두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이 말씀은 결단코 제자들이 예수보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란 말씀은 아니었다. 이 말씀은 예수보다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범한 세상 사람들로부터 앞서서 신앙의 길을 걸어가라고 하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말슴을 잘못 이해하여 예수를 따라가기보다 먼저 풍랑의 시련의 바다를 건너감으로 인해 큰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예수보다 앞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시련이 반드시 오게 된다. 예수보다 내 생각을 앞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시련이 반드시 온다. 예수보다 내 생각을 앞세우고, 예수보다 내 생활과 내 삶을 앞세울 때에 환난과 시련은 필연적으로 오게 된다.
④ 기도하지 않고 인생을 출발할 때 찾아온다.
본문 23절의 말씀을 보면 "무리들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라고 말했다.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며,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제거하는 능력을 소유한 전능의 주님이시다.
그런데 이런 능력의 주님, 은혜의 주님, 이런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는 주님이 다른 데 가지 아니하고 또 기도하려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도는 신앙의 생명이며 기도는 우리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본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예수님은 능력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기도가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에 기도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문제를 기도로 시작하고 마무리 지으셨다. 그런데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 없이 인생을 출발했기에 문제에 봉착하여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
(2) 찾아오신 예수님
그러나 신앙의 본질, 신앙의 생명, 신앙의 비밀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고난의 자리에 반드시 예수께서 찾아와 주신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일지라도 환난을 당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아니하시고 한밤중에 찾아 오셨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이 찾아온 예수님을 몰라보고 유령이라고 하며 놀라 두려워 떨었다. 이때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셨다. 여기서 이 "내니"라는 말은 헬라 원문의 '에이미'라고 하는 말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께서 이 풍랑의 갈릴리 바다에 찾아와서 제자들에게 강한 역사를 보여주시기를 작정하신 일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상태였으며 이때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하게 되었다.
또한 예수님의 "오라"는 대답에 베드로가 그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과 자신 사이에 풍랑의 바다를 뚫고 예수께로 달려갔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그의 신앙적 특성을 보게 된다.
(3) 고난을 이기는 비결
① 베드로의 신앙은 신뢰하는 신앙이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다. 여기에 "만일 주시어든" 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의심하는 말이 아니고 헬라 원문에 '과연 주님이십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신뢰의 신앙임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이시며 능력의 구주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신앙이다.
② 베드로의 신앙은 기도하는 신앙이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라고 주님을 향해 기도하였고 "오라"고 하는 말씀에 그는 순종하여 자기의 몸을 바다에 던졌다.
이렇게 베드로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했다. 예수님을 능력의 구주로 인정했다. 예수님을 향하여 기도하며 자신을 바다에 던지는 이런 헌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신앙을 가지고 갈릴리 바다를 걸어갔지만 그는 중도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그의 믿음이 '적은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갈릴리 바다에 빠져들어가는 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즉각적으로 그를 일으키시며 베드로의 믿음을 '적은 믿음' 이라고 말씀하셨다.
현실에 도전하여 나갈 때에 내 믿음이 크냐 적으냐, 내 믿음이 참 믿음이냐 거짓 믿음이냐, 이것이 우리의 생명에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요인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적은 믿음을 가지고는 큰 시련을 이겨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자 베드로는 적은 믿음을 가지고 현실의 큰 시련을 극복하려고 했다.
③ 작은 믿음을 큰 믿음으로
작은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돌밭에 뿌려진 믿음이다. 돌밭에 뿌리웠다고 하는 말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환난과 핍박이 올 때는 곧 넘어지는 믿음이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큰 믿음이나 작은 믿음의 차이뿐이지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내 믿음이 과연 큰 믿음이냐 하는 사실이다.
작은 믿음을 가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려다 실패한 베드로처럼 우리들도 작은 믿음을 가지고는 큰 시련의 현실을 도전하기가 어렵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의문점과 문제점이 무엇인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가지고 현실에 도전할 때 자신의 믿음이 분량을 알지 못하는 데 있다.
여러분이 큰 믿음을 가졌다면 현실의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이길 것이지만 여러분의 믿음이 크지 못할 때는 여러분은 현실의 환난에 깨어지고 넘어지고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 작은 믿음을 가지고 고난의 바다를 건너가려던 베드로는 물에 빠졌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작은 믿음을 가지고 현실에 도전하다가 그는 여러 가지 문제 봉착할 것입니다.
(4) 작은 믿음의 두 가지 특징
오늘날 큰 믿음을 갖지 못하면 이 현실의 바다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① 놀라기를 잘한다.
본문 26절에 나타난 말씀을 보게 되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면서 무서워하고 놀랐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믿음이 작으면 작은 일에도 항상 놀라고 두려워한다.
② 도깨비 신앙을 갖게 된다.
생명의 주님의 찾아오셨는데도 생명의 주님을 향해서 유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신앙이 작기 때문에 도깨비 믿음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이와 같은 문제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이 세상의 환난이 문제가 아니라 이 환난을 대처하는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문제다.
(5) 큰 믿음은 이루자.
큰 환난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예수님과 함께 움직일 때 큰 믿음이 생긴다.
본문 32절에 나타난 말씀을 보면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라고 말했다. 예수님과 함께 내가 가정을 이루고, 예수님과 함께 사업을 하고, 예수님과 함께 결혼하고,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큰 믿음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믿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오늘날 이 세상 속에서도, 불의하고 불법스런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을 할 때 여러분의 믿음에 놀라운 부흥이 있고 승리와 성공이 있을 줄로 믿는다.
결론 :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자.
이 세상에서 갈릴리 바다와 같은 세상의 풍랑이 불어오며 역경의 비바람이 몰아칠지라도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사랑을 통하여 풍랑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의 심령을 강하게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자.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크게 해주시고, 놀라운 성령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제 큰 믿음을 소유하여 예수와 함께하는 승리의 삶을 살도록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하자.
내 믿음을 크게 하는 길은 예수와 함께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을 소유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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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보좌의 능력과 축복을 가진 자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멋진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설교 감사합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